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스토리 중시형 장편 RPG를 좋아하는 편이고, 게임제작도 그쪽으로 가고 있는터라 참조할만한 좋은 예제작품이 별로 없어서 몇 해 전에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리 밑에서 리턴>를 플레이하기로 했습니다. 군시절 때부터 무척 플레이하고 싶었던 게임이었는데, 이후 속편을 준비하는 와중에 있었던 여러가지 사건들에 휘말려 탈퇴 아닌 탈퇴하면서 어느 순간 잊어버린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스위찰드님의 작품도 좋은 예제가 되겠지만, 찰드님 스타일은 전부터 비교적 잘 알고 있어서 천무님 작품으로 정했습니다.)
과거의 명작을 리메이크했다고는 하지만, 스토리-서사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인 주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제게는 오히려 이전 시대 유저들을 감동시킨 스토리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는 기대감이 더 컸습니다.
아직 초반부밖에 진행하지 않았지만, 여러모로 잘 만든 작품같았습니다. 제 과거의 작품을 이 정도 퀄리티로 다시 리디자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이 아주 좋았습니다. RPG2003이라는 낙후된 툴에, 상당히 기본적인 기술들을 위주로 게임을 디자인했음에도 그걸 보완해주는 섬세한 이벤트 연출과 적절한 음악사용, 퀄리티 좋은 인물 포트레이트 등등 게임 하는 내내 정말 큰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똑같이 툴의 기본기능들을 위주로 디자인했음에도 저보다 여려모로 한 수 위의 퀄리티를 뽑아낸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특히 불행에 불행을 거듭하는 주인공의 인간드라마는 상당히 애잔해서 자주 게임을 멈추고 갖가지 상념에 빠지곤 했습니다. 제가 인물보다는 큼직 큼직한 사건들의 전개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스토리를 풀어갔다면, 이 작품은 갖가지 사연이 있는 인간드라마로 플레이어에게 감정을 이입시키며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라서 호소력이 높았습니다. 인물들의 행동을 직접 풀어주는 해설 연출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것도 오소독스함을 지향한 작품의 성향에 부합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호소력 있는 인간드라마 연출, 개인적으로 속편을 만들 때 가장 많이 닮고 싶은 부분입니다.)
좀 더 플레이해야 이 작품의 진가들을 더 발견할 듯 싶지만, 기술력 구현의 경연장으로 변모한 메이저 게임계와 시선을 끄는 비쥬얼적인 요소와 기발에 시스템에 치중하여 이야기꾼으로서 보편적인 면모가 점점 약해지는 오늘날의 인디 RPG계에서 정말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같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RPG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인간세계의 보편적인 주제가 담긴 이야기들을 다루고, 그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전달하느냐가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될 것이라는 제 RPG제작사상이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ps- 주인공이 정말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이리 저리 휩쓸리는 모습을 보면, 제 게임에 나오는 주인공의 처지하고도 많이 비교되서 숙연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