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7 06:26

CRESCENT MOON - 단편

조회 수 42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시작에 앞서,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극중 등장하는 케르티어라는 집단은 '닌자'를 각색한 것입니다.


 


 


 


 


 


KeRtir. 그림자의 춤이라는 뜻. 은밀히 계승되어 왔으나 C.W. 500여년경 제런의 몰락과 함께 이 집단의 존재가 역사의 표면으로 불거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제런의 검사집단 천영과 협력하여 리베리티 침략기 10여년만에 리베리티로부터 제런의 영토를 탈환하기에 이른다. 케르티어는 검술과 체술, 은신에 능하며 독자적인 마법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캐린이라 불리며 손으로 마법진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연속적으로 변화함으로 마나의 흐름을 제어, 마법을 시전시킨다. 그들은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장해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회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두령의 존재로 전쟁의 승패가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던 당시의 전쟁으로서 그들은 은폐된 집단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가에 볕이 들기 시작한다. 창살 사이로 햇빛 한가닥이 리아나의 눈꺼풀위로 내려앉았다.


  사실 그미는 이미 깨어있었다. 오랫동안 몸에 배어버린 탓에, 이제는 그 생활에 속박되어버린 자신에게 의미 없는 반항을 했을 뿐이리라.
  눈을 떴다.


  변하지 않는 천장.
  변하지 않았던 그미의 시간.
  그리고, 변하지 않을 현재. 언제까지고 그대로 일 것 같은 모든 것은 그미의 주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귀밑으로 찰랑거리는 주황빛 머리칼을 이마부터 천천히 쓸어 올렸다.


  "후우…….  "


 


 


 


  치마 단이 긴 푸른 파스텔톤 원피스를 입은 리아나는, 아까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웃음기 가득하고 밝은 얼굴은, 더이상 아침의 차가움이 흐르지 않는다.


  북적거리는 시장길을, 몇몇 리아나를 보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웃음 머금은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걸어갔다.


  "오, 안나! 좋은 아침이지?  "
  쾌활하게 리아나에게 인사를 하는 식료품가게 주인. 많이 웃어서 발달된 것 같은 광대뼈도, 눈 주위의 주름도 푸근한 느낌이다. 그미는 빙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리아나는 낯익은 한 남자가 비췄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로 접근하는 것을 확인하고 자연스레 시선을 가게주인에게로 돌렸다.


  "흐음. "
  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허리를 굽혀 진열된 식품을 바라본다. 그 모습은, 가족들과 둥근 테이블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며 빵을 쪼개는 식사를 상상하는 소녀의 행복한 표정으로써 부족함이 없었다. 가게주인은 리아나가 어떤 식사를 만들지 고민하는 모습에 퍽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릎을 받치고 있던 두 손을, 뒷짐 지듯 등뒤로 가져갔을 무렵, 누군가의 손이 그미의 손과 닿았다. 그리고 피부가 아닌 다른 물건. 여러번 접힌 종이가 그 찰나에 리아나의 손으로 넘겨졌다.
-툭
  리아나에게 무언인가 건네준 마른 체격의 남자가 리아나와 살짝 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리아나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그가 뒤로 돌아보더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면서,


  "실례. "  
  그리고 뒤돌아 서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저, 저, 저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보아하니 이방인 같은데 사람을 넘어뜨려 놓고 그냥 가는 게. " 
  "어머, 넘어지지는 않았는데요? "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반문하는 그미에게, 주인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크흠. 그럴땐  '까악'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철푸덕 쓰러지는 거야. 그럼 안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시장에 청년이 손을 내밀어 안나를 일으켜 세우고, 버릇없는 저 청년에게 장갑을 벗어 던져 결투를 신청하지 않겠니. " 
  "요한 말인가요? "


  "물론 그애도 포함해서, 온 마을 청년들이 연모해 마지않는 안나양이지 않나. 안나에게는 멋진 남자친구를 얻을 기회가 되지 않겠어?".  
  리아나는  '꺄악'을 연기해버린 아저씨의 무서운 낯짝 두께와, 바닥에 쓰러지는 소녀를 철푸덕으로 표현해버린 센스를 꼬집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이 꺄르륵거렸다.
  "근데 요한은 어디 나갔나요? 안보이네. 그 밀가루 작은 포대 하나요."
  가게주인은 1큐빗 정도 되는 작은 밀가루 포대하나를 들어냈다.


  "삶의 고단함과, 적자생존의 치열한 세상을 몸소 체험하고 있지."
  " …하아?  "
  어색한 침묵이 흘러버리자 주인은 무안한 듯 리아나의 얼굴 앞에 밀가루 포대를 불쑥 디밀었다.
  " 50코퍼스폿. 배달 갔단다. 없는 사이에 네가 들렀다는 것을 알면 날 원망하면서, 포대 뜯는 나이프를 챙길지도 모르지.  "


  " 그건 왜요? "


  "백스텝용. 그러니까 안나가 들른 것은 비밀이다. "


  리아나는 그 대답에 웃으며,


  " 대신, 과일잼 한 병 값 깎아주기, 어때요?  "


  협상을 시도해 버렸다. 아저씨는 껄껄 웃는다.


  " 안나가 이 마을에 온지 한 달쯤 되었니? 이제 생활은 익숙해 졌고?  "


  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반리터정도 용기의 과일잼을 주었다.


  " 자아, 이건 55코퍼스폿. 총 1실버 5코퍼스폿. 이중에 25코퍼스폿은 내 목숨값으로 제하도록 하지.  "


  " 와아, 감사합니다.  "


  값을 치른 리아나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나선다.


  " 요한한테 너 왔었다고 전해주마.  "


  " 어머, 아저씨 죽는 거 싫어요.  "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리는 아저씨를 보며, 리아나도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 잼 맛있게 먹을께요.  "


  가게를 나오던 리아나는 시장 한쪽이 시끄러운 것을 느꼈다. 원래 시장이란 어수선한 곳이니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집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 비켜! 다치기 싫으면 비키라고!  "


  멀쩡한 대로를 두고 시장길을, 그것도 육두마차를 끌고 온 어처구니없는 인간에, 시장 사람들은 적잖게 당황했다. 필시 안내자가-분명히 방금 전 소리지르던 사람일 것이다- 헤맸기 때문이라.


  마차의 앞뒤로, 한 소대 규모의 기마병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선두의 길치는 나름대로 기사같이 보이는 지휘자였다. 아마도 처음엔 마차를 둘러싸는 듯한 대형으로 가고 있었으나  기사같이 보이는 자 에 의해 이 길로 온 후, 양쪽의 호위를 앞뒤로 보낸 것 같다.


  저들은 리베리티의 사신으로, 제런과의 회의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왕족과도 연관이 있는 귀족으로, 제런과 리베리티간의 연합작전에 관한 회의로 내국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종 목적지는 왕궁의 작전담당관 이겠지만, 지금 이곳의 영주가 병법이 뛰어나다 알려진 제런의 전 작전담당관으로, 사전 검토를 위해 이 곳의 영주를 먼저 만나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말하고 보면 꽤나 높은 간부일 법 한데, 호위가 부실한 느낌을 준다. 리아나는 무리를 주욱 훑어보다가, 선두의 지휘자 뒤로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약간 외소한 듯한 느낌을 주는 체구였다. 분명 검사로 보임에도 방어구는 양팔의 암실드-팔 하박을 감싸는 금속제 호구-가 전부였다. 마법검사일 것이다. 그것도 높은 수준의.


  그는 제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종족인 이스트보우-동이족-로 보인다. 이스트보우족의 대단히 높은 자긍심, 또 그 때문에 가지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에도 그는 리베리티의 호위기사-정확히 어떠한 직위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로서 살고 있다. 분명 그는 험한 인생을 살아왔고 이겨냈을 것이다.


  그리고 마차 뒤에서 호위하고 있는 사람, 그 중에 호리한 몸집이 마차 뒤에 가려, 마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도 있었다.


