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30 19:21

[단편]우렁각시 수렁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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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섭 씨, 당신은 세계를 구할 영웅입니다."


 현섭이 뭔가를 묻기도 전에, 여자는 황당한 말을 꺼냈다. 여자에게선 장난기라곤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 표정을 통해 현섭은 깨달았다. 지금 이 상황이 마뜩찮은 건 자신만이 아니다. 여자 얼굴은 어색하리만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자를 쳐다보기 위해 현섭은 고개를 있는 대로 빼어 치켜올려야 했다. 두 팔과 다리가 각각 묶인 채 여자 발치에 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장신구 하나 없이 단순하지만 맵시 있는 흑백 정장 차림이었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이 다린 검정 양복 바지자락 아래 굽 낮은 검정 단화는 일부러 광을 내진 않았지만 먼지나 때를 타지 않고 흠없이 청결한 상태다. 틀림없이 신은 사람 성격 그대로일 그 구두가 자기 눈 바로 앞에 놓여 있었기에 현섭은 몸을 비틀어 조금 뒤로 물러났다. 얼마 가지 못해 방구석에 놓인 싱글 침대에 등이 부딪치긴 했지만 말이다.

 자기 발치 아래서 현섭이 무얼 하건 여자는 조금도 관심 없어 보였다. 마치 자동인형처럼, 그것이 제 의무이기라도 한 양, 여자는 무미건조하게 자기 대사를 읊조렸다.


 "당신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건 당신의 의무란 말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구세주가 되어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습니다."

 "듣자듣자 하니까 이게 무슨 개소리야!"


 발끈한 현섭이 고함을 빽 내질렀다. 그것 말고는 여자에게 반항할 다른 방법이 없었던 탓이다. 여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여전히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해하시겠죠? 지금 이 상황을 말입니다. 세계 60억...아니, 70억 인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주시죠. 부탁드립니다."

 "미친 년 아냐, 이런 썅! 야! 이거 당장 풀지 못해? 어!"


 다음 순간 현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자 등 뒤에서, 낯익은 남자 둘이 나타난 탓이다. 현섭과 여자 두 사람이 있는 방 안에 들어온 남자들은, 묶여 있는 현섭을 향해 그 우악스런 손을 뻗었다. 두 사람 모두 색 짙은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현섭은 좀처럼 그 둘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읽을 수 없었다.


 "뭐야! 대체 뭘 할 생각이야! 그 손 안 치워?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을 에워싼 두 남자의 스크럼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은 손을 뻗어 현섭의 묶인 다리와 손목을 붙잡았다. 잔뜩 긴장해 얼어붙은 탓에 현섭은 여자가 뒤이어 한 말을 귓전에서 흘렸다. 당장은 그보다 눈 앞에 있는 남자들이 더 신경쓰였다.


 "이 방에서 은둔해 주시죠."


 순간 손목을 묶은 끈이 느슨해졌다. 현섭은 무의식적으로 눈 앞에 있는 남자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얼결에 콧등을 얻어맞은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현섭이 입은 하얀 후드티 위로 새빨간 핏방울이 튀었다. 다음 순간 현섭은 다른 남자에게 팔을 붙잡혀 꼼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코피가 터진 남자는 먼저 방문을 나서고 있었고, 여자 역시 막 나가려는 듯 방문 앞에 서서 현섭을 주시했다. 남자에게 붙들린 현섭에게 여자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겼다.


 "얌전히 계시면 편히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여자가 밖으로 나가자, 현섭을 붙잡고 있던 남자도 손을 놓아주곤 밖으로 향했다. 아차, 하는 사이 밖에선 이미 문을 걸어잠그는 듯 했다. 묵직한 쇳덩이가 다른 쇳조각과 마찰하는 요란한 소리가 난 뒤, 철컥, 하고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현섭은 다리에 힘이 풀린 양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뭐야, 저 사람들은."


