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이라도 무릎이 꺼질 것 같다. 한 번 한 번의 호흡이 기관지를 찢어놓는 것만 같다. 난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살아 숨쉴 수 있을까.
“컥..헉..”
2층을 넘어 3층으로 올라왔다. ..썩을! 재수없게도 양 쪽 현관 모두 잠겨있었다.
‘제발, 제발 하나만 열려 있어라..’
“씩! 씩! 씩!”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바로 아래서 들렸다. 이젠 정말 코 앞까지 쫓아왔어!
‘벌써 4층이야?!’
여긴 아파트가 아니다. 여기도 잠겨있으면 정말 끝장이다..!
“제발!!!”
철컥. 바람소리만 새어나오는 기원이지만 하늘엔 닿았나보다. 문 손잡이가 돌아갔고, 난 구르듯 뛰쳐들어간 뒤 문을 잠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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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다른 방에서 끌어온 책장을 그대로 문 쪽으로 힘껏 밀었다. 생각없이 친 바리케이드였지만, 벽과 벽 사이의 길이가 딱 알맞은 덕에 책장은 완전히 눕다시피하며 문을 막았다. 이제 문이니 단순히 들이받아서는 쉽게 열 수 없으리라. 부서지지 않는 한은..
나는 숨을 고르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방과 방을 가로지르는 동선 부근은 온통 쓰러진 가구나 옷가지, 자잘한 장신구 따위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어디 피신이라도 떠난걸까. 집 주인이 누구였든 간에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고 있다면 좋겠지만, 건물 여기저기에 튀어있는 혈흔은 부정적인 결론만 이끌어냈다.
그 때 갑자기 현관문이 크게 울렸다. 그냥 때리거나 걷어차는 정도가 아니었다. 도구를 쓰는 걸까? 아니, 단순히 괴물이니까 맨몸으로 저런 충격을 주는 것도 가능할테지. 어느 쪽이든 간에 현관에서 떨어지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잠시 바리케이드를 더 칠까 고민했지만, 그런 짓을 해봤자 문 건너편에 내가 있다는걸 알려주는 꼴 밖에 안되겠지. 더군다나 현관은 철문이다. 그게 뚫린다는건 집 안에 있는 뭘 몇 십개를 쌓아놔도 다 부수고 들어온단 소리고. 아무리 놈들이 괴물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만약에’ 라는게 있다. 스치기만 해도 끝장일텐데 하나라도 더 생각해야지.
난 벽을 끼고 낮은 자세로 기어갔다. 바닥 여기저기에 창문에서 나온 유리조각이 흩어져있었지만, 조각이 큰 편이라 쉽게 집어서 치워놓았다. 그 와중에도 철문이 쿵쿵 울려대는 통에 심장이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안쪽 방으로 들어가는 데엔 성공을 했다.
문제는 나보다 먼저 온 놈이 있다는 거지.
“큽!”
기던 자세 그대로 턱을 얻어맞고 뒤로 쓰러졌다. 잠시 시야가 하얗게 번쩍였고 다음 순간엔 놈의 얼굴이 코 앞이었다. 난 있는 힘껏 녀석을 밀치고 반대편으로 굴러서 일어났다. 내 몸에 아드레날린이라도 잔뜩 분비된건지 녀석은 벽까지 나가떨어져서 바르작거렸다. 나보다는 작은 것 같았지만 밖에 있는 놈들과 마찬가지로 괴물인 듯 했다. 형체는 얼추 사람과 비슷했지만 피부는 겨자색이었고, 털 하나 없이 주름만 쭈글쭈글한 것이 흡사 ET 같았다. 손가락을 맞대며 교감하는건 무리일 것 같지만.
놈이 몸을 추스르기 전에 내 쪽에서 먼저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하지만 힘이 모자랐는지 괴물은 내 명치 근처를 제대로 걷어찼고, 그대로 위치가 바뀌어버렸다. 괴물이 어떻게 질식사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놈은 내 목을 부러뜨릴 듯이 졸라댔다. 하나만 하면 좋겠는데, 그대로 바닥에다 쿵쿵 찧기까지 하는 판에 시야가 어두워지고 사지가 벌벌 떨렸다. 나는 눈 앞의 괴물을 뚫어져라 노려보다 이내 무력감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옆으로 굴렸다. 이대로 죽는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지난 인생을 비추는 주마등 따윈 스치지 않았다. 비슷한 걸로 두 동강난 스탠드가 있었지.
“씨이발.. 이런 씹빨노미야아악!!!”
