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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직도 더 나빠질 수 있다. 자존심을 버리면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잃게 된다고 생각했다. 자존심과 존엄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다.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도 한동안은 괴로워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어째서 이것밖에 안되는 인간인가.
  
  존엄을 잃은 자는 괴로워 할 일도 없다. 그래서 새벽 2시에 편의점을 나왔다. 그나마 겨우 남아 있는 존엄이라도 지키기 위해. 길거리는 온통 차가운 적막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편의점 주인 놈은 면접을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인수인계를 해줬던 고등학생 녀석이 면접을 보는 내내 심사하는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속을 뒤집어 놨다.
  
  너 대체 몇 살이냐.
  
  귓방망이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일단은 편의점 선배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경력이 깡패다. 편의점 주인의 귀가 일그러진 것이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다. 대개 유도 같은 격렬한 운동을 한 사람들의 귀가 그렇게 된다. 격투기도 그렇고, 레슬링은 물론이다. 도대체 전직이 뭐였을까. 편의점 주인은 내가 뽑아온 이력서를 보더니 대뜸 말했다.
  
  앞으로는 봉투에 넣어 갖고 다니세요. 
  
  편의점 면접 보러 올 때 이력서가 필요하다는 것도 웃기지만, 봉투에 넣지 않았다고 뭐라 하는 것도 황당하다. 그러고보니 언젠가는 사진을 붙이지 않았다고, 그것 때문에 점수가 깎일 거라고 말하는 녀석도 있었다. 사진을 붙이고 이력서를 봉투에 넣으면 면접에 붙여줬을 것인가. 개소리 하지 마라. 어차피 사진 값과 봉투 준비하는 수고만 들 뿐이다.  
  
  전화로 이리저리 불러다가 이러쿵저러쿵 떠든 후에 연락 한다고 해 놓고 돌려 보낸다. 연락을 한다는 말이 퇴짜의 완곡한 표현이란 걸 깨달은 것은 알바 면접을 열 세 번 본 후의 일이었다. 개새끼들. 빌어먹을 놈들. 내 버스비하고 전화비 내놔, 이 씨발놈들아. 나는 정신이 약간 나간 나머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가게마다 들어가 말했다.
  
  혹시 알바 구하세요.
  
  고깃집 주인은 때릴 것처럼 밀어 붙였고, 호프집 주인은 그냥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나 같은 녀석을 원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시급 4000원도 안되는 돈을 주면서 첫 달에는 3800원만 주겠다고 했다. 편의점 한 달 돌리면 버는 돈이 얼마인데, 인건비 200원씩 아껴서 라면이나 사 먹을 수 있겠냐.
  
  귀가 일그러진 편의점 주인은 목요일에 시범적으로 나와서 일을 배우라고 했다. 그것도 돈을 안 받고 말이다. 어차피 자기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하니 오히려 돈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소심하게도 한 마디 할 배짱도 없었다. 왜 돈 안줘요라거나 말도 안됩니다라고 대거리를 할 용기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바로 잘릴 것 같아서 불안했던 것이다. 편의점 사장이 POS 다루는 법과 시재 맞추는 법, 검수 하는 법을 대충 중얼거리다가 전화를 받고 자리를 비웠다. 편의점에서 배워야 할 건 초등학교만 나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구아나도 한 달만 가르치면 레종과 에쎄 정도는 쉽게 구별해낼 수 있다. 그따위 것들을 가지고 몇 시간 씩 중얼댈 필요는 없다. A4에 요점만 써주면 30분 만에 달달 외울 수도 있다.
  
  학교에서는 수백배 더 복잡한 일들을 속사포처럼 떠들어 대는 교수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받아 적었다. 그래도 나중에 시험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금 와서 터치 스크린의 어떤 버튼을 눌러야 반품이 되고 영수증을 재발급 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배우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이다. 그딴 거야 눈이 있고 손가락이 있으면 5분만 다뤄봐도 누구나 할 수 있다. 나한테 1주일만 주면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서 POS 운영체제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딴 거 누가 못하나. 
  