 소란스러운 순간을 넘기고 정장 입은 세 남녀가 방을 나선 후에야 현섭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있는 방 전경이 그제야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 구조는 풀 옵션인 원룸과 같았다. 화장실과 주방용 개수대가 있고, 드럼 세탁기와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반대편에 놓인 시스템 책상엔 신형 컴퓨터도 한 대 갖춰져 있었다. 책상 옆엔 침대가 있고, 침대 발치엔 옷장도 있다. 심지어 벽면에 붙박이 TV며 에어컨 따위도 있었다. 다만 방 어디에서도 창문 비스무레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주방용 후드나 화장실과 방 천장 구석에 설치된 환풍기 따위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 전까지 묶여 있어 손끝이 살짝 저렸다. 현섭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조금전 세 남녀가 방을 나설 때 열렸던 문은 도로 닫혀 있었다. 그 문 옆에 다이얼도, 액정화면도 달리지 않은 새하얀 인터컴이 달린 게 현섭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든 인터컴 수화기 너머에서 방금 전 보았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당신 설마 아까 그!"

 "그러고보니 설명 못 드렸군요."


 수화기 너머에서 종이 비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책장 넘기는 소리일까? 아니면 무언가 서류 뭉치라도 정리하는 걸까? 현섭은 조금 전 본 여자 모습을 떠올렸다. 외양만 놓고 보자면 이 여자는 누군가의 비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꼼꼼하고, 지적이고, 침착하고, 단호하고.

 수화기를 통해서라서인지 여자 목소리는 얼굴을 대면했을 때보다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어쩌면 이제 막 옷을 갈아입고 잠을 청하려던 때였을지도 모른다...아니, 이건 전화가 아니라 인터컴이다.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건 사적 공간이기보단 사무실인 편이 더 어울렸다.


 "왠만한 것은 방 안에 모두 갖춰 놓았지만, 식품이나 소모품 따위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현섭 씨가 어떤 걸 필요로 하는지 알지 못하므로 기호품도 갖추지 못했고요. 때문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이 인터컴으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 건 필요 없고, 이 문이나 빨리 여시지! 지금 당신들 뭘 하는지 알고나 있어? 납치! 감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여자 목소리에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다.


 "이건 '은둔'입니다. 정황상 어쩔 수 없이 강제하긴 했지만, 이건 현섭 씨가 받아들여야 하라 사명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거기서 단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실 수 없겠지만, 자발적으로 희생한다 생각하시고 이 사명을 받아들여주셨으면,"

 "그런 억지 부리지 말고. 여기서 어떻게 계속 틀이박혀서 살 수 있다고 그래!"

 "어디까지나 이 세계와 모든 인류를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미친 년!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일까. 여자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현섭은 이봐, 하고 여자를 불렀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거듭 현섭이 수화기 너머 여자를 불러냈을 때도 답은 오지 않았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찰나, 다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위해서라고 생각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뭐라고?"

 "세계와 인류를 위해서, 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당신같은 별볼일 없는 남자를 생각하는 여자 한 사람을 위해서, 라고 생각해주실 순 없으시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아닙니다. 꺼낼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거기서 푹 쉬어 주시죠. 용건 없으시다면 이만 끊겠습니다."

 "잠깐만! 할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해! 방금 그게 무슨 뜻이냐고! 야!"


 수화기 건너편으로부터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쪽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더이상 여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현섭은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침대로 돌아와 뒤로 쓰러져 누웠다.


 "이게 다 대체 무슨 일이야, 진짜..."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 현섭은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전공 강의가 끝나고, 모처럼 술자리 약속 잡혀서 서둘러 교문을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불러 세웠었다. 짐 좀 실어 주라길래 승합차 뒷문을 열었더니, 검은 옷 입은 남자들, 납치당해서, 그 다음엔......

 어째선지 현섭은 그날 밤 악몽을 꿨다. 가위가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아 눈을 떠보니,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운 자기 몸 위에 아까 그 비서 여자가 올라타 있었다. 꿈 속에서 여자는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생명이 없는 것인 양 살갗이 싸늘했다. 여자가 자기 목을 조르려는 순간, 현섭은 기겁하며 잠에서 깨었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 시간을 짐작하기란 어려웠다. 갖고 있던 핸드폰도 납치당할 때 남자들에게 뺏겨 버린 채였다. 현섭은 자포자기해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홀로 있는 방은 소름끼치리만큼 고요했다.