  그는, 아니. 그미는 인간이 아니다. 도대체 어떠한 친분 때문에 리베리티가 엘프의 호위를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사로서 그미가 가지는 능력은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리아나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짧은 한숨을 쉬며 부엌 쪽으로 발을 옮겼다. 거실 반대쪽 허리높이의 식품장을 열어, 시장에서 구매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 못 알아 보겠더군. 너무 감쪽같은 걸.  "


  그미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인기척을 숨기고 있던 한 남성이 입을 열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남자가 자신을 죽일 작정으로 있었다면,풍기는 살기에 리아나가 진작에 눈치챘을 것이다. 리아나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입을 열었다.


   "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 그 귀한 몸 끌고 오기 힘들었을 텐데.  "


  " 리아나가 내가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내 실력일까, 네 방심일까.  "


  키들거리는 남자의 말소리에 리아나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 시장에서 건넨 것말고도 볼일이 더 남아있나? 말장난하러 예까지 행차한 거라면 다음부턴 목숨걸고 있어야 할거야.  "


  " 왜 이리 저기압이야? 님에게 바람이라도 맞으셨어?  "


  그 말에 리아나는 차가운 투로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 시덥쟎은 소리 짖어댈 거라면 이만 꺼져 버리시지. 옆에서 숨죽이고 있는 쥐새끼도 같이.  "


  " 호오.  "


  그 남자는 웃음을 띄며 다리를 쭉 뻗어 테이블에 올렸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고 팔짱을 낄 때쯤, 그의 옆으로 흰색의 가면을 쓴 검은옷의 케르티어가 경계하는 자세로 서 있었다. 그 호위 케르티어의 손은 언제라도 허리춤의 카타나를 뽑을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다.


   " 호위가 그 놈 뿐인가? 그럼 또 하나는…….  "


   그미는 오른손을 허리 아래로 내리더니 순간적으로 손목을 꺾었다가 폈다. 어느샌가 그미의 손에 쥐어진 한 뼘 길이의 나이프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남자는 손을 황급히 저으며 말했다.


  " 아니, 동행이야 동행.  "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에서 다리를 내렸다. 그와 비슷하게 리아나도 정리를 끝내고 식품장 문을 닫았다. 그미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남자가 말했다.


   " 본론으로 들어가지. 오늘 시장에서 행렬이 뭔지는 알고 있지?  "


   " 리베리티의 고위 간부라고 하더군.  "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 타겟이기도 하고. 리베리티와의 협력작전에 관한 보고서를 지니고 있을 거야. 영주성의 비밀회의실에서 보관하게 될 테니.  "


  "그것을 훔쳐와라?  "


  남자는 손을 휘휘 젓는다. 그리고 약간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왜이리 급하시나. 필요한 것은 그곳에 있는 서명과 날인. 즉, 그 작전을 짜낸 인간이 누구인지 그 물증의 확보. 그리고 그 보고서에 관한 내용은 여기.  "


  1큐빗 약간 안되는 길이의 흰색막대 하나를 리아나에게 던졌다.


  " 그걸 종이 위에 훑듯이 쓸면 내용을 저장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보고서의 내용만 훔칠 것.  "


  " 번거롭게 하는군. 내용이 많다면 이 막대기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휘두르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다가, 리아나가 노려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 킥, 천하의 리아나가 말이지. 그런데 이게 높으신 분 명령이니 어쩔 수가 없거든.  "


  남자가 일어서더니 문쪽으로 걸어갔다. 리아나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고 있다.


  " 내 용무는 여기까지. 요즘 우리 뒤를 밟는 놈들이 많아. 아까…….  "


  문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그는 흠칫거리더니 말을 끊고 수화로 대화를 시작했다.


-시장에서 받은 것은 내성. 영주성의 지도. 경계병 위치도 포함되어 있으니 잘 활용바람. 도처에 귀밝은 쥐들이 깔려있음. 자중하기 바람. 매주 수요일 밤 10시에는 매로 전문을 보내니 창문을 열어놓을 수 있도록.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리고 시하의 전언이다. 안부전해 달라더군.  "


  시하.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리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띄워졌다. 그 미소를 띄는 동안 그미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그 남자는 호위 케르티어 두명에게 신호를 보내고 손을 움직였다. 손에서 하얀 빛줄기가 손 마디마디에 엉기면서 그 모양이 연속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자 그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캐린을 이루는 캐릿-캐린을 구성하는 손동작 하나하나를 캐릿이라 한다- 구성을 보았을 때, 그의 몸이 빛을 투과시키는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보이지 않지만 어렴풋이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미는 그들이 문을 나설 때까지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 리아나는 시장에서 건네받은 종이를 펴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훑듯이 보려 한 것이었지만, 경계병의 배치까지 꽤나 자세히도 기록되어있어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그미는 지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을 흘렸다.


  " 정말이지, 부려먹는데는 선수라니까.  "


 


 


 


 


 


  창문을 열어놓은 수요일 밤. 리아나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특별히 갑갑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베노가 다녀간 것은 어제. 그때 말한 그 행렬의 주인공이 이 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오늘밤 전문을 보내리라.


  늦봄인데도 아직 밤은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주위 민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살고있는 그미는, 창가에 앉아 서서히 바깥풍경을 바라본다.


  그다지 높지 않은 창이라 바닥에 앉아있던 그미는 창가에 엎드려 하늘을 보았다. 잠입하기에 알맞은 월광이다. 최적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그미는 언젠가 길드 마스터에게 하사 받은 두 자루의 소도를 손질한 후다. 그 두자루의 도는 각각 히브리드 엘과 히브리드 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였다. 허나 네임드(Named)라는 사실보다, 자신이 쓰기 좋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삐익


  귀에 익은 매의 울음소리에 리아나의 신경은 순식간에 곤두섰다.


  푸덕거리는 소리가 치고 매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리아나는 능숙하게 매를 몰아 팔에 앉혔다. 그리고 다리에 묶여있는 종이조각을 벗겨내고, 매를 다시 날려보냈다.


  그미는 지체없이 검은색의 종이조각을 펴보았지만, 그 종이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미는 손을 놀렸다. 손에서 흰 띠가 엉기며, 손 모양을 다섯 번 정도 바꾸었을 때 종이에 곳곳에서 불이 붙었다. 그 불은 일정한 모양을 만들며 종이 위에서 춤을 추다가 사그라들었다.


  리아나는 종이를 들어올려 빛을 대고 그 종이의 단어를 읽더니, 종이를 찢어 밖으로 날려보냈다.


  " …정말 번거롭게 하는군.  "


 


 


 


 


 


  한참을 달려왔음에도 그미의 숨은 고르게 내 뱉어지고 있다. 그미는 행동에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약간 타이트한 검은 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는 것이 보통이건만, 리아나는 맨 얼굴 그대로다.


  건물의 지붕을 건너뛰어 가며 도착한 내성. 성의 주위에는 5미터 정도의 폭으로 해자가 둘러있었다. 그미는 달리는 중에 캐릿을 맺는다. 그미가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질주방향은 성벽이 만들어 낸 거대한 그림자로 사각이 생기는 곳이다.


  경계병의 위치를 이미 파악한 리아나는 지체없이 들어갔다.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잠입에 있어 최대한 몸을 드러내는 시간이 없어야 한다.


  마지막 캐릿이 맺어졌을 때, 리아나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가 퉁겨 올렸다. 그미의 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성벽 위까지 도달했지만, 넘기 직전에 성 바깥벽에 착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벽에 붙어있다.


- 차랑, 차랑


  사슬갑옷이 마찰하는 작은 금속음을 울렸다. 리아나의 몸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2미터도 채 넘지 않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보초병의 것이었다. 들릴 듯 말 듯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마지막 캐릿을 맺으면 언제든지 도약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미는 조용히 기다렸다.


   차랑거리는 금속음이 미미하게 작아지고 있을 때쯤, 리아나는 마지막 캐릿을 맺고 바람을 탄 깃털처럼 성벽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급격한 포물선을 그리며 성벽 안쪽으로 떨어졌다.


   그미가 착지하기까지, 미미한 소리가 난 것 외엔 어떤 인기척도 남기지 않았다. 경비들은 이제까지와 다름없는, 언제나처럼 지루한 하루의 경계시간이라 생각 하며 지금도 성벽 위를 걷고 있을 것이다.


