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1 22:41

[단편]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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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바다는 마음만 먹으면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하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고, 복수의 계획을 세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배신당했던 길고 긴 세월동안 그들은 언제나 그 희끄무레한 눈동자로 수면 위를 응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추워. 그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어. D는 총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섞이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D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직 동이 트기까지는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D는 몸을 웅크린다. 총열을 어루만진다.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금속의 감촉은 차갑고 딱딱했다.
 ‘MMM 식품공장’ D는 커다란 원통형 건물의 외벽에 쓰인 로고를 읽었다. 가장 맛있는 햄을 누구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합니다. 울긋불긋한 광고에는 점박이 돼지 한 마리가 메저키스트라도 되는 듯 길게 늘어진 비엔나소시지를 들고 씩 웃고 있었다. 축 늘어진 채 나른한 웃음을 짓고 있는 눈초리가 인상적이다. D는 갑자기 배가 헛헛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생각해보면 지난 1주일간 제대로 먹은 것이 없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모든 걸 다 가져가 버린 덕분에.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비프스테이크와 당근을 곁들인 소시지. 기억 안 나? MMM의 즉석식품이었지. 당시 우리는 너무 가난했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에는 돈도, 시간도 부족했거든. 그 때는 다 그러고 살았지. 하지만 이제 그들은 죽었어, 안 그래? 늑대들한테 죄다 잡아먹히고 만 거야. 진지한 생각을 하기에는 배가 너무 고프다. 고기를 생각하니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D는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총을 어깨에 메고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공장 안은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오랜 습관에 따라 D는 전등을 켜기 위한 스위치를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곧 포기했다. 이 넓은 곳에서 스위치를 어찌어찌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D는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컨테이너 벨트를 더듬거리면서 창고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목 뒤로 얕은 숨결이 느껴진다. D는 고개를 홱 돌린다. 준일이다.
 “종말의 밤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몰라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D는 헛기침을 했다.
 “경계를 놓치지 마. 네 앞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아무도 모르지.”
 “…….”
 “자, 고개 들어 나를 봐. 나처럼 이렇게 볼품없게 죽기 싫으면 항상 주의하라고.”
 준일의 얼굴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다. 뭉개진 이목구비 사이로 질척한 피가 새어나온다. 댁은 이미 죽었잖아. D는 말을 끝맺지 못한다. 당신은 개처럼 죽었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죽음이었어. 준일은 이미 사라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준일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미처 작업을 완료하지 못한 돼지고기 덩어리에 불과했다. 무엇을 본 거지? 어쩌면 미쳐가는 중일지도 몰라. D는 마음을 다잡았다.   
  D는 창고에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그곳에는 출하를 기다리는, 앞으로 다시는 빛 볼 일이 없을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다. 납골당 같군. 문득 든 생각에 D는 몸서리를 쳤다. D는 조심스럽게 그 중 하나를 꺼내 포장을 풀었다. 상자 안은 햄 통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굶어죽을 걱정은 없겠구나. D는 안도감에 크게 숨을 내쉬고 벽에 기대어 걸터앉았다. D는 햄을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손이 때에 절어 있었지만 그런 걸 상관하기에는 너무 배가 고팠다.
 이미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눈두덩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럼 죽던가. D는 총을 내려다보았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어. 굳이 손을 써서 찾을 필요는 없겠지. 준일은 나보고 살라고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꼭 기억하라고. 개처럼 죽어간 모두를 위해 잊지 말아달라고. 죽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죽으면 뭐가 있을까? 영원히 잠드는 거야. 그럼 무슨 의미가 있지? 아니, 아무 의미도 없어. 하지만 편할 수는 있겠지. 너나 나나 우리 모두 천국에는 가진 못할 거야. 맥도날드와 아이팟으로 빚어낸 자본주의의 천국. 모두 사라진 지 오래지만. 잿더미 속에 흔적은 남겠지. D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일단은 도망쳐야 해. 도망쳐서……. 그곳으로 가야 한다. 마지막 남은 희망.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복수?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D는 비어버린 통조림을 기울여 그 안의 기름 국물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살아남는 것.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다. 허기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무거운 피로가 찾아온다. D는 시계를 보았다. 동이 트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뭐가 어떻게 되진 않겠지. 눈꺼풀이 무겁다. 잠깐 쉬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

 

