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07 04:43

랜덤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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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해가 반 넘어 또 반이구나. 한 시간도 못 버티고 서쪽으로 떨어지겠네. 사람 힘빠지게 만드는 주황빛 햇살에 눈을 돌리다가, 저희들끼리 낄낄대던 한 커플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바라보는 네 개의 눈이 결코 곱진 않다. 그냥 눈 한번 마주친 걸 가지고 왜 그리 한대 팰 기세로 눈총을 주나요, 아이고 무셔라. 서둘러 고개를 홱 돌린다.


 


 진행이 루즈한 영화를 골라버린 바람에, 영화관 맨 앞자리까지 잡아놓고선 영화 끝날때까지 앉은 자리에서 상모를 돌렸다. 크리스마스라고 남들이 다 밖에 우르르 몰려나와 놀고 있으니까 나 홀로 집에 콕 박혀있으면 지는 것같고, 그래서 나홀로 적적하게 영화나 보러나왔더니 요모양 요꼴이다. 왜이리 되는 게 없니 그래.


 


 솔로네 커플이네 하는 이야긴 제껴놓더라도 저기압일때 술 마실 친구가 없는 건 너무 암울했다. 뭐 크리스마스에 술 마시는 솔로들이면 우스갯소리로 루저들인데, 없으면 오히려 다행인건지도.


 


 윽, 이건 좀 안 좋다. 얇게 둘린 베둘레햄 안쪽에서 꾸르륵 소리가 울린다. 아침도 아니고 오후도 아닌 어중간한 때에 컵라면만 한 개 말아먹고 나와선 PC방에나 쳐들어가고, 담배냄새 폴폴 풍기면서 영화관 들어와서 앉아서 잤으니 소화가 될리가 없지. 무리해서 남들처럼 굴려다가 탈만 냈군 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 참을 수 있어. 미련하긴 하지만 집 밖에서 건더기 빼느라 더 머무르는게 더 아깝다. 역시 홈 스위트 홈. 집에 들어가서 이불 속에서 TV보는게 솔로의 공식이지. 상영시간 차이가 좀 있는지 로비에 사람이 별로 없다. 이쯤되면 계획성없이 영화보려다가 매진되서 징징거릴 커플이 아니고서야 사람이 더 올린 없지.


 


 해서, 사람없는 엘리베이터에 내 몸만 홀로 경쾌히 올라선다. 퉁퉁퉁. 이런, 이건 별로 경쾌하지 아니한데. 문이 닫혀가고, 자동에 가깝게 1층 버튼으로 내려가던 손이 이상한걸 발견했다.


 


 '어.. 이게 뭐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로 '랜덤' 이라고 적혀있는 버튼. 네이버의 모 웹툰에서 이것과 관련된 짧은 만화를 본 기억이 있었는데, 그게 정확히 뭐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쓰잘데기없는걸 기억해봐야 기억력 낭비지.


 


 승객들을 위한 작은 유흥일까? 랜덤 버튼이라. 누르면 진짜 아무 층으로나 막 가버리나? 훅~ 가버리나? ..몹쓸 예능 흉내. 호기심이 동해 눌러보려다가 잠시 생각한다. 이 건물에 내가 가선 안될 엄한 데가 있나 하고. 예식장이니 영화관이니 PC방이니.. 예식장은 좀 그렇지만 안될 것도 없지 않나. 어차피 잘못 눌렀다고 하면서 1층 누르면 장땡 아닌가.. 괜찮겠지. 누릅니다. 딸칵.


 


 자자자, 움직입니다 움직여요! 엘리베이터야 날 몇 층에 모실테냐. 머릿속에선 빵빠레 울리기 전 두구두구두구하고 빠르게 두들겨주는 북소리가 오버랩된다. 멈추는 순간 빵빠레가 터지겠지. 물론 머릿속에서만.


 


 하지만 이건 좀 실망스럽네. 띵! 엘리베이터도 내가 빨리 꺼져주시길 바라는지 1층으로 쭉 내려왔다. 흠흠. 헛기침을 작게 하고 군중 속으로 섞여든다.


 


 뉴스에서 눈이 내릴거네 어쩌네 해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해봤지만 로망은 개뿔 낭만은 쥐뿔. 이보쇼 하늘님! 이건 좀 아니잖아요! 얘야, 내가 눈을 펑펑 뿌리면 다음날 청소부 아저씨들은 얼마나 고생하시겠니. 눈내렸네 신났다 하고 뛰놀다 미끄러져 크게 다칠 아이들은 어떻고. 모두를 위한다는 것은 다수의 행복을 위하는 것보다 소수의 불행을 피하는 것이란다. 아 그렇군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근데 쓸 데가 없네요. 우린 일어나지 않은 불행은 생각도 못하는데 일어나지 않은 행복은 잘만 생각하잖아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텐데, 하늘님은 고독하시네요. 그래, 나도 너처럼 솔로란다. 흑흑흑. 그렇게 하늘도 울고 솔로도 울고 나도 울었다.


