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24 23:29

에스포와르(espoir)

조회 수 646 추천 수 1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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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가 원했던 것은,

그래. 평범했던 일상일 뿐이었다. 사냥꾼이 잡아온 고기를 다같이 둘러앉아 먹는 저녁식사. 어둠(noir)을 몰아내는 새벽(aube)의 소년의 바램같은 행복한 장소. 적어도 내가 원하고 그리워하고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곳.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법이다."

 

소년을 등뒤로 밀어넣고 풀숲사이로 교묘하게 석궁을 설치해놓는 마을 제일의 사냥꾼 딕의 얼굴은 침착함과 대조되는 울 것 같은 그렁그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어른이라도 괴로운거구나. 필시 소중했던 것이 더욱 많았기에 그럴테지. 소년은 딕의 얼굴을 보면서 가장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 나는?'

 

과연 자신은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머물던 곳이 불타오르고 날카로운 비명이 끝이지 않고 침묵을 찾아들게 하는 푹푹 소리가 계속 나는데도.

소중했던 인연도 있었다. 지키고자 했던 것도 있었다. 떨어지기 싫은 것도 있었다. 이별을 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나는 슬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무리다. 소년은 딕이 막 추격을 대비한 석궁함정 설치를 끝내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깨달았다. 외롭지 않다. 괴롭지 않다.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필시 무얼 원하고 있지도 않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에 어떤 것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그것은 아마도 죽음마저.

 

"있잖아. 딕 아저씨. 어째서 아저씨랑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 모두가 죽었어. 엘버크도. 커키도. 시에라도. 에냐도. 호냔 형도. 키리 아줌마도. 전부. 마을 사람 모두가 다 죽었는데 어째서 나와 아저씨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

 

괴로워 하고 있다.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부를때마다 딕은 괴로워하고 있다. 이 사냥꾼은 지킬 수 있었을 터다. 그러나 지키지 못했다. 순간의 불찰은 이다지도 당사자에게 비수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딕 아저씨였다면 괴로워 했을 것인가.

 

"개중엔 아저씨의 친자식도 있었고 모시던 노모 마저 있었잖아. 부인은 없었지만...그래도 나보단 그들이 우선이었을텐데."

"아니야. 사냥꾼에게는, 직감이라는게 있다. 확실히 내게 우선이 되었던 것은 내 자식들이었지만. 구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 그들은. 마을의 인간들이 모두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데 반해 너만이 생의 길을 찾아내었었으니까."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버렸다. 라는 거다. 딕은 이쪽의 속도에 맞춰 뛰어가며 정말로 괴로운듯이 얘기했다. 아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을 살렸더라면. 그것은 딕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 거라는 건가.

 

"그렇게 까지 해서. 우리들이 살아남았을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다같이 죽는 길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남을 구하는 길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했을 이유. 생에 대한 집착이라는 추잡한 자기욕망의 구현이 현재의 나의 버러지같은 목숨. 이렇께까지 해서 살아남았어야 했을 이유는?

 

"크아아악! 석궁이다. 모두 조심해라! 이 근처를 샅샅이 뒤져!"

 

뻔하다면 뻔하지만 여기까지 벌써 뒤를 잡힌건가. 아직 얼마 안뛰어온 거 같은데.

 

"있다. 살아남아야 했을 이유가. 마을 전부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딕의 품안에서 작은 구슬이 나왔다. 뭐지 이건. 흡사 생긴게 뱀의 눈이다. 그것밖에 설명할 길 없는 이 눈.

 

"「용의 눈」이다. 그것을 가지고 가거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 두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말아라.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 마을의 의무다.

그 때 걸어갔던 활로를 가지고 있다라면 너는 반드시 지킬 수 있겠지."

 

말도안되는 소리다. 고작 열살짜리 꼬마애가 지키기엔 너무 무게가 다르다. 마을 전원의 목숨이 담김 구슬이라는 거 아닌가.

 

"나같은, 어린애보단 당신같이 경험많은 사냥꾼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딕 아저씨."

 

딕은 달리는 걸 멈췄다. 따라 멈추다 반전하는 딕의 망토자락에 얼굴이 걸려버렸다. 뒤로 주저앉으며 아파하고 있는데 머리를 누가 마구 헝클어버렸다. 딕의 손, 역시 사냥꾼의 손 답다. 손 전체의 굳은 살과 그 커다람이 머리카락 전부를 헝클고 난 뒤에야 딕은 손을 떼어 검을 들었다. 날이 잘 갈려있다. 문득 딕이 한번도 검을 쓰는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저 검은 필시 이 날을 위해 가지고 있던 것이겠지.