 거미, 늑대, 그것들……. 사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그들이 인류를 습격한 시간은 늦은 여름의 어느 날 밤. 나사에서 쏘아올린 유인우주선 암스트롱호가 이틀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화성에 도착하던 순간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우주선의 승무원은 화성의 붉은 모래뿐인 대지에 발을 올려놓았고 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에 딛는 인간의 첫 번째 발자국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단 장면이 위성을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되고 있었다.
 약 15억 명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첫 번째의 발자국. 백인 우주 비행사들의 뛰어난 능력. 꽤 오랫동안 회자되던 생명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여부. 인류의 관심은 온통 그런 쪽으로만 쏠려있었다. 비록 방송이 전파를 탄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지만, 그동안 인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역사적인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해서 그 날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모두 집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차였다. 우연이라면 정말 기막힌 운명의 장난이고 노린 거라면 굉장히 교활하다고 밖에 할 수 없으리라.
 그들이 우리를 공격했던 것은 암스트롱호가 착륙하고 드디어 승무원 중 하나가 화성에 발을 딛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거리에서 뭔가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쿵쿵거리는 소리. 축축한 숨을 내뱉는 소리. 미친개라도 뛰어다니나. D는 가족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눈치였다. 어쩌면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겠지. D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이번엔 비명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소리.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 우적거리는 소리. D는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어둠에 싸여 희미한 형체로 보였지만 거리엔 시커먼 사냥개 같이 생긴 알 수 없는 이상한 괴물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면도날 같은 이빨이 가득 들어찬 아가리를 벌린 채 행인들에게 달려들었다. 늑대 같다. 순식간에 피와 살점으로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보도블록이 붉게 물들었다. 혹시 정신이 나가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D는 현기증이 일었다.
 D는 두 마리씩 짝을 지어 사람에게 달려드는 괴물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차츰 어둠에 눈이 익어 늑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녀석은 털 하나 없는 검푸른 색의 번들거리는 피부에 회백색으로 희부연 눈을 하고 있었다. 생김새는 개라기보다는 털이 다 빠져버린 원숭이에 가까웠다. 늑대는 몸놀림이 유연했다.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이 남자를 끝장냈으면 다음은 저 여자에게 달려들고, 팔을 부러뜨린 다음에 목덜미로 바로 아가리를 들이대는 식으로 녀석들은 춤을 추듯 유려하게 몸을 움직였다. 신기한 점은 서로 아무런 신호도 주고받지 않는 듯싶으면서도 녀석들의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마치 한 몸처럼. 문득 든 생각에 D는 소름이 끼쳤다.
 삽시간에 녀석들은 아무런 제재나 방해를 받지 않고 수십 명의 행인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왜 아무도 파출소에 신고하지 않는 거지? 사람들이 죄다 죽자 녀석들은 망설임 없이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남은 것은 너덜너덜한 채로 길바닥에 버려진 핏덩이 들 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D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오는 어머니를 무시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움켜잡은 채로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개죽음이었다. 그들은 모조리 늑대 밥이 되었다. 터져 나온 뇌수와 내장들. 누리끼리한 지방질과 그 모든 것을 적셔 버렸던 피……. 입 안이 썼다. 이제 더는 토해낼 것이 없는데도 D는 구역질을 계속했다.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서 소화액을 끄집어내었다. 부모님도 창문으로 드러난 끔찍한 거리의 모습을 보았는지 문 밖으로 비명소리가 들렸다.
 D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런 괴물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군대?, 유전자 연구소?, 제약회사?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혹시 누군가의 음모일까? 아니, 이럴 때일수록 현실성을 잃으면 안 되겠지. 어쩌면 동물원에서 탈출한 맹수들일지도 몰라. D는 곰곰이 생각해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런 동물은 어디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D는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혹시 몰라서 휴대폰으로 경찰에 전화를 해봤지만 불통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성 착륙을 보도하던 채널에서는 이제 긴급속보가 들어와 있었다. D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황한 모습의 아나운서는 이 생물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까지 알려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조만간 군대가 진압에 나설 테니 밖에 나가지 말고 가급적이면 건물 안에 있으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어쩌라는 거야. 명확한 해결책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리라는 것도 아니고.” 
 D의 아버지는 초초한 기색이었다. D는 누나를 떠올렸다. D의 누나는 간만에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고 좋아하며 친구들과 함께 놀러 나간 차였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누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갈 뿐, 응답은 오지 않았다.
 D는 덜덜 떨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비 일상이란 괴물은 그가 서 있던 일상이란 얇은 얼음판을 부셔버렸다. 그는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누나는 죽었을지도 몰라. 늑대 밥이 되었을지도 몰라. 삽시간에, 누가 자기 목을 물어뜯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죽었을지도 몰라.
 “은지니?”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누나와 간신히 연결이 되었다. D의 어머니는 울음부터 터뜨렸다. 누나는 어머니에게 지금 시내의 한 식당에 있는 중이고 당장은 녀석들이 없지만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 않고 있다고 했다. 누나가 살아있다는 말에 D의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차 열쇠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는 위치를 알았으니 누나를 데려오자고 했다. 어머니는 혹시 뭔 일이 생길지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게 낫지 않겠냐며 아버지를 말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이 D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D는 아버지의 굳은 얼굴을 보고 포기하기로 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아버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늑대 밥, 늑대 밥, 늑대 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D는 애써 께름칙한 기분을 무시하고 속보가 들어오는 데로 이어진다는 TV 화면을 노려보았다.

 

*

 

 D가 소녀와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오후 4시경. 슬슬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늦은 낮 시간이었다. D는 총을 어깨에 메고 보스턴백을 손에 쥔 채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오로지 해가 하늘에 떠 있는 시간에만 이동할 수 있으니 그때만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묵직한 보스턴 백 때문에 팔이 아팠다. 가방 안에는 햄 통조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오늘 아침 서둘러 공장을 나오면서 챙긴 것들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숨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돌아올 것이다. D는 지도를 꺼내 온 거리와 방향을 점검해보았다. 이제 겨우 15km를 걸었을 뿐인데. 아직 철원까지는 한참 남아있었다. 목이 말랐다. D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미 때문일까. 온통 깨어지고 부서진 잔해 뿐.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D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냈다. 안을 살펴보았다. 물병은 텅 비어 있었다. D는 당황했다. 물을 어디서 구하지? 식당이나 편의점 같은 곳이 떠올랐지만 그런 게 남아 있을 턱이 없다. 해가 지고 있었다. 물을 구해야 하는데. D는 사방을 필사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었다. 부서진 콘크리트 틈 사이로 마실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더러운 흙탕물이 흘러 내렸다. 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D는 웅덩이에 물병을 밀어 넣었다. 배탈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곧 어둠과 함께 그들이 찾아올 터. D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마시지 않는 게 좋을 걸요.” 문득 들려온 말소리에 D는 화들짝 놀랐다. D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 소녀가 서있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D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한 탓인지 때에 절어 있었다. 소녀는 씩 웃고는 D에게 생수병을 건넸다.
 “녀석들이 거기에 뭘 타는 걸 봤거든요.”
 소녀는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하루 종일 걸었던 모양이다. D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을 받아 들었다.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곧 놈들이 올 거야.”
 D는 갈증을 채우고 나서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성대가 쇳소리를 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소녀가 미심쩍었지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해는 이제 완전히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숨어야 할 시간이다.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D에게 소녀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보아하니 이 주변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던 것 같고. 계속 혼자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보고 그렇게 반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군. 지금 당장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D는 소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름이 뭐에요?”


 *

 