 소위 '은둔' 생활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며칠간은 그랬다. 인터넷 게임을 하거나 TV에서 줄기차게 틀어주는 런닝맨 혹은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다보면, 끼니를 때웠는지 아닌지도 잊을 정도였다. 배가 출출하다 싶으면 인터컴 수화기를 들어 컵라면이나 피자, 짬뽕 따위를 시켰다. 주문을 받는 사람은 비서 여자일 때도 있었고, 때때론 남자일 때도 있었다. 어떤 주문을 하던지 10여분 정도 기다리면 정장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방 안에 넣어주고 갔다. 음식을 넣어주는 사람은 매번 달랐지만 모두 하나같이 양복 차림에 체격 건장해 무슨 보디가드들처럼 보였다. 키는 크지만 몸이 마른 편인 자신이 그런 떡대들을 뿌리치고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고 현섭은 생각했다.

 이따금 식사를 가져다주는 그 자들 등 너머로 언뜻 본 주위 풍경은 낯설고 또 딱히 어디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한 특징이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그저 이 '방'이 어느 건물 옥상 위에 옥탑방처럼 자리잡고 있다는 정도 뿐이다. 방문 앞 바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과 비교하면, 이 '방'이 자리잡은 건물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만은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방문으로부터 보이는 풍광은 전부 산지뿐이라 한산해 보였고, 이따금 멀찌감치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났다.

 인터넷을 할 수 있단 걸 알자 현섭은 메일이나 게임 채팅을 통해 친구들과 연락해 보았다. '나 납치됐어.' 대답은 십중팔구 이런 식이었다. '지랄한다.' 하긴 믿어준대봐야 도움이 될 거 같진 않았다. 현섭 자신도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기야 여자에게 이런 말도 들었다.


 "행여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어째서지?"


 첫날 이후로 여자는 줄곧 인터컴으로만 연락을 취해 왔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걸 어쩐지 꺼리는 듯했다. 그것을 현섭은 내심 아쉬워했다. 어쨌거나 자기와 인간답게 말을 주고받는 건 여기서 그 여자뿐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육성으로 하는 도움 요청이 아니면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나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인터넷 채팅 따위에선 더더욱 그렇죠."

 "그것 때문에 전화기를 뺏었다고?"

 "하나 더, 요즘 사람들은 휴대폰이 없으면 연락을 취할 상대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가족 전화번호도 그렇고요."


 어째서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이렇게 답했다. 현섭은 어째선지 오기가 생겼다.


 "하려고 마음먹으면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구조요청할 수 있어. 게다가 경찰에 신고당해 IP 추적이라도 당하면 여기 위치도 금방 들통이 날 걸?"

 "성인, 특히 젊은 남성이 실종당했다고 신고를 하면 대개 얼마간은 단순가출로 신고접수됩니다. 단순가출 정도론 경찰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하면서 여자는 말을 이었다.


 "설령 IP추적을 당한대도 쉽게 여기 위치를 알아내긴 힘들 겁니다. 프록시 서버 여러 대로 우회하고 있으니까요."


 어쩐지 묘하게 인터넷 속도가 느리더란 생각이 들긴 했다.


 "슬슬 점심 시간이군요. 뭔가 먹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피자! 라지로 열댓 판!"

 "알겠습니다."


 여자는 두 번 묻지도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십여 분 만에 방문 앞에는 뜨끈한 피자 열댓 판이 작은 탑처럼 현섭의 눈 앞에 쌓였다. 현섭은 곧바로 인터컴을 들었다.


 "이걸 지금 날보고 다 먹으라고?"

 "주문하신 대로입니다. 문제가 있나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조금만 생각해도 알 거 아냐! 그렇게 내가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으면,"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어한 건 그쪽이겠죠."


 여자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현섭은 잠시 분을 삭혔다. 어쨌거나 여자 말대로였다.


 "...가져가."

 "전부 수거해도 좋습니까?"

 "한 판만 남겨두면 돼. 그것도 많다고."

 "알겠습니다. 나머진 알아서 폐기하겠습니다."

 "잠깐만, 폐기한다고? 이걸 다 버리겠단 거야?"

 "방금 먹지 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현섭은 눈을 돌려 층층이 쌓인 피자판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혼자 전부 먹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기왕 시킨 거, 가져가서 나눠 먹어도 되잖아."

 "그것들은 전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들입니다."