 

"가거라 마들린으로. 마들린의 만물상으로. 그곳까지 용의 눈을 운반하는 거다."

 

그러니까 무리라고. 나보단 당신이 더 적합하단 말이야! 나는 딕이 이렇게 의사소통 불가능의 존재일 줄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언제나 과묵했기에 별로 말 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녀석 확실히 말이 안통한다. 게다가,

 

"내가 이걸 거기까지 갈 의무는 전혀 없잖아요 딕. 이걸 놈들에게 넘겨주면 우린 살 수 있어요. 살아남을 이유는 없지만."

 

아마 맞았다고 생각한다. 왼쪽 뺨이 얼얼하다.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질이 잖아 이건. 게다가 손에 버클달린 건틀릿까지 끼고. 딕의 갈색머리는 사자갈기 처럼 뻗쳐있었고 눈은 흉흉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정도였나 딕 아저씨.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무서운 기세로 딕은 나를 보면서 윽박질렀다.

 

"쫑알쫑알 말대답하지마!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고? 그런주제에 살아남아 있었잖아! 그렇다면 살아. 살아서 너를 대신해 죽은 이들을 위해

평생동안 사죄하란 말이다! 꼬맹이라고 봐주는 건 끝이야. 내가 네게 살 이유를 정해주지. 일단은 용의 눈은 운반한다. 그것이 현재 네가 살아야될 이유다. 알겠냐 단 크로와츠!"

 

마법에 홀린 게 분명하다. 아니면 최면의 일종이거나. 아까 그 주먹질이 시동키였을까? 아무튼 난 뭔가 홀린거다 분명. 그렇지 않고서야 딕에게 얻어맞은 것 따위 잊고 수긍하면서 지금 내 품안에 소중히 이 용의 눈이라는 걸 지키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난 딕이 챙겨가라면서 챙겨준 몇가지 여행용 물품을 최대한 주머니에 넣고 망토를 둘렀다. 여차하면 밤에 모포로 쓸 생각이었다. 갈색의 망토는 생각보다 어둠에 잘 어울려주었다. 추격은 더이상 없었다. 딕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고 있거나 이미 내가 멀리 도망친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추격이 끝났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마들렌이라. 나는 어느정도 여유가 생기자마자 바로 지도부터 꺼내들었다.

 

우와, 멀다. 욕지기가 튀어나올만큼 멀잖아 여기. 우리 마을이 있는 지역이 대략 동쪽 끝이라면 마들린은 서쪽 끝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가야겠지. 지금 날 움직이고 있는 것은 딕의 그 마지막 말 한마디 였으니까. 현재는 무의미하지만, 과거마저 무의미하게 하고

싶진 않다. 밤은 길다. 이때 최대한 멀리 가둬야 한다. 시야가 트이는 아침보단 어두워서 찾기 힘든 밤에 많이 움직이라는 딕의 충고를 곱씹으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처형으로 향하는  <여행> 이 시작되었다.

 

 

prologue                  

-어둠을 내딛는 일보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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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둠을 내딛는 일보 편 끝 냈습니다.

갑작스런 창작활동 재개. 역시 상당한 연재 텀을 보일거라 생각하지만 군대라서 그런거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짬 차면 많이 올릴겁니다.(笑)

전개 너무 급한 듯 싶긴하지만 그거야 제 실력미숙탓이죠 뭐. 나중에 이 급전개를 어느정도 이완시켜주는 이야기들을 풀어서 위화감을

없애겠습니다. 그냥 프롤로그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세요 ㅋㅋ

다음 연재가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good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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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1.04.25 05:00

     제가 보긴 전개가 그리 급해보이진 않네요. 흥미를 끌어내는 프롤로그로써 잘 쓰인 글같아요^^;


     죽음에 대해 무덤덤하게 생각했던 소년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단게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본편 내용이 궁금한데요? 재미있게 글 읽고 갑니다.

  • ?
    다시 2011.04.29 08:19

    군인이시라면 좀 절박한 작품을 볼 수 있겠네요 ㅋ

  • profile
    샌슨 2011.04.25 06:51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시간이 나서 휴가 기간에는 어떻게든 한편 아니면 두편 더 올리고 갈 생각입니다.

    그럼 좋은 밤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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