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 모든걸 해소해준다고 믿었다.
그렌 발슈타인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달리길 멈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 어른들이 칼을 부딪치며 목숨 걸고 싸우는 상황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임무에 환희를 느꼈다. 그냥 임무가 아니다, 대임무!
"지금 갑니다 성녀님!"
십자가에 묶여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은발의 여성이 약간 턱을 들었다.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그렌은 가슴이 벅차올라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항상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나 환상으로 존재했던 진짜 성녀가 바로 이 앞에 있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구원을 기다리며!
- 신은 모두를 구원한다고 믿었다.
마침내 십자가 앞에 도달한 그렌은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소년의 폐활량을 고려했을 때 몇 분은 주저앉아서 헉헉 거려야했지만 그렌은 어지러운 정신 속에도 성녀의 구원을 우선시했다.
떨리는 두 손이 그녀의 팔다리에 묶인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신이 도운 건지 서툰 손짓에도 매듭은 순순히 풀려졌다. 눈가가 안대에 가려 있는 성녀가 그렌 쪽을 응시했다. 그렌은 뜀박질 이외의 문제로 심장이 덜컹 거렸다.
'서..성녀님이 날 봐주고 있어!'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성녀의 입은 분명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날 구해주러 온 거니?"
"네! 당연합니다! 성녀님은 빛이고 희망인 걸요!"
그렌은 당차게 외치고는 너무 유치한 말을 한 게 아닐까 성녀님 앞에서 이렇게 소리 지르다니 실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성녀는 왼팔이 자유로워지자 팔을 뻗어 한창 나머지 밧줄을 풀던 그렌의 뺨을 감쌌다.
헉, 하고 그렌은 매듭 풀기를 멈췄다. 소년의 눈동자가 안대를 쓴 성녀로 향했다.
"서...성녀님?"
"착한 아이구나. 혁명군들은 어디에 있니? 이들이 전부가 아닐 텐데."
그렌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이십 남짓의 혁명군들이 그보다 배는 많은 제국군의 능수능란한 공격에 밀리고 있었다. 조금 마음이 급해지는 걸 느끼며 손놀림이 빨라졌다.
"걱정할거 없어요. 성녀님! 우리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아요! 저쪽 계곡에 다 숨어 있어요. 거기까지만 가면 될 거에요. 서둘러야 해요!"
쇳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그렌은 다급히 말했다. 양손과 발이 자유로워졌지만 어째선지 성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팔을 잡아 당기려했던 그렌은 안대 탓인가 하고 발꿈치를 올려서 그녀의 안대를 벗겼다.
- 신을 믿었었다.
은발이 흘러내리고 미려한 눈가가 차례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렌이 입을 벌리고 말을 잊은 건 그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벌레를 내려 보는 듯한 혐오감이 완연히 드러난 얼굴에 가득했다. 이게 성녀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인가? 그렌은 두려움마저 느꼈다.
성녀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이젠 아니지만."
그렌은 흉부를 압박하는 힘에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소년의 가슴을 발로 뻥 차버린 성녀는 감상하듯 바닥을 구르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귀 아래에 손가락을 얹은 성녀는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아아, 들리나 멍청이 함장? 발신된 건 녹음해뒀겠지? 이도 아니면 메모라도 했던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성녀를 보며 그렌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땅을 쥐며 떨었다.
"어..어째서야? 당신은 성녀잖아? 우리를 구원할 사람이잖아?"
성녀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지."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빛의 기둥이 그들의 근처 어느 곳에 직격했다. 팔등으로 눈가를 가렸던 그렌은 빛이 잦아들자 불길이 이는 쪽을 쳐다봤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
아저씨들이 매복하고 있던 계곡, 아니 그런 지형이었던 장소가 크레이터로 변해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저 지경이 되었는데 누군가 살아있길 바라는 것은 스스로를 고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렌은 쉽사리 믿지 못했다.
"열심히 울어 네 생명은 얼마 안 남았으니깐. 20초미만?"
부드럽다 못해 자애가 넘치지만 이젠 증오스러운 목소리. 그 내용도 악의가 넘치는 말을 내뱉은 성녀를 그렌은 노려보았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외친다.
"어째서! 당신은 성녀잖아! 신이... 신이 인정해준 유일한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이렇게 죄를 짓다니!"
성녀는 속주머니를 뒤적이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아니, 나는 죄가 없어. 네 말대로 '신이 봐주기로 한' 유일한 사람이거든? 면죄라는 말 혹시 들어봤어 꼬마?"
주머니에서 나온 건 한 자루 피스톨이었다. 자신 쪽으로 향한 권총을 보며 그렌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성녀니까 죄가 아니란 거지."
이윽고 제압을 끝낸 제국군들이 시체를 옮기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녀 앞에 온 병사가 머리가 깨진 소년의 시체를 보며 흠칫했다.
그녀는 눈가를 찌푸렸다.
"아직도 세상엔 신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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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엽편..
배고프네요
성녀의 배신이라니!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