 "...왠지 나를 방사선 폐기물 취급하는 것 같은데 말야,"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전 그저,"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동시에 수화기를 든 현섭에게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힘없고 작은 소리여서 그것이 누군가의 목소리란 걸 깨닫는 덴 시간이 걸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건 또다른 여자 목소리였다. 비서 여자나 떡대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인, 낯선 사람 목소리에 현섭은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비록 수화기 너머 낯선 여자 목소리가 너무나도 작고 또 멀게 들려와 그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따금 간간히 비서 여자 목소리가 섞여 들리는 걸 보면 두 사람이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낯선 여자에게 건네는 비서 여자의 말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해하고, 어울리지 않게 감정적이고, 평소답지 않게 완곡하게 들렸다.

 한 차례 대화가 오간 뒤 비서 여자는 다시 현섭이 붙잡은 수화기 너머로 돌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나머진 감사히 받겠습니다."

 "뭘 감사히 받겠다는 거야? 어차피 자기들이 산 걸,"

 "그걸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현섭에겐 어째선지, 여자 목소리가 살짝 격양된 것처럼 들렸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여자는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대화를 마쳤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연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편히 쉬시죠."


 조금 후에 남자 하나가 들어와 쌓여 있는 피자판들을 들고 방을 나섰다. 다시 홀로 조용한 방에 남겨진 채 현섭은 조금 전 들었던 낯선 목소리를 떠올렸다. 바람 소리나 TV 소리를 잘못 들은 것일까? 그렇다곤 할 수 없을 거다. 상대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 비서 같은 여자가 거기에 대꾸해준 건 분명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낯선 여자 앞에서 비서 여자 태도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현섭 자신을 가둔 건 비서 여자가 아니라...

 문득 어떤 생각이 불현듯 현섭에게서 떠올랐다. 이 낯선 상황이 사실은 낯설지 않고, 어딘가서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그 경험은 실제 현섭 본인이 체험한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본 이야기인 듯도 하다. 그 이야기란,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문득 읽은 것같기도 하고, 친구에게서 들은 것같기도 하다가, 나중엔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것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바보같은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라고."


 암만 그래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납치당해 강제 은둔 생활하는 영웅 이야기가 있을 것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는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좀 다른 성격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도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권선징악형인 전래동화라던가, 민담이라던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 채 깨어났을 땐, 이미 방 안은 현섭이 누웠던 자리만 빼놓곤 말끔히 정리된 후였다. 그러고보면 누군가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자주 봤어도 방을 청소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신경쓰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방청소는 현섭이 잠들었을 때 사람이 드나들며 하는 것 같았다. 비록 어떻게 창문도 없는 방 안에 있는 현섭이 잠들었는지 아닌지를 밖에서 매번 아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혹시 방 안에 감시 카메라라도 있는 거야?"


 다시 인터컴을 들었을 때, 현섭은 어째선지 비서 여자에게 직접 물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여자는 한 치 주저 없이 답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어째서야?"

 "저희가 필요하니까요."


 그러니까 이 인간들은 멋대로 사람을 납치해 감금하고, 거기에 24시간 내내 사생활도 없이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었단 얘기지. 현섭은 화를 꾹꾹 눌러 삼키곤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몰상식한 상대에게 화를 내봐야 이쪽 입만 아프다.


 "좋아. 그럼 대체 방 청소는 대체 누가, 언제 와서 하는 거야? 당신이야?"

 "...제가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째선지 여자는 대답을 회피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에 현섭은 조금 당황했다. 약점을 잡았으니 기뻐해도 될 테지만, 그것이 전혀 의외인 화제에서 밝혀지니 현섭으로서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처했던 것이다.


 "어째서 대답 못하는 거지?"

 "대답 못하는 게 아닙니다. 대답할 필요가 없단 거죠."

 "그거 거짓말이잖아. 어째서 그런 걸 감추려는 거야? 딱히 내가 안다고 해도 상관없잖아, 그런 얘긴."

 "알아도 상관없는 얘기라서 안하는 것 뿐입니다."

 "지금 말꼬리 잡고 늘어지고 있는 건 알고 있어? 둘러댈 거리도 없나보지? 왜, 내가 아는 사람이기라도 한 거야? 내가 알면 안되는 사람이기라도 해서?"


