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 재즈의 시대, 아메리칸 드림의 슬픈 초상 -
20C 영미문학 최고의 작품은 무엇일까? 예술엔 우열이 없으니 단 하나의 작품을 모두가 최고로 꼽기는 어렵게쑈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독자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꼽게 될 거ㅏㅅ이라 확신한다. 영화,연극, 음악 등 수없이 많은 매체에 재생산되고 있으며 Gatsbyrous(세련되며, 멋스럽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20C 영미문학 불후의 명작의 반열에 드는 작품 <위대한 개츠비>. <1Q84>와 <상실의 시대>로 유명한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부터는 내 생의 최고의 소설이 되었다. … 어느 페이지 어느 구절을 펼쳐보아도 최고의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라는 말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위대한 개츠비>는 ‘닉 캐러웨이’라는 화자의 미국 동부지역 이주와 함께 시작한다. 미국 동부는 예나 지금이나 미국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며, 그중에서도 중심인 뉴욕은 1920년대 재즈의 시대에 찬란히 꽃피우기 시작한 미국 문화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쉽게 말해 화자의 동부 이주는 우리나라로 치면 1970~80년대 경제 부흥기에 부를 좇아 서울로 상경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며 이러한 처지는 관찰자인 화자 ‘닉 캐러웨이’뿐만 아니라 주인공 ‘제이 개츠비’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부에서 상경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번 졸부 ‘개츠비’, 그리고 돈을 벌려는 ‘닉’, 이 두 인물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개츠비’의 첫사랑 ‘데이지’와 그의 남편 ‘톰’이다. 이 두 사람은 ‘닉’과 ‘개츠비’와는 달리 귀족적 용모와 행실, 태도를 취하고 그에 걸맞은 입지를 차지하고 ‘개츠비’와 같은 졸부와는 혈통적으로 다른 ‘그 무언가’가 내재되어있으며 그 차이는 그들이 거주하는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라는 거주지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닉’과 ‘개츠비’가 사는 ‘웨스트에그’는 가난한 지역은 아니지만 ‘이스트에그’에 비하면 뒤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비교적 낙후된 동네이며 이는 노르망디 시청 청사풍의 개츠비의 저택으로 대변된다. 반면 조지 왕조 시대의 식민지 관저 풍으로 대변되는 ‘이스트에그’는 귀족적 분위기가 흐르는 세련된 부촌이다. 작가는 이 쌍둥이처럼 닮은 지형의 두 지역을 통해 동부와 서부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지칠 줄 모르고 열리는 성대한 파티의 주최자로 알려진 ‘웨스트에그’ 최고의 저명인사 ‘개츠비’, 그는 상당한 재산을 쏟아부어 끊임없이 파티를 연다. 그리고 그 파티는 자신의 첫사랑 ‘데이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아니 파티에 참가한 ‘데이지’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 위한 눈물 겨운 노력이다. 하지만 ‘데이지’의 남편 ‘톰’과 데이지의 첫사랑 ‘개츠비’는 부자는 같은 부자라 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 귀족과 졸부라는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이 있다. 때문에 ‘데이지’가 ‘개츠비’에게로 마음을 돌리는 꿈 같은 일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 사실을 ‘닉’과 ‘개츠비’, 심지어는 ‘톰’과 ‘데이지’까지도 잘 알고 잇다. ‘톰’과 ‘데이지’는 재즈시대의 무너져버린 미국의 도덕성과 물질만능주의의 상징적 인물이며 ‘개츠비’는 작중인물 중 유일하게 순수성을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을 ‘데이지’에 대한 구애로 표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수차례의 시도는 작중 인물 모두와 독자가 예상하듯 물거품처럼 스러지며 결국 결정적으로 ‘톰’과 ‘데이지’, ‘개츠비’의 삼자 대면을 통해 그의 구애는 막을 내린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데이지’의 선택은 자발적으로 ‘톰’을 향하고 ‘개츠비’는 굴욕적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 후 ‘톰’의 방관에 의한 사고로 ‘개츠비’는 죽음을 맞이하며 개츠비의 파티에 즐거이 참여했던 수많은 저명인사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의 장례식은 ‘닉’과 ‘개츠비’의 아버지만이 참가한 가운데 쓸쓸히 치러진다. 