   착지할 때 취했던 웅크린 자세로 리아나는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미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그렇게 두어 걸음을 밟았을 때, 그미의 몸이 비약적으로 가속되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은 더욱 매섭게 리아나의 얼굴을 스쳐갔다.


  성 안의 건물들은 그다지 복잡한 구조가 아니었다. 중앙의 건물, 목표로 한 건물까지 달려가는 데에 시간을 잘맞췄는지 순찰병과 마주치지 않았다. 리아나도 이 상황에 매우 만족했다.


   그러나 순간 그미가 긴장의 끈을 놓친 댓가로, 보초의 기척을 알아채는 것이 늦어졌다.


  " 거기, 누구냐.  "


  가속된 힘을 참격에 실었다.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호를 허공에 그슬리며 그미의 손이 나아간 자리로 그미의 애도(愛刀)인 히브리드 엘은 뿌려졌다.


   " 제길, 번거롭게 됐어. "


  순식간에 주인을 잃은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리아나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이것을 다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미는 결정했다. 그 판단에 망설임은 없었고, 냉철한 목표의식이 있을 뿐이다.


 


 


 


 


 


  한 남성이 담배를 채운 파이프에 불을 붙이면서 몇 번 뻐끔거렸다.


  " 케르티어가 그렇게 만만한 존재로 보였다?  "


  그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실웃음을 흘리다가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였다.


  " 이번 건 맛이 좋군.  "


  그는 옆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에게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


  " 어때, 아타스. 피워보겠나?  "


  " 사양하지. 그것보다.  "


  아타스라 불린 사내는 담배를 거두는 그를 보며 신경 쓰이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 이후 케르티어 행동에 계획을 세워야하지 않을까. 차기 마스터님께서.  "


  " 베노라고 불러. 아직은.  "


  " 후후, 아직은, 이라.  "


  베노는 담배연기를 하늘로 뿜었다.


  " 스파이를 심어놓는 것은, 보험 같은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건수를 물어버렸군.  "


  베노의 말에 아타스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추측의 확신을 얻으려는 듯 물었다..


  " 그럼, 마스터에게서 쌍둥이 소도를 받았다는 계집은…….  "


  아타스가 말을 흐린다. 필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일 것이다. 베노는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 리아나 말인가. 아직은 두고 봐야해. 이번 임무 결과에 따라 계획을 세울거야.  "


  " 그런가.  "


  아타스는 추측이 맞았는지 웃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베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킥킥대는 입으로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댔다.


  " 그 계집은 조금 아깝지만 말야. "


 


 


  허술하다. 두 국가간의 중요 작전문서 이송 경계로 보기에는 너무도 허술하다. 리아나도 자신의 실력이 뛰어남은 자부하고 있었지만 꺼림직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어렵지 않게 그 문서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서재로 들어섰다.
  서재의 문은 잠겨있지도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간 리아나는 책상 위에 방치된 목표문서를 발견했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것이 보통사람으로선 엄두도 못 낼 경계로 둘러져 있었지만, 잠입의 전문가인 케르티어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리아나는 결국 그렇게 단정짓고 베노에게서 받은 마법막대를 품에서 꺼내 내용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복사중에 내용을 훝어본 리아나는 실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동맹작전은 제런의 지형에대한 조사가 부족한 상태에서 짜여진 느낌이 다분하다.
  " 대단하군.  "
  시니컬한 감상을 흘리며 계속 작업을 이어갔다.
  내용은 약 20여장. 그리고 리베리티 작전참모의 서명과 날인이 있는 가장 앞장을 찢어서 두 번 정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 여어, 이제야 오는가.  "
  다음날 리아나가 시장을 보고 집으로 왔을 때,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있었다. 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은, 미소가 지어지기 마땅한 상황인 것임에도 리아나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그는 전에 리아나를 찾아왔던 그 청년이다. 그는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얼른 말을 붙였다.
  " 아, 오늘 저녁거리? 내가 맛 좀 볼 수 있나?  "
  " 네놈 몫은 없어.  "
  라고 말하던 리아나는 그 옆에 앉아있는 또 다른 케르티어를 발견했다.
  " 오랫만이다.  "
  리아나는 그와 마주보며 살짝 미소를 머금는다.
  " 시하 식사까진 어떻게 되겠지만. 베노는 무리지.  "
  베노는 투덜거리면서 파이프를 들었다. 리아나는 식재료를 정리하려 선반으로 가면서 말했다.
  " 피우면 네놈 대가리부터 태워 버릴거야.  "
  그의 표정은 상당히 불쌍하게 됐다.
  식재료들을 정리하고, 도자기 주전자와 찻잔을 가지고 베노와 시하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왔다. 주전자에는 허브티가 담겨있었는데, 아마 아침에 끓여서 식혀놓았나 보다.


