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참 별것 아닌 일입니다.
데이트 도중에 다른 남자, 그것도 요새 은근히 신경쓰이게 하는 그 녀석 이야기를 몇 번 꺼내기에 꾹 참았다가, 급기야 내 옷 사러 온 가게에서 "다음 주에 의민이 걔 생일이라고 하던데, 모자나 사줄까?" 하는 소리에 드디어 제 분노가 터져버린 것이었죠.
그래요, 압니다. 그 녀석에게는 여친이 있다는 것도, 여친은 그저 녀석을 그냥 친구로만 생각한다는 것도. 그런데 그래도 화가 나는 건 화나는 거지요.
"너 지금 뭐 하는거야? 어? 종일 데이트하는데 왜 그 자식 이름을 내가 계속 들어야 되는데?"
여친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또 사람들 많은 가게 안에서 내가 큰 목소리(그리 크지도 않았지만)로 성질을 내서 시선이 쏠렸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모양입니다. 당장 노발대발하며 가게를 빠져나가더군요.
싸웠습니다. 그녀는 그녀대로 분노를 폭발시켰고, 저는 저대로 그동안의 쌓여온 짜증을 쏟아냈지요. 어쩌면 이러다가 끝날 수도 있다는 위기경보가 울렸지만 까짓 거 이제 참을 데까지 참아왔습니다. 이렇게 뱉어내니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내가 무슨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성인(聖人)도 아니고….
그래요, 솔직히 이 사람도 할 말이 없지요. 자기가 한 짓을 그대로 다 나열해놓으니 정말 스스로 생각해봐도 아니다 싶은 짓 많이 했지요.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그저 말없이 차창 밖만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별이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다 왔어. 내려."
하지만, 그녀는 내리지 않습니다. 짜증 나 담배나 한 대 물려고 하는 순간 차창에 비친 그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도 직감했겠지요. 내가 이렇게 분노를 터뜨리고, 이렇게 냉랭하게 대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이별을 통보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뭐라고 한마디 할까, 하다가 입을 닫았습니다.
"왜 말 안 했어?"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참고 물었습니다.
"뭘?"
심드렁하게 되묻자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짜증이 쌓였으면 말로 하고 그러지, 왜 말 안 하고 꾹 참고 있다가 이제서야 다 쏟아놓는 건데."
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습니다.
"너랑 싸우기 싫어서. 솔직히 전부터 짜증이 많이 났었는데, 그래서 은근히 돌려서 말도 해봤는데 넌 뭐 그저 친구라면서 감싸고만 돌고, 내 기분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기에. 뭐, 또 질투하는 모양새라서 유치하기도 하고…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짜증이 나더라고. 솔직히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봐. 너 옷 사러 간 가게에서 내가 다른 여자 이야기하면서 걔 옷 사줄 생각이나 하면 네 기분은 어떨지. 어휴."
창문을 내리고 담배연기를 뿜었습니다. 차 안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 상아지만, 그렇기에 일부러 더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더이상 귀찮게 이 아이가 제 삶을 간섭하는 것도 짜증 났습니다.
"…미안해."
그녀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올 줄이야. 지금 내 표정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군요.
"아냐, 미안할 거 없어. 솔직히 네 말도 맞아. 그냥 친구 생일에 옷 한 벌 사주는 게 뭐 잘못된 건 아니지. 매번 선물을 주고받고 툭하면 그 친구 이야기를 해대는 걸 못 견디는 내가 옹졸한 거지. 됐어, 미안할 거 없어. 후…"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존심과 고집이 그토록 셌던 그녀가, 드디어 그 자존심보다 저에 대한 미련을 더 크게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여자가 그렇게 엉엉 울면서까지 자존심을 접으면, 거기서 한번 또 접어주는 것이 진정한 남자의 자세겠지요.
왠지 이 뒤가 더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드네요;;
오랜만에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나, 항상 그렇듯 글 잘쓰세요. 대사도 그렇고, 내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