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1 02:43

[단편] 어떤 대화

조회 수 353 추천 수 2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나는 나약한 일면도 있어서 쉽게 몸을 웅크리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물론 그에 대해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마음은 갈가리 찢기는 편이다. 겉모습은 무뚝뚝하여 누군가가 내려치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 충격은 내면에 그대로 쌓인다. 그 충격이 쌓이고 쌓이다가 심한 우울을 겪곤 한다. 계속되는 좌절에 우울해지곤 하는 나를, 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한다.

 "괜찮아.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야. 처음엔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세상에 유일한 특별한 사람이야.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큰 무언가가 있어. 그게 내 가슴에 여기 여기에 내 여기에 꼭 맞는 사람이야. 그러니 혼자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하지 마요. 응? 내가 여기 있잖아? 당신도 내가 옆에 있어서 좋다고 했잖아? 내가 옆에 있으니 일어나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어떤 상처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요렇게 요렇게 치유해줄게. 그러니 내 곁에 있어줘요." 

 작은 손으로 내 가슴을 어루만지는 수. 나는 응? 응? 거리는 수의 얼굴을 보다가 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이따금 어떤 불안감에 휩싸여."

 "어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

 "그럼 어떤 걸 가졌는지 말해 볼래요?"

 "밥 먹고, 책 읽고, 영화보고, 생각하고, 사랑받고, 또 사랑을 주고. 남들만큼 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

 한 마디 해두자면, 나는 내가 떠받치지 않으면 건물이 무너져버릴 거라고 걱정하는 부류의 술주정뱅이와는 다르다. 물론 과민반응이라는 건 인정해. 아마 남들보다 생각이 많기 때문이겠지만.

 "남들보다 살지 못하다니요? 당신이 어째서?"

 "아니, 아니, 뭐 갑자기 어떤 사고가 일어나서 예를 들어 이번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 때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잖아."

 "그렇죠."

 "나도 그런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잘 이해가 안 가."

 "음, 그러니까 어떤 거대한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예를 들어 교통사고나 사업이 망한다거나 흉측한 병에 걸린다거나 전쟁이나 그런 일이 일어나서, 아니면 노력했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 주위 모두가 떠나고 내 옆에 혼자 있게 되는 거지. 모두가 날 떠나고 혼자 남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

 "잠깐만, 이해 좀 해 볼게요."

 "그래."

  나는 가만히 있다가 생각이 난 듯 유자차를 끓였다. 달콤한 유자차가 먹고 싶었다. 말이 없어진 수. 나는 Wild world 라는 노래를 틀었다. 수는 내방의 매트리스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올린 수의 모습은 마치 고민이라는 새끼를 품은 고양이 같았다. 수의 얇은 종아리를 보면서 나는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유자차를 내어 오자 수는 차를 식기를 기다리다가 유자차를 홀짝거렸다. 그러다 내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참 다정한 남자야."

 "응?"

 "그래요. 갑자기 모든 걸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어떤 안 좋은 모습일 때, 남들보다 못한 모습에 대한 비웃음에 대한 불안감."

 "응. 뭐,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나 스스로 노력도 안 하는 것 같고, 그게 좀 불안하고 그래서 그 끝 없는 불안감 속에 사람들이 내가 남들보다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남이 비웃는 것도 참 싫고."

 "충분히 노력하는데…."

 "나 노력하나?"

 "응. 재밌어. 재밌게 노력해."

 "재미?"

 "아, 네. 네. 음 이렇게 우리의 대화도 기록하고."

 "아, 뭐…. 무언가 남기고 싶다는 버릇이야."

 "하하, 그러니까."

  수가 웃으면서 키스를 해 주었다. 그녀의 입에서 유자향이 났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로 나의 자그마한 자부심을 키워주는 데 아주 능숙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녀 스스로는 그런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신이 별다른 자각도 없이 내게 건네준 말들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완전하게 이해는 못 하겠어. 왜 그런 불안감을 가지는 건지. 그냥 일단 지금 당신이 불안하고 고독하고 자신이 없어지고 그런 거로 생각해요. 그럼 하나 물어볼게.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말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내게 말한 사람이 있었어요. 누군지 알아요?"