 정전이 된 지 2시간도 넘게 흘렀다. D는 불안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집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D는 전등 스위치를 껐다가 다시 켜봤다. 역시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세 시간도 더 넘게 정전이다. 전기가 없으니 TV나 라디오 같은 것도 킬 수가 없고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다. 밖에서는 끊이지 않고 비명소리와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D는 창 밖에서 죽은 사람들을 세다가 200을 넘어가자 그만두었다. 이제 더 이상 셀 수조차 없다. 거리는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시체, 시체, 시체들 뿐. 군대가 곧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자. 눈앞에 펼쳐진 아비규환 같은 장면도 계속 보다보니까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 처음만큼 그렇게 구역질이 올라오진 않았다.
 적어도 건물 안에 있으면 안전할 테니까. D는 휴대폰을 꺼내 다시 부모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연락은 두절된 지 오래다. 이게 정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른다. 전자이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초조해지는 마음에 누나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D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속으로 간절하게 되뇌고 있긴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게 냉혹한 현실이겠지. 거리에는 예의 그 시내 한 복판에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찢어발기던 늑대 말고도 새로운 놈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놈들은 양 옆으로 다리가 다섯 개나 달려있는, 덤프트럭만한 괴물로써 무지막지한 힘으로 닥치는 대로 자동차나 가로등 같은 것을 집어던지곤 했다. 녀석들은 거미를 닮았다
 도대체 이런 녀석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두통이 몰려왔다. 인류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이룩한 것들. 그들은 모든 문명의 흔적을 순식간에 짓밟고 폐허로 만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은 기계처럼 오차 하나 없는 동작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끊었다.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나 노인이나 죽음에는 차별이 없었다. 늑대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어서 빨리 군대가 왔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그들 역시 별 소용이 없으면, 그때는 어떡하지?
 혼자뿐인 집 안을 감도는 공기는 무거웠다. D는 갑갑함에 미칠 것 같았다. 잠깐이라도 나가볼까. D의 집은 아파트 11층이다. 나간다고 당장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도 식히고 상황이라도 볼 겸 해서 나가야겠다. D는 추리닝을 입은 채로 문을 열고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옥 같은 바깥 상황과는 다르게 아파트 복도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단조로웠다. 건물 안은 공격하지 않는 걸까. 하긴 늑대나 거미가 그렇게 건물 문을 열거나 계단을 오를 만큼 똑똑해 보이지는 않았다. 차가운 바깥공기를 들이마시니 어느 정도는 진정이 된다.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자칫하면 죽는다. D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파트 전체를 울리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래쪽인가. D는 귀를 기울였다. 뭔가를 후려치는 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씹어 먹는 소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D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비명 소리가 그쳤다. 죽은 걸까? 그럼 도대체 어디에서, 누가 죽은 거지? 녀석들의 짓인가. 쩝쩝거리는 소리는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더 실감나게 들려왔다.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과연 녀석들이 이 안에 들어온 걸까.
 D는 5층에서 멈춰 섰다. 분명히 쩝쩝거리는 소리는 이 아래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D는 조심스레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고개를 내밀어 아래층의 모습을 살폈다.
 피바다. 피는 좁은 아파트 복도를 흥건하게 적신 채 흐르고 있었다. 412호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앞에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괴이한 생명체가 서 있었다. 녀석은 늑대처럼 검푸른 색의 칙칙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희뿌연 눈으로 현관문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을 뜯어 먹는 소리는 문 안쪽에서부터 들리고 있었다. 녀석은 두 발로 일어서 있었다. 녀석들 중 가장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모습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아찔한 모습에 D는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괴물은 D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눈동자. D는 순간적으로 녀석과 시선을 마주쳤다. 먹는 소리가 그쳤다. 다음은 너야. 괴물의 눈은 명백한 위협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안 돼. 몸이 얼어붙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도망쳐야 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D는 엉금엉금 기어 5층 복도로 올라갔다. 어디로 가야하지? 죽을 지도 모른다. 살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에 D는 끝없는 공포를 느꼈다. 면도날 같은 이빨. 도망쳐야 해.
 다리가 돌아왔다. D는 오른쪽의 복도로 달렸다. 녀석들이 있는 곳은 중앙 엘리베이터 홀이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려면 옆으로 새는 게 낫겠지. 늑대는 이제 412호에서 뛰쳐나와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지 달리는 D의 뒤로 다급한 숨소리가 따라붙었다. 빨리 판단해야 해. 도망쳐야지. 어디로, 집으로? D는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차피 집에 있으면 녀석들에게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늑대 밥밖에 더 되겠어.
 내려가자. 즉흥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미친 거야? 밖에는 녀석들 천국이라고.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잖아. 아파트 안에서 추격전을 벌이기에는 이쪽이 너무 불리해. 망설일 틈도 없었다. D는 오른쪽 비상구를 통해 아래층으로 향했다.
 현관. D는 난데없이 들리는 총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밖에서는 군인들이 녀석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싸웠던 거지? 아까 집 안에서 밖을 내려 보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철모에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으로 늑대와 거미를 쏘고 있었다. D는 옆으로 뒤집힌 승용차 뒤로 웅크리고 상황을 보았다. 곳곳에 녀석들과 군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살았다. D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군대가 개입했으니 사태는 곧 진압될 것이다. 그렇지?
 군인들 중 하나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늑대가 믿을 수 없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군인의 어깨를 물었던 탓이다. 순식간에 주먹만 한 살점이 뜯겨져 피가 튀었다. 곧바로 녀석에게 집중적인 사격이 이어졌다.
 거미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총알은 거미의 딱딱한 살가죽을 뚫지 못했다. 오로지 번들거리는 흠집만 낼 뿐이다. 녀석들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 마리를 죽이면 두 마리가 쏟아져 나와 빈자리를 채워버리니 도저히 속수무책이다.
 대공포가 불을 뿜었다. 거미의 배가 터지고 온 사방에 질척한 액체가 뿌려졌다. 수류탄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놈들 대 여섯의 몸이 산산 조각나 허공을 비산했다. 이 전투에 인류의 생존이 달려 있다. 군인들은 필사적이었다. 늑대는 예리한 이빨이 가득 들어찬 아가리를 벌려 돌진했다.
 너무 많아. D는 손바닥이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또 다른 녀석들이 나타나서 빈자리를 채운다. 이대로라면 질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이들은 어디에서 이렇게 튀어나오는 거지? 시체의 산이 쌓여가고 있었다.
 D는 충동적으로 쓰러진 시체가 쥐고 있던 총을 집어 들었다. 도망가야 한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여기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죽을게 뻔하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지? 대피소가 떠올랐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녀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내를 지나야 했다. D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산이다.
 그렇게 등산을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도망치는 데엔 찾기가 힘든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D는 엄폐물로 삼던 승용차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몇 시간째 산 아래턱에는 폭음 소리와 비명 소리, 그리고 번쩍거리는 불빛이 끊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D는 열심히 아래쪽을 보려고 애썼다. 눈가가 욱신거렸다. D는 휴대폰을 꺼내 부모님과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는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D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잠자기는 그른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꿈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너무 황당하다. 괴생물체의 습격이라니……. 녀석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을 공격했고 대부분을 죽여 버렸다. 왜 이들은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아까 아파트에서 마주친 희끄무레한 눈빛이 떠오른다.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기계 같던 눈동자. 분명 녀석들은 정상이 아니었어. 그렇지? D는 총을 움켜잡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믿음직스러운 금속의 느낌이 D를 진정하게 만들었다. 긴장하지 말자. 어떻게 뭔가 방법이 있겠지. 지금 고전하고 있긴 하지만 분명히 군대가 문제를 해결해 줄 거야. 
 어느 순간부터 산 아래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있다.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희미한 쩝쩝거리는 소리. 축축한 발자국 소리 말고는. D는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

 

