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23 10:03

괴물과 자취생과 옷장

조회 수 447 추천 수 1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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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실제 인물, 단체, 아무튼 어떤 것과도 관계 없는 완전한 허구입니다.


  나는 키보드를 잠시 내려놓고 침대 쪽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뻑뻑한 눈으로 바라본 밤하늘은 눈이라도 오려는지 말라붙은 피얼룩같은 빛깔이었고,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봐 왔던 풍경이 기괴한 실루엣을 보여줬다. 아까 마신 6캔 째의 핫식스와, 5시간 째 같은 대목에서 헤매고 있는 내 글러먹은 정신머리가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했다. 그 뒤로도 나는 계속 의미 없이 키보드를 쳤다가, 지웠다가, 재미는 있지만 지금 하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는 사이트를 들어갔다가, 시계를 보고서 이미 3시에 가까운 걸 보고 자러 가기로 했다. 언제나 수요일은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어나도 쉬는 날이 오려면 이틀은 버텨야 하니까. 거기다 내일은 오전 아르바이트까지 있었다.


  늘 그렇듯 나는 발만 대충 씻고 나서 자리에 누웠다.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리에 누우니 바로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 단칸짜리 방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늘 저 옷장은 마음에 걸렸다. 분명히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붙박이 옷장-겉보기도 그렇고, 실제로 열어봐도 지금 입었다간 얼어 죽을 게 분명한 여름옷들, 호모 같은데다 입으면 영 좋지 않은 부위가 조여서 입지도 않는 스키니 진, 그 외의 옷들과 잡동사니들이 잔뜩 들어있을 뿐이었다―이건만, 내가 누우면 바로 저게 보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부기맨이나, 집주인이 없는 사이에 나와서 밥도 먹고 볼일도 해결한 다음, 계속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여자라던가. 굳이 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저주받은 저택의 문처럼 앞에 버티고 선 저 놈에게 내가 오래된 친구나 이런 것처럼 대해줄 이유는 없겠지. 말만 할 수 없었다 뿐이지, 놈은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안에서 털이 북슬북슬한 큰 팔을 꺼내 나를 나꿔채갈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핫식스 기운 때문인지, 다음달 방세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뻑뻑한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질 않았다. 그렇게 삼십분쯤을 누워 있었을까. 뭔가 무거운 것을 떨어뜨린 것 같은 쿵 소리 때문에 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 설마 누가 뛰어내렸나? 창틀에 팔까지 기대고 밑을 내려다 봤지만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확인하고 나니 갑자기 긴장이 탁 풀어져, 졸음이 몰려왔다. 그대로 일어서려는 순간, 다시 예의 쿵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튀어 올랐다가 후두부를 세게 들이받았고, 욕설을 뱉으며 뒤로 돌아섰다.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소리가 옷장 쪽에서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리의 주기는 점점 빨라졌다. 나는 벌벌 떨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부기맨인가. 내 방에서 어째 먹을거리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꾸 사라진다 했더니 이상한 놈이 옷장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건가. 전 시퀀스에서 총을 보여주면 다음 시퀀스에서는 쏴야 한다더니 진짜로 나타난 건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머릿속에서 레슬링을 하는 가운데, 쿵 소리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한 술 더 떠서 옷장이 마구 흔들리기까지 했다. 이제는 밑엣 집의 성격 더러운 외국인 노동자-며칠 전만 해도 타자소리가 시끄럽다고 올라와서 멱살을 잡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줄 알았다-는 안중 밖이었고, 그래도 뭔지 확인은 해봐야 했기 때문에 훈련소 앞에 선 까까머리 신병만큼 의욕적인 속도로 옷장의 여닫이문 홈에 손가락 4개를 걸었다. 잡고 있는 도중에도 계속 흔들리는 옷장의 문이 서서히 열렸고,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눈앞에는 라벤더 빛의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암청색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 모래에 반사된 달빛이 기괴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신기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 멀리에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을 궁전과 신전들의 슬픈 폐허, 그리고 수없는 사구와 둔덕만이 보였다.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앞으로 걸었고-멍청한 소리처럼 들리는 건 나도 안다-내복바람으로 들어온 내 발에 무언지 알 수도 없는 옅은 보랏빛의 모래가 가득 묻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어줍잖은 지식에 따르면 지독하게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래는 딱 적당할 정도로 식혀져 있어 사락사락 한 것이 기분 좋았다. 옷장의 문지방을 넘어와, 두 발을 디디고 서자 약한 바람이 모래를 함께 싣고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제서야 나는 방 안에 모래가 들어가면 나중에 몹시 귀찮겠다는 생각에 뒤를 봤다.