 "모르겠는데."

  정말 몰랐다. 수가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당신이에요."

 "나?"

 "네. 정말 기억 못 하네. 음, 우리가 예전에 이야기했을 때, 좋아하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싫어할 거라고 했었어. 그냥 포기할까요 아니면 한번 시도해 볼까요? 하고 물어보니까 당신이 그렇게 말했죠."

 "내가 그랬었나…."

 "결과가 좋지 않아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도 했어요."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탕탕탕하는 커다란 빗방울 소리가 섞였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한없이 이어질 것처럼 들려왔다. 수가 가늘게 몸을 떨며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추워 보여서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면 파자마 너머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리고 내 인생인데 누가 뭐래? 하면서 남이 대신 살아 줄 것도 아니면서 라고 말했죠."

 "음…."

 "이렇게 생각해 봐요. 나는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져도, 어떤 모습을 보여도, 어떤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아. 왜 그렇게 말하느냐면, 당신은 그런 짓 안 할 사람이니까. 당신은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범죄는 저지르지 않을 거잖아요? 뭐,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또, 그렇다고 막 분별없게 행동하지도 않고. 길을 걷다가 역 근처에서 노점을 하는 할머니 두 사람이 자리싸움을 하면서 싸웠잖아. 당신은 그걸 보고 나서지는 않았어. 하지만, 가슴이 아프다고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고. 뭐랄까. 그 모습이 사건을 벌이고 그런 일에 휘말리지는 않지만, 또 매정한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

 "고마워."

 "자기는, 상처를 받아도 남한테 상처 줄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상처받기 싫어서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고. 그게 스스로 못난 탓이라고 여기고. 그러지는 마요. 당신 탓은 아니야. 그리고 잘 살 거야. 그리고 잘 살잖아?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은 어쩌라고. 내일 당장 먹을게 집도 없는 저기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혼나요. 혼나."

 수의 나무라는 듯한 소리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이토록 가슴이 먹먹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와 같은 나이대 사람의 위로는 뭔가 내가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들게 했다. 수가 내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며 물었다.

 "만약에 남들이 나를 비난하면 자긴 어떻게 할 거에요?"

 "뭐, 어떤 상황인데?"

 "음, 자기 앞에서 남들이 나를 비난하는 거야. 뭐 어쨌네 저쨌네 우습네 하면서 말이야."

  나는 깍지를 끼며 말했다.

 "제가 수의 남자친구인데 다시 말씀해 보실래요? 라고 하겠지."

 "그리고?"

 "어떤 비난인가 나도 한번 들어보자 그러겠지."

 "또?"

 "뭐, 음…. 음…. 일단은 당신이 뭐라든 내 눈에는 그 사람에 대한 질투로 보인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하지 말라고. 정말 내 여자친구가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정말 내게는 좋은 사람이라고. 당신이 본 그 모습이 내 여자친구 전부의 모습일 수는 없다고. 그 사람의 남자친구인, 내가 당신보다 내 여자친구를 모를까요 라고 물을 거야."

 "그리고요?"

 그러자 수는 지금껏 없었을 만큼 다정한 몸짓으로 자신의 조그만 머리를 내 가슴에 기댔다. 그것은 수많은 말을 하나로 응축한 몸짓이었다. 물론 '사랑'과 깊이 관련된 말이다.

 "뭐, 그래도 이리저리 말을 하면 남 비난할 시간에 당신이나 주위 사람들 칭찬을 하세요. 지금 재미로 남을 비난하는 거 같아요. 그 사람은 절대 당신보다 우스운 사람은 아니라고. 최소한 내게는 정말 큰 사람인데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나도 가끔 그래 왔었다. 그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는데, 싫다는 거 자체가 그만큼 의식하고 부러워한다는 말 아니냐. 뭐 그 사람이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사기나 그런 거면 잘못 한 건데 내게는 그러지 않았다고. 당신에게는 그랬냐? 뭐, 그러지 않을까."