 비서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섭은 돌연 수화기를 붙잡고 건너편에 있는 사람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거기 있는 거 누구야! 누군데 이런 장난질이냐고! 이게 재밌냐? 사람 가둬두고 갖고 노는 게 즐겁냐? 너 나 아는 놈이지? 윤섭이냐? 지훈이냐? 시발, 누군지 몰라도 나가면 한번 보자!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려니까, 그냥!"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현섭 씨."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섭은 다시 뭐라고 얘기하려 했지만, 여자가 먼저 말을 끊고 들었다.


 "한 가지 말씀드리죠. 여기엔 당신이 아는 사람이라곤 없습니다. 윤섭이고, 지훈이고,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여기 오지 않았습니다. 출신 학교로건, 지역으로건 간에, 어쨌거나 지금 여기 당신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얘깁니다. 제 말 무슨 얘긴지 알아들으셨나요, 현섭 씨?"

 "지금 그걸 믿으라고..."

 '믿지 못하시겠다, 이거죠? 좋습니다. 믿어달라고 하는 소리 아니니까요. 당신이 그런 망령이나 피해망상과 다투며 이 은둔생활을 스스로 괴롭게 만드시겠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 말씨에는 조금 주의를 해 주시죠. 여기엔 당신 같은 사람이 막말을 퍼부어도 좋을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설령 납치, 감금 같은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고 해도 말야?"


 여자가 혀를 참과 함께, 건너편에서 딸깍,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현섭에게 들렸다. 현섭은 수화기를 내려놓곤 의자에 깊숙히 몸을 실어 앉았다. 젠장, 하고 현섭은 책상을 발로 세게 찼다. 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지적이고 꼼꼼하긴 개뿔, 꼬장꼬장하고 깐깐한 늙다리 년 주제에. 더이상 현섭은 그 비서 같은 여자에게 흥미가 없었다.

 화가 나면 몸을 움직이게 된다. 이 '방' 밖에서 지낼 땐 현섭은 자주 뜀박질이나 축구공을 차고, 아니면 하다못해 오락실 펀치볼이라도 두들기며 화를 풀었다. 본래 좁은 방인데다 빼곡이 가구들로 들어찬 이 방에선, 그런 식으로 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윗몸일으키기나 팔굽혀펴기 같은 거라면 또 모를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자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현섭은 도로 침대로 기어 들어가 눈을 감았다. 몸은 피곤하지 않은데다 화도 풀리지 않아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억지로 잠을 청한지 한참이 되어서일까, 누군가 밖에서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현섭은 화들짝 놀라 윗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이 시킨 것도 없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문이 열리고 방 안에 들어온 건 뜻밖에도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밖이 어두웠고, 방 안 불도 꺼둔 채라서 상대 얼굴을 알아보긴 힘들었다. 품에서 작은 LED 스탠드를 꺼내어 책상 위에 세운 뒤, 상대는 그 조명에 의지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순간 현섭과 눈이 마주쳤는지, 상대는 화들짝 놀라 힉, 소리를 내며 바짝 뒤로 물러섰다. 그 여리고 새된 목소리가 어째선지 현섭 귀에 익었다.


 "누구야, 넌?"


 아직 눈이 빛에 익지 못한 현섭이 상대에게 물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머리를 기른 걸로 보아 상대는 여자인 듯했다. 체구는 중고생 정도이고, 어째선지 품이 넓은 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아이 손에 들린 걸레조각을 보고 현섭은 곧바로 무언가를 떠올려냈다. 자신이 잠에 들 때만 찾아와 방을 정리하는 누군가가 있다. 비서 여자는 끝내 그게 누군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어째서 그녀가 한사코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현섭은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 앞에 있는 그녀에 대해 감추려 했던 게 분명하다.

 비로소 현섭은 과거 자신이 읽었던,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냈다. 여전히 긴장한 여자를 향해 현섭은 말을 걸었다.


 "네가 내 우렁각시로구나, 맞지?"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여자애는, 아직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현섭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네, 맞아요. 그게 바로 저예요."






 "어디 몸이 안 좋기라도 한거야?"


 방 안 불을 켜고 여자아이를 앉혀놓은 뒤, 현섭은 가장 먼저 그 질문을 던졌다. 환자복을 입은 아이는 웃는 낯빛으로 답했다.


 "큰 병은 아니에요. 다만 병이 만성이 되어서, 치료를 오래 받아야 한대요."

 "그것 참 힘들겠네."

