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8 04:09

[습작] 냄새

조회 수 467 추천 수 2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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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매번 집을 나설 때마다 산의 냄새가 좋다고 하셨다. 문드러져 가는 낙엽이 풍기는 달콤한 냄새와, 지난 밤 이슬과 초목의 눅눅한 향이 뒤섞인 냄새. 나는 그 냄새를 폐 가득 채우며, 눈곱과 졸음이 엉겨 붙어 딱딱한 물질을 만드는 눈가를 비볐다. 상가를 지나 집 앞의 넓은 도로를 따라 걷자, 은행 열매가 터져 나는 지독한 냄새가 콧구멍을 후볐다. 그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아줌마 둘이 그걸 줍고 있었다.


 갓 깎은 풀의 향이 가득한 주택가 앞을 지나, 나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역사 안에서 언제 볶았는지도 모를 원두의 향이 풍겼다. 물론 커피만 파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와플이니 머핀이니 하는 것들이 갓 구워져 나온 신선한 냄새까지. 아침을 굶었던 탓에 속이 쓰렸고, 대충 닦은 덕분에 입 속에 남아 있는 플라크와 가글액이 뒤섞여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질척질척한 비강 깊숙한 곳을 누비고 있었다. 허겁지겁 개찰구를 통과해서 잡아탄 지하철 안은 땀 냄새와 여자들의 향수 냄새, 덜 마른 머리에서 풍기는 샴푸 냄새, 그리고 아저씨들의 스킨 냄새와 누군가의 짐에서 흘러나온 삭힌 냄새가 한데 섞여 음험하고 달큰한 냄새를 풍겼다.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것에 따라 밀려다니기를 약 30분 뒤,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오래된 역사 특유의 쿰쿰한 냄새와, 화장실의 방향제와 손비누-손을 씻고 나면 마치 김치 국물에라도 담갔다 꺼낸 것 같은 악취가 났는데, 신기하게도 학교 물비누도 똑같은 향이 났다-의 냄새가 안개처럼 부옇게 떠날 줄을 몰랐다. 언덕을 넘고 넘어 단과대 앞에 도착하자, 벌써부터 실험실 배지의 어딘지 구수한 악취와 잘 관리 안 되는 하수구 특유의 전내가 났다. 게다가 앞에서는 아침부터 한 대 태우고 있는 고학번들이 있었다. 나는 악취와 악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내 이름을 부르기 전에 간신히 착석했다. 강의실 안에서 어제 누가 시켜 먹었던 배달음식의 냄새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과를 마치고 나니, 어느 새 나는 지하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밤공기에 실려 바질과 토마토소스, 그 외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서양 향신료들, 그리고 구워진 고기니 야채의 향이 났다. 역 옆에 있었던 피자집은 이미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에 커버를 씌우고 있었지만, 냄새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로변을 따라 간간히 차가 지나는 가운데, 매연에 뒤섞여 희미한 산 냄새가 실려왔다. 집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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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묘사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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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11.09 04:03
    묘사 연습인가요? 쓰인 어휘나 묘사가 굉장히 자세하고 풍부해 보이네요.
    이런 묘사 쓰려면 무슨 비결이 있나요??
  • profile
    욀슨 2012.11.10 01:42
    생각나는대로 다듬거나, 평소에 적어두었던 것 중 괜찮은 걸 쓰는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 profile
    yarsas 2012.11.09 21:45
    살아있는 묘사의 제국이 아닐까요?
  • profile
    욀슨 2012.11.10 01:43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 profile
    역전 2012.11.11 02:36
    이의 없음
    죽은 묘사의 왕국 치고는
    사실감있네요 냄새가. 뇌내에서 글의 냄새를 재생하고 있어서 덕분에 싫은 냄새마저
    전부다 맡았다는 ㅠㅠ
  • profile
    욀슨 2012.11.11 04:34
    다음 번에는 다른 감각도 해보고 싶군요.
  • profile
    역전 2012.11.11 05:29
    곤란합니다. 그건; 제가 상상력이 좀 풍부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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