 "좋아요. 좋아요. 그래서, 그래서?"

 "당신이 범죄는…. 안 저지를 거로 생각해. 법의 테두리 내에서 비난은 도덕적인 건데, 설사 네가 그런 도덕적인 잘못을 저질러도 내게는 더없이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의 모든 게 이렇다고 판단하지 말아 달라고 할 거야."

  수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면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해줄게. 더불어서 남들이 비난해도 난 당신이 좋으니까. 계속 좋아할게. 좋아?"

 "좋아!"

 "문제 해결?"

  나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활짝 웃었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다가 수의 긴 머리칼 뒤로 수의 하얀 목덜미를 보았다. 수의 몸에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난다. 나는 수의 향기를 좋아한다. 수가 내 곁에 머물러 따뜻함을 준다. 더 많은 따뜻함을 느끼려 수를 만지자 나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함을 느낀다. 더 많은 부드러움을 느끼려 수에게 입을 맞추자 가슴 떨림을 느낀다.


Storywriter의 말

아마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이 둘은 기묘한 이야기 - Repetition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맞습니다.
일종의 후일담 격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8:08

     애틋하달까, 포근포근한 얘기네요.

     저런 식으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이야기도 좋아해요. 잘 봤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60 드림of타운/완전판6 1 백수묵시록 2011.03.02 348 2
1159 은빛기사의 저널 #21. Tears of Undine 2 A. 미스릴 2011.03.02 399 2
1158 단군호녀 22화! 거스를 수 없는 비명下(悲命)『다시 원점으로..』 3 ♀미니♂ban 2011.03.02 440 2
1157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Fake End) 4 윤주[尹主] 2011.03.02 430 1
1156 던전 크롤(1) 3 백수묵시록 2011.03.02 789 4
1155 [현실은 2학년 될 예정일텐데...]별의 노래(은영 편 - 25. 프로젝트의 마무리) 2 클레어^^ 2011.03.01 347 2
1154 귀로(歸路) 2 악마성루갈백작 2011.03.01 341 1
1153 몽환의 숲 4 건망 2011.02.27 431 2
1152 [외전 모음집이라고 해야 하나?]별의 노래(외전 모음 - 고마워) 2 클레어^^ 2011.02.27 338 1
1151 은빛기사의 저널 #20. Ash to Ash 2 A. 미스릴 2011.02.25 383 1
1150 포켓몬스터R- 8 완결 1 다시 2011.02.24 704 1
1149 [관심 받고 싶어요 ㅠㅠ]별의 노래(진영 편 - 27. 이원준의 진심) 2 클레어^^ 2011.02.24 355 2
1148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4) 4 윤주[尹主] 2011.02.24 402 1
1147 단군호녀 21화! 거스를 수 없는 비명 中(悲命)..『인간이 되다.』 4 ♀미니♂ban 2011.02.22 499 1
1146 [잠시 토론이 있겠습니다.]별의 노래(세나 편 - 25. 임수현의 컴플렉스) 4 클레어^^ 2011.02.22 354 1
» [단편] 어떤 대화 1 악마성루갈백작 2011.02.21 353 2
1144 포켓몬스터R-7 1 다시 2011.02.20 412 1
1143 [몸이 좀 안 좋아요 ㅠㅠ]별의 노래(진영 편 - 26. 이상한 멜로디) 2 클레어^^ 2011.02.20 388 1
1142 다시 쓰는 고등학교 3학년의 추억 3 모에니즘 2011.02.18 425 3
1141 [제가 제 무덤을 팠나봐요 ㅠㅠ]별의 노래(세나 편 - 24. 오랜만의 남매 간의 재회) 2 클레어^^ 2011.02.18 349 1
Board Pagination Prev 1 ... 158 159 160 161 162 163 164 165 166 167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