 소녀는 햄을 걸신들린 듯 먹어치웠다. D는 소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소녀가 D를 데려온 곳은 낡아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판잣집이었다. 벽에는 온통 금이 가 있었다. D는 소녀가 측은했다. 소녀의 몸은 손이라도 대면 부러질 듯 가냘프다. 은신처라고 할 수도 없는 낡은 폐가에는 소녀 외의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어떻게 그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던 걸까.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소녀는 이렇게 혼자였던 걸까.
 소녀는 입가에 묻은 기름을 손으로 닦아냈다. 남의 식량, 그것도 조리하지 않은 날것을 게걸스럽게 먹은 것이 부끄러웠는지 소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D는 신경 쓰지 말라는 손짓을 하고 벽에 귀를 대고 밖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발자국 소리를 주의해야 한다고 준일은 말하곤 했었지. 물론 이런 외진 곳에서 늑대나, 혹은 거미를 만난다면 살아남기는 불가능할 테지만. 어쩌면 준일은 대범한 척은 했어도 항상 두려웠는지도 몰라.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소녀는 D를 보고는 쿡쿡 웃었다. D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놈들은 체온으로 사람을 찾거든요.”
 소녀는 화장실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 있으면 바로 앞에 있어도 몰라요, 진짜야.”
 대답이라도 하듯 어디에선가 발자국 소리,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 뭔가를 부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시큼한 바다 냄새가 난다. 도망가야 한다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소녀는 당황하는 D의 손목을 잡았다. 긴장하지 마. D는 소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D는 미심쩍은 눈길로 소녀를 보았다. 그렇게 쉽게 따돌릴 수 있다니? 그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 준일과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곤 했다. 대피소 주변에 향수를 뿌려 냄새를 가리고 도시 곳곳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웠다. 대피소로 내려오는 계단 부분을 돌무더기로 가려 결코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 불. 아 그랬구나, D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준일과 D는 추운 겨울밤을 덥히기 위해 불을 피웠었다. 녀석들이 마지막 날 밤 대피소를 찾아냈던 것은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열에 민감한 걸 보면 녀석들은 도롱뇽 같은 수생생물과 닮은 구석이 있다. 생긴 것도 비슷한 것 같은데. 결국 이 점에 있어서는 준일이 옳았던 셈이다. 바다 속에 사는 군집성 양서류는 잘 상상이 안 가지만.
 욕조는 당연하지만 하나밖에 없었다. D는 소녀와 등을 맞대고 비좁은 욕조 안에서 웅크리고 앉았다. 물은 서늘하고 축축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푹 젖어버린 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음, 저기…….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죠?”
 소녀가 머쓱한 분위기를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이 판국에 그런 사소한 것이 뭐가 중요하겠는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왔는데 아저씨란 말을 들으니 왠지 억울하다. D는 침묵으로 긍정의 뜻을 표시하고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혼자 지낸 거니?”
 소녀는 몸을 움츠렸다. D는 내심 이야기를 꺼내지 말 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소녀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가 떠난 이후부터요.”
 “엄마?”
 “엄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소녀는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일하던 소녀의 어머니는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고 휴대폰으로 곧 들어간다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남긴 다음에 연락두절이 되었단다. D는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그 지옥이 펼쳐진 지 보름도 더 넘게 지났는데도 아직도 소녀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D는 가망 없는 일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등을 맞대고 있어서 모르지만 아마 소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으리라. 부서질 듯 연약해 보여도 이 생지옥에서 혼자 맨몸으로 버틴 아이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무턱대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저씨는요?”
 소녀는 D에게 되물었다. 이야기하자면 꽤 길 것이다. 하지만 밤은 아직 많이 남았고, 어차피 또 길을 떠나려면 내일 아침까지는 기다려야 할 테니까. D는 피식 웃고 자신의 이야기를 소녀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준일을 만난 이야기에서부터 해적방송을 들은 일, 준일의 죽음. 지금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D는 갑자기 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니 혀가 굳어 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몰려온다. 욕조 안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추적을 따돌리는 것도 좋지만 이 상태로 계속 있다간 저체온증이 올 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20분 정도만 더 있으면 돼요. 그 때쯤이면 녀석들은 다른 곳으로 사라졌을 테니까.”
 소녀는 D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등을 맞대고 앞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D는 눈을 감았다. 아직도 가끔씩은 이게 꿈이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 이 모든 것이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눈만 감았다 뜨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허망한 백일몽이었으면 좋으련만. 눈을 떠 봐도 보이는 건 전등이 꺼진 어둡고 비좁은 화장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찰박거리는 물의 미세한 움직임뿐.
 모든 것은 다 사라져 버렸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죽으면 아무 걱정 없이 쉴 수 있어. 미래? 희망? 삶? 개나 줘버려. 이런 지옥에서는 애초에 모두 개소리라는 거 잊지 마. 인류는 몰락해 버렸어. 상황이 변했다고.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달빛이 물결치는 욕조를 수놓고 있었다. D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아파, 머리가 아파. 죽을 것처럼 아파.
 “이제 나가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소녀가 D의 일그러진 얼굴을 걱정스럽게 돌아보았다. D는 고개를 끄덕였다. D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직 한밤중이다. 살아남아. 준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D는 물이 묻지 않게 화장실 구석 한편에 기대어 세워두었던 총을 집어 들었다. 총은 너의 생명이야. 총이 없으면 너도 없는 거야. 늘 몸에서 총을 때어두지 마. 냉철하게 방아쇠를 당기던 그의 모습. 
 소녀와 D는 거실로 돌아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D는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D에게 소녀는 모포를 꺼내 건넸다. 
 “덮어요. 그나마 나을 거예요.”
 “차라리 불을 피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직은 안 돼요. 녀석들이 알아챌 수도 있어서.”
 “…….”
 D는 피곤했다. 며칠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피로가 몰려왔다. 아니, 정신을 차려야 해. 이런 곳에서 잠들 수는 없어. 준일은 항상 살아남았다. 모두가 죽고 늑대 밥이 될 때도 그는 어떻게든 악착같이 투쟁하고 늘 혼자 남았다.
 준일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혼자 살아남았다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모두 살아남고 너는 죽은 거면 어떡할래? 여기는 아무 것도 없어. 여기는 항상 눈이 내려. 그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군.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D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확하게 들려. 이건 확실히. 신음소리. 헐떡거리는 소리. 비웃는 소리 이것은 그들의 소리야. D는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소녀를 잡아끌었다. 녀석들은 우리를 놓치지 않았어. 그들은 돌아오고 있는 중이야.
 “어서!”
 그는 소녀의 손목을 잡은 채로 폐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금기 섞인 냄새가 그들을 추격했다.
 “아…….”
 소녀는 짧은 탄식을 흘렸다. 순식간에 어둠을 뚫고 늑대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D는 침착하게 녀석의 미간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질척질척한 피가 튀고 녀석이 쓰러졌다. 서둘러야 한다. 이 녀석들은 개미나 벌 같은 사회성을 지닌 집단이다. 바로 앞에서 같은 개체가 죽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목표에게 달려든다. 얼빠져 있을 시간 같은 건 없다. 이 사격으로 위치가 알려졌을 터였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한다.
 D는 소녀를 이끌고 도로를 벗어난 논밭 쪽으로 향했다. 점점 발걸음이 빨라지자 소녀는 다급하게 D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일단은 지금 좀 숨었다가, 철원으로!”
 “그렇지만…….”
 소녀는 집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D는 답답한 마음에 소녀에게 언성을 높였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녀석들의 눈에 들어왔어. 저긴 이제 못 가. 죽는다고!”
 “엄마가 절 기다릴 지도 몰라요…….”
 “야, 웃기지마! 너희 엄마는 죽었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D는 걸음을 멈추고 턱까지 닿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소녀의 어깨를 잡고 논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볏짚 더미에 밀어붙였다. D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D의 눈길을 피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소녀의 표정이 D를 더 화나게 했다.
 “현실 속으로 돌아오라고! 모두 죽었어.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
 D는 말을 하고 나서야 잘못했음을 알았다.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돌이키고 싶지는 않아. 어차피 인정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헛된 기대 속에서 무의미한 개죽음을 당할지. 딱 이 두 갈래로만 나뉜 갈림길이야. 외면해도 언젠가는 마주할 수밖에 없는 그런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빨리 결정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사실 모르는 건 아니에요.”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D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숨이 차분해지면서 이성이 돌아왔다.
 “……미안하다.”
 “아니, 제가 잘못했죠. 괜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
 소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D는 소녀가 안쓰러웠다. 모두가 죽어나가는 생지옥에서 열흘 넘게 혼자 살아온 소녀. 아무도 없는 긴긴 밤에는 혼자 욕조에 몸을 담그고 엄마가 곧 돌아오실 거라고 되뇌어 다짐하던 소녀. 정면으로 현실과 부딪힌 지금 소녀의 눈은 너무나도 공허해 보였다.
 D는 눈살을 찌푸렸다. 역겨운 비릿한 바다 냄새가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우선은 지금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다. 다른 건 몰라도 도망치는 데에는 자신 있지. D는 이를 꽉 악물었다. D는 소녀의 손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

