2012.02.27 05:23

[단편]어떤 1초

조회 수 454 추천 수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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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 끄는 소리. 곧 코너를 돌아 그는 내 앞 책상에 도착할 것이다. 아마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곧장 의자를 꺼내 앉을 것이다. 나는 그가 지닌 장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혹은 장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는 정말이지 다리를 조금 절고,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얼굴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않으면 그는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여기에 있을 뿐’인 것이다.

  앞에 꺼내둔 책들은 뻔하다. 21세기 문화와 교육이나 2급 한자문제집. 육백페이지짜리 교육학 서적과 머리 아플 때 읽는 펄프픽션 한 권 따위. 교육평등론 파트를 펼쳐놓고 나는 졸지도 못하는 중이다. 이어폰을 꽂고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다. 소리가 새지 않도록 조용한 노래를 골라 듣다보니 가사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식 발라드가 반복 재생되고 있다. ‘ごとばにできない(말로는 할 수 없어).’ 슬픈 곡조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슬픈 노래라 하더라도 모든 1초의 무게는 동일하다. 꽝꽝 울리는 하우스뮤직을 듣든, 처량한 발라드를 듣든 모든 일초는 같은 거리로 나를 내몬다.

  그러니까 슬픈 노래를 듣는 것처럼, 어떤 슬픔은 무척 선량한 기척으로 내게 온다. 그 힘으로 나는 늘 아무렇지도 않게 도서관에 앉아 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사랑뿐일까. 학교 도서관에 앉아 빽빽한 장서들과 매끄럽게 청소된 바닥을 들여다 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선량한 슬픔은 그런 순간에 온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나를 그런 감정으로 내모는 것만은 아니다. 그냥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책장을 보고 있을 때, 키가 작고 마른 그가 책장을 지나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웃고 있었던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숙여 교육사회학 이론서에 집중하는 척 한다. 입가를 한껏 일그러뜨리고 웃는 그 얼굴은 우습게도 나를 슬픔에서 먼발치로 떨어뜨려 놓는다. 그때 나는 부끄러워졌다. 왜 저런 남자 앞에서 부끄러워지느냐고 한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그는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 사이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다. 그저 어쩌다보니 고개를 들면 서로 마주치기 딱 좋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 외에, 도서관에 앉아있다는 것 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랑에 빠진 거야.

  슬픈 곡인 주제에 클라이맥스로 치달은 노래는 그렇게 외치고 있다. 대학교 일학년 때 초급일본어 강의를 들었다. 딱 그 초보적인 수준에서 일본어실력은 멈추었지만, 그래도 노래 가사는 어쩌다 한 마디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랑에 빠진 거야. 아, 참 초보적인 한 마디. 사전 한 번 찾아본 일 없었음에도 A+를 받았던 스무 살의 초급일본어 교실. 믿기 어렵지만 같은 무게로 일초가 지난다. 그때도, 지금도. 그러니까 나는 사랑에──

  노래 가사같은 사랑. 다시 말해 참 철없어. 그렇게 자조하면서도 나는 좀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도서관의 의자를 바싹 당겨 앉으며 천천히 안경을 고쳐 썼다. 어쩌면 말이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은 상처를 견딜 힘을 주는 지도 몰라. 어떤 노래라도 일초가 지나고, 또 일초가 흘러가면 반드시 클라이맥스가 온다. 이건 어떤 법칙같아서, 하우스뮤직이든 대중가요든 이 멍청한 일본식 발라드든 꼭 같았다.

  같은 법칙 속에서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일초들은 나쁘지 않다. 이렇게 내가 앉아 있는 도서관의 풍경 속에는 내일도 틀림없이 그가 있다. 말로 할 수 없는 법칙들. 당신이 신발을 끌며 내 앞 책상에 앉을 때 나는 슬픈 노래를 듣는다. 어쩌면 딱 그 순간 클라이맥스를 맞은 노래는 한번 더 내가 알아듣기 좋은 초보적인 가사로 사랑을 말할지도 모른다. 아. 이제 다시 교육평등론에 집중할 시간이다. 노래 가사는 어차피 몇 구절을 빼면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좋다.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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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어^^ 2012.02.29 07:03

    흐음... 1초라... 그 짧은 시간에도 의미는 있는 거지요.

    그럼 과연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1초는 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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