  개도 그 정도는 한다. 
  
  편의점 알바 해본 적 있나요. 없는데요. 곤란한데. 이거 배우는데 시간 걸리는데. 금방 배우지 않나요. 그래도 해본 사람이 낫지. 미안한데 우리는 경력 없으면 안돼요. 게토 다뤄본 적 있습니까. 피카는요. 저 PC 방은 처음이지만 바로 배워서 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것도 배우는 건데 우리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아무래도 경험자 위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끔은 개가 할 수 있는 일마저도 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개들은 일주일에 한번은 목욕을 하는데 노숙자들은 한 달에 한 번도 못한다. 개는 눈 먼 사람을 안내해주고 밥을 먹는데 나는 집을 지키면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할 일이 없으면 집이라도 지켜야지. 전화도 안 받고 뭐하냐. 엄마 내가 집 보는 사람이야. 
  
  자존심을 지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존엄을 희생하더라도 자존심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존엄을 되찾아야 하는 걸까.
  
  사람이 집 지키는 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면 밥 굶지 않는 것 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한다. 집에서 놀면 뭐하겠는가. 편의점에서 알바라도 해야지. 
  
  잠깐 나간다고 했던 편의점 주인이 1시간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갑자기 일이 있어서 돌아올 수 없으니 아침 교대자 올 때까지 근무하라는 것이다. 새벽 한기가 편의점 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나는 졸다가 깨다가 다시 졸았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차가 하나도 없었다. 매장에 울려퍼지는 라디오에서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여러분 좋은 밤 되세요. 라디오 광고가 나오다가 끊어졌다. 어차피 평소에 듣지도 않는 라디오였지만 갑자기 조용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허전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문득 조용한 것이 라디오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새벽이라고 해도 가끔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까지 안 나는 일은 드물다. 폭주족들은 밤만 되면 발정이 나서 돌아다닌다. 택시도 없다. 새벽 공기를 찢어발기는 엔진 소리와 타이어 마모음이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어디선가 짖어 대는 애완견 소리도 마찬가지다. 밤이면 싸우기 좋아하는 집 구석도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왕복 4차선 도로가 사막처럼 고요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찬 공기 속으로 순례자가 되어 걷기 시작했다. 대상 행렬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았다. 하지만 시내 쪽으로 갈수록 정말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있는 편의점이 모두 텅 비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알바들이 모두 도망간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 불이라도 나서 구경을 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안 보였다.
  
  소리가 안 들린다는 건 생명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최소한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는 사람이든 개든 존재한다는 기색을 찾기 어려웠다. 귀가 멀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서 손뼉을 쳐보기도 했다. 귀는 멀쩡했다. 세상이 이상했다.
  
  추위가 갈수록 심해져서 오줌이 마려웠다. 전봇대에 싸려고도 해봤지만 오히려 그럴때일수록 오줌은 나오지 않는 법이다. 불알까지 아파오는 걸 겨우 참고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마렵기는 한데 나오지를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통증이 사타구니에서 허벅지로 옮겨가던 차에 소음이 들려왔다.
  
  뭔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였다. 우산을 장난삼아 풍차처럼 돌릴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고장난 자전거의 바퀴 살이 헛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곧 소리의 근원이 보였다. 중앙선에 사람이 서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옷, 물론 내가 본 옷보다 못 본 옷이 훨씬 많지만, 을 입고 있었다. 아랍인들이 쓰는 터번 같은 모자에 통으로 된 옷을 걸치고 있었다. 토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대적이었다. 옷감이 몸에 착 달라붙고 가랑이 부분이 갈라져 있었다. 
  
  저걸 뭐라고 하지. 점프 슈트. 스즈키 복. 로브. 뭐라고 부르든 좋지만 어떤 이름을 붙여도 그건 틀린 소리가 분명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모자와 옷이 하나로 되어 있었음에도 꼭 분리된 것처럼 움직였다. 남자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거대한 기계를 조작하는데도 동작을 방해하지 않았다.
  