 "치료받는 건 괜찮지만 오래 입원해 있다보니까, 뭐랄까 많이 지루해요."


 소녀가 어떤 심정인지 현섭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과 며칠뿐이지만 자신도 이런 방에 홀로 갖혀 지내봤으니까.

 순간 현섭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입원한 병원은, 혹시 여기야?"

 "네. 맞아요."

 "이 방은 병원 옥상에 있고?"

 "맞아요. 모르고 계셨어요?"


 빙고! 이제 자기 위치에 대해서 한 가지 단서를 더 얻은 셈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섭은 여자아이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얘, 그러면..."

 "재희에요. 윤재희."

 "음, 그래. 재희야. 혹시 여기 병원 이름은 뭔지 알 수 있을까?"

 "...죄송해요. 그건 절대 말해주지 말라고 들었거든요."


 역시나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리진 않을 모양이다. 현섭은 그 이상 단서를 얻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렇게 병실 나와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요. 얘기해두고 왔는걸요."

 "얘기해두고 왔다니, 누구에게 말야?"

 "간병인, 이라고 해야 할까... 아빠 회사 사람인데, 저 돌봐 주시느라 병실에 같이 지내고 있어요. 오빠도 본 적 있댔는데, 기억하세요? 이렇게 눈매 치켜올라가고..."

 "아, 그 사람이 네 보호자니?"


 이렇게 반문하면서도, 현섭은 재희가 말하는 게 정확히 누군지 긴가민가했다. 현섭 생각대로면 재희가 말하는 건 그 비서 여자이지 싶었다. 다만 현섭으로썬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이 가녀린 소녀 보호자가 그런 인간미 없는 아줌마란 사실이 말이다.

 현섭은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재희 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니?"

 "뭐가 말예요?"

 "지금 이거 말야. 왜 내가 납치당해 이런 곳에 감금되어 있는지, 어째서 그 여자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지, 너는 어째서 나도 모르게 내 방에 드나들면서 청소를 해야 하는지."

 "딱 하나는 확실히 대답해드릴 수 있어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재희녀는 현섭에게 말했다.


 "적어도 전 제가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하지만 이젠 이런 일 하지 않아도 돼."

 "어째서요?"


 눈이 휘둥그레진 소녀에게 현섭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몸 아픈 애한테 자기 방 청소 맡겨놓을 정도로 난 나쁜 사람이 아냐. 게다가 넌 청소뿐만 아니라 설겆이며, 빨래 같은 것도 하고 있지? 생판 모르는 여자애한테 속옷 따위를 맡겨둘 순 없으니깐,"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할 말을 고르는지 재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좋아해요!"

 "뭐라고?"

 "그, 그게 아니고 이런 거 좋아한다고요. 억지로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청소하는 것도, 빨래도,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그러니까, 저는..."

 "무슨 소린지는 알겠어. 근데 말야, 나도 남잔데 솔직히 좀 부끄럽거든. 그러니까 부탁할께.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해둘 테니까, 이런 식으로 매일 와서 청소할 필요 없어. 알았지?"

 "그러면 저는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하죠?"


 살짝 글썽이는 눈을 들어 재희는 현섭을 보았다. 현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자신을 가둬놓은 누군가가 비서 여자나 또 이 소녀를 시켜 자기를 감시하고 또 청소나 이런저런 잡일을 돕도록 억지로 시키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여자애가 뭐가 아쉬워 현섭 자신의 빨래나 청소를 하고 또 그걸 못하게 한다고 눈물까지 보이겠는가? 이 소녀가 해오던 빨래나 청소를 억지로 못하게 하면, 소녀에게 뭔가 해가 될 일이 일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이 일을 해주는 대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고, 이 일을 하도록 협박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소한 청소나 빨래까진 아니더라도 이 방에 찾아오는 것만은 막지 않아야 옳은 것이 아닐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돼. 청소나 빨래를 하러 굳이 올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그럼, 일이 없어도 언제든 와도 된다는 거네요..."


 현섭이 한 말에 재희는 기뻐하는 듯했다. 현섭은 다행이라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면 저는 이만 나가 볼께요. 쉬시던 중에 불쑥 들어와 깨운 거 죄송해요."

 "아냐, 어차피 잘 기분 아니었으니깐 괜찮아."


