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8 05:13

[단편]소나기

조회 수 496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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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린다. 오한이 드는 봄날이지만, 뜨거운 녹차 한잔이 몸을 녹여준다. 빗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연두 잎사귀들. 그들이 좋다면 나도 좋다. 오래 전 누군가가, 폴짝폴짝 뛰며 그리 좋아했던 것처럼, 나도 비오는 날이 좋다.

  내게는 누이가 있었다. 나풀거리는 단발머리와 강아지처럼 까만 눈을 가진, 내게는 누이가 있었다. 몸이 아파, 오랫동안 시골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는 그 아이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완두콩처럼 내 삶에 들어왔다. 놀리고 잡아당기고 뺏고, 울고 엄마한테 뛰어가고 혼자 꽁하니 있고, 나는 나대로 누이는 누이대로 매일을 그리 분주하게 살았다. 동생을 낳아달라고 맨날 조르더니 왜 이리 못살게 구누, 나이든 어머니는 도리도리하는 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한숨쉬듯 말하곤 했다. 

  나는 그 아이가 좋았다. 집 밖으로 나갈 땐 내 손을 꼭 잡는, 보송한 솜이불을 손에 꼭 쥐고 아침에 한잠이라도 더 자려고 버티는, 그 아이가 좋았다. 그 날도 그랬다. 보슬비가 잎사귀를 촉촉히 적신다고, 고요한 일요일 아침 결에 지붕을 툭툭 치는 물방울 소리를 듣고 잠이 깬 누이는, 보송한 솜이불도 물리친 채 문밖으로 나가자며 나를 졸랐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고, 우산 없이 나가지 말라고 평소 부모님이 늘 이야기해도, 이른 아침부터 문밖에 뛰어나갈 생각에만 들떠 짧은 머리를 나폴거리며 나를 조르는, 그 아이가 좋았다. 아직 잠결에 빠진 부모님을 남겨두고 얇은 겉옷만 두른 채, 도랑을 따라가는 오솔길을 뛰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그 아이가 좋았다.

  추워, 누이가 말했다. 나도 추워, 축축해진 나무 틈새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하며 나도 말했다. 사람들이 오며 가며 들르는 그 낡은 오두막엔, 그 날은 여벌의 담요가 없었다. 이미 젖어버린 옷을 말릴 땔감도 없었다. 조금씩 하얗고, 말수가 적어지는 누이를 업고 긴 오솔길을 달렸다. 굵어지는 빗발이 머리칼을 적셨지만, 이미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말이 없는 누이에게서 붉은 녹물이 나와 내 등을 물들였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렇게 세차게, 늦은 오후까지 내렸다.

  홀딱 젖은 몸은 열이 내리지 않았다. 꼬박 일주일을 헤메고 나서야, 참 다행이다 다행이다하며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부모님이 깊은 잠에 빠진 새벽이 되어서야, 적막이 나에게 다가왔다. 푸르스름한 햇살, 마치 천년동안 내리던 비가 그친 것처럼 청명한 공기. 비와 함께, 다른 무엇인가도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부모님의 고요한 숨소리, 내 사각거리는 발자국 소리, 푸르스름한 새싹들이 몰래 창가를 긁는 소리, 그리고 비어있는 하나의 방. 보송한 이불과 귀여운 인형이 놓여있어도, 그 침대는 비어있었다.

  틈새가 있었나봐, 어머니가 멀리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생활방수는 된댔는데, 흠뻑 젖은 건 우리 잘못이라고 잘라 말하는데 어쩌겠어. 아니야, 새로 사진 않을거야, 어머니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애가 워낙 좋아해서 놔뒀는데, 홀짝, 이젠 몸이 약하더라도 학교도 보내야겠고, 홀짝, 집에서 로봇이랑만 놀 나이는 지났지, 뭐. 조용한 커피 냄새가 계단 춤에 서있는 내 곁에까지 번져온다.

  빗발이 쉬이 그치질 않는다. 식어버린 녹차 방울이 비가 되어, 조용히 나를 타고 내린다. 낮잠에서 깨어난 딸아이가 우유를 찾아 내려왔다 문득 나를 발견하고 뛰어온다. 강아지처럼 까만 눈을 가진 너는, 어쩜 그리 오래 전 그 아이를 닮았니. 언젠부턴가, 오후 내내 비가 왔던 그 날 이후로, 나도 비오는 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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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부정남’ 2012.02.28 20:52

    향수와 슬픔이 아련합니다 그려

  • profile
    클레어^^ 2012.02.29 07:02

    누이 이야기를 보고 갑자기 시가 떠오르네요...

    (은수저였나? 그거... '아이가 없다' 라는 구절이 있는 그거... 시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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