 

 날이 밝았다. 낙엽과 마른 풀에서 오는 까칠한 감촉에 D는 낯설음을 느꼈다. D는 눈을 떴다. 앙상한 겨울나무 아래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D는 몸을 일으켰다. 차디찬 공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젯밤 일을 기억하려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간헐적인 장면들. 늑대, 거미, 군인…….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D는 흠칫 몸을 떨었다. 눈동자. 그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던 희끄무레한 눈동자. 그들은 마치 기계와도 같다. 인류멸망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기계.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D는 품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고 부모님과 누나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들려올 뿐, 모두 통화가 되지 않는다.
 D는 나무 등걸에 기대어둔 총을 집어 들었다. 차라리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꿈이기를. 망상에 불과하기를. 하지만 아침햇살 속에서 드러난 파괴의 흔적은 끔찍했고 무자비했다. D는 산등성이의 아래쪽으로 펼쳐진 도시의 폐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시체와 부서진 건물들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놈들은 어디로 갔지? D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혹시 움직이는 게 없나 살펴보았다. 희한하게도 어제 그렇게 많던 녀석들은 죄다 온 데 간 데 없었다.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아니,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있었다. 뭔가가 움직였다. D는 총을 장전했다. 연초록색 바지, 피가 묻어 질척해진 군홧발. 모두가 죽어버린 유령 도시에 군인 하나가 혼자 남아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D는 더 자세히 그를 주시했다. 콘크리트 무더기에 깔린 모양인지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 같았다. 도와줘야 하나? D는 별 생각 없이 산을 내려가 그를 도우려다 멈칫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없을 지도 모르지만 아직 녀석들이 남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저 사람, 저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잡아먹힐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먼 곳도 아니다. 가장 가까운 등산로로 뛰어서 움직인다면 10분도 채 안 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군인인 만큼 D보다는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의 범위도 넓을 것이다 도와주러 가야 해.
 언제 녀석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최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D는 달리기 시작했다.
 
 “고맙다.”
 생각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아스팔트 덩어리를 몇 번 옮기고 나니까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몸이 쑤시는지 군인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군인은 혹시 어젯밤에 다치지는 않았냐고 묻는 D에게 그렇게 심각한 편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준일. 그의 이름은 준일이었다.
 그는 막판에 후방 백업으로 지원을 온 보병이었다. 어제 새벽.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녀석들에 의한 무시무시한 학살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군대는 모든 전력을 잃었다고 한다. 장갑차에서부터 탱크, 전투헬기까지 현대 화기란 화기는 모조리 동원된 작전이었지만 그 모든 노력은 녀석들의 날카로운 이빨 아래 산산이 부서져 물거품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현대 인류 문명은 정체를 모를 괴생물체들에게 짓밟힌 것이었다. 준일은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마치……. 비유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개미 같았어.”
 개미는 공동체를 위해 자아를 철저하게 억압하는 사회를 만들어 집단생활을 한다. 그들은 오로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움직이며 이 과정에 설사 개인의 희생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와 같으며 자의식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는다. 그런 점이 녀석들과 닮았다. 어제의 그 희뿌연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괴물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D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지금 어디 있죠?”
 “모르겠어. 아마 왔던 곳으로 사라진 게 아닐까?”
 준일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도무지 녀석들의 행동 패턴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하루 만에 인류의 문명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그만한 전투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애초에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는 기분 나빠요. 언제 녀석들이 돌아올지 모르니 안전한 곳으로 가 있죠.”
 “일단 챙겨야 할 물건들은 챙기고 나서.”
 준일은 짧게 대답하고 나서 짐을 챙겼다. 주위에 나뒹구는 총 한 자루와 군용 장갑 등을 챙기고 준일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D는 내심 준일을 도와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D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젬병이다. 20년을 살면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라면 끓이기랑 컴퓨터 전원 키기밖에는 없다. 준일이 없었다면 혼자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갔을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그런데 그는, 준일은 어떻게 그 지옥에서 혼자 살아남은 거지? 도대체 왜 그 돌 더미 아래에는 깔려 있었던 걸까? D는 준일을 흘끔 쳐다보았다. 준일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동료의 죽은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는지.
 