 그러면 편히 쉬세요. 이 말을 남기고 재희는 자기 소지품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소녀가 나가고 현섭은 다시 자리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 바보같은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관되어 있는 걸까? 이 모든 일을 지시하고 감독하는 미친놈은 대체 누구인 걸까? 자기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걸 보면 어찌됐건 평범한 사람은 아닌 거겠지.

 재희에게 좀 더 물으면 더 많은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언젠가는 이 방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이다가 현섭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가씨, 오늘은 좀 어떠세요?"


 재희가 있는 병실에 정장 차림 비서 여자가 들어선 건 그로부터 한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도착하자마자 여자는 보호자 침상 위에 앉아 재희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요. 일은 잘 됐어요?"

 "네. 죄송합니다.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자리 비웠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대답하는 와중에도 재희는 줄곧 병실에 설치된 TV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TV 화면은 6분할된 채 각각 다른 방향에서 모두 현섭이 있는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여자도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곤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재희 아가씨, 잠시 할 말이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말씀하세요."

 "이제 내일모래면 저 남자가 온 지도 딱 열흘이 됩니다."

 "그래서요?"

 "미리 말씀드렸었죠? 이 이상 오래 붙잡아두는 건 무리입니다. 슬슬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곤 실종 신고를 할지도 모르고, 행여나 경찰에서 움직이기라도 하면 일이 귀찮아집니다. 지금은 얌전히 있는 거 같지만 저 남자도 슬슬 탈출을 시도할지도 모르죠."

 "조금 더 지켜보게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다른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이 눈치채기라도 한다고 생각해보시죠. 저런 간이 컨테이너 주택에 한 사람을 일주일 넘게 감금해두고 있다고 하면, 아가씨는 물론이고 틀림없이 사장님께도 문제가 됩니다. 아가씨, 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건데요? 저한테도 얘기해주실 수 없는 겁니까?"

 "말했을 텐데요. 전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저렇게 가둬두진 않아요."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 아닙니다! 아가씨, 상황을 이해하셔야 되요!"

 "하지만 저 사람이 저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걸요!"


 잠깐 동안 병실에 침묵이 흘렀다. 바깥 복도에선 온갖 바퀴 달린 것이 굴러가는 소리, 목발 짚는 소리, 기침 소리 따위가 소독약 냄새와 함께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가끔 전화기 소리가 울리고, 다급히 슬리퍼를 끄는 소리, 무언가 외치는 소리 따위가 그 사이사이에 끼어들기도 했다. 소란스럽지만, 거기에 생동감이나 활력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수백, 수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건물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먼저 입을 뗀 건 재희였다.


 "서울 병원에 있을 땐 자주 창밖을 보곤 했어요. 거긴 시내 한복판이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 담장 밖을 매일같이 오가는 게 다 보였거든요. 그걸 보면서, '저 사람은 무슨 일을 하겠지', '저 사람은 어디에 가는 중이겠지' 하는 것들을 상상하는 게 마냥 즐거웠어요."

 "아가씨..."

 "그렇게 낯선 사람들 삶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게 남의 삶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건 더이상 그들만의 삶이 아녜요. 왜냐면, 그걸 상상해낸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저인걸요? 비록 몸은 여기에 있지만, 저는 담장 밖에서 그들이 되어 살아가요. 때로는 학생이었다가, 회사원도 되고, 아르바이트생도 되고..."

 "..."

 "알아요. 그건 전부 제 환상이죠. 언젠가 한 번은 담장 건너편을 지나는 커리어우먼이 되어 본 적이 있었어요. 잰걸음으로 길을 걷던 그녀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걸 보는 저도 마치 무릎을 찧은 양 따끔해했죠. 바로 그때에요. 보도 위에 넘어진 젊은 회사원을 다들 스쳐지나갈 때, 저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줬어요. 몸을 일으켜 세우는 걸 도와주고 괜찮은지 물어봐 줬어요. 친절을 베풀어 줬단 말예요. 당신은 그가 그 여자 회사원에게 친절을 베풀어줬다고 하겠죠. 하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제게도 손을 내밀어 친절을 베푼 양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저 남자라면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저 남자라면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요."

 "이런 방법으로 말입니까?"

 "이런 방법으로도 가능했어요."


 재희가 짓는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여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재희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기 전까지 말이다.


