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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이 글은 완전한 허구입니다. 실제 인물, 단체, 기타 등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등장인물 소개

 

안박사-어제부로 30세가 되었다. 남중남고공대랩을 거친 우수한 인재이다. 닭을 좋아한다.

김병장-2X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군바리. 닭을 좋아하지만 먹을 기회가 별로 없다. 왜 아직도 그는 아직도 전역을 못 하고 있는 걸까? 진실은 저 너머에.

국장-연령불명. 사무실에 닭 냄새가 풍기는 걸 싫어한다. 추적관리국의 대빵.

빌리-아마도 5X세. 아름다운 미소와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이 시대의 댄디 미들. 닭가슴살을 좋아한다.

밀렵꾼들-이번에 한 건 해서 큰몫 잡아보려는 한심한 인간들. 닭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1

 

"빌어먹을!"

 

온통 잿빛의 땅을 배경으로, 남자 둘이 뛰어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걸어가거나 기어가고 있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쓸데없이 크고, 우스꽝스러운 방호복이라니. 복장만 봤다면 누구라도 여길 달 어딘가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주변 풍광도 유독한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잿빛 바위의 틈으로 가끔 시뻘건 용암이 끓어오르는 것만 제외하면 달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왜 여기서 수십 명 실종됐는지 알 것 같네요. 아마 이 빌어먹을 방호복을 입고 있다가 쇄골이 내려앉아서 죽은 거겠죠.” 클라우스(30세, 무직, 파트타임 밀렵꾼)가 말했다. 방호복 때문에 목소리는 꼭 드럼통 속에서 말하는 것 같이 들렸다.

 

“헛소리 말고 빨리 가기나 해. 쩐이 눈 앞에 있는데 왜 이리 밍기적거리냐, 너는.” 윌슨(40세, 자영업자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사실은 밀렵꾼)이 말했다. 역시나, 의사소통이나 될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울리는 소리였다. 그들의 뒤로, 풀 한 포기도 없는 바닥에 용암 덩어리 비슷한 것이 질질 끌렸다. 덩어리의 주변에 빈틈없이 매인 끈이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제멋대로 춤췄다. 한참을 달리다가, 클라우스는 무릎을 짚고 멈춰 서 버렸다.

 

"저는 더 이상 못 뛰겠네요. 좀 빼 주시죠."

"돈이 걸렸잖아, 임마. 돈이! 이 일만 끝내면 평생 플로리다에서 참치 낚시만 즐기면서 살 수도 있어."

 

“저 낚시 싫어하는데요.” 클라우스의 흰소리를 듣고, 윌슨이 방호복 안면유리-대충 이마 언저리-를 탁 쳤다. “대체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어른의 사정이라는 거야, 어른의 사정. 계속 이렇게 밍기적거리면 약속된 몫도 못 받는 수가 있어.” 윌슨은 말하면서 하늘 쪽을 보고 있었다. 뭔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까봐 걱정하는 그런 모습으로.

 

“쳇, 그럼 나중에 추가수당은 꼭 주시는 걸로 알죠.” 클라우스가 자기 쪽의 끈을 다시 끌러 메자, 둘과 바윗덩어리는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들의 위쪽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과 동시에, 높고 길게 끄는 울음소리가 났다. 둘이 위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그림자는 더 넓고 크게 드리워졌다. 잠시 뒤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의 위에 있던 그림자는 화구 위를 한참 빙글빙글 돌다가, 자취를 감췄다.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는 것과 동시에, 어두운 색의 액체로 범벅이 된 방호복 조각이 재와 함께 섞여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닿은 조각들은 지열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2

 

안박사는 신나게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닭튀김의 진한 향기가 사무실에 떠돌았다. 김병장은 휴일에 불러낸 주제에 먹고 싶냐며 물어보지도 않는 저 파렴치한 인간에게 속으로 쌍욕을 퍼부으며, 공문을 띄우고 보고서를 복붙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건 간부가 하게 마련이지만, 이등병 때부터 지금까지 안 박사는 김병장에게 그걸 전부 떠넘기고 있었다. 사실 며칠 전에-순전히 안박사의 삽질로-보안과에서 털리고 징계를 주네 마네 휴가가 짤리네 마네 하는 일련의 소동 후에야 김병장은 비로소 공문은 간부가 띄우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아, 씨바. 집에도 못 가고 기분 꿀꿀하니까 닭다리나 뜯어야지. 어후! 닭이 너무 맛있엉!"

 

휴가 나간지 좀 지난 덕분에-게다가 외박은 남아있을 리가 없었고-김병장은 잠시 인간의 존엄성은 훌훌 벗어버리고, 안박사가 먹고 던진 치킨 꼬투리에 남은 뼈와 껍질이라도 있을까봐 그쪽을 흘끗 봤다. 하지만 더러운 성격 그대로 안박사는 닭뼈 끄트머리에 남은 연골은 물론이고, 뼈 자체를 이빨로 쪼개서 안에 있는 골수까지 핥아먹고 있었다.

 

"안 박사님, 근데 말임다. 국장님이 사무실에서 닭냄새 풍기는 거 누군지 찾아내면 가만 안 두겠다고 하셨는데 말임다. 아, 나도 닭 먹을줄 아는데." 김병장이 말했다.