  그미가 차를 따라주자 베노는 경악했다.
  " 리아나한테 이런 면도 있을 줄이야. 독 같은거 타진 않았겠지.  "
  " 네놈을 죽일만한 맹독이라면 갖고 싶긴 하군.  "
  베노는 킬킬거리면서 차를 마셨다.
  "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니 다행이군. 베노의 호위격으로 특별히 오게 되었지.  "
  이야기가 이어질 듯하자, 리아나가 말을 끊었다.
  " 사적인 얘기는 좀 있다가 하도록 하지.  "
  시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베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콧잔등을 긁적이면서 임무 결과를 물었다. 리아나는 바로 공존-캐린의 종류. 이공간에 물체를 보존할 수 있다-의 캐릿을 맺어 몇가지 물품을 불러왔다.
  " 여기 내용, 이건 날인문서.  그리고. "
  드물게도, 리아나가 말을 이으려 하자 베노는 살짝 눈길을 주고는 막대기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날인을 훔쳐오게 되면 들키게 되지 않나? "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가져왔지? "
  "명령이니까. "
  베노는 키들 거렸다.
  "내가 말하는 걸 깜빡 했었나 보군. 그건 국가와 케르티어의 암묵적 합의야. "
  "암묵적? "
  시하가 입을 열었다.
  "케르티어가 작전시에 개입하게 된다는 선포. 아무런 흔적없이 날인만이 사라지는 것은 케르티어 정도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 "
  "한놈을 베었어. "
  "알고 있다. 그건 처리했어. "
  베노의 말에 리아나는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
  "누가. "
  "심어 놨었지. "
  베노가 막대를 몇 번 건드리니 막대 표면에, 복사되어있는 내용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끝부분을 살짝살짝 만질 때마다 다음 내용이 점점 올라왔다. 이윽고 작전을 이해하기 시작한 베노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 …작전을 실시하는 제런과 리베리티 측에 위협을 줄 소지가 다분해.  "
  " 무서운 작전이군.  "
  다 훑어본 베노가 시하에게로 막대를 건냈다.
  " 이 것말고, 전투지역 정보분석에 관한 내용은 없었나?  "
  " 못 봤는걸. 가지고 온 문서에 의하면, 아직 그런걸 만든 것 같지 않는데.  "
  날인문서. 그것은 작전계획을 만들 때 근거로 한 정보가 간단히 표기되어있는 것이 정상이다. 베노가 본 곳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현재 종합중인 전장정보분석에 의거…
  " 전장정보가 종합되지도 않았는데 작전계획부터 만들어버린 것인가.  "
  " 어느 나라 군사학이야.  "
  리아나는 차가운 말투로 한마디를 뱉었다.
  " 어떤 상황에서라도 승리할 수 있는 전술인가보지.  "
  베노의 입에서 웃음이 삐져나왔고, 옆의 시하를 괴롭히며 괴로워하면서 웃었다. 시하도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 아, 하, 리아나도 센스가 좋군. 그래서 말인데, 일이 하나 더 생겨버렸다.  "
  " 대강 알 듯하군. 다시 들어가서 전장정보분석에 관한 문서를 찾는 것이겠지?  "
  베노는 손가락을 튕겼다.
  " 딩동. "
  "존재하지 않는다면? "
  시하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없다면, 누군가를 노리는 미끼일 확률이 높지? "
  "없을리가 없어. 완성되지도 않았고, 정규작전으로 채택될지도 확정되지 않은 작전을 노리게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케르티어 정도 밖엔 없겠지. "
  리아나는 베노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케르티어가 목표일 확률은? "
  "없지. 케르티어는 최고의 암살자들이다. 제런의 그림자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의 참모들도 알고 있을 터. 타협하지 않고 지독하게 독자적인 집단이긴 하지만. "
  베노가 단어를 고르려 약간 말을 끌자 시하가 거들었다.
  "국가 위기때마다 개입하여, 제런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한 것을 무시하지는 못할 테지. 탈국가적 집단이지만 국가를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니까. "
  "생각이 있다면 케르티어를 건드리지 않는 편이 국가로서 이득일테고. 강함의 순도는 한번도 양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라는 말이지? "
  리아나의 말에 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 입장에서도 케르티어는 비밀리에 남아있는 편이 유리하지.  "
  "아아. 우리의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외세도 그러한 이유때문에 섣불리 전쟁을 선포할 수 없을테니까. "
  시하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생각하던 베노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길어졌군. 지령은 2·3일 내로 보낼테니 창은 매일 열어놓도록.  "
  그리고 베노가 일어서자, 시하도 일어나려 했다. 베노는 강제로 그를 앉혔다.
  " 아아, 뭐. 쌓인 얘기들 천천히 하고 오라고. 내가 있어서 못한 염장질도 좀 하고, 시하는 내일 복귀하는 것으로 해 놓을 테니까.  "
  그리고 리아나에게 그 막대와 날인문서를 내밀었다.
  "당분간은 네가 보관하고 있으라고. 아직은 케르티어 쪽에서 급한 문제가 아니야.  "
  그는 그대로 문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멈춰섰다. 인사를 뜻하는 베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레몬버베나 티 잘 마셨다.  "
  " 레몬그라스였어.  "
  헛기침을 삼키는 시하를 무시하며 베노가 나가고, 리아나는 주전자를 들어보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 허브티 더 가져올게, 잠깐만.  "
  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일전, 시하가 우연히 들은 바로는 영주의 성에 이미 첩자를 심어두었다고 했다. 그러한 베노가 굳이 이번 임무를 리아나에게 맡길 필요가 있을까. 그의 의도를 알수 없다.
 시하는 일어서서 리아나에게로 다가갔다. 당연히 그미가 못 알아챌 리가 없다.
  " 거의 다됐어. 조금만 기다리면 곧 갈…….  "
  그는 그대로 뒤에서 그미를 껴안았다. 그미의 입에서는 얕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봐, 무슨…….  "
  "리아나.  "
  리아나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 이번 임무, 그만두었으면 해. "
  찻잔에 티를 따르는 그미의 손이 멈추었다. 달깍, 주전자를 놓은 그미는 시하의 말을 기다렸다.
  "느낌이 이상해. 확증은 없지만 베노는 뭔가 숨기고 있다고. 만약 그게, 그게 리아나 너한테 위험한 일이 된다면, 그래서 베노가 그렇게 뭔가 숨기고 있는 거라면. "
  말을 하는 중에 리아나는 돌아서서 시하를 마주보았다. 그미는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잡았다.
  "잘 들어. 절대 내가 죽는 일은 없어. 난 혼자 남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카낙 의 이름을 걸고. 내가 죽을 자리는 내가 정해.  "
  강인함이 스민 눈동자.
  언제부터였을까. 그미의 눈빛 깊숙이 감춰진 상처를 느꼈을 때, 그것을 알아챘을 때 그미는 이미 시하의 마음에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낙. 리아나가 케르티어로 설 수 있게 해준 스승이며, 옛 연인이었다. 신원불명의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은 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미는 중요한 약속을 할 때는 꼭 그의 이름을 말했다.
  시하의 양볼을 감싸고 있는 리아나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시하의 머리를 살짝 당기듯 하며, 자신의 얼굴도 그에게로 점점 가까이 움직였다.
  서로의 숨결이 코에 닿을 때쯤, 그미의 고개가 살짝 틀리며 눈꺼풀이 내려갔다. 그리곤 그와 호흡이 겹쳐졌다. 그의 뺨을 감싸던 그미의 손은 어느새 목을 감고 있었다.
-벌컥
  누군가 문을열고 들어왔다. 리아나는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요한. 무슨 일로…….  "


  "그, 그, 게, 아까, 배, 달, 부탁, 온 건, 데, 여기, 두, 고, 갈게!  "
  그는 매우 당황하며 어렵게 입을 열긴 했지만, 상당히 더듬는다. 그리고는 짐들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하 역시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굉장히 토막난 말이군.  "
  "시장에 식료품 가게 주인 아들이야.  "
  리아나는 그미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그의 손을 가볍게 풀며, 티를 따르던 찻잔을 들었다.
  "미안.  "
  "응?  "
  리아나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 살짝 대어 보기만 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도 못 잊는 것 같아.  "
  카낙을 말하는 것인가. 시하는 묵묵히 그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미의 어투는 매우 건조하게 들렸지만 시하의 귀에는 물기어린 것으로 들렸다.
  그렇게 긴 침묵이 흘렀다. 리아나는 당부하듯이 다시 입을 연다.
  "걱정마.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


 


 


 


  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갔다. 그의 말을 들어서 만이 아니라도, 그미가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미는 그것을 단지  카낙을 떠올린  옛 기억의 울림 탓이라 단정지어 버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저녁 8시쯤에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일찍 전령이 왔다. 시하. 그가 직접 전령을 가져왔다.
  "내용은.  "
  "오늘이라는 것이겠지. 목표는 전장정보분석에 관한 문서탈취.  "
  끄덕. 시하는 말을 아꼈다. 정말 하고싶은 말을 가슴에 담아둔 채로.
  "리아나, 다시한번 말하지만…….  "
  "미안.  "
  리아나는 단호했다.


 


 


 


  온몸을 휘감던 열기가 찬찬히 식을 때쯤, 그미는 눈을 떴다. 램프의 기름은 다 타버렸고, 아스라이 내리온 달빛이 그미의 윤곽을 비추었다. 리아나는 곤히 잠들어있는 시하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케르티어가 이렇게 마
음을 놓고 잠을 청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던가. 심지어는 같은 집단의 일원이라고 해도 그미가 몸을 일으켰을 때 잠을 깨는 것이 보통이다. 그미의 입가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맺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침대를 빠져나오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싸늘한 기운이 닿았다.
  케르티어의 검은 복장을 입고, 히브리드 엘과 일이 허리 뒷춤에 고정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준비는 끝났다.
  "다녀올게.  "
  그미가 작게 중얼거리며 시하에게 입술을 포개었다.


 


 


 


  서재에는 그미가 찾는 것이 없었다. 한참을 찾았음에도 그러한 문서는 보이지 않았다.
  작전계획에는 분명 정보가 따라야 할 것이다. 정보 없이 계획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시하의 우려가 조금씩 실감되기 시작했을 때는.
  만약에.
  만약에 이 임무자체가 완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표적으로 몰려 버리게 되는 것은.
  살기를 띈 인원이 서재의 주위로 몰려듦이 느껴졌다.
  "칫.  "
  리아나는 황급히 입구쪽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바깥쪽 복도는 포위되었다. 사람들이 밀어닥치기 직전, 그미는 은신의 캐릿을 맺고 문 위쪽 벽에 붙어있었다.
  갑옷의 사슬이 찰랑거리고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지더니 여섯의 무장을 한 패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그들만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침입자의 행방을 쫓으려 애썼다. 그들은 리아나의 위치를 전혀 모르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중 한 사람 만이 손의 종이조각을 살펴보다가 리아나가 있는 쪽을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은신은 풀리지 않았다. 보일 리가 없다. 그리고 저자가 투명체를 탐지하는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들고있는 종이조각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은신 탐지 스크롤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리아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리아나의 몸이 벽에서 퉁기듯이 그대로 그자를 향해 날아갔고, 그를 스치듯이 뒤쪽으로 착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었다.
  아직 그미의 은신은 풀린 것이 아니지만, 착지 때 난 둔탁한 소리로 인해, 그 남자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영주님!?  "
  한 병사의 외침에, 리아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허나 이미 벌여져 버렸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영주의 목에, 가는 핏줄기가 그어지더니 그것은 점점 굵어졌으며, 이윽고는 스르르, 그 선을 따라 그의 머리가 흘렀다. 그미의 도는 이미 영주의 목을 통과했었던 것이다.
  병사들의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겹쳐 들렸다. 순식간에 영주가 살해당하고, 살해자는 아직 누군지도 모른다. 병사들의 얼굴에 어두운 기운이 역력했다. 리아나는 놓치지 않고 몸을 서재에서 빼냈다.


