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25 07:23

어느 겨울의 초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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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acoc.kr/index.php?mid=contents_fictionb&page=4&document_srl=594498

* 이 글은 허구입니다. 실제 인물, 단체, 지역, 국가 등 기타등등 실존하는 어떤 것과도 무관합니다. 

* 뱀 대가리에 지렁이 꼬랑지

* 비속어와 비행이 듬뿍 들어가 있습니다. 선량한 독자들은 백스페이스를 눌러 주세요.


#3

다음 날에도 하루 종일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시험기간이기는 해도, 어차피 일찍 가니까 자리 잡는 것까지는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문제는 자리선정이었다. 주황색 케이스에서 때에 전 귀마개를 꺼내자마자, 앞과 뒤쪽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기 시작하더니 열띤 토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나가서 살찌는 카라멜 마끼아또라도 쪽쪽 빨아가며 안 굴러가는 짱구에서 뭔가 짜낼 것이지, 만만한 게 열람실에 도서관이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야, 이렇게 해서는 교수님이 만점은 안 주실 것 같아.” 

“여기에다 필터 달아봐야 돈만 먹을 거 아냐. 이건 글렀어.” 

그쪽에 앉아 있는 놈들과 부단히 아이컨택트를 시도했지만, 소용 없었다. 

“에라이, 멍청아. 어차피 돈 내고 실제로 설계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얘도 참. 비싼 필터나 잔뜩 때려넣으라고. 검사장비도 비싼 걸로 쓰고.” 

“푸크힛~! 역시 오빠는 천재야!” 

귀마개를 껴도 들린다. 귀마개가 아니라, 아예 고막을 터뜨려도 들릴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놈들. 공모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런 녀석들 때문에 방해를 받을 수는 없었다. 도서관이 아니면 집중이 될 리도 없었고. 나는 일어나서 그들 쪽으로 갔다. 

“저기요.” 

“예?” 

그들이 레프리컨이나 예티라도 보는 눈길으로 쳐다봤다. 예는 무슨 예야, 멍청한 놈들. 

“좀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부터 계속 떠들고 계신데.” 

“진짜 웃기는 사람 다 보겠네. 도서관에서 과제도 못 해요? 아저씨는 과제도 안 해요?” 

“뭐...” 

“됐으니까 가서 볼일이나 보세요. 하, 참.”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지만, 쓸데없이 싸워봐야 좋을 것도 없으니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없는 옷 겹쳐 입은 상태로 펜을 잡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계속 떠들 뿐이었다. 물론 귀마개를 끼건 말건 계속 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그렇게 벌벌벌 떨면서 무의미하게 앉아 있는 동안, 녀석들은 껌도 씹고 못 먹은 머핀이랑 아메리카노도 먹고 배도 부르니 더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여자애 하나가 끝데껌 2개째를 입에 집어넣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걸 느꼈다. 

“씨발 좀 조용히 좀 하라고!” 

공책이 어느 새 손을 떠나 건너편 책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공책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일어났다. ‘나 운동합니다’라고 온몸으로 광고하는 녀석이었는데, 앉아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일어나니 나보다 머리 두 개가 더 컸다. 아차 싶었지만 너무 늦은지 오래였다. 놈은 바닥에 떨어진 노트를 집어서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미친놈이 아까부터 지랄이네. 뒤질래 새끼야?” 

나는 여전히 앉아 있는 채였다. 녀석의 깔아보는 눈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반쯤 감고 다니는 눈을 억지로 크게 떠서 정면으로 놈과 마주쳤다. 사시사철 가시질 않을 것 같은 땀냄새가 풍겼다. 

“그럼 도서관에서 씨발 하하호호거리는 건 잘하는 짓이냐?” 

내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멀리서 말하거나 선풍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지독하게 이질적이었다. 솔직히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기는 했는지, 이게 내가 말했다고 생각만 한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입가가 떨렸다. 뒤쪽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 어쩌라고 미친놈아. 도서관에서 과제하는 게 뭐가 나빠. 이야기로 하면 될 거 아냐. 억울하면 너도 떠들던가. 아니, 친구가 없어서 안 되나?” 

“씨발 내가 친구기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개새끼야! 그리고 아까 말한 건 못 들었냐? 네 귓구멍은 옹잇구멍이냐?” 

“뭐래, 병신. 이거 보면 알 수 있지.” 
녀석은 바닥에 패대기쳐져 있었던 노트를 집어들어, 한 차례 대충 넘겨봤다. 