 거리에는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수고 조각내 쓸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D는 파리가 잔뜩 꼬여 있는, 머리가 반쯤 날아간 시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까지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 이쯤이에요.”
 D는 찜찜한 표정을 지은 채 따라오는 준일에게 말했다. 지금은 산산조각 나서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이곳에 편의점이 있었다. D는 손가락으로 예전, 그러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편의점의 입구였던 곳을 가리켰다.
 “음.”
 준일은 잠깐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툭툭 차보다가 곧 수북하게 쌓인 잔해들을 일일이 손으로 걷어내기 시작했다. 뽀얀 흙먼지가 일었다. D도 일손을 거들었다. 10분쯤 치우다 보니까 찌그러진 물건들이 잔해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우산, 껌, 담배, 컵라면……. 다양한 종류의 잡화가 손에 잡힐 때마다 준일은 그것들을 길바닥 옆에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찌그러져 더 이상 먹을 수가 없게 된 즉석식품이나 도시락 같은 경우는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 나누어 먹었다.
  D는 잔해를 뒤지다가 가방을 하나 발견했다. 파는 물건이 아니었는지 속에 들은 것이 묵직했다. D는 가방의 지퍼를 풀고 뒤집어서 안에 든 것들을 모두 쏟아냈다. 먼지가 잔뜩 묻은 보스턴백에서는 두꺼운 책들과 함께 휴대폰과 연락처 등이 쏟아져 나왔다. D는 지갑을 꺼내 안을 살폈다. 대학생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모양이었다.
 제기랄. 까닭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D를 준일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어둠이 찾아올 거란 생각을 하니 왠지 낯선 불안감이 들었다. D와 준일은 정리를 마치고 대피소로 향했다. 대피소라면 안전하겠지. 무엇보다 아직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아. 누나나 부모님이 거기 멀쩡하게 잘 있을 수도 있잖아. 치기어린 공상이라는 것은 D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 그런 생각이라도 안 하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준일은 D의 옆에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레트로 스타일의 포켓 라디오였다. 건전지로 작동하니 전기가 없어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 판국에 무슨 방송을 들으려고? 뭔가 생각이 있겠지. D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왠지 모르게 예의 그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는 느낌이다. 녀석들의 몸에서 짙게 풍겨져 나오는 그 악취. 준일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더욱 발걸음을 재게 걸었다. 학교는 반쯤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래도 용하게 계단은 살아남아 D와 준일은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서둘러야 했다. 녀석들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D는 대피소의 문손잡이를 비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정비한적 없는 시설은 거미줄과 켜켜이 쌓인 먼지로 점령당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 모를 희망을 가지고 대피소까지 왔지만 결국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정말 어젯밤 모두 다 죽은 걸까? 살아남은 사람은 더 없는 걸까? 그들은 어떻게 하루 만에 그 모든 사람들을 죄다 처리할 수 있었던 걸까. D는 막막한 심정에 긴 한숨을 쉬었다.
 준일은 대피소 안을 돌아다니며 나무 탁자나 사물함 같은 것을 밀어다가 문 앞에 놓았다. 이 정도면 녀석들이 들이닥친다고 하더라도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으리라. D는 입구 반대편에 있는 비상구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도대체 녀석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는 사람을 죽이러 나온다니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저기요. 뜬금없을지는 모르지만…….”
 “응?”
 준일은 편의점에서 가져온 짐을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녀석들은 어디서 온 걸까요?”
 “……글쎄.”
 “그 두 녀석……. 늑대같이 생긴 놈이랑 거미같이 생긴 놈, 아마 같은 종류겠죠?”
 사실은 그것부터가 확실하지 않다. 생김새가 명확하게 다르기는 하지만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는 몸 색깔이나 같이 협력을 해서 싸우는 모습 같은 것을 보니 무조건 다른 종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 준일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사회성 동물이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한 이야기다. 요컨대 병정개미와 일개미의 차이처럼. 애초에 생김새만 보면 전혀 딴판이지만 사회 집단이라는 공동체로 묶여 있는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여왕이 있을까.
 D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D가 목격한 놈들의 종류는 세 가지로 네발로 걷고 민첩하고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을 가진 녀석과 모두 열 개의 발로 기어 다니고 덩치가 되게 큰 녀석. 그리고 제일 알 수 없는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녀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셋이 모두 같은 종이고 인류말살을 위해 여왕이 준비한 병기란 말이지. D는 피식 웃었다. 겨우 한 번 본 게 다다. 속단하기는 너무 이른 상황이겠지.
 “……바다.”
 “네?”
 “녀석들이 온 곳은 바다가 아닌가 싶어.”
 “흐음.”
 “놈들이랑 마주칠 때마다 짠 냄새가 나거든.”
 꽤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동안 인류가 그렇게 바다를 탐색하고 조사하고 지도를 그리는 동안 어떻게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던 걸까.
 D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준일은 라디오를 집어 스피커를 귀에 대고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한동안 잡음이 계속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준일은 다이얼을 더 섬세하게 조작해 남자의 주파수를 잡아냈다. 그러나 원래 방송 상태가 좋지 않은 듯 남자의 목소리는 희미한 노이즈와 함께 들려왔다.
 “……거기는 아무도 없습니까? 이곳은 철원입니…….”
 D와 준일은 흥분해서 귀를 라디오에 바싹 기울였다.
 “……저희는 지금 함께 있습니다. 이곳은 물자와 시설이 풍부합니…….”
 순간이지만 백색소음이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혹시 방송이 끊겨 버린 것은 아닐까. D는 조바심이 들었다. 다행히 곧이어 헛기침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곳은 철원 군청입니다. 모두 여기로…….”
 방송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더 이상은 소음 외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준일은 다이얼을 계속 돌려 보았지만 다른 채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철원이라. D는 준일은 간이 모포를 꺼내 이부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둘 다 깊은 생각에 빠져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잠이 들었다. 간간히 지상에서는 비명소리와 뭔가를 씹어 먹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들은 욕심쟁이야. 죄다 먹어버렸지. MMM 사탕 한 알까지 남기지 않았어. 점점 어깨에 메고 있는 보스턴백이 무겁게 느껴졌다. D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D는 몸이 많이 약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피로 때문이라기보다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끝이 없는 절망감. 그 때문이겠지
 올해 겨울은 유난히도 싸늘하고 인정머리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아. 모두 죽었어. 건물은 뿌리 채 뽑혔고 이제 거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지. 바람을 막아줄 만한 따뜻함 같은 것은 더 이상 없어. 눈앞은 그냥 텅 비어버린 공백일 뿐이야. 한때 여기 누가 살았노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그런 공백.
 “힘드니?”
 D는 입을 열었다.
 “……네.”
 소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면 쉬어가도 돼.”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소녀는 D를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D는 한숨을 쉬고 깨진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았다.  “그럼 내가 힘든 걸로 하자.”
 “…….”
 겨울치고는 드물게 하늘이 맑았다. 인류는 멸망했다. 그 사이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무심할 만큼 푸르렀다. D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만약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D는 헛기침을 하고 덧붙였다.
 “만약에 말이야.”
 D가 입을 열었다. 폐허가 된 포천 시내를 둘러보고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네?”
 소녀는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지?”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D는 다시 입을 닫고 침묵을 지켰다. 소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요. 다 잘될 테니까.”
 그래, 그렇겠지. 흙먼지가 섞인 바람이 다시 불었다. D는 눈을 감았다. D와 소녀는 걷고 또 걸었다. 밤이 되면 서로 순서를 바꿔가며 불침번을 서고, 콘크리트 조각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체온을 숨길만한 물웅덩이를 찾고…….
 혼자서 하는 일을 둘이서 하니 훨씬 편했다. D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버텨주는 소녀가 고마웠다. 소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들은 왜 그럴까요?”
 소녀 역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뭐가?”
 “밤에만 움직이는 거 말이에요.”
 “……음.”
 “해를 보면 안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
 “대충 짐작이 가긴 해.”
 “뭐가요?”
 “습기 때문이야.”
 “……습기요?”
 “밖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그렇지 녀석들은 원래 바다 동물이야. 하루 종일 물 밖에만 있으면 건조해서 못 견딘다고.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소녀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출발해요.”
 “그러지.” D는 지도를 펼쳐 들었다. 이제 내일이면 도착한다. 비록 당장은 아무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가면 무언가 답이 나오겠지. 준일은 괜히 죽은 게 아닐 것이다. 준일은 늘 치밀하게 계획하고 일을 실행하는 완벽주의자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준일이라면, 헛된 빈말만을 늘어놓진 않았을 것이다. 