  남자가 도로 한복판에 옮겨 놨음이 분명한 기계는 진공관으로 이루어진 초기 컴퓨터를 연상하게 했다. 유리로 만든 수많은 관이 톱니바퀴 사이에서 빛을 발했다. 남자가 막대기를 잡아 당기면 톱니바퀴가 돌면서 관이 빛나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했다. 줄 잡아서 백개가 넘는 막대기와 단추, 꼭지, 줄, 바퀴, 페달을 당기고 밟고 누르고 돌리고 밀고 묶고 넣고 빼면서 남자는 춤을 추고 있었다.
  
  말을 걸어야 하는 건지 떠나야 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 남자 밖에 없는 게 확실하다. 말이 통하기나 할지 겁이 났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외침이 꾸물거렸다.
  
  “오늘 세상이 멸망한다는 얘기는 들었나?”
  
  남자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멸망이라. 하긴 멸망할 때가 되긴 했지. 2012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다들 아주 신이 나서 몰려오고 있지. 굉장한 구경이 될 테니 자리 잘 잡고 있으라고. 이 주변에는 겁쟁이가 많아서 그런지 어떻게 된 게 코빼기도 볼 수가 없구만.”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소개령이 내려졌다든가 대피령이 발령되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전쟁이라도 나는 건가요?”
  
  남자는 여전히 기계에 정신이 팔린 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대단한 전쟁이지.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야.”
  
  나는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무척 슬펐지만 만약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에서 더 나아질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건실한 인간으로 자랄 수는 없다. 쓸모 없고 보잘 것 없는 인간도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그게 나라고 해서 딱히 분하지는 않았다. 물론 슬픈 건 사실이었다.
  
  내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다시는 꺼내볼 수도 없는 상황이 될 거라는 걸 너무나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나는 그저 소모품처럼 차량에 수납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 뿐이다. 설령  죽더라도 그건 내 의지와는 무관하다. 살더라도 마찬가지다.
  
  “혹시 신이신가요?”
  
  남자가 껄껄 웃었다.
  
  “그렇게 천박한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어차피 말려도 열광할 자들은 있으니까.”
  
  남자는 기계 조작을 멈췄다. 옆면에 비스듬히 기댄 채 턱을 괴었다.
  
  “넌 좀 멍청한 녀석 같군. 혹시 머릿속에서 무슨 소리 같은 거 안 들리나?”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귀에 정신을 집중했다.
  
  “안 들리는데요.”
  
  “역시 멍청하군. 당장 도망가. 이런 소리가 안 들린단 말이야?”
  
  다시 귀를 기울여 봤지만 역시 들리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는 한심한 새끼라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 
  
  “최소한 반경 30km에 있는 녀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벌써 도망갔어. 아마 지금도 뛰고 있을걸.”
  
  “그럼 그 기계가 사람 머리에다가 소리라도 지른단 말입니까?”
  
  “조악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아마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굳이 얘기하지 않을 거야. 단순한 호르몬 조작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해두지.”
  
  “그런데 지금 입고 계신 옷은 무슨 코스프렙니까.”
  
  “닥터 후. 이 기계는 공각기동대.” 
  
  나도 두 작품 모두 봤지만 굳이 몇 대 닥터인지, 공각기동대가 언제부터 스팀펑크였는지는 묻지 않았다. 때로는 물어보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일이 있다. 엄청난 바보를 만나거나 미치광이를 보면 누구나 한눈에 눈치챈다. 이 녀석은 둘 다인 것 같다. 
  
  “슬슬 올 때가 됐군.”
  