“존나 이런 거 쓰는 새끼들은 다 패배자 새끼들이야. 복학만 하면 다냐? 나이만 많으면 다냐? 하여간 겉멋만 든 덕후새끼가 짜증나게. 나잇값이나 하라고, 병신아.” 

“미친놈아, 돌려줘!” 

손을 뻗었지만, 녀석은 간단히 나꿔챘다. 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이게...” 

“뭐 새끼야. 오늘 진짜 뒈져보고 싶냐?” 

“오빠, 그만해. 저런 아저씨 때문에 오빠만 나쁜 사람 되잖아.” 
아까 머핀 씹던 여자애가 말했다. 다음 끼에 먹으려고 입가에 비상식량까지 붙이고 있었다. 

“선배가 참아요. 이상한 애들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무술 하는 사람이 남 때려봐야 무슨 소릴 듣겠어요. 아저씨, 부끄러운 줄 알아요.” 
온통 울긋불긋한 어린놈이었는데, 얼굴에 분화구라도 생긴 줄 알았다. 

“하, 씨발. 너 앞으로 내 눈에 띄면 뒤질 줄 알아라.” 
녀석은 노트를 내 발치에 던지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가만히 노트를 주워서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무술 하는 친구’가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뭐 새끼야. 빨리 안 꺼져? 30초 뒤에도 그 자리에 있으면 넌 씨발 진짜로 뒤진다.” 

나는 허겁지겁 짐을 싸서 계단을 올라갔다. 걸어가는 도중에 가방 안에 들어있던 것이 계단에 쏟아졌다. 뒤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가에서 쉴 새 없이 뭔가가 계속 흘러내렸다. 곧 차게 식겠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도서관에서 나오고, 빈 강의실에 들어가 혼자 문을 닫고 앉아 책상에 엎드릴 때까지도 웃음소리와 속삭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병신 같은 놈.” 

“어휴, 나는 저런 아저씨랑 사귀느니 차라리 자살한다.” 

“히히, 얼굴 봤어? 질질 짜고 있더라고! 바보 같아!” 책상을 치자 강의실 안에 소리가 헛되이 울렸다. 

“우리가 우습게 보이지? 우리도 네가 우습게 보여.” 그만해. 

“방앗간 위에 뜬 음울하고 푸른 달은...” 제발 그만해. 

"어이, 조심해! 떨어지겠다!" 그만 좀 해. 제발...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살려줘... 

"이아! 슈브 니그라스! 천 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양! 찬양하라! 이아! 이아!" 제발 살려줘... 

하지만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공기가 찼다. 

#4 

그 동안에는 한 일주일 동안 도서관에 가질 못했다. 정확히는 시험이 끝날 때 까지였다. 어차피 시험 끝나고는 들어오지도 않을 놈들인 게 뻔했으니까. 봄은 오다가 얼어 죽었는지, 4월 중순인데도 조금만 밖깥에 나가 있다 들어오면 발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여하간, 오랜만에 도서관 자리에 앉아 노트를 폈다. 이제 노트의 내용은 '죄다 죽이고 죽었다'로 바뀌어 있었다. 한 페이지도 못 쓰긴 했지만 이 정도면 양호했다. 최소한 글변비는 나은 셈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60개의 계단을 내려가 자리에 앉아 있었더니, 이번에도 성가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도서관은 한가하기 짝이 없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돌아보니 카운터에서 근로장학생들이 떠들고 있었다. 성질이 뻗쳤다. 

"자연과학실 실장님 진짜 최악이라니깐. 저번 회식 때 끝끝내 돈 없다고 버텼는데, 누가 떡이 된 실장님 택시태워서 집에 보낼 때 지갑에 보니까 만원짜리만 10mm 두께로 들어있었대." 

"어휴, 하여간 나잇살 먹은 어른들이. 자기네는 돈도 벌면서 왜 그러나 몰라." 

"그것보다 오늘 점심 뭔지 알아?" 

"모르긴 해도 뻘겋게 볶은 고기를 밥 위에 얹거나, 상추랑 섞어서 비빔밥이라고 내놓을 건 확실하지 뭐." 

"깔깔, 얘도 참." 

가까이 가니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입도 안 뻥긋하고 그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정말 대단하군. 대단한 복화술이야. 내가 다가가자, 선반에 책을 꽂으며 오늘 먹을 점심에 후식은 뭐가 나올지-당연히 요구르트지 뭐긴 뭐야-토의하고 있던 근로장학생들이 이쪽을 돌아봤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텅 빈 요새에 온 걸 환영하네. 한 때는 위세등등했었지." 