 

*

 

 D와 준일은 그렇게 며칠 동안 대피소에 숨어 살았다. 녀석들의 추적은 밤마다 이어졌지만 비상구 외의 출입이 봉쇄된 대피소 안은 안전했다. D와 준일은 낮에는 나와서 활동하고 밤에는 대피소로 돌아가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반복했다.
 준일은 D에게 총 쏘는 법을 알려주었다. 영점을 조준하는 법. 반동에도 놀라지 않는 법. 탄알을 재빠르게 장전하는 법.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법. 얼마 지나지 않아서 D는 총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D는 총의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그는 점점 더 말수가 적고 매사에 신중한 준일을 닮아갔다. 
 D와 준일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첫날에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철원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사실 이제는 아무리 다이얼을 돌려 보아도 더 이상 잡히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D와 준일에게 일종의 터부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반쯤 폐쇄된 그들의 거처는 엉망진창이 된 도시의 다른 곳에 비해 꽤 안전한 장소였고 조금만 주의를 잘 기울이면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녀석들을 피해 잘 숨어있을 수 있었다.
 준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구를 깔고 누워서도 준일은 동이 터올 때까지 몸을 뒤척거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생존자의 죄책감. 모두 죽었지만 혼자 살아남아 있다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죄의식. 준일은 녀석들과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군인이었다.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아 있다는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준일의 얼굴은 항상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실 당장의 안정된 생활은 모두 거짓이고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서로 입 밖으로 말을 내어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희망은 없다는 것. 그리고 당장 그게 내일이 될지 1년 후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언젠가는 녀석들에게 잡아먹히고 말거라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
   무턱대고 철원으로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이곳처럼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거기까지의 여행은 또 얼마나 위험할 것인가. 여기서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 굳이 나서서 늑대 밥이 될 필요는 없다. 식량은 충분하다.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버티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던가.
 녀석들은 항상 무리지어 다닌다. 또 녀석들은 결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들의 추적 솜씨는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들은 도시가 아무리 쑥대밭이 되어도, 더 이상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어도 악착같이 짓밟았고 시멘트 조각 하나까지도 들쑤셨다. 실로 그들은 기계나 다름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지상에서는 크고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얼마 남지 않은 최후의 생존자들은 날이 바뀜에 따라 점차 숫자가 줄어들었다. 새로 땅에 흩뿌려진 붉은 핏자국을 보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이른 겨울의 날씨는 추웠다. D와 준일은 도시의 폐허를 뒤져 나무토막 같은 것들을 모아 밤이면 불을 피웠다.
 
 “살아라.”
 “……네?”
 “꼭 살아남아.”
 “무슨 말이에요.”
 “누군가는 꼭 살아남아야 해. 살아서 철원에 가.”
 “철원……에요?”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었던 마지막 소주 팩이었다. 준일은 얼굴이 혀 꼬부라진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일까. D는 혼란스러웠다. 준일은 키득키득 웃었다.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돌이켜보면 준일은 어느 정도 즈음은 예상했던 것 같다. 준일은 언제나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했으며 그에 따른 행동 경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은 띄엄띄엄 끊어져 있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D를 바라보던 준일의 눈은 무척 슬퍼보였고 동시에 약간의 안도감도 섞여 있는, 그런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준일은 D를 깨웠고 헐떡거리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D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결국 D와 준일을 찾아냈던 것이다. 대피소의 문이 부서져라 흔들렸다. 바리케이드가 산산 조각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망쳐야 했다. D는 비상구로 향했다.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면 그들은 D를 산 채로 씹어 먹을 것이다. 죽음은 바로 등 뒤에 몇 발짝 뒤에 무서울 만큼 가깝게 있었다. 준일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돼! 이거 잃어버리지 말고.”
 D는 엉겁결에 준일이 건네는 보스턴백을 받아들었다. D는 비상구의 문을 열고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긁어대는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역겨운 바다냄새가 진동했다. D는 달렸다. 숨이 가빠왔다. 이대로라면 곧 늑대에게 잡아먹힐게 뻔하다.
 허리춤에 덜렁거리는 총을 잡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D는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드디어 끝낼 수 있다. 이걸로 이제 더 이상의 고통은 없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준일은 어디 있지? D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녀석들은 아직 대피소 안에 있는 건가? D는 D를 떠밀던 준일의 손길이 떠올렸다.
 준일은 죽은 걸까. 도대체  왜……? 고민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다음 순간 대피소가 폭발했다. 순식간에 밀어닥친 후끈한 열기에 D는 두어 발짝 정도 뒷걸음질 쳤다.