 


 상황극 1 종료. 이제 집에 다왔다. 야후 신나는 우리집! 나와 동생만 사는 2층짜리 단독주택!! 이 놈은 보나마나 2층서 문잠그고 오덕거리고 있겠지. ~짱 거리고 하악거리고 옆구리에 책끼고 사는 세간의 농담거리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만화를 컴퓨터나 MP로 보면 그걸로 게임오버. 뭐 그건 걔 인생이고, 나도 소년가장이나 다름없으나 별 힘도 없으니 위세떨면서 훈계할 철면피가 못된다. 게다가 시대의 명언이 있잖은가. '너나 잘하세요'!. 나나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꼬리 말고 들어가야지. 공부는 동생이 훨씬 잘한다. 난 고등학교는 졸업했지만 평일에 놀고. 동의어는 대학 떨어진 놈. 아아, 왜이렇게 암울해지냐. 루저면 루저지 루저 오브 루저가 될 참인가. 어서 집에나 들어가자.


 


 눈을 털고 신발을 벗는다. 현관이 넓으므로 눈 털어봤자 마루엔 안떨어진다. 1층에 왜 불이 켜져있는건지 모르겠네. 이녀석이 웬일로 컴퓨터를 안하고 있나 하고 생각한다. 현관에서 더 들어가면 복도가 사거리가 되는데, 더 들어가서 오른쪽이 안방이다. 집에서 기르고있는 검은 고양이 초생이의 서식처기도 하고. 숫놈인데 발정기가 되어서도 난리를 안피워서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녀석이다. 음.. 설마 고자? 아, 아니, 수의사 양반! 그게 무슨 소리요! 어.. 주인에겐 문제가 없네요.. 어.. 선천적인 생식 불능입니다. 이 고양이는 고자에요. 고자. 뭐요? 아이고 이 불쌍한 것. 세상에, 고자라니! 내 애완고양이가 고자라니!! 앙대!!


 


 상황극 2 종료.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고서나 이렇게 불을 켜놓고 다니는건가? 속이 탄다 속이 타. 거실 불도 끄고 베란다 불도 끄고.. 안방은 TV가 켜져있는지 약간 시끄럽다. 이 놈, TV 안보면서 켜논거면 차단기를 내려버리고 말겠어.


 


 다행히 속없는 짓은 안했다. 쇼파에 누워있군.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다? 초생이 씻길 때 쓰는 비누 냄새가 왜 이 녀석한테서 나는거지? 얘가 고양이 끼고 놀아줄 놈도 아니고, 초생이 녀석이 개처럼 친하게 구는 것도 아닌데.. 설마 이녀석이 개과천선해서 초생일 목욕이킨건가!! 보름이가 싼 똥을 밟는 한이 있어도 안 치우는 더티한 녀석인데!! 너무 크리스마스를 과대평가하는 거야 이건.


 


 이보쇼.. 만약 앞에 떠들어댄 내용의 결론을 인용하자면 이게 내 동생 놈이 아니란 이야기가 되는데, 그게 말이 돼? 무단 가택침입을 한 동생 또래의 어느 소년이냐? 번짓수를 잘못 골랐네요 그럼. 여긴 솔로만 살아서 빈집살이나 빈집털이는 들어올 자리가 없거든. 경찰서로 보내버리겠어.


 


 팔자좋게 이불까지 덮고 있네. 거기다 신비주의를 가장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가렸어. 집주인이 왔는데 팔자좋게 가부좌틀고 TV를 보시겠다? 망치로 뒤통수를 깨버리고 싶군. 선빵필승이라지만 가택침입vs무단폭력중 어느쪽이 더 과한 범죄인지 난 모르겠으므로 함부로 패버릴 순 없다. 망치로라면 더더욱! 그건 닥치고 교도소다. 난 이제 소년원 갈 나이가 아니라고! 갈 짓도 안했지만. 게임 아이디중에 이런거 꼭 하나씩 있잖아. '밟아보니엄마' '패고보니여친' 같은거. 짧지만 교훈이 담긴 여섯글자의 아름다움이 있지. 내 경우엔 (이불을)걷어보니(생판모르는)남자 겠군.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을 대폭 생략했지만 그게 뭔 상관이냐! This! Is! My home!! 내 집에선 내가 왕이다. 동생님은 영의정.


 


 정말 오늘따라 잡생각이 끝이 없군. 이 집의 가장家長다운 일을 하자.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불 위로 발길질은 하지 말자. 내가 아니라고 믿었던 동생이 이불 밑에서 신나게 밟힌 뒤 "왜 밟냐?" 이렇게 말 걸어오면 난 빌어야하니까. 내가 잘못했는데 미안해서 더 패? 영의정이 왕한테 깝치는 소리지. 아니 뭐, 우리집은 조선시대가 아니르모 깝쳐도 괜찮습니다만.


 


 ..하여, 이불을 걷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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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 버튼을 엘리베이터에서 발견했을때, 난 그것을 누르지 말았어야했다. 겨우 그 버튼 한 개와 엘리베이터가 내 인생을 얼마나 망쳐버릴수 있는지는 알 리가 없었지만.. 뭐든지 한 가지의 소원을 이루어주겠다면, 내 생애 간절히 빌 소원이란 단 하나밖에 없으리라. '그 버튼이 존재하지 않게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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