손에 닿자마자 있는 힘껏 쥐고 후려쳤다. 쓰잘데기없이 긴 손톱 때문에 정말로 꽉 쥐진 못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던 것 같다. 스탠드는 놈의 대머리가 안쪽으로 파일 정도로 직격이었고, 꺼억! 하는 외마디비명이 한 번 울린 뒤론 온 세상이 잠잠했다. 지겹도록 울리는 현관문 소리만 빼곤. 개새끼들이 사람 쉴 틈을 안주네.
몸에 힘이 돌아오는 대로 땅에 널브러진 시체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숨이 멎은건 확인했지만 그 정도론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던진지 거의 3초도 안되어서 뭐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호박이 떩 하고 깨지는 소리 같았다. 그걸 신호로 곧 창문 아래쪽이 소란스러워졌고 현관의 울림도 잠잠해졌다. 이유가 뭐든 간에 겨자색 괴물의 시체가 다른 괴물들의 관심을 끈 모양이다. 왜지? 저 놈들은 지들끼리도 서로 잡아먹는 걸까? 하기사 내 볼기짝이던 겨자색 놈 갈빗대던 간에 고기야 고기지. 허이구 씨발, 어제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먹을 거로 주가가 추락했네. 다른 주식들처럼 인생㈜가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갈 수 있다면 참말로 좋겠다. 지금처럼 세상에 별 잡놈들이 들끓는 판에 기대하긴 힘든 일이겠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도통 알 수 없는 일 들 뿐이야. 거리에 왜 괴물이 들끓는지, 살던 동네가 폭격맞은 것처럼 무너지고 박살나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처지를 비관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나처럼 쫓기고 도망치는 일이 없더라도, 지금 세상이 살기 아주 좆같이 변해버렸다는건 살아있는 이들의 공통분모지. 어느 누구도 힘든 상황을 배려해줄 수 없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자. 내 유일한 동료는 나 자신이다.
조용해진 틈을 타서 건물 안을 더 둘러보았다. 화장실 하나에 침실 둘, 거실 겸 주방 하나. 이런 난리통만 아니었다면 분명 평범한 가정집이었으리라. 손전등이나 테이프같이 좀 쓸만한 것들은 집주인이 다 챙겨간 모양이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은 방전된 노트북이나 토스트기 같은 잡동사니가 대부분이었다. 혹 XX마트가 멀쩡하게 남아있다면 거기서 배터리를 가져다가 쓸 수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판국에 그런 미친 짓을 하려면, 내가 ‘말세의 중심에 서서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며 야동을 보고 싶어하는’ 단백질 자판기 정도는 되어야 할 게다.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지만 대단한 건 없었다.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신토불이 산통 깨는 땅콩버터 한 통이 전부.. 집주인이 양키 센스에 눈을 떴던 모양이다. 열량은 엄청나겠지만, 배를 채우자고 이걸 먹었다간 분명 혈관에 버터가 낄 테지. 말은 이렇게 했어도 침이 고이는건 어쩔 수가 없었던지라 몇 번 찍어먹었다. 눈물나게 달았다.
장롱이나 세탁기를 뒤져서 찾아낸 옷가지로 창문이란 창문은 다 가렸다. 물론 완벽하게는 아니고, 좀 찢어서 빛이 새어들도록 했다. 전기가 끊겼는지 배선이 끊겼는지 하여튼 전등이 켜지질 않으니.. 혹 제대로 작동한다고 해도 빛이 놈들을 자극한다면 있으나 마나였다.
나는 혹시나 싶어 집 안에 또 다른 괴물이 남아있진 않는지 뒤져보았지만, 다행히도 괴물은 아까 그 ET놈 하나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사흘 정도는 죽은 듯이 지내며 버틸 수 있겠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피로가 몰려들었다. 혹시나 싶어 내가 놓친게 없나 한 번 더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이 집 안에 나 말고 다른 위협될만한 건 없고, 먹거나 마실 것도 없으며, 내 존재를 은폐할 작업도 마쳤다. 이게 최선이다.
이 집도 우리 집처럼 2세대 가정이었던 모양이다. 부모님하고 아들이나 딸이나 아들딸이나 딸딸이나. 내 덩치엔 퀸이나 킹 사이즈가 맞을테지만, 침대는 고사하고 방이 개판이라 엄두가 안났다. 아까 죽였던 겨자색 괴물이 다 부수고 깽판 놓은게지. 하는 수 없이 애들 방으로 들어갔다. 점점 어두워지는 탓에 손을 더듬어 누울 자리를 찾는데.. 빙고. 침대다.
평소 하듯이 오른쪽으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다리가 자꾸 밖으로 빠져나가는게 역시 너무 작다 싶지만.. 별 수 없다. 발받침으로 쓸 의자도 없으니 있는 대로 사는게 정신 건강에 좋다. 자잘한 생각일랑 접고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