“저기요, 죄송한데. 좀 조용히 해주실 수 없나요.” 근로장학생 중 하나가 참 희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른 친구와 눈을 마주쳤고,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무슨 소리세요? 저희는 그냥 조용히 업무만 보고 있었는데요.” 

“아니잖아요. 떠드는 소리가 귀마개를 끼고 있는데도 들리던데.” 

"어딘가 무지개 저 너머에..." 

몇 없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뭐, 네놈들은 못 들었다는 이야기냐. 지금도 들리잖아. 내가 그들을 억울하다는 것처럼 쳐다보자, 그들이 시선을 슬슬 피했다. 진짜 못 들은 건가? 머릿가죽이 정수리를 중심으로 쪼그라들어 당기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두통이 맥박을 따라 꿈틀거렸다. 타이레놀도 없는데. 이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는 방식에는 뭔가 불쾌한 면이 있었다.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눈빛. 정말 지나가다가 불한당에게 뺨이라도 맞은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내가 헛것이라도 들었다는 거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죄송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네요." 

"아니에요. 수고하세요." 

나는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따라 쫓는 것 같았다. 속삭이는 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부터, 언제나의 그 빌어먹을 냉기가 파고들었다. 머리 안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상태였다. 

'놓아주지 않겠어어어어...' 

열 두시간 뒤, 끊임없이 속삭임과 냉기에 시달리며 나는 도서관을 나섰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다 내 행색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날 보고 웃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속삭임은 자리에 누워 잠들 때까지도, 잠든 다음에도 펄떡펄떡 뛰는 편두통처럼 나를 괴롭혔다. 

#5 

오늘도 어김없이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전에 봤던 땀내나는 멍청이를 본 것 같았지만, 녀석은 내게 신경도 쓰질 않았다. 누군가가 분명히 '난방비를 아낄 수 있으니까 전역하고 나면 깔깔이는 챙겨 와라'고 말했지만, 나라면 '어차피 있건 없건 추운 건 마찬가지니까 안 가져와도 상관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랬다. 나는 이불을 둘둘 말아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꼬라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올리브빛의 그것도 껴입고 있었다. 여전히 커서는 깜빡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퇴고가 도저히 끝나질 않았다. 완전히 막혀 있었다. 어떻게 해도 만족할 만한 결말이 전혀 나오질 않았다. 주인공이 전기톱으로 사채업자들을 갈아버린다. 주인공이 자전거 체인으로 김사장을 후려치고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으로 몸을 던진다. 주인공이... 하지만 어느 것도 잘못 만든 열쇠처럼 도대체가 들어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부자연스러웠다. 

내일이 공모전 마감일이었다. 괜히 작년 수상작을 보고 나니까 더 집중이 되질 않았다. 발이 너무 시렸다. 아니다. 그 빌어 쳐먹을 년들만 없으면 글이 더 잘 써질 것이다. 뭔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속삭여서 방해하는 개 같은 년들. 뭐? 오늘 점심은 뭘 먹고 싶냐고? 지옥에서 아버지랑 같이 1000원짜리 라면이나 먹어라, 돼지 같은 년아. 손이 너무 시리다. 너무 곱아 타자치기도 어렵다. 잘 모르는 게 있으면 여기서 의논하지 말고 나가서 떠들지 그러냐. 레펠은 건물에서 타지 말고 산에 가서 타란 말야! 찢어지는 목소리로 Don’t Look in anger 치면서 노래 부르지 말라고. 나보다도 더 못 치는 주제에. 나는 기타도 안 치는데. 분명히 방이었는데도,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는데도,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목도 안 마르고 입도 안 아픈지 끝도 없이 속삭였다. 내가 왜 집에서까지 방해를 받아야 하지? 내가 왜 너 같은 놈년들 때문에 귓속까지 상해가면서 때 낀 이어플러그 따위를 껴야 하지? 왜 듣고 싶지도 않은 노래를 들어야 하지? 장도리로 이빨을 하나씩... 그르흐그으으그ㅡ르... 이아! 이아! 그래, 개새끼들.... 하하! 하하하하하! 이제 내가 혼자 있는데도 방해한다 이거지... 크르으그그그...파탄...흥그르느아... 므글으나프.....딱정벌레.....! 시끄러워! 자비로운망각의신이여. 내가만약에총이있었다면. 그그그극...히히! 기기기히히! 히히히히! 라우다레 마그니 이골로냑! 이아! 이아! 

"좀 닥치라고!" 

