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5 09:20

바하 (Baha) . 000

조회 수 326 추천 수 1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이그니스 신족의 왕위 쟁탈전을 시작한다! 」

 

 

 그 말 한 마디가 이 모든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시작이었다.

 

 

 “ 허억…. 허억…. 젠장, 정신나간 녀석들! ”

 “ 어이, 이거 왜 이러셔. 한때 바르헨 골목을 주름잡던 바하는 다 어디갔어? ”

 “ 허억…. 그 입 좀 닥치고 있어, 티케. 네 녀석한테 쫄아서 도망친 거 아니니까. ”

 “ 저 자식이…! 주제를 모르고 주둥아리를 놀려? 얘들아! ”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초대 염제(炎帝) 이그니스 이후 대대로 이그니스 신족의 왕위는 세습되어왔다. 여제(女帝)가 탄생할지언정 이전까지 이런 방식으로 왕위를 결정했던 적은 없었다.

 

 

 “ 너희같은 녀석들은 백번 천번을 덤벼도 나한텐 못이겨. ”

 “ 멍청한 새끼! 불을 다루는 이그니스 신족인 주제에 변변찮은 불꽃 하나 못 다루는 녀석이 뭐? 백번 천번? 오냐, 오늘 그 주둥아리를 백번 천번 다져주마! ”

 “ 티케, 네 녀석이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닐텐데! ”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면서 몸을 깊게 숙인 채 파고들어간다. 체구가 큰 거인족들이다. 대대로 이그니스 신족의 영토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해오던 종족. 그렇기 때문에 단 한번의 타격만으로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만큼 위력적인 일격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인족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속도 면에서 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애석한 것은 아직 성숙한 거인족 전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체구도 나의 1.5배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도 뭐, 3m에 달하는 키면 작은 건 아니다. 다만, '거인족임을 감안하면' 작다는 거지.

 

 

 “ 크윽…! ”

 

 

 거인족 똘마니 한 명이 배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선다. 티케 녀석의 눈에 증오가 이글거린다. 자기 손으로 나를 때려눕혀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둘로 갈라져도 티케 녀석에게만큼은 내가 질 것 같지 않거든.

 

 

 “ 나는 네 녀석이 어렸을 적부터 싫었다!! 아무것도 없는 네 놈이 바르헨 지역을 꽉 쥐고 있는 비스케 가문의 장남인 나를 깔본다는 점이 말이다!! ”

 “ 그래서 뭐? 설마하니 왕위 결정전에서도 네 녀석의 그 잘난 '출신성분'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이, 정신차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바르헨 지역은 이그니스 신족의 통치영역 중에서도 가장 서쪽. 협곡으로 둘러싸이고 바닷 바람에 의한 습기가 밀려들어오는 최악의 공간이라고. 이런 지역을 꽉 쥐고 있다는 건 대단한 권세가라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중앙 왕족들과의 다툼에서 밀려나 귀양온 거나 다름없다고! ”

 “ 닥쳐!! 이 애비없는 자식아! ”

 

 

 티케가 달려든다. 몇 마디 던져주면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저 멍청한 성격 덕분에 내가 이긴게 한 두번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 출신성분도 티케 녀석이 훨씬 좋고, 물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힘도 나보다 티케 녀석이 조금 더 강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정식으로, 흥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붙어 보았을 때에나 드러나는 것이다. 흥분한 상태에서는 모든 동작이 단조로워지고 커진다. 큰 피해를 줌으로써 상대방을 단숨에 제압하겠다는 욕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되려 공격이 명중할 확률은 낮아지고 피로는 더욱 많이 쌓이는 것이다.

 그 증거로 티케 녀석은 나를 향해 방금 주먹을 크게 두번 휘두른 것만으로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세번만 더 피한 후에 녀석을 쓰러트린다. 한 번, 밑에서부터 위로 크게 올리는 어퍼컷. 단조롭다. 일차학교에 다니는 애송이들도 차분히 대응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만한 공격이다.

 

 

 “ 이익!! 죽어라!! 바하!! ”

 “ 그리 흥분하면 못 쓰지, 후회할지도 모른다. 티케. ”

 

 

 두 번, 큰 호를 그리며 내지르는 주먹. 주먹을 바깥에서 안으로 찔러넣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자신의 사정거리를 되려 줄이는 셈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없는 범위에까지 힘을 쏟아넣은 결과다. 앞으로 한 번만 더!

 

 

 “ 으아아아아아아아!! ”

 

 

 예상치 못한 세번째 일격이었다. 주먹으로 들어오는 척 하더니, 발차기로 내 옆구리를 그대로 가격했다. 순식간에 밀려들어오는 묵직한 타격감. 입에 차오르는 짭짤한 맛은 '피'인가?