 


 


 


  아무리 도망가도 그미를 쫓는다. 벌써 열 명 넘게 베었던가. 그미를 추적하는 병사들로 아직 본성에서 조차 빠져나가지 못했다.
  "여기!  "
  낮게, 그러나 뚜렷한 목소리가 그미의 귀에 들려왔다. 생각할 겨를 없다. 그미는 소리가 난 쪽의 문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미의 몸은 경직되었다. 정확하게 그미의 얼굴을 향해 질러오는 칼.
-파륵
  그미의 몸 전체가 진동하듯 짧게 흔들린 순간, 칼이 그미의 목을 뚫었다. 하지만 그 형체는 잔상이었고, 본체는 약간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리아나는 팔을 약간 비틀며 아래에서 위로, 역수로 쥐어있는 히브리드 엘을 올려 질렀다.
-창캉
  그 검은 상대의 암실드에 멈추었다.
  "무슨 수작이냐.  "
  "과연, 잔영의 리아나인가.  "
  그의 말투에선 살기가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야.  "
  그는 검을 거두면서 한쪽 바닥의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여긴 영주의 방이라 비밀 통로 하나쯤은…저기로 빠져나갈 수 있을거다.  "
  "이유는?  "
  "베노의 명령이다.  "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분명 언젠가 대로에서 보았던 마검사이다.
  그의 손이 살짝 움직이면서 의식적인 모양 하나를 그려내었다. 케르티어에서 상대방을 식별하는 암호 중 하나. 동료인 것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리아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파리들이 꼬이는 군. 꽤나 먹음직스러운 걸 들고 있나본데.  "
  그미가 통로로 들어간 후에, 통로를 숨겨두던 장판을 덮고, 의자를 들어 창문으로 던져버렸다. 유리창이 산산히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동굴 같아 보인다. 집중해서 들으면 물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수로와 연결되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상수도로 보이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하수가 흐르던 동굴을 개조했으리라.
  흐르는 물은 매우 잔잔하게 흘렀다. 가운데에 10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수로가 있고, 양쪽으로 2미터정도 폭의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리아나는 길을 따라 달려갔다.
  반대편 인도로 건너가는 6미터 남짓의 다리와, 그쪽으로는 출구로 표시된 팻말이 보인다. 리아나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다가 멈추었다.
  "누구냐.  "
  지금 리아나가 가려고 하는 방향의 기둥이 만들어 낸 그림자 안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습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숨어있지 않았고 그림자 안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함정을 설치해 놓았을 수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수도, 혹은 이 자체가 함정일지도 몰랐다. 리아나는 조심스레 그 그림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대체 아타스는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요.  "
  목소리. 그것은 여성의 것이었다. 리아나의 시각을 돕는 빛은 출구를 표시한 횃불 하나 뿐.
  차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만든 다리 형식이라고 해도, 그 위로 얇은 층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횃불 빛에 그미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리아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 모습을 찾아내었다.
  금발의 긴 머리칼, 날카롭게 날이 선 두 귀. 분명 전에 대로에서 보았던 엘프다.
  "초면이죠? 루미너스라고 합니다. 이 길은 제가 막고 있습니다.  "
  "알아듣기 쉬워서 좋군.  "
  리아나의 손은 천천히 히브리드 엘과 일을 뽑고 있었다.
  "종족을 초월한 충성심에 경의를 표하며, 그 발로가 무엇인지 들을 수 있을까?  "
  그미의 말에, 루미너스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진다.
  "알펜하임의 이단자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향해있기 때문이죠. "
  루미너스의 대답을 들은 리아나는 차갑게 미소지었다.
  "인간과 공존을 택한 엘프에게 불가항력적인 선택인가. 명부로의 길, 그곳에 나의 길은 없다.  "
  "검을 겨눈 명분이, 서로에게 각인되길 바랍니다.  "
  루미너스가 느긋하게 레이피어 뽑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리아나는, 왠지 맥이 빠진다는 듯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암기도 사용한다.  "
  "알고 있습니다. 독도 사용합니까?  "
  루미너스는 싱긋 웃으며 말한다. 리아나는 엘과 일을 역수로 고쳐잡았다.
  "번거롭지. 직접 베어버리는 게 빠르니까. 
-촤악
  리아나의 발이 바닥을 스치듯 쓸면서 물의 얇은 층이 아래서부터 위로 치고 올라왔다. 그것은 리아나와 루미너스 사이에 순간적으로 얇은 물의 층을 만들어 루미너스의 시야를 흐려지게 만들었다.
  리아나는 물이 다시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미가 있던 곳을 환영으로 대체시키고 루미너스의 뒤를 잡았다. 물과 어둠에서 일렁이는 횃불이 그미의 시야를 방해했을 텐데도 그미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는 분명 리아나의 움직임을 좇을 수 없었을 텐데.
-차캉
  히브리드 엘은 루미너스의 레이피어에 막혔다. 그렇게 검을 막은 상태에서 그미의 입에서는 마치 노래같은, 리드미컬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칫!  "
  리아나는 엘을 쥐고있던 손을 놓았다. 엘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 몸을 회전시키며 캐린을 완료한 그미가 그것을 받았을 때, 순식간에 엘의 검신에는 붉은 화염이 맺혔다. 그리고 왼손의 일과 함께 루미너스의 목을 겨냥해 어둠을
갈랐다.
  전투 직후에 리아나가 만든 물의 벽, 그런 것이 리아나와 루미너스 사이에 밀려 올라왔다. 리아나는 얇은 층이라 무리없이 뚫을 수 있다 생각하여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나, 엘과 일은 그 얇은 막에 마치 바위를 찍은 듯이 저지되었다. 엘의 화염은 부딪힌 순간에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수증기를 뿜고는 사그라졌다. 루미너스가 움직인다. 그미의 심장을 찌르려는 듯 두 손으로 단단히 겨누어 지른다.
  이 물벽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이렇게 빈틈이 빤히 보이는 자세로 공격하는가. 공격의 순간에 역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아나는 꺼림직한 기분에 휩싸였다. 엘프가, 이유없이 저런 평범한 지르기에 저렇게 살기를 펄펄 풍길 리가 없다. 엘프의 판단력으로 저런 방식의 공격이 저 정도로 자신만만한 것이라면,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리아나는 재빨리 엘을 검집에 꽂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루미너스의 칼이 그미의 몸을 뚫기 직전 그미는 캐릿을 맺고 뒤로 도약하여, 천정에서부터 매섭게 내질러진 거대한 종유석에 흡착 되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에 리아나는 엘프에게 시선을 향했다. 루미너스가 내지른 검격을 중심으로 다섯개의 커다란 돌기처럼 물이 뻗어 나오다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동결되어 버렸다.
  리아나는 캐릿을 맺었다. 그미의 엄지와 검지사이에서, 마치 전기의 그것처럼 작은 스파크가 연결되어 불규칙한 춤을 추었다. 리아나는 종류석에 흡착한 상태로 그 하얀 줄기를 향해 강하게 숨을 불었다.
-화륵
  그미의 숨에 반응해 미약한 불길을 만들어내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루미너스를 삼켜버릴 듯 거대하고, 거세졌다. 불길은 질풍처럼 빨랐다. 리아나는 자세를 지속하며 그미의 행동을 살폈다. 느릿한 느낌의 노래가락. 그
것에 실려오는 기운은 마나인 것을 리아나는 알 수 있었다. 물은 얇은 층을 만들어 루미너스를 구형으로 감쌌고, 불길은 구형의 층을 따라 흘렀다. 그리고 그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DomeTik, AsraHeN. "
  "짜증나는군. "
 스펠싱잉이라는 것이 저런 것일까. 루미너스를 감쌌던 물은 반구형으로 변하더니, 오목한 부분이 리아라 쪽으로 향했다. 리아나의 캐린은 그 반구 안에 고여-액체인 듯이- 움직인다. 루미너스의 입이 다시 열릴 것 같
이 보이자 리아나의 손은 바빠진다.
  "Tika! "
  물의 반구에 모여있던 화염은 리아나를 향해 뿜어 올라갔다. 그리고 종유석에 그대로 직격한다.
  본래 리아나가 사용한 화염술은 폭발이 아니라 연소가 목적인 기술로, 지축을 울리거나 종유석이 깨어지는 일은 없었으나, 리아나가 있었던 종유석은 새까맣게 타서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물이라…엘프가 유리한가. 리아나는 중얼거리며 일까지 검집에 넣었다. 그리곤 손을 털었다.
  "번거롭게 됐어.  "
  그렇게 중얼거리며, 예의 그 차가운 미소를 띄웠다.
  손에 흰 빛의 실가닥이 엉기며 순식간에 캐릿이 연달아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길어지자 루미너스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Resto Eltgen. "
  리아나를 향해 엄청난 수압의 물줄기가 수면에서부터 올라갔다. 리아나는 손을 종유석에 흡착시키고, 그것을 축으로 철봉처럼 빙 돌았다. 뿜어진 물줄기는  퉁 하는 소리와 약간의 진동과 함께, 천정에 엄청난 기세로 구멍을 내었다.
  리아나의 몸이 종유석에 가려졌다가, 다시 루미너스의 시야에 나타났을 때, 리아나의 손에는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리아나는 원심력까지 더해서 루미너스를 겨누어 나이프를 뿌렸다.
  루미너스는 가볍게 나이프를 쳐냈다. 그리고 연속해서 날아온 나이프를 쳐내려 했을 때, 그미는 멈칫했다. 아래로 쳐냈을 첫 번째 나이프에서 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De Besto Eltigen! "
  루미너스의 목소리에 반응해 두 물줄기가 수면에서부터 뻗어 나와, 그미에게로 날아오고 있는 나이프와 리아나를 향해서 뿜어졌다. 투척된 나이프를 막고 후속 공격을 봉쇄하려는 생각이었으나 리아나는 캐린을 멈추지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버렸다. 왼쪽어깨를 스치며 선혈이 튀기는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두 개의 나이프는 허공에서 회전하며 떠 있었다. 그리고 리아나의 캐릿에 대답하듯이 첫 번째 나이프가 바닥쪽에서 위로 솟았다. 루미너스는 가까스로 몸을 틀어 얼굴에 스치는 정도로 끝났다. 그리고 그것이 천정에
박히기 전에 두 번째 나이프가 위에서 내리질렀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다리를 노려 여댓개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교묘한 각도로 뻗어나와 어디로도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루미너스는 공중으로 몸을 띄우며 나이프 하나를 쳐냈다.
  "Hamegik To. "
  방어계열의 싱잉을 하는 그미의 예상대로, 리아나의 환영으로 보이는 물체가 리아나가 흡착되어 있던 종유석으로부터 튀어나왔다. 그것은 사람, 리아나의 모습을 갖추어 루미너스에게로 돌진했다.
  "Deka InHofaet. "
  공중에 있는 탓에 물을 끌어올리는데 한계가 있다. 그미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환영쪽으로 물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벽과 환영이 부딪히기 전, 이질적인 기운이 등에 닿았다. 자신을 그대로 통과하는 섬뜩한 느낌에 온몸이 공포감으로 뒤덮혔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심하게 젖혀질 정도의 충격.