나는 키보드를 쾅 쳤고, 곧 그걸 후회했다. 자판 몇 개가 주먹 밑부분에 붙어 있다가, 바닥에 권투선수 강냉이처럼 떨어졌다. 나는 허겁지겁 그걸 주워 끼우려고 했지만, 어디가 망가졌는지 몰라도 키는 전혀 자리에 붙어 있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울면서 키보드를 집어 던졌고, 침대에 부딪친 키보드에서 더 많은 글자판이 떨어져 나왔다. 바닥에 자판들이 뒹굴었다. 자갈 위를 걷는 것처럼, 거슬리는 자그락자그락 소리가 났다. 한참을 주저앉은 채로 가만히 있다가, 분명 저걸 내버려 두면 내일 밟고 발바닥 어딘가가 찢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치우기 위해 가까이 갔다가, 나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자판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ㅈ이… 원래 2개가 있었나? 

ㅈㅗㅣㄷㅏㅈㅜㄱㅇㅕ 

눈을 한번 비볐다. 

죄다 죽여. 

다시 한번 비볐다. 

Massacre 

나는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로, 꼴사납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바닥에서 자판들이 제멋대로 떨리고, 잘게 부숴지고, 그 상태에서 녹아 내렸다. 어디선가 매캐한 비닐 타는 냄새가 풍겼다. 자판이 녹아서 변한 시커먼 곤죽이 내 쪽으로 ‘기어왔다’. 그 뒤로 장판에 시꺼먼 흔적이 파였다. 아마 비닐 냄새는 장판 탄 냄새가 분명할 것이다. 나는 일어나서 뒤로 돌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문을 헛되이, 문고리를 앞뒤로 흔들었지만 거부하는 철컥철컥 소리만 날 뿐,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발 뒤쪽에 한기가 느껴졌다. 밑을 보자 소름 끼치게도 시꺼먼 곤죽이 다리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떼어보려고 바닥에 굴렀지만, 그것은 더 넓고 쉽게 퍼졌을 뿐 꾸준히 내 목까지 치고 올라왔다. 분명히 닿는 감촉은 뜨거웠고 온 몸에 수포가 올라오고 탄 자국이 생겼을 텐데도 추웠다. 몸의 감각이 점점 없어졌다. 곤죽이 입으로, 코로, 눈으로 밀고 들어오는 고통 속에서 나는 그대로 혼절했다. 

일어나자 제일 먼저 느낀 건 뻣뻣하게 굳은 목의 강렬한 통증이었고, 그 다음은 뺨에 와닿는 싸구려 합판의 차가운 촉감이었다. 꺼진 채로 있던 화면은 내가 일어나서 마우스를 건드리자 깜빡이는 눈으로 다시 노려봤다. 목을 꺾어 돌리며 뒤를 보자, 바닥에는 키가 빠진 키보드가 널브러져 있었다. 가서 살펴보니 역시 바닥에건 키보드에건 ㅈ은 하나밖에 없었고, 멀쩡한 그냥 키보드 자판이었다. 당연히 녹아있지도 않았다. 한참 동안 그걸 쳐다보고 있다가 시계를 보자 짧은 바늘이 6과 7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고, 날이 밝아도 여전히 어두울 것이었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제야 오늘 마감이었던 게 기억났다. 결국 시간은 죄다 빼앗긴 것이다. 이제 전부 끝났다. 집에는 큰소리 치고 뛰어나온 주제에 이렇게 패배자로 생을 마감하게 됬다. 다 그 년들 때문이다. 집 주인 때문이다. 내 재능을 알아주지 않은 개새끼들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제정신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이거 모르겠는데 가르쳐 줘.’ ‘쟤 완전 웃기게 생기지 않았냐? 분명 태어나서 지금부터 여자친구라고는 사귀어 본 적도 없을 거야.’ ‘옷도 차라리 마네킹이 더 잘 입을 것 같고. 꺄하하, 마네킹이 뭐야? 쟤는 소나무나 허수아비가 더 어울릴걸.’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급하게 대충 오타와 결말만 마무리 지은 원고-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비쥬얼 키보드라는 것도 처음 써 봤다-를 인쇄해서, 클립으로 끼운 다음 하얀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저번에 못 박는데 썼던 망치를 천에 잘 싸서 가방에 넣고, 봉투를 오른손에 들고 집을 나섰다. 가는 도중에 봉투는 기다렸다가 학교 우체국에서 빠른 등기로 부쳤다. 전화번호는 적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리도 없으니까. 


#6

9시 뉴스입니다...전국에 내린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는 등 각종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오늘 정오, 서울 모 대학에서 묻지마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인 김 모(28)씨는 범행 직후 4층 높이에서 투신해 현재까지 중태 상태이며... 이 사건으로 4명이 사망, 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경찰은 정확한 범행과정과 공범 여부, 동기 파악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아, 방금 들어온 속보에 따르면... 