 내가 들어온 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절망적이거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외려 앞의 저 앞으로 가서 옛 도시를, 폐허를 보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빛은 모래에 부딪쳐 시시각각이 다른 빛으로 바뀌었고, 발 밑의 모래와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서 가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나는 폐허에 도착했다. 아마도 우리 인간과는 몸집도, 생긴 것도 달랐던 것이 분명한 어느 종족의 유적이 분명했다. 모래에 파묻히지 않은 거대한 폐허의 벽에는 인간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생물들의 생활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너무나도 생동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어, 처음에는 이들이 살아있는 줄 알고 도망갈 뻔했다. 아마 왕궁이나 그런 거창한 곳이었는지, 부조의 생물들은 인간 입장에서 봐도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금까지 부조에서 봤었던 생물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나타났다. 기다란 몸에 발은 없고, 온 몸에 입만 달린 그런 존재. 생물들은 그 괴물에게 쫓기고 쫓기다가, 멸망한 것 같았다. 흠, 과연 그렇군. 그래서 이렇게 사막의 모래에 파묻힌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도중, 나는 뒤에서 바람 소리나 모래가 쓸려가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질척질척한 것이 꼬리를 끄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나는 서서히 돌아봤다.

 뒤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아까 부조에서 봤던 괴물이 있었다. 놈은 창백한 뱀 같은 몸을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놈은 끔찍하게도 몸에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들이차 있는 입이 온통 벌어져 있었고, 입만큼이나 많은 눈들과 온몸에서 계속해서 질척질척한 점액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뛰었고, 괴물이 몹시 느린 속도로 쫓아왔다. 영원히 도망갈 수는 없었고, 게다가 놈은 느리기는 했어도 지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놈의 몸에 달린 입이 여닫히며 나는 것 같은 사각사각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몇 번이나 튀어나온 돌부리나 엄한 곳이 푹 꺼진 사구 때문에 넘어질 뻔하며 나는 필사적으로 뭔가 놈에게서 숨을 만한 곳을 찾았다. 한참을 달린 곳에 찾은 것은 작은 우물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혔다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했다. 뒤를 돌아보니 놈은 느리긴 해도 꾸준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됐다. 이거면 잠시 동안은 놈은 따돌릴 수 있겠지. 우물은 나 하나도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막 우물 쪽으로 내려가려다, 나는 우물 안쪽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뭔가 악취나고 시커먼 액체라는 것을 알아챘다. 젠장, 겨우 찾아낸 피난처라는 게 이딴 곳이라니. 그 사이에도 괴물은 계속해서 이쪽으로, 점액의 긴 자취를 남기며 다가왔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느냐, 아니면 이 뭔지 알 수도 없는 역겨운 액체 속에서 빠져 죽느냐. 하지만 괴물이 구역질나는 뜨거운 숨을 토하며 이쪽으로 다가오자,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나는 우물으로 떨어졌다. 물로는 생각되지 않는 끈적끈적한 액체 속에서 끝도 없이 잠기는 그 느낌, 얼굴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뜨거운 기운에 비명을 지르다가, 나는 눈을 뜨고서는 어느 새 내가 방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밖은 이미 밝아 햇빛이 일수 받으러 온 불한당처럼 얼굴과 온 몸을 때리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일 시작한 지 일 주일도 안 됐는데 지각이라니, 맙소사. 아무튼 늦은 건 늦은 거고, 지금이라도 가야 했다.


 참 희한한 꿈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지금 출발해도 도착하면 열 시. 점장에게 갈굼 깨나 먹을 게 분명했다. 잔뜩 떡진 머리를 하고 양말을 신던 도중, 발바닥에 뭔가 먼지 같은 게 달라붙은 느낌이 나서 발바닥을 털었다. 나는 순간 모든 것을 멈추고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가만히 노려봤다.


보랏빛 모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

*(정말 아무래도 좋은)쓰는 중에 들은 음악

닥터 고딕, ‘왱알앵알’
Radiohead, 'Paranoid Android'

Radiohead, 'Street Spirit(Fade Out)'


*아마 '어느 겨울의 초상' 나머지 분량은 내일이나 모레쯤 올라올 것 같습니다. 그럼.

*11:45경 수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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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06.23 17:39
    잘 봤습니다~ 요즘 날이 좀 후덥지근하죠;
  • profile
    yarsas 2012.06.23 20:25
    멱살을 '잡는' 바람에 에 잡는이 빠져있군요. 나니아 연대기가 생각나는 군요.
  • profile
    Yes-Man 2012.06.24 0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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