 준일은 언제부터 대피소 안에 폭발물을 숨겨두기 시작했던 걸까. 준일은 한 번도 D에게 어째서 자신이 혼자 살아남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아마 도망친 게 아닐까. 도망쳐서 동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준일은 냉철했고 감정 표현을 하는 일이 적었다. 그는 군인이었다. 그 죄책감은 또 얼마나 큰 것이었을는지. 어쩌면 그런 죄의식,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굴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렸다는 듯이 침착하게 D를 깨우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폭탄의 스위치를 눌렀을 준일의 행동은 결코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동안 리허설을 해 두었던 것처럼 준일은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머뭇거리는 D의 등을 떠밀기까지 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피소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연기만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금 D는 혼자가 된 셈이다. 정적이 흘렀다. D는 몸을 일으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걸로 빚진 거야, 당신. D는 보스턴백 안을 확인했다. 텅 비어 있던 가방 안에는 어느새 조그만 물병과 함께 지도와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준일은 평소 성격대로 매사에 빈틈없고 꼼꼼한 군인이었다.
 물병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D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늑대 밥. 늑대 밥. 늑대 밥. 그들은 엄마도 아빠도 누나도 모두 다 데려가 버렸지. 죄다 씹어 먹혀 버리고 만 거야. 이제 다시 원점이야. D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빨, 예리한 이빨. 손을 대기에는 너무 날카로워. 그렇다고 건드리지 않자니 너무 외롭지.  기회는 단 한번 뿐이야. 과연 그곳에 간다고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손가락은 모두 열다섯 개. 이제 몇 개나 남았지? 원숭이 같은 것들, 희끄무레한 눈동자, 늑대, 거미, 준일. 그래 우리는 너희들을 배신했더랬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될 일은 분명 아니겠지만 말이야.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구원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단지 휴식. 더 이상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실컷 늑장 부릴 수 있는 그런 휴식 밖에는 없어.
 D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준일의 시계를 조심스레 손목에 찼다. 지도를 꺼내 길을 확인하며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은 과연 어디로 통해 있을까? 어떡해서든 살아남아. 살아남아서 꼭 기억해야 해.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해야 해.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어.

 

*

 

 식량이 떨어졌다. D는 마지막 남은 햄 통조림을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소녀는 D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 들여다보았다. D는 부쩍 야위어 있었다. 피곤함이 누적되어 다크서클이 번진 눈가는 퀭했다. D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D는 지도를 꺼내 길을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들은 철원 시내에 거의 근접해가는 중이었다.
시내로 가는 길은 처참했다. 비닐하우스는 뼈대만 남은 채 앙상하게 서 있었고, 곳곳에 소나 닭 같은 주인을 잃은 가축들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바다괴물들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엔 문명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에 누군가가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D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대체 뭘 원했던 걸까요?”
 “……아마 우리의 종말이 아닐까.”
 D의 목소리는 가래가 섞여 걸걸했다. 심한 감기에 걸린 탓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소녀는 D를 돌아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소녀는 감정이 풍부했다. D는 소녀가 무지개 같다고 생각해본다. 온통 검은색과 흰색뿐인 무채색 세상에 선뜻 나타난, 약간 그을리긴 했지만 그래도 선명한 무지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단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어떻게 이런 짓을…….”
 “…….”
 D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라도 오려나. 구름이 잔뜩 끼어 해를 가리고 있었다. D와 소녀는 쉬지 않고 걸었다. 정오가 되었을 즈음 그들은 철원 시내를 지나고 있었다. 말이 시내였지만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악취를 내뿜는 시체들과 나뒹구는 조각난 간판들이 전부다. D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입 안이 모래라도 낀 듯 텁텁했다. 
 소녀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아스팔트 바닥을 헤집었다. 흙투성이의 곰 인형이었다. 한쪽 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었다. D는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죽, 늘 곰 인형을 가지고 싶었어요.”
 “…….”
 소녀는 인형을 다시 원래 있던 폐허 속에 두고 D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바빴어요. 늘 밤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죠. 엄마의 손은 항상 부르터 있었어요.”
 “…….”
 “그 손을 보면, 차마 사달라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어요.”
 “…….”
 “엄마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엄마는 착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천사가 되었을지도 몰라. 티 하나 없는 하얀 옷을 입고 황금으로 된 나팔을 불고 있을지도 몰라.”
 소녀의 얼굴엔 희미한, 부서질 듯 투명하고 여린 미소가 떠올랐다. D는 소녀에게 다가가 소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래.”
 소녀의 어깨가 조금씩 떨렸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송이가 탐스러운 함박눈이었다. D와 소녀는 군청 앞에 서서 아니, 군청이 있던 자리에 서서 할 말을 잊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D는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틀림없었다. 이곳이 바로 군청이다. D와 소녀의 앞에는 구덩이가, 엄청나게 큰 구덩이가 있었다.
 소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D는 무심한 눈길로 온통 잿빛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송이 두 송이. 눈의 꽃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는 그와 소녀 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모두 죽은 것이다. 무책임한 사람들. D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탈한 마음에 실소가 새어나왔다. 소녀는 D를 응시했다.
 “야, 눈이다.”
 소녀는 짐짓 들으라는 듯이 밝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름다워요.”
 “…….”
 D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으면 아무리 조심해도 언젠가는 꼬리가 잡힐게 분명했다.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다시피 했다. D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죠?”
 소녀의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D는 소녀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 땅거미가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에는 오로지 황량한 폐허만이, 어디를 둘러봐도 정붙일 곳 없는 그런 차가운 풍경만이 펼쳐져 있었다. 일단은 이 주위에 숨을 곳을 찾아봐야겠지. 그리고 날이 밝으면…….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D는 싱긋 웃었다.
 “땅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곳. 사람도 녀석들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자.” “…….”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을 거야. 하늘 아래 오직 우리 둘 뿐이겠지. 천국도 지옥도 아니야.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이것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하나 둘 셋. 종말의 밤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응답 바란다, 본부.
 “힘든 여정이 될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도착할 테니 한 번만 더 노력해 보자.”
 D는 유쾌한 기분이었다. 크게 하하 웃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까. 희망은 언제나 아무것도 없는 공백에서 싹을 틔운다. 언젠가는 쓰러지겠지만 지금은 아냐. D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네, 지금 출발해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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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2.02.22 04:49

    현재와 과거, 또 현재... 회상과 현실이 왔다갔다 하는 군요.

    과연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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