"하 진짜. 이번에는 왜 이리도 쓸 만한 글이 하나도 없지. 다 겉멋들만 잔뜩 들어서 말야. 거기다 스테이플러로 쾅쾅 찍어서 던져주면 좋아할 줄 아는가 보네. 하여간 요즘 애들은 기본이 안 되어 있다니까, 기본이. 이것 봐. ‘겨울의 학교 도서관은 언제나 추웠다’... 중략, 중략, 중략, 중략. 누가 남의 시덥잖은 개인사에 관심이라도 있을 것 같나. 에잉." 

편집장은 보고 있던 원고를 옆에 던져버렸다. 편집장의 책상 위에는 몇 페이지만 보고 던져버린 원고들과 꽁초가 들어간 종이컵, 마시고 버린 커피 캔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분명히 높이 쌓여 있었을 원고들은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오른쪽 한 켠에 작게 두세 개인가의 원고만이 깔끔하게 정리된 채로 놓여 있었다. 편집장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다다라 있었는데, 그는 조금만 더 읽어봐도 다 쓰레기라면 나머지는 그냥 선풍기로 날려 보내고 되는 대로 점수를 매길 생각이었다. 김 기자 역시 편집장의 작업을 돕고 있었는데, 원고들을 세절기에 넣어서 갈아버리지 못해 근질근질한 표정이었다. 김기자는 바닥의 흰 등기 봉투를 집었다. 그런 뒤 입구를 북 찢어 던졌다. 

"편집장님, 이거 보셨어요? 그래도 이건 클립으로 묶어놨네요." 

김 기자가 봉투를 건넸다. 편집장은 그걸 말하고 걸어 다니는 고양이라도 되는 양 지긋이 쳐다봤다. 

"클립으로 찝었다고 제대로 된 글일 리는 없지만. 일단 줘봐." 

편집장은 흰 봉투에서 두툼한 원고를 꺼냈다. 라디오는 계속해서 아이돌 가수의 최신곡과 광고, 뉴스를 토해냈다. 

"어때요?" 

"아, 좀 기다려 봐. 내가 무슨 속독학원 선생도 아니고." 

읽는 동안 편집장의 얼굴은 갓 꺼낸 빨래처럼 꾸깃해졌다가, 애써 웃음을 참았다가-입 밖으로 웃음이 쿡쿡 새어나왔다.- , 시퍼렇게 질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김기자는 그 모습을 몹시 흥미롭게 관찰했다. 

"어때요?" 

"어, 음, 그게 말야. 이 친구 전화번호 없나? 찢어버린 봉투 조각에 적혀있었던 거 아냐?" 

"주소만 적혀 있던데요. 전화번호도 없고, 이름도 없어요." 

"아이고, 맙소사. 주소 찾아가서 한번 뭐 하는 사람인지 물어봐. 인적사항이 아무것도 안 밝혀진 인물을 대상 자리에 올려놓을 수는 없잖아." 

"편집장님답지 않은 칭찬이네요. 제가 입상했을 때는 촌평으로 '이런 가망 없는 쓰레기는 자근자근 밟아서 다시는 출품도 못 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으면서." 

"내가 언제 그랬어, 인마! 아무튼 내일 가서 알아봐. " 

"예, 알겠슴다." 

김 기자는 편집장이 던지는 종이컵을 피하고,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었다. 거리에서는 눈이 가로등 불빛을 따라, 바람에 실려 어지럽게 춤췄다. 바람이 좁은 골목을 휩쓸고 나가며 비명소리인지 한숨소리인지를 냈다. 겨울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늘은 눈 오는 날이면 으레 그렇듯 팥고물을 뭉갠 것 같은 빛깔이었다. 

==

영감을 준 것들/쓰면서 들은 음악들 : 

‘냉기’, H.P 러브크래프트 

‘해리와 몬스터’, 이상윤 

捌보채 선생님 

도서관에서 하찮은 예의범절에 얽메이지 않고 즐거운 담소를 나누시는 모든 분들 

http://www.youtube.com/watch?v=wN8axjt0dwI 

‘Right to go Insane', Megadeth 

http://www.youtube.com/watch?v=B53JMOCBBiw 

'Sweating Bullets', Megad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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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시 2012.06.25 07:31
    1등
  • profile
    yarsas 2012.06.25 09:28
    음울함과 음침함을 노리신거라면 의도에 맞는 멋진 글이라 생각합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06.25 16:02
    음울한 것도 음울한 거지만 꿈이 있는 글이네요. 감상적인 글이기도 하고요.
    재밌게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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