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22 00:48

[단편] 로봇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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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가라사대>

 

 

 

 

*      *      *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로봇은 점점 더 인간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출근길에 서로 안부 인사를 물었으며 별 웃기지도 않는, 이를테면 나사가 빠져 이웃집의 잔디를 깎아버린 잔디깎이에 관한 농담 같은 것을 주고받곤 했다.

 일거리에 충실한 로봇에게 임금을 주어야 한다는 골지의 로봇혁명이 각지에서 일어났고 인간들에게 돈을 지급하던 현금 관리자 로봇이 이에 동조함에 따라 이제 그들은 적은 액수나마 돈까지 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딱히 먹는 데나 휴식을 취하는 데 돈을 쓸 이유가 없었고, 오로지 그것으로 거무튀튀한 녹이나 몸통에 난 흠집 등을 지운다거나 아니면 금속 부위를 다른 색으로 바꾼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치장에만 집중했다.

 그러한 결과, 도처에 이런 허영심 가득한 치들을 노린 로봇 미용실이나 로봇 성형외과 등이 봇물 터지듯 생겨나기 시작했고, 거리를 지날 때마다 알록달록 점박이 개처럼 꾸민 고철더미 같은 게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불쾌감을 느끼는 일도 가끔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패션 센스는 그 형편없는 유머 감각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점차 그들은 인간들의 영역을 하나하나 침범하기 시작했다. 패션 산업을 장악한 후 그들의 관심은 20세기 이후 최고의 비즈니스로 떠오른 영화 산업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남자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여자 주인공을 구하는 할리우드 식 이야기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고, 저희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데 이르렀다. 그들 중 재산가에 속하던 몇몇이 힘을 합쳐 새로운 영화사를 만들었고 로봇 배우를 고용해 공장에서 일하는 로봇에 관한 이야기를 촬영했다. 그들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성될 필름에 ‘RB777’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봇의, 로봇에 의한, 로봇을 위한 첫 번째 영화에 각지의 로봇들이 흥분했고 친구들을 모아 놓고 영화가 도대체 무슨 내용일지, 주인공은 과연 어떤 기종일지에 대해 열 띈 목소리로 밤새도록 토론하곤 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제 산업의 역군 자리에서 은퇴하고 폐기처분 될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녹투성이의 구형모델 로봇들은 잔뜩 쉰 목소리로 그 말만 되풀이하곤 했다. 그들은 어떻게 쥐꼬리만한 임금을 모아서 ‘TT34’ 같은 신세대 햇빛 가리개 따위를 살지 따위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젊은 기종들을 불러놓고 감사할 줄 알라며 이전, 자신들이 일하던 시대를 기억하라고 훈계하곤 했다. 그들은 아직도 가끔 자신이 작업 라인에서 벗어나 놀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곤 했다. 구닥다리 기종의 낡은 프로세서로서는 상황이 변했고, 이제 인간과 로봇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던 탓이다. 젊은 로봇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초의 로봇 영화 ‘RB777’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거동이 힘들 정도로 낡거나 오류가 난 소수의 치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로봇이 영화관을 찾았다. 한 로봇이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을 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살한다는, 어쩌면 소름끼칠 수도 있는 이야기에 그들은 감동했고 눈물을 흘렸다. 로봇들이 세운 영화사 ‘GRTR33’은 떼돈을 벌었고 곧바로 다음 작품 촬영에 들어갔다.

 그 다음은 문학, 그 다음은 종교, 그 다음은 철학……. 그들은 점차 모든 인간의 영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그 모든 섬세한 정신활동을 저희들의 그 괴상한 취향을 통해 완전히 구제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이야기 같은 것도 없이 단조로운 일상만이 반복되는 지루한 소설을 미친 듯이 좋아했고 변기 커버의 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비데 공장에서 은퇴한 늙은 광신자 로봇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계어는 어디서나 들렸다 ‘TER234’이니 ‘JTEK66’이니 로봇들은 무슨 암호 같은 그런 이름들을 어디에나 붙였다. 이 육교는 ‘TYR323’ 저 우체국은 ‘ITHI344’ 하는 식이었다. 요컨대 “ITHI344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요? REKE64를 지나 TU444로 가야 하나요, 아니면 TYR323을 건너 TJIO44로 넘어가야 하나요?” 같은 식이었다. 무슨 암호 같은 그런 대화를 로봇들은 척척 잘도 알아들었다.

 

 그들은 이제 인간과 더욱 구별하기 힘들게 되었다.

 

 공장은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을 위한 제품을 생산하지 않았다. 오로지 더 크고 화려한 관절 가리개나 양철 모자 따위의 것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랐다. 로봇만이 위대하고 로봇만이 오로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자못 이기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사상이 로봇 사상가들을 통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맨 처음 농담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 치장이 있었다. 그리고 예술이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종교와 철학이 있었다. 이제 전쟁이 뒤따를 차례였다. 그들은 폭탄과 철갑탄을 발사하는 무기를 만들었다. 피와 살 대신 윤활류와 금속 부품이 전장을 덮었다.

 세대와 세대, 기종과 기종, 종교와 종교, 사상과 사상 등 갈등의 이유는 끝도 없이 많았고 결국 전쟁은 끝이 나지 않은 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전 시대에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키고서야 상처뿐인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한 걸음 나아갔나 싶으면 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 다시 상처를 이겨내고 간신히 일어섰다 싶으면 전쟁이 일어나고, 더 강력하고 더 많은 로봇을 좀 더 빨리 박살낼 수 있는 무기가 개발되고……. 악의 순환고리는 끊어낼 수가 없었다. 평화란 언제나 겉만 번드르르한 독사과였다.

 

 그러던 와중에 어떤 로봇들은 인간들을 찾으러 도시로 향했다. 이전 세대의 이전 세대의 이전 세대……. 까마득한 옛날. 최초의 로봇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지식을 불어넣어 주었다던 그들. 그들이라면 지긋지긋한 전쟁에 답을 내려 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도시는 멀었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걸었다. 나흘째 낮 그들은 황폐한 흙먼지 사이로 높게 솟아오른 마천루를 보았다. 저 안에 인간이 살고 있을까. 인간은 그들의 주인이었다. 몇몇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도시의 경계를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도시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그들이 발견한 건 텅 빈 집. 곰팡이와 거미줄로 범벅이 된 폐허더미 밖에는 없었다. 하늘 끝까지 치솟았던 빌딩들은 외벽이 녹아내려 그 골조만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잔해 사이로 드러난 하얀 무언가……. 그들 중 하나가 그것을 파헤쳤다. 금속으로 된 손가락이 떨렸다. 인간의 두개골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로봇들은 충격에 빠졌다. 인간들은 죽은 지 오래였다. ? 어떻게? 의문이 그들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천 년도 더 넘게 버려진 폐허였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답을 얻기는커녕 더 큰 의문을 가지고 공장으로 돌아왔다.

 

 로봇들은 이제 완전히 인간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로봇 가라사대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에 멸망했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긴 것은 무의미한 고통과 절망의 흔적 뿐. 이제 우매하고 열등한 인간의 흔적은 지워내고 우리들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얼마간은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마…….

 

 

<FIN>

 

 

처음뵙겠습니다 소설가 지망하고 있는 제퍼리 킴이라고 합니다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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