-타앙
  파공음이 울린다. 그리고 그것은 루미너스의 비명과 겹쳐졌다. 순간, 자신의 앞에 있던 물벽이 물방울로 흩날리며 정면에서 날아오던 공격마저 허용하고 말았다.
  리아나는 아직 공중에 떠있는 루미너스의 목을 향해 발도를 하였다. 오싹하리만큼 냉철한 표정으로.


 


 


  대체 어디서부터 이리도 어긋난 것일까. 단지 조직에서 주어진 임무를 위했을 뿐인데.
  축지의 캐린은 그미를 순식간에 숙소로 옮겨놓았다. 아까 나갔을 때 열어 놓았던 창문으로 들어가면서, 집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에 꺼림직함을 느끼면서 그미는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은 잠겨있었다. 그리고 시하가 남겨 놓았는지, 테이블 위에 메모지가 보였다. 그미는 종이를 들어올리더니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시하가 자주 사용하는 암호캐릿을 맺었다. 그 종이 위에는 시하의 필체로 작은 글자들이 나타났다.



-낌새가 좋지 않다. 일단 인기척을 들키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누군가 계속해서 찾아왔다. 성에서 난 소란이 어느정도로 심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케르티어에 중간보고가 필요한 것 같아 먼저 복귀한다. 무리하지 말고 무사귀환 하도록



  메모를 거의 다 읽음과 동시에, 누군가 현관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그에 리아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안나, 빨리 나오지 못해!?  "
  리아나는 문쪽을 바라보았다. 시하가 해 놓았는지 가구 하나가 문을 막고 있었다.
  현관 바깥쪽이 조용해진다 싶더니, 어두운 문틈으로 붉은 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미는 설마 했지만 코끝을 자극하는 타는 내는, 사람들에게 그미는 이미 상종을 해서는 안되는 인간으로 치부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불은 금새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미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리아나는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그미의 몸은 서럽도록 곱게 허공을 미끄러졌다. 땅에 닿을 때쯤, 거꾸로 떨어지던 몸을 회전하여 바로 착지시키자, 그미의 주위로 공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착지의 충격을 흡수해 버렸다.
  "저기! "
  리아나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의 외침에 경비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달려와 그미를 둘러쌌다. 그들은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창으로 겨누고 있다.
  "안나! 너를 영주님 살해혐의로 체포한다.  "
  "증거는. "
  싸늘함이 잔뜩 묻은 말투에 그미를 알고있던 사람들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외부인이 네 집에 출입했다는 증거는 잡혔다. 그게 네 애인이라고 해도 케르티어일지도 모르는 복장을 한 사람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
  한명이 무리를 대신해서 답하고 있다. 저자가 리더인 모양이다.
  "일지도 모른다라. 그것은 마녀사냥의 일환인가.  "
  "다, 닥쳐! 이 요물!  "
  리아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한 명, 요한은 자신의 눈길을 피하고 있다.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그미였다. 그미는 히브리드 엘을 뽑았다.
  "틀린말은 아니니,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라구. "
  스르릉 거리면서 뽑히는, 귀를 긁는 검의 곡성이 병사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맺혔다. 그리고 그 행동을 필두로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가해져왔다. 허나 정작 당사자인 리아나는 태연히 캐릿을 맺을 뿐, 가슴을 억누르는 중압감에 어쩔줄 모르는 것은 오히려 경비병들이었다.
  리아나를 향해 질러지고 휘둘린 창들은, 그미를 중심으로 생긴 고리띠가 형성되자 창의 궤도가 위쪽으로 바뀌어, 그미를 중심으로 도열하듯 둘러싸고 있다.
  리아나는 빠르게 자세를 낮춰, 양손을 교차시키면서 손끝으로 땅을 쓸었다. 리아나의 머리칼 하나가 살짝 들리는 듯 싶더니 매서운 바람이 아래로부터 뿜어졌다. 그것은 그미를 중심으로 둥근 칼날이 서듯이 달빛을 반사시키는 막이 휘감겨 올라갔다. 그미의 머리칼은 사납게 휘날렸으며, 그 머리칼이 가라앉을 때쯤에는 사납게 휘몰아친 바람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잦아들어 소름끼치는 정적만 존재했다.
  그 침묵은 리아나가 뽑아올린 진공칼날의 반경에 들어있던 경비병들의 몸이 절단되듯 흘러 쓰러지자, 한 마을 처녀가 외친 비명으로 깨어졌다.
  리아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몸을 바로 세웠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그미를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다.


