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2 01:11

[단편] 솜씨네

조회 수 446 추천 수 0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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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다. 정말 춥다. 오늘 하루 정도는 날씨가 따뜻해도 세상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해도 날씨는 따뜻해지지 않고 내 바지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복 위로 이런저런 옷을 껴입고 눌린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까지 쓴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옷걸이를 쥔 내 손은 추위에 벌써 벌겋게 달아올랐다.

 

  얼마 전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이제 혼기를 채우다 못해 아예 놓쳐버린 건 나 뿐이다. 살이 쪘는지 잘 채워지지 않는 바지를 억지로 입다 훅이 하나 떨어졌다.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녀석을 찾고 뒤지다 결국 결혼식에도 늦게 도착했다. 얼굴에선 땀이 흐르고 옷 사이에 가득 찬 열기에 몸이 간지러운데도 결혼식 내내 손만은 차가웠다. 사진촬영을 할 때 살짝 돌아본 친구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회사 창립기념일로 집에서 쉬는 날, 난 그 날의 바지를 수선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 자주 들르던 수선집은 오늘 문을 닫았다. 그 앞에 서서 난 한참이나 동네의 모습을 머리속에서 떠올렸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이사를 온 지도 꽤 되었지만 도통 이 근처 어디에 다른 수선집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지가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다음에 올까 했으나 발은 돌아가는 길로 쉬이 가지 않았다. 정오가 약간 지난 시각, 난 걸었다.

 

  동네 마트나 편의점만 가끔 들르는 나에게 시장은 미지의 공간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그 존재마저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난 정장 바지를 건 옷걸이를 들고 그 시장에 들어갔다. 과연 이게 문일까하는 생각과 함께 문을 밀었다. 쇠가 서로 긁히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작은 토굴처럼 이어진 시장 바닥은 포장도 되어있지 않고 물이 고인 곳도 많았다. 불이 들어오는 가게는 많지 않았다.

 

  솜씨네. 단번에 내 눈을 사로잡은 이름에 발이 움직였다. 밖에서 훤히 보이는 가게 안은 한 평이 조금 넘어 보였다. 절반은 주인이 커피를 끓이고 앉는 곳, 나머지 반이 수선을 하는 곳이었다. 낡은 미싱기게가 있고 몇 가지 되지 않는 실이 있고 낡은 전구가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안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느긋하게 농담을 주고받던 자리에 내가 앉자 안이 조용해졌다. 용무를 묻는 주인에게 내가 바지를 건넸다. 크기가 맞는 훅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별로 걱정할 것이 되지 않았다. 목에 걸었던 안경을 쓰고, 색이 맞는 실을 찾는 동안  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천장이 낮아 일어서기만 해도 걸어놓은 옷들이 머리에 걸렸다. 옷에는 핀으로 꽂은 메모가 적혀 무엇을 고쳐야 할지 적혀있었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는 명절에도 듣기 어려운 옛것이었다.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아직 살아있을까 의심이 되는, 그런 노래. 수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인은 바지를 건네곤 값도 부르지 않고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난 멍하게 앉아있다가 값을 물었다.

 

  "이천 원만 줘. 거, 총각. 면접 보러가나 봐?"

 

  이유는 모르지만, 난 더듬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옷을 들어올려 실의 색이 맞는지, 위치는 맞는지 확인했다. 그의 바느질은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맞춰 움직였다.

 

  "우리 아들이 면접 본다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애가 둘이야. 하나는 이번에 초등학교 들어가고."

 

  지갑을 열고 지폐를 꺼내던 내 손이 멈췄다. 뒤돌아선 주인의 옆에 돈을 올리고 나갈까 생각도 했으나 그렇게 하진 못했다. 주인은 끝난 바느질을 마무리하고 다림질을 했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끝나고 그의 콧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그 애가 면접볼 때까지도 이 집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총각도 그 면접 잘 보고 잘 혀."

 

  "예, 감사합니다. 아, 이거 그 돈은 두고 갈까요?"

 

  "응? 아, 그래. 줘, 줘. 내가 깜빡했네. 가끔씩 그래."

 

  돈을 주고 수선집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언덕은 여전히 가파르고 날은 추웠다. 나도 모를 웃음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다. 몸을 떨면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기에 눈이 절로 감겼다. 그 날은 본가에 전화를 했다.

 

  바지의 훅은 새로 달았지만 허리 둘레는 줄지 않았다. 그 바지는 옷걸이에 걸린 채로 장롱에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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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2.02.22 04:53

    왠지 감동적이면서도 마지막에 씁쓸한 면도 있는 듯 하군요...;;

    아주머니가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고요, 저도 정장은 어느 새 구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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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부정남’ 2012.02.25 20:48

    매일 이별하며 사는구나.

  • profile
    메론왕자 2012.02.26 02:38

    호옹 제가 쓴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댓글들이네요.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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