 

 

 “ 큽…. 티케, 너 이 새끼 정말! ”

 

 

 이제 세번째고 뭐고 필요없다. 그대로 다시 나를 향해 달려드는 다리를 잡아서,

 

 

 “ 크윽?! ”

 “ 멍청한 놈, 그러게 한 번 먹힌 발차기가 두 번 먹힐 거라고 생각하냐? ”

 

 

 꺾어버린…다?

 

 

 “ 머리를 내려쳐버려!! ”

 

 

 아차, 거인족 똘마니들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했…

 

 

-

 

 

 아버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바르헨 협곡에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바르헨 마을을 벗어나는 아머지의 모습이었다. 전장으로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초라하면서도 거대하게 느껴졌다. 홀로 전장에 보내진다는 것, 그것은 이그니스 신족에게 있어서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담담하게 검을 들고 나가셨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동족들에 대한 분노조차 내색하지 않고, 아버지는 그 검으로 용맹하게 적들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셨다.

 협곡 바깥은 미카론 화산의 입구이다. 그 곳에는 서쪽의 지배자인 테라 신족의 영향권이다. 아주 옛날에는 이그니스 신족의 땅이었지만, 테라 신족에 17대 왕 '아리디타스'가 취임하면서 남하해왔고, 그 때 빼앗긴 것이다. 미카론 화산은 미스릴과 금, 은, 아다만티움, 레어메탈 등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광석이 나는 자원의 요충지이다. 아버지는 미카론 화산 일대를 지키는 아벤투스 부대의 수장이셨지만,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셨고 그 죄로 인해서 사지로 내몰리신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보면 전사로서의 자긍심을 치유해줄 수 있었던 처벌이 아닌가 싶다. 나라는 개인,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가혹한 처벌이자 짐이었지만, 전사 '바론'의 입장에서본다면 나쁘지 않은 죽음이었을런지도.

 

 

-

 

 

 눈을 떠보니 낯선 광경이었다.

 

 

 “ 아오…. 머리야. ”

 “ 뭐야, 이거 완전 돌머리였잖아? ”

 

 

 어떤 건방진 년이 초면부터 실례되는 소릴.

 

 

 “ 거인족이 휘두른 둔기를 맞고도 멀쩡하게 일어나다니, 이거 돌머리도 기냥 돌머리가 아니네. ”

 

 

 라고 말하면서 내 머리통 두들기지 마라, 안 그래도 울린단 말이다. 그렇지만, 혹시 이 여자애가 날 살려준 건가? 붉은 머리카락에 주황색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안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 가녀리는 듯하게 보이는 체형이지만, 복장만큼은 모험가 복장이었다. 그러니까, 어디 귀족집 규수께서 모험가 코스프레한 것 같다는 소리다. 아무튼 얼굴이 나쁘지는 않으니 뭐라고 화는 안 내겠다.

 

 

 “ 야, 정신차렸으면 뭐라고 말 좀 해봐. 실어증이라도 걸렸냐? ”

 “ 네가…날 구해준 거냐? ”

 “ 아니, 미쳤니? 티케란 녀석이 너 죽은 줄 알고 길거리에 내버려둔 걸 내가 다른 녀석들이 챙기기 전에 재빨리 줏어들고 왔지. ”

 “ 이제보니, 너 시체매였냐. ”

 “ 에헷, 빙고. ”

 

 시체매라는 직업은 아주 특이한 직업이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손을 빌리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는 게 더 상식적이다. 시체매의 주 업무는 시체를 줏어다가 보관하는 일이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야, 전사들의 유가족에게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시체도 시체매들과의 거래를 통해서 구할 수 있었다. 시체매들끼리는 워낙 경쟁이 심해서 가끔씩 시체매들에게 시신의 행방을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직접 발품 팔거나 믿을만한 정보통을 통해서 시체매들이 수습한 시체에 대해서 암암리에 정보를 얻어야 한다. 약간 귀찮은 시스템이다. 나도 우리 아버지의 시체를 찾을 때 보관 기한이 다 끝나서 버려지기 직전에 찾아온 기억이 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시체매들이 버리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들 중 한 구를 모셔다가 그들의 가족의 시체를 대신하여 제사나 의식을 드리기도 한다. 시체매라는 직업은 우리 바르헨 지역의 어두운 면은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음침한 시체매라도 의뢰를 받고 직접 시체를 수습하러 다니기도 한다. 가끔씩 왕족이 전사하는 경우에도 활약한다. 특히 이그니스 신족은 대대로 왕이 군대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왕궁 직속 시체매가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그니스 신족의 왕족들이 모두 씨가 말랐다는 것이 일면 납득되기도 한다.