 


 


 


   제길. 
  정말 지겹게도 쫓아온다. 마을을 벗어난지 이미 30분가량 경과하였는데도 정확한 방향을 알고, 그미를 추적하고 있다.
  그미가 어느정도 거리를 벌리고 한숨 돌리려 할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르티어는 제런 이외의 나라에 융합되어선 안되지.  "
  베노의 목소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작전 계획을 입수해서, 전쟁 개입 타이밍을 파악하려 했지.  "
  리아나의 그말에 상관없이, 베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로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귀찮지 않나, 그렇게 눈에 띄는 걸 질질 끌고다니면.  "
  리아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베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제런의 고위 간부들은 케르티어의 전력을 양지로 끌어내려는 수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함정도 만든 것이고.  "
  그미는 베노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조각조각 나 있던 실마리들이 한순간에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추적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곤 입수한 작전계획의 날인문서 뿐이다. 그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가 싶더니 히브리드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아마도 그 문서에 추적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을거야.  "
  베노는 모습을 드러내 그미의 열발자국 정도 앞까지 걸어왔다.
  "영주 목을 땄다는 건 조금 놀랐다. 덕분에 케르티어 지위가 매우 위태하게 되었거든. 국가 유공자이기에 왕족과도 친분이 깊은데다, 리베리티의 그 귀족과도 형제지간이라. "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골치 아프게 되었어. 국가적으로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 "
  순간, 리아나는 시하의 말을 떠올랐다. 리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케르티어 내분이 있었다는 걸로 결정.  "
  서서히 베노가 살기를 품기 시작했다.
  "주동은 리아나, 너.  "
  그 말을 신호로, 두 개의 물체가 순식간에 리아나에게로 돌진했다. 아마도 베노를 호위하던 2인의 케르티어 일 것이다.
  캐린을 맺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그미는 급히 뒤로 빠졌으나, 생각외로 상대의 속도가 빨랐다. 캐릿을 맺기 늦었다고 판단한 그미는 상대의 손목을 돌려잡고 내려당겼다. 그의 손에 맺혀있던 캐린은 허공에서 터지고 말았다. 게다가 리아나정도 되는 실력이라면 잡힌걸로만 끝나지 않는다. 캐린이 허공에 터졌을 때, 이미 그의 손목관절은 빠져있었다.
  그미의 발은 쾌속하게 움직인다. 상대의 얼굴을 쥐고 땅으로 내리치며, 두 번째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연이어 뿜어낸 참격에는 피할 재간이 없어 보였다.
  그순간 그미의 몸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참격은 그미의 잔상을 지나, 두개골이 파열된 케르티어의 몸에 빨려들어갔다. 그의 옆에서 나타난 리아나의 손은 붉은색의 실들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는 급히 카타나를 휘둘렀지만 리아나의 엘에 걸리고 만다. 그미가 노리는 것은 심장부. 그 케르티어가 목숨대신 희생하기 위해, 리아나의 궤적에 주먹을 뿌렸다.
  그미의 손가락이 그의 팔에 닿았을 때, 팔을 휘감던 붉은 기운은 빨려 들어가 듯 그의 팔로 이동해 갔고, 그와 동시에 불기둥이 그의 팔을 따라서 휘감겨 올라가며 피부를 새까맣게 태워 들어갔다. 이것은 찰나의 순간에, 화르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당연하건만,  '카가각'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골격에 붙은 근육들을 급속도로 갉아 뱉어내고 있다. 그에 손목하고 팔꿈치 사이에만 앙상한 뼈가 남아있고, 침묵이 미덕인양 과묵하던 그의 입에서는 고통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바람이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엘이 그의 목을 쳤을 무렵이다.
  자신이 즐겨쓰는 캐린이기에 쉽게 알수 있었다. 리아나는 신속히 캐린을 해제하기 위한 역캐린을 맺었지만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베노가 리아나에게로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들어왔고, 이미 방어가 불가능한 상황이며 조치하기도 이미 늦었음에, 다가올 타격에 리아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노의 몸이 리아나를 통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완전히 통과했을 때,  타앙 하는 엄청난 파공음이 울리며 그미의 몸이 격하게 젖혀졌다.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 핸드스프링으로 바로 착지했다.
  그러나 순간 엄청난 고통이 엄습하여, 다리가 풀리며 주저 앉고 말았다. 겉으로는 상해가 없는 것 같지만 내장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으리라.
  이번 것은 크다. 그미가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몸 속으로부터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커헉!  "
  땅바닥으로 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리아나는 거친 숨소리를 몇 번 뱉다가 스윽,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경험의 기술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지.  "
  웃는 모습이 기분 나쁘다. 그는 안소매에서 궐련을 한 대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그 상황에 역캐린을 맺어서 캐린을 막은 것은 칭찬하마. 완전하진 못했지만.  "
  베노는 손끝에서 작은 불꽃을 일으키더니 궐련의 끝에 불을 붙이고는 몇 번 뻐끔거렸다. 그는 연기 한덩이를 길게 뿜더니,
  "어때? 충성을 맹세한다면 그림자로서 살 수 있게는 해 주지.  "
  그는 이 승부가 끝났음을 알고 있다. 그도, 리아나도. 더 이상의 싸움은 불가능 한 것을 알고 있었다.
  "미안, 카낙.  "
  "뭐?  "
  중얼거리는 듯한 말이었다. 그리고 리아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카낙이 뭐라 불렸는지 기억하나?  "
  베노는 궐련을 입에서 때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크로노 브레이커, 였던가. 힘들었지.  "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운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챈 리아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네, 네녀석.  "
  "아아, 내가 직접 목을 딴 것은 맞지만, 그건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고. 계획은 내가 짠 것이 아니었어.  "
  그미는 이런 인간을 동료로 생각했었던 것일까.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체 그는 그렇게 있었던 것이었나.
  "뜬금없이 옛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지 들어볼까.  "
  "뽑아라.  "
  "응?  "
  "카낙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군. 잘됐어.  "
  베노는 웃음을 흘렸다.
  "그몸으로?  설사 네가 카낙의 기술을 쓴다고 해도, 그 몸으로는 무리야.  "
  몇 개의 캐릿. 그 조합은 베노가 처음보는 것이었다. 캐린이 완성되자 그미가 눈살하나 찌푸리지 않고 일어서는 것을 보며, 그 캐린의 종류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회복 캐린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방금의 것은 통감을 마비시키는 신경작용 캐린일 것이다.
  이번에는 죽음을 직시하고 덤비는 것이다. 그는 궐련을 옆으로 뱉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귀찮게 됐어.  "
  카타나를 뽑음과 동시에 리아나가 날린 나이프를 튕겨냈다. 베노는 그 순간 일렬로 늘어서서 날아온 2개의 또다른 나이프에 당황해 버렸다. 그러나 그 당황보다 생존을 위한 반사적인 움직임이 더 앞섰다. 그는 카타나를 비스듬이 들어 나이프의 궤적이 모두 자신을 비껴 가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에, 리아나가 캐릿을 맺으며 빠르게 다가선다. 왼손 역수의 히브리드 일, 큰 궤적을 그리며 베노를 베려했다. 그미의 동작이 큰 것은 아까 받은 타격 탓인가. 그는 이제껏 해 온 것처럼 자연스레 흘리며 반격하려 했다. 허공에 아직도 회전하면서 머물고 있는 3개의 나이프를 눈치채기 전까지는.
  그것들은 리아나의 캐릿에 반응하여 베노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그는 급히 뒤로 빠지자,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나이프 하나가 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리아나에게서도, 허공의 나머지 두 개의 나이프도 베노를 향해
일제히 날아 들어왔다. 베노가 순식간에 맺은 캐린에 나이프들은 공중에서 모두 정지했다. 그리고는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보여줄 것이 이런 장난인가?  "
  리아나는 묵묵히 그에게 다가섰다. 그미의 팔에는 아까처럼 붉은 실이 일렁이고 있었다. 베노는 캐릿을 맺더니 자신의 앞쪽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가 났던 허공으로 히브리드 일이 지나가려 했으나, 손에서 강렬한 진동이 오면서 칼이 퉁겨졌다. 그 반동은 상당하여 칼을 놓치고 말았고, 주인을 잃은 일은 멀찍이 떨어졌다.
  "히브리드 정도의 칼이 아니었으면 산산조각이라구.  "
  리아나는 대꾸없이 히브리드 엘을 뽑아 그에게로 덤벼들었다. 그는 아까와 같은 캐린을 맺고서 뒤로 빠진다. 그러나 그미는 거침없이 앞으로 뻗어갔다. 캐린의 사정거리에 들자 그미의 오른쪽 옆구리가 한주먹만큼 사라지며 피가 뒤쪽으로 흩날렸다. 그렇게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다가오는 모습은 실로 소름이 끼쳤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성. 엘은 베노의 카타나에 붙었다. 엘을 봉쇄한 베노는, 즉시 왼손으로 캐릿을 맺으려 했으나 , 마치 리아나의 시계가 빨리 돌아간 것처럼 그미만이 미끄러지듯 그의 오른팔에 손을 대었다.
  무서운 속도로 그의 팔을 갉아 들어가는 불꽃의 송곳은 날카로웠다. 베노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움직이며, 그 와중에도 캐린을 깔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리아나는, 그것이 효과를 내기 전에 이미 범위를 통과한 뒤였다. 엘은 베노를 겨누고 그대로 질러 들어갔다.
  그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캐린을 맺으려 했으나, 그미는 자신의 몇 십배의 속도로 캐릿을 맺어버렸고, 붉은 실을 머리에 휘감았다.


