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18 23:05

당신에게 보내는 유서

조회 수 483 추천 수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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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다-.


창우는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봤다.


그랬다. 붉었다. 작고 음습한 주방의 가운데에 드러누운 여자의 주위로, 번져나온 액체는 붉고 진득거렸다. 녹슨 쇠붙이 냄새가 났다. 창우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째서인지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반응 없는 눈물샘을 손으로 꾹꾹 눌러보며 그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짚어보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니었다. 이런저런 집안 사정 때문에 본래 살던 집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헌데 마침 아는 선배가 같은 동에 살아서 인사도 할 겸 슬쩍 같이 놀기도 할 겸 겸사겸사 와본 것이었다. 벨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별 생각 없이 문고리를 잡아보았고, 문은 열려있었고, 그래서 선배의 이름을 부르며 몇 걸음 집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


섭섭해 할 거 없어요.



솔직히 속내를 조금 더 털어놓자면.
많이 아쉬워요.



난 당신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마음속 가득 담은 원망과 한과 서운함과 서러움과 괴로움을 떠안겨 돌려보내기 위해서.
좀 더 완벽하게 뒤통수 치지 못한 자신의 치밀함이 아쉽네요.



내 안에서 당신이 있을 자리는 없어져 버린지 오래되었어요.
당신이 내게 한 행동들이 그러했고,
당신이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알았기에
콩깍지가 벗겨진 것뿐이었죠.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착각이란 걸 난 너무 늦게 알았네요.
아쉽다거나 서럽다거나 하지 않아요.
그러나 좀 더 잘 숨겼으면 했어요.



난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거짓말을 했을까요?
당신은 얼마만큼 눈치채고 얼마만큼 알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난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아나요?
그리고 당신의 눈곱만큼도 없는 노력에 얼마나 속 깊이 비웃었는지 아나요?



그런 당신에게 목매는 사람 몇몇을 알아요. 아니, 어쩌면 더 많을 테죠.
그런데 난 그런 싸구려 동정에 평생 당신에게 매여 있을 만큼 멍청하지도 약하지도 않아요.
당신에게 난 아까우니까.



당신이 내 애인일 때는 당신이 아깝단 생각을 진심으로 했어요.
그렇지만, 당신의 관리 대상자 중 하나라면 내가 아깝네요.
그 끈이라는 거 잡고 있었건 말건 내겐 아무 해당 사항이 없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고마워요. 내가 모르던 너무 많은 즐거움을 알려준 것에 대해선.
단지 그것뿐이네요. 당신과의 추억도 당신과의 기억도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니까.
내 변화가 당신의 죄책감을 덜어주게 되는 일이 생기질 않길 원해서 여태 숨겨왔어요.



거짓말이라는 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요는 상대에게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일이니까요.



난 당신에게 아주 간단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었어요.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라는. 그리고 "내뱉은 말은 지킨다."라는.
그 때문에 당신은 내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했고, 반응해 주었죠.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당신은 집에서 곱게 자라서 그런지 거짓말이 서투르더군요.
난 당신을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 단 한 번도 당신을 온전히 믿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은 걸릴 게 뻔한 거짓말을 질이 아니라 양으로 경쟁했고.
난 거기에 속아 넘어갈 때마다 당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죠.



쇼크였겠죠. 내가 당신 외의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남자와 잤다고까지 하니까요.
당신은 몇 달씩이나 나 몰래 다른 여자와 만나 왔고, 그 여자와 뒹굴면서 날 태연히 만났고.
내게 두 번씩이나 같은 상대에게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였지만,
그 와중에도 당신은 내가 그저 목매달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당신이 들으면 화를 낼만한 거짓말, 사실 그간 많이 했어요.
진작 당신이 지금 느낀 그 허탈감을 느낄 거짓말도 수없이 많았죠.
시작한 순간부터 끝까지.



지금에 와선 미안한 말이지만, 난 당신에게 진심이 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응. 사부가 말했던 것처럼 내 남성편력의 일환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진심이 된 이후에 난 전력을 다해서 쟁취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거 알아요?
당신과 지낸 그 시간, 그 즐겁고 달콤함 속에서
난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당신을 재어보고 있었고.



당신에게는 웃는 낯으로 당신이 최고라고 말했던 수많은 것 중 상당수는
내 입과 마음의 생각이 달랐다는 걸?
난 감정과 머리가 따로 돌아가는 사람이니까요.



당신 때문에 속상해하며 당신에게 숨 막히게 울음을 토해내며 전화하면서도,
내일 있을 파티를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날 더 신경 쓰게 만들까를 고심하면서도,
다른 힘들다는 남자애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기도 했죠.



내 이런 모습 일부를 들킨 건 내 실수겠죠. 응, 인정해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그러지게 된 건 당신이 시작이에요. 당신이 이걸 부정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그 끝없는 욕심이. 천박한 애정욕이, 과시욕과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
그저 아무 여자에게나 휙휙 던져대는 싸구려 같은 웃음이 이 모든 걸 잡쳐놓았으니까.



난 얼마든지, 얼마든지 당신이 바라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어요.
적당한 거짓말과 적당히 달콤한 언변과 그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을 책임지는 행동들로.
어느 한순간도 난 내가 내뱉은 말에 책임을 게을리 해보진 않았어요.
그게 아무리 거짓말이어도 난 항상 사실로 만들었어요.



우린 행복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내 노력으로.
난 그저 당신으로.



아마 당신은 불가능했겠지만.
난 그저 당신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었어요. 응, 평생.



하지만, 당신 때문에 괴롭고 힘들었던 것도 사실.
물론 내 울음의 얼마만큼이 진실이었나 당신은 알게 되면 어이없어 하겠죠.



그래요, 오해는 어디에도 없었죠.
당신은 그저 그런 사람이었고.
난 이따위인 사기꾼이었으니까요.



당신에게 말했던 수많은 약속 지키지 않을 거에요. 서운해하진 않겠죠?
우리 사이에 약속이란 단어만큼 의미가 퇴색한 단어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참 달콤했어요. 그 시간은 참 즐거웠어요.
돌려준다고 하면 거절할 달콤함이지만.



가장 강렬하고 맹렬하게 사랑했고
가장 후련하게 헤어지네요.



그럼 잘 있어요. 이 글을 당신이 읽고 있을 쯤엔 난 이미 죽은 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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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smilerecan119 2011.03.18 23:39

    아...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친구들 만나서 남편 뒷담화나 하시던지요.

    창우 선배는 죽어도 귀찮은 존재가 사라졌다고 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선배의 형수님의 부모님과 친지 분들이 불쌍하네요.

  • profile
    smilerecan119 2011.03.18 23:40

    으윽.. 그나저나 웃음소리가 상당히 무서운데요.

    붉고 진든한 쇠붙이 냄새 여인이 노려보는게 상상이 되요 ㅠㅠ

  • profile
    클레어^^ 2011.03.19 05:22

    헉, 이건 '사랑과 전쟁'에 나올 만한 스토리 아닙니까?(거기서는 살아서 법정에서 있겠지만...)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다고 하더니만...;;

  • profile
    윤주[尹主] 2011.03.19 07:56

    와...정말 소름 쫙 끼치는 얘기네요;;


    그와 동시에, 여자가 좀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인상깊은 말도 있었구요. '우린 행복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내 노력으로, 난 그저 당신으로' 이게 어렵더라고요. 남의 기억에 남을 만한 구절을 만드는 게.


     그래서 멋진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럽네요^^ 잘 보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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