 

 

 “ 암튼, 내놔. ”

 “ 뭘? ”

 “ 돈 말이야, 돈. 시체매는 공짜로 일하는 줄 아니? ”

 “ 난 시체가 아니잖아! ”

 “ 산 사람 보관하는 데에는 돈 안 드는 줄 알아?! 아직 약품처리만 안 했지 사실 너 보관해놓으려고 비는 수납장 찾고 있었다? ”

 “ 애초에 생사람 관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거네!! ”

 “ 어휴, 그래 그러면 그냥 너 하룻밤 잠재워준 돈만 받자. 40페론[화폐단위 : 1페론 = 1000원]“

 

 

 뭐가 이렇게 비싸?!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신세진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내가 지금 돈이 없다는 거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골목에서 애들 협박해서 돈이나 뜯어내는 게 수입의 전부였으니까.

 

 

 “ 저기…. ”

 “ 응? 왜? ”

 “ 나 돈 없는데. ”

 “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하나?! ”

 

 

 퍼억,

 

 

 “ 잠깐만…. 사, 살려줘. ”

 “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운 게냐, 플레어. ”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안대를 찬 회색 머리의 사내가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차분한 코트, 정열적인 붉은 색과 자극적인 색들을 좋아하는 이그니스 신족답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안대에 가려서 한쪽만 보이는 깊은 눈동자는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 마스터! ”

 

 

 시체매 길드의 마스터였던가. 어쩐지. 그렇다면 저렇게 눅눅한 분위기인 것도 이해가 간다. 맨날 전장에서 피비린내 맡으면서 시체나 주우러다니다 보면 저절로 우울해질 것이다.

 

 

 “ 무슨 일이냐. ”

 “ 마스터, 죽은 줄 알고 끌고왔더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모잘라서 돈도 없대! ”

 

 

 뭐래는 거냐, 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모자른 건데?

 

 

 “ 흐음, 그래? ”

 

 

 사내의 눈이 번쩍인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인데?!

 

 

 “ 그럼, 몸으로 떼우는 수밖에. ”

 

 

 뭐라고?

 

 

 “ 아잉, 신참 교육하는 거 너무 귀찮은데…. ”

 

 

 잠깐만, 나보고 지금 냄새나는 시체들을 뒤지는 시체매를 하라는 거냐?! 어이, 농담이시겠지!

 

 

 “ 투정은 듣지 않겠다. 내일까지 기초적인 탐색마법은 쓸 수 있도록 만들어놓도록. ”

 

 

- 프롤로그 끝

?
  • profile
    윤주[尹主] 2012.05.05 19:39
    뭔가 대단한 전투가 벌어지나, 싶더니 갑자기 시체줍기라뇨 ㄷㄷ;
    잘 봤습니다. 재밌어 보이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3780 장미와 부랑자 2 Yes-Man 2012.05.07 481 1
3779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는 기술 6 산늘 2012.05.07 487 2
3778 구두 4 산늘 2012.05.07 389 1
3777 이그드라실! 12화 3 윤주[尹主] 2012.05.06 460 0
3776 화분편지 1 Yes-Man 2012.05.06 395 1
3775 이 시대의 비 2 Yes-Man 2012.05.06 383 1
3774 바하 (Baha) . 001 2 Longinus 2012.05.06 369 1
3773 섬에서 Adriftor 2012.05.06 420 1
3772 이그드라실! 11화 2 윤주[尹主] 2012.05.05 446 0
» 바하 (Baha) . 000 1 Longinus 2012.05.05 326 1
3770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보시는 게...]그래도 별은 빛난다 - 8. 충격적인 비밀(2) 2 클레어^^ 2012.05.05 327 1
3769 문제 발생! 갈등의 원인으로 본 이야기의 네 분류 1 윤주[尹主] 2012.05.05 448 1
3768 이그드라실! 10화 4 윤주[尹主] 2012.05.04 416 1
3767 생존자 5 file 드로덴 2012.05.04 322 1
3766 이그드라실! 9화 5 윤주[尹主] 2012.05.03 480 1
3765 피그말리온【#9】 1 ♀미니♂ban 2012.05.03 401 0
3764 노래방 도쿄도 락 시티-더빙-연습 kadin 2012.05.03 817 0
3763 [단편] 희망찬 여름 3 乾天HaNeuL 2012.05.02 344 1
3762 이그드라실! 8화 2 윤주[尹主] 2012.05.02 447 1
3761 지은이 못난이 2 다시 2012.05.02 392 1
Board Pagination Prev 1 ...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