  남자가 하늘을 쳐다봤다. 나도 봤다. 보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었다. 귀청을 폭파할 것처럼  소음이 윙윙 댔다. 작은 점으로 시작했던 빛이 사람 크기의 원에서 건물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해졌다. 나와 남자는 빛에 갇힌 채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사람이다. 하나, 둘, 셋, 최소한 15명은 넘어 보인다. 보험 회사 건물 옥상에서부터 차근차근 내려오고 있었다. 맨 처음 내려온 자는 발가벗은 여자였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소름 하나 돋아있지 않은 피부가 광채를 발했다. 고개를 저을 때마다 긴 갈색 머리카락이 떨어져나왔다. 화살처럼 날아가 아스팔트에 꽂혔다. 여자는 웃지 않았다. 남자의 기계와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양 걸어갔다. 
  
  두 번째로 내려온 자는 뚱뚱한 남자였다. 살이 온몸을 휘감고 있어서 사람인지 살덩이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남자인 건 틀림없었다. 사타구니 사이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성기에 맞춰 바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옷감에 둘러싸인 공이었다. 허공에서 내려올 때도 묵직하게 튀다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세 번째로 내려온 자는, 그만 하자. 어차피 보지 않고서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니까.  갈수록 구역질 나는 존재들이 나타나 기계와 남자를 둘러 쌌다고만 해두자. 상체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하체는 물결처럼 너울지는 자,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검은 옷을 입은 자, 머리 대신 페달을 얹은 자, 진공관으로 만든 눈에 대나무 심지를 넣은 자, 어제 꾼 악몽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자, 여자와 결합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자, 배를 움켜쥐고 음식을 게워내는 자, 눈을 돌릴 때마다 거대해지는 자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 시간대도 이제 끝이군.”
  
  남자는 원을 채운 자들의 면면을 일일이 확인하며 말했다. 
  
  “모두 잘 모이셨소.”
  
  남자는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을 다른 언어로 열 다섯 번 반복한 후, 다시 몸짓으로, 눈빛으로, 진동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원을 이룬 자들 사이에서 말의 물결이 요동쳤다. 아랍 쪽 언어 같기도 하고 남미 쪽 언어 같기도 한 소리들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음악이라 하기에는 지나친 불협화음이었다.
  
  “거수로 결정하겠습니다. 손이 없는 자들은 촉수를 들고, 촉수가 없는 자들은 중얼거리기만 하시오.”
  
  같은 과정이 또 반복되었다. 곧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가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새가 지절대는 속에 컴퓨터 쿨링 팬에 먼지가 잔뜩 끼었을 때 나는 소리가 섞였다. 
  
  “결정됐습니다. 이의는 다음 시간대에서 받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멈췄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남자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내가 대학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아빠가 딱 저 얼굴이었다. 그 날 아주 오랫동안 맞아야만 했다.
  
  “폐쇄안이 가결됐습니다. 모두 떠나시길 바랍니다.”
  
  남자가 기계의 모든 레버와 페달과 줄과 버튼과 바퀴를 내리고 밟고 당기고 누르고 돌렸다. 불쾌한 자들은 조금씩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고 코를 찌르던 악취도 옅어졌다. 세상은 다시 조용했다.
  
  기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모든 일을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관자놀이에서 땀이 흘렀다. 한 방울 흐를 때마다 세상은 새로운 적막으로 나아갔다. 나는 너무 오래 주저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도로에 누웠다.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와 전신에 퍼졌다.
  
  남자가 말했다.
  
  “완전히 끝나려면 10분 정도 남았어. 뭐 할 일이라도 남아 있나.”
  
  “아니오.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없다.
  
  나는 없다.
?
  • profile
    클레어^^ 2012.02.25 07:17

    흐음... 마침 올해 종말론이 어쩌구저쩌구하던데...

    참 씁쓸하면서도 무섭군요...;;

  • ?
    악마성루갈백작 2012.02.25 07:42

    본의 아니게 편승(?)하게 되었군요. 결국 1999년에도 그랬듯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겠지만요.

  • ?
    언제나‘부정남’ 2012.02.25 20:42

    초중반이 사...상당히 리얼하네요.

    보는 것 만으로도 아스팔트와 보도블럭이 쉥하고 네온사인만 반짝거리는 도시가 눈앞에서 어른어른(?)
    후반부는 적..적절한 세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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