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21 09:16

웃으며 떠난 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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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우라 불리는 사신은 당혹해 한다. 온통 검게 차려입은 그가 묵념하듯 내려다보는 발밑에, 스틱스 강과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아케론 강 너머로 방금 떠난 네 머리가 있다.


흙모래 위를 뒹구는 네 얼굴과, 마찬가지로 쓰러진 네 몸은 거의 1m 가량 떨어져 있다. 거대한 낫을 들고 사신은 그 사이에 서서, 자기 발아래 놓인 네 머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을 보듯 이상하게 바라본다.


스스로 흘린 피로 물든 흙모래 위에서, 네 얼굴은 아름답게 미소 짓는다.


네가 쓰러진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남자’도 있었다. 일찍이 그 역시 크로우와 같이, 오로지 명령받은 것만 아는 가혹하리만치 공정한 죽음 그 일부에 속했다. 며칠 전까진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날아와 네 곁에서 검은 날개를 고이 접던 칠흑 까마귀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심장에서 뿜어 올린 피 또한 열정이나 감정 따윈 녹아들지 않아, 네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얼음 조각 같은 얼굴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는데.


그런 그가 지금은 미소 짓고 있다. 너와 마찬가지로 몸에서 잘려나가, 흙 위에서 더럽혀지고서도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다.


누가 그 심장에 온기를 주었나. 누가 그에게 죽음을 웃으며 마주하는 법을 가르쳤나. 의문가질 것도 없이 해답은 물론 사신이 선 발 아래 있다. 그러나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삶은 구차했고, 진정 사랑받아본 적 한 번 없었으며, 따라서 행복이란 저 멀리 남의 것인 줄 알며 살아야 온당했던 네가 이 모든 변화를 이뤘단 사실을. 자신을 죽이려던 자를 감동시키고, 마지막까지 스스로 업적으로, 기록으로, 혹은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고자 했으면서 끝내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웃으며 받아들였던 너란 존재를.


바위투성이 황폐한 산 위에 네가 있고, 함께 죽은 그가 있고, 고개 숙인 크로우가 있다. 주위엔 수많은 죽은 이들이 있다. 사신과 ‘그 남자’의 동료였던 그들 역시 너를 찾아, 또 자신들을 배신하고 너를 지키겠다고 선언한 그를 찾아 크로우보다 먼저 왔었고, ‘그 남자’에게 목숨을 잃었다. 네가 동굴 안에서, 자신이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양피지 위에 펜을 굴리던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이전 동료였던 자들의 목을 베고, 가슴을 꿰뚫고, 팔다리를 잘라냈다. 크로우가 끝내 그와 네 목을 벨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실력이 월등했던 탓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끝마친 너희가 저항 않고 순순히 검은 강물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서로 알게 된 지 불과 사나흘 만에 그는 너와 죽음까지도 함께하게 되어 버렸나.


크로우는 결코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이 잠든 황야 위로 거센 바람이 분다. 바람은 피 냄새를 지우고, 멀리 군대의 함성을, 사람들의 비명을 지우고, 네가 죽는 날까지 지켜야 했던 저주받을 성벽이 타오르는 연기를 지운다. 엄숙한 적막 속에서 핏빛 노을 진 하늘을 이불 삼아, 황폐한 바위산을 침상 삼아 영원한 휴식에 든 너를 위해서.


모두가 혐오스러워 하는 자이자 범죄자로서 너는, 네 고향을 짓밟았던 침략자들을 지키러 이 근방에 나왔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죽은 자는 그 무엇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오로지 영향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네 죽음은 과연 누구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무수한 시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산 자인 크로우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웃고 있는 네 하얀 얼굴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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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세 번째 우려먹는 내용입니다. 이전엔 <웃는 얼굴로 바라보라>였고, 그 전에는 <연금술사>였던가요. 내용이 익숙해서, 구성을 바꾸거나 설정을 추가하는 등 새로이 쓰기가 편하더군요.


최근 제대로 뭘 써본 적이 없어서, 회복한다 생각하고 써봅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라는 말은 못하겠네요.


3회만에 끝내는 짧은 글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전에 올렸던 것과는 많이 틀릴 것입니다...생각해 보면 길게 말해야 변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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