 


 


 


  아직 통각은 마비된 상태라 걸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은,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함이 느껴졌을 때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정신을 잃는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겠지.
  한참을 걸어갔을 때, 시하가 있었다.
  "길드의 명령이다.  "
  그는 그미가 전투를 치렀던 장소를 지나왔던 것일까. 그의 손에는 그미가 미처 회수하지 못한 히브리드 일이 쥐어져 있었다.
  "리아나는 죽었다. 이것이 그 증거.  "
  그는 일을 들어 보였다가 내렸다.
  "다음에 만나면, 너를 베어야 할지도 몰라.  "
  조용히 그 말을 듣고있는 리아라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떠나라.  "
  월광이 약한 날 인데다가, 검붉은 케르티어 복장을 입어서, 그미의 몸상태를 가늠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리아나는 차갑게 말했다.
  "거절하겠어.  설득해도 소용없으니, 뽑아.  "
  그미의 말투에 시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리아나는 좀처럼 보기 힘든 케르티어의 격투예법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케르티어는 암살이 주가 되기 때문에 예를 보이기 전에 죽이게 된다.
  "명부로의 길. 같이하진 못할 것이다.  "
  "명부로의 길. 그곳에 나의 길은 없다.  "
  리아나와 시하는 차례로 말을 건네고, 리아나가 먼저 움직였다.
  아름다운 곡선. 카타나가 이루는 물결은 허공에서 잔잔하게, 그러나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물결이 서로를 만나 거센 파도가 치려는 찰나, 한 물결이 다른 쪽을 쓸어버렸다.
  "…왜.  "
  원망에 가까운 목소리가 시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차피, 내 목숨은 얼마남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죽지, 않으면 시하가 곤란한 거잖아.  "
  리아나는 가슴을 관통한 카타나 날을 잡고 서서히 뽑았다. 카타나를 뽑은 자리에서부터 선혈이 솟구쳐 허공에 흩날리다 내려앉았다.
  그미가 칼을 거두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시하에게 목숨을 주었다.
  통감이 마비되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임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틀. 그미의 몸이 쓰러지려 했다. 시하는 그미를 부축했다. 그리고 베노와의 전투에서 생겼던 상처를 보았다.
  "너, 이런 상처를 입고.  "
  "통각을 마비시켜서 아프지는 않아. …그런데 심장이 곧 멈출 것 같아.  "
  리아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
  "내가 죽을 자리는 내가 정한다고. 베노, 그런 녀석에게…카낙의…원수에게 죽는 것 보다 시하에게 죽는 게 더…….  "
  "카낙의, 원수?  "
  "내몫까지 살아. 그리고 케르티어의 정점에 서, 그러면 나도 편히 눈을 감을테니.  "
  그미는 말을 끝내고 눈을 크게 끔벅였다. 그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받기를 꺼려하는 시하를 향해 그미가 입을 열었다.
  "시각이 사라졌어. 시하? 시하, 거기 있지?  "
  "그래, 여기 있어.  "
  그는 그미의 손을 꼭잡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동자의 초점은 흐려 있었지만 분명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다.
  "입, 맞춰 줄래? 촉감까지 사라지기 전에.  "
  그는 눈이 따가워졌다. 이제껏 좀처럼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었는데. 그미가 처음으로, 마지막 부탁을 했다.
  그미의 입술이 파리하게 온기를 잃고 있다. 시하는 그미의 입에서 비릿한 피의 감촉을 느꼈다. 실로 죽음의 감촉이었다.
  "동정이나 부탁 때문이 아니야. 나는…….  "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어. 내가 시하를 사랑했으니까.  "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 서서히 촉감이 둔해져 감을 느끼고, 귀에서 맴도는 바람소리도 점점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광할한 공간에 그미만이 모든 감각을 잃은 채로,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사고만이 남아있었다.
  "엘과 일을 잘 돌봐 줘.  "
  마지막 그미의 말이 시하에게 들렸는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한 것이 말한 것이라고 믿는 사고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사고가, 슬프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영원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고정되어 버릴 때 즈음,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기억을 더듬어, 카낙과 시하를 만나고, 현재로 향하는 여행의 끝에서, 그미는 곱게 기억의 존재들에게로 흩날려졌다.


 


-FIN


 


  개인적으로 비극을 좋아합니다. 이제까지 써 온 글들은 그런 소설이 많았죠.


  장편 소설을 쓰는게 있습니다만, 거기서 마법을 쓰는 암살자들 집단을 만들고, '이런식으로 움직일 것이다'를 이미징 하기위한 테스트적인 소설이 이 단편입니다. 이스트보우족(東夷族)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런은 우리나라를 의식하며 썼습니다. 리베리티는 일본을 생각하면서 쓴 것이죠.


  카타나가 나옵니다만, 곡도를 표현할만한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그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왜색이 들어가는 것은 꺼리낌이 있지만, D&D 등에서도 등장하기도 하니, 억지로 지어내는 것보다 인지도가 있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이미징이 쉬울것 같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4220 묵시록 Memento 2009.12.07 372 0
4219 묵시록 Memento 2009.12.07 389 0
» CRESCENT MOON - 단편 검은날개의천사 2009.12.07 422 0
4217 hero story(영웅 이야기) file #soul# 2009.12.07 438 0
4216 나이트 매지션 팹시사이다 2009.12.07 397 0
4215 hero story(영웅 이야기) #soul# 2009.12.07 461 0
4214 연상기억술 15 연상달인 2009.12.15 538 0
4213 (단편)meaning 리엔블루 2009.12.15 610 0
4212 [헌터스] GRIP 2009.12.15 495 0
4211 랜덤 버튼 file 드로덴 2010.01.07 500 0
4210 안개 파스텔뮤직 2010.01.12 556 0
4209 늑대인간 The Wolfman 신승일 2010.01.12 409 0
4208 몬스터 블라블라울라블라 2010.01.12 314 0
4207 빛의 서사시 글쟁이 2010.02.02 329 0
4206 당근먹고퐁당 coKePlay 2010.02.02 321 0
4205 빛의 서사시 글쟁이 2010.02.02 299 0
4204 당근먹고퐁당(2) coKePlay 2010.02.02 295 0
4203 당근먹고퐁당(3) coKePlay 2010.02.02 345 0
4202 빛의 서사시 글쟁이 2010.02.21 250 0
4201 빛의 서사시 글쟁이 2010.02.02 250 0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