이후 ‘개츠비’의 죽음과 함께 동부 사회, 그리고 미국에 환멸을 느낀 ‘닉’은 고향으로 돌아가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흔히들 작중 ‘개츠비’의 모자란 모습이나 이해할 수 없는(혹은 우스꽝스런) 언행과 행실, 그리고 그의 몰락 등으로 비추어 <위대한 개츠비>를 역설적인 제목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그렇게 평하는 평론가 또한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개츠비’의 위대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재즈의 시대 1920년대를 가장 예리한 필치로 묘사했다는 작품 내의 사회 정서와 분위기는 과장을 조금 보태 성경 속의 소돔과 고모라 수준이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며, 불륜과 간통이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라면 악세사리처럼 지니고 있어야 하듯 횡행하고, 물질만능주의의 끝없는 팽배로 인간 ‘개츠비’가 아닌 부자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 심지어 순수성의 상징인 ‘개츠비’마저도 그랬듯 마피아, 갱단과의 동업으로 떳떳치 못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사회. 1920년대는 그야말로 인간이 마땅히 지키고 보존해야 할 가치들이 모두 파괴된 도덕이 황폐화 된 사회다. 하지만 암흑의 세계와 손을 잡고 돈을 벌었을지언정 ‘개츠비’만은 다르다. ‘개츠비’가 도덕적으로 고결한 심성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또한 부패한 사회 안으로 들어가 그들 가운데서의 높은 지위를 찾고자 했으며, 그러기 위해 철저한 계획 아래 각고의 노력으로 돈을 벌었고 앞서 언급했듯 그 과정은 절대로 깨끗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츠비’는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았다. 비록 부패한 그들 가운데 들어가고자 했으나 그 속에서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인 사랑, 다시 말해 자신의 첫사랑 ‘데이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물론 ‘데이지’는 고결하고 순수한 여신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 여인이다. “그녀의 말 속에는 ‘돈’이 있어요” 라는 말로 ‘닉’에게 설명하듯 ‘개츠비’는 그녀의 그러한 성품을 잘 알고 있다. ‘데이지’가 ‘톰’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의 불륜 또한 알지만, 그리고 그의 막대한 부와 높은 명예 때문에 그를 벗어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개츠비’에게 그런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부족했던 자신이 처음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던 ‘데이지’. 작중의 언급처럼 “개츠비가 만난 첫 괜찮은 부류의 사람이었던 그녀는 ‘개츠비’에게 있어서 그의 삶의 목표, 아니 목표 이전에 그의 삶, 어쩌면 ‘개츠비’ 그 자체이며 그 끝없는 순수한 사랑이 바로 ‘개츠비’의 위대함인 것이다.
독자는 누구나 이 작품을 읽으며 ‘개츠비’를 작품 내의 유일한 긍정적 인물로 생각하는 화자 ‘닉’의 입장에 공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개츠비’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우리는 얼마나 현실 속에 반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2010년대의 우리들, 우리도 또한 1920년대 뉴욕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 속에서 살고 있다. 끝을 모르고 만연해가는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사회, 출신 대학이 후천적 신분을 정해주는 학벌지상주의 사회, 한없이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그것이 가속화 되고 있는 양극화 경제 사회, 스펙 키우기와 자기계발 경쟁에서 도태되면 그 즉시 벼랑 끝으로 몰리는 무한경쟁 사회. 그 속에서 우리는 ‘개츠비’와 같은 순수한 이상을 향해 얼마만큼이나 노력해 왔는가 자문해 본다.
내가 진정 이루고 싶은 꿈과 냉혹한 현실과의 타협. 그 타협의 결과물이 우리의 이상과 현실의 절충이 아닌 현실의 노예 그 자체는 아닌지, 과연 내가 달려가고 있는 목표가 과연 내가 원하는 목표가 맞는지, 어쩌면 달리고 있는 나의 길 자체가 ‘개츠비’가 달려간 돈키호테의 길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 내게 강제로 부여한 쳇바퀴 같은 길은 아닌지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한번 쯤 생각해 보자.
- 이렇게 유려한 문체로 아름답게 쓴 완성도 높은 글을 아무도 못보게 썩혀둘수는 없다...;
서평과 상관은 없는 곳이지만 여기서라도 많은 사람이 봐주기를...
그리고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그 별명을 싫어하셨지만, 추억이 돋아 한번 불러봤습니다.
스파님 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