 "현섭씨가 저를 뭐라고 부른 줄 알아요? 우렁각시래요.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대요."

 "설마 그 방에 들어가셨어요?"

 "벌써 몇 번이나 들어갔었던 걸요? 가끔 혼자 있을 때 한번씩."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없을땐 결코 그 방에 아가씨가 들어가선 안된다고요.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신 거예요! 혹시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좀전에 도서관에서 우렁각시 얘기를 찾아 봤어요."


 여자의 말을 끊고 재희는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사람들은 남자가 착실해서 우렁각시를 얻었다고 하지요. 전 이렇게 생각해요. 남자가 우렁각시를 얻은 게 아니라, 우렁각시가 그 성실한 남자를 얻은 거라고. 왜냐면, 처음부터 상대와 함께하려 노력하고 길들인 건 남자가 아니라 우렁각시였잖아요?"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요, 그 남자가 영원히 저만 보면서 저에게만 완전한 헌신을 바쳐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게 뭐 이상한 건가요?"


 여자는 할말을 잃고 재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희는 줄곧 TV 속 현섭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 미소짓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자기 잘못인 건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느꼈다. 재희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작은 아이가 너무도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받아왔다는 게 안쓰러웠다. 자신은 이렇게 멀쩡한데 재희는 고통받는 이유가, 바로 그녀 자신의 죄악까지도 재희가 모두 짊어진 탓인양 죄책감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항시 엄하고 깐깐했던 여자가, 유독 재희에게는 모질게 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재희가 부탁하는 거라면 그게 무어든 여자는 최대한 들어주려 해왔다. 그게 설령 위험하거나 어려운 일이라 해도, 설령 현섭 일처럼 범죄 행위가 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재희의 망상벽을 키웠다. 그 사실 때문에 여자는 다시금 자책하고, 그 죄책감이 또다시 재희를 향한 아낌없는 헌신으로 바뀌어 쏟아진다. 어쩌면 재희에게 사로잡힌 건, 저 현섭이란 남자뿐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 순간 여자 눈 앞에 환각이 어른거렸다. 바닥 없는 수렁 속으로, 재희도, 현섭도, 여자 자신도 끊임없이 빠져들어가는 환각이었다. 그것은 재희가 만든 수렁이다. 여자는 어째선지 그 사실을 알았다. 환각 속 세 사람은 몸을 잔뜩 웅크려 말고 있었다. 여자는 그것이 시골집에서 본 우렁 껍데기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문득 껍데기 틈으로 새어들어로는 가을 햇살이 따스해서, 여자는 그 쪽을 향해 두 팔을 뻗어 보았다. 그 손을 붙잡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여자가 내민 손끝은 하릴없이 허공을 훑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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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욀슨 2012.09.30 20:51
    인상 깊은 마무리군요. 꼬이고 꼬여서, 어떻게 해도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이 관계가 너무 좋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10.05 00:49
    개연성 있게 설명이 되었는진 모르겠지만요;; 이런 관계 저도 좋아요
  • profile
    XatraLeithian 2012.10.01 18:55

    안녕하세요 윤주님. 간만입니다 'ㅅ'/ 간만에 보는 글이네요.

    소설의 전개를 보면서 혹시 내가 예상하는 그게 아닌가 라고 생각했는데...어느정도 일치했네요.

    망상벽...그리고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하는 소녀 그리고 그 소녀 덕에 갇혀진 남자....무서운 느낌과 함께 뭔가 가련하고도 슬프기도 하네요. 동정심이 들기도 한다랄까...

    결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저 같아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글 잘 보았어요. 최근 슬슬 컴뱃을 시도하는중입니다(....귀차니즘이 이젠 문제군요 ; )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새글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ㅅ'/

  • profile
    윤주[尹主] 2012.10.05 00:51
    사트라 님 쓰시는 글들에 대한 어수룩한 모방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쓰고 나니 비슷한 분위기가 된 거 같아서요 ㅎ
  • profile
    yarsas 2012.10.01 20:55
    윤주 님 작품 오랜만인네요. 추천 수도 장난 아니군요 ^^;;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신착란자 이야기라 더 재미있었던 듯..
  • profile
    윤주[尹主] 2012.10.05 00:52
    어떤 분들이 다 추천을 찍어주고 가셨는지 궁금하네요;; 황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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