 

"뭐? 너 지금 협박하는 거냐?" 안 박사가 입 속에서 씹을 수 없는 닭뼈 끄트머리만 꺼낸 다음 서랍을 뒤졌다. 그가 꺼낸 것은 뻘건 도장이 찍힌 고무 곤봉이었다. 천천히 일어나서 걸어오는 안 박사의 얼굴에, 한니발 박사나 조커의 얼굴에나 드리울 법한 그림자가 졌다. 그쪽을 본 김병장은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바짝 붙었지만, 어차피 뒤는 책상이었고 도망갈 곳 따위는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안박사가 곤봉을 치켜들었다. "국장님이 그러셨지 말임다! 일단 그것부터 내리고 말씀하십쇼!"

 

"내 친구에게 인사해. 이름은 존슨이라고 하지. 내가 몇년 전에 '살아있는 갑옷' 건으로 조사갔다가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헤까닥 맛가는 걸 막아준 고마운 아이야. 존슨과 너도 뜨거운 대화를 나눠보렴."

 

"이 미친놈아! 영화 자체가 틀리잖아!"

 

"뭐? 미친놈? 그래 좋아. 날 미친놈이라고 부르는 건 좋아. 사실이니까. 하지만 날 미친놈이라고 놀리는 건 참을 수 없다!" 존슨이 김병장과 첫 만남을 가졌다.

 

"뭐? 무슨 소리야! ...아야! 때리지 마십쇼! 안박사가 사람 죽인다아아아!" 사무실에 신명나는 자진모리 장단이 울려퍼졌다. 김병장이 삼도천 너머의 조상님들과 면담하고 있을 때 즈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안박사는 고개만 돌려 뒤를 본 뒤 그 자세로 그대로 굳었다.

 

"안 박사... 사무실에서 뭐하는 짓이지?"

작은 키에 나이도 알 수 없는 아줌마였다. 늦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알이 커다란 선글래스를 끼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입에는 거의 다 타서 끄트머리만 남은 시가가 물려 있었다. 아줌마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시가를 질겅질겅 씹었다. 안박사는 거의 반사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각도로 몸을 구부리고 손바닥을 마주 비비기 시작했다.

 

"아이고! 국장님! 어인 일로 평일에 이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마실 건 유자차? 커피? 현미녹차? 매실차? 당장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국장의 표정이 선글라스 너머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얘! 가서 차좀 타와라!"

 

"버... 범인은 안박... 끄르르륵..."

 

김병장이 경련 한번을 마지막으로 바닥에 축 늘어졌다. 국장의 고개가 바닥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엎어진 김병장, 그리고 안 박사 책상 위에 있는 닭의 잔해를 거쳐, 안 박사에게 향했다.

 

"오호라. 출장 전에 잘 하고 있나 한번 보러 왔더니 이렇게 개판을 쳐놓고 있을 줄이야. 내가 병사 패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리고 내가 분명히 사무실에서 닭 먹는 놈 찾으면 족친다고 그랬을 텐데." 국장의 입꼬리가 한쪽만 치켜올라가 씰룩거렸다. 안박사의 얼굴이 군바리 점심 식사만큼이나 시퍼렇게 변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손바닥을 비비는 건 멈추지 않았는데, 파리인간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허허허! 오해입니다 국장님! 병사가 밤늦게까지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닭이라도 시켜준거에요. 정말이에요." 안박사가 손바닥을 비비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조금만 더 빨리 비볐다가는 불이라도 붙을 지도 몰랐다.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이 머저리 새끼야." 국장은 품에서 시가 써는 칼을 꺼냈다. 안 박사가 다 체념한 표정으로 칼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국장은 다른 쪽에서 시가와 함께 성냥을 꺼냈을 뿐이었다. 안 박사가 안심하는 사이, 국장은 시가 끄트머리를 썰고, 안박사의 거칠거칠한 뺨에 성냥을 그은 뒤, 그걸로 불붙인 시가를 그의 이마에 비벼 눌렀다. 사무실 안에 또 비명소리가 가득 퍼졌다.

 

#3

 

"어휴, 시발. 내가, 시발. 당장 굶어죽지만 않으면,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안 박사는 조수석에 앉아서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백미러 밑에 달린 염주가 차가 흔들리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차는 1톤 반짜리 픽업트럭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김병장이었다.

 

"숨 안차심까?" 김병장은 윈드실드 너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차가 올라가고 있는 비탈은 대충 다져진 흙길이었는데, 그나마도 길의 경계는 얇은 재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다.

 

"뭐 이 자식아?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안 박사가 자리 밑에 있는 짐에서 곤봉을 꺼냈다. 김병장은 자신의 싼 입을 원망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아, 젠장. 때리지 마십쇼! 차 시동 꺼짐다!" 가뜩이나 나쁜 길에서 차는 더 심하게 흔들렸다. 한두 번 차가 산비탈로 미끄러지고, 김병장의 눈이 퉁퉁 부어오르는 일련의 사건 뒤에 차는 겨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김병장은 간신히 미끄러지지만 않을 정도로만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구름에 온통 붉은 빛이 비쳤다. 주위는 고장난 건식 사우나에라도 들어온 것 같은 열기가 풍겼고, 김병장은 시동을 끄고 나와 열심히 땀을 닦고 있었다. 안박사는 그 꼴을 보고 코웃음을 치더니, 짐에서 터무니없이 크고, 헐렁하고, 여기저기 해진 천뭉치를 그에게 던졌다.

 

"입어라, 멍청아. 우린 저 밑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농담이시지 말입니다?" 하지만 김병장은 안 박사의 눈을 보고 방호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야근 확인서 끊어갈 때랑 똑같은 눈빛이었으니까. 농담이고 흰소리고 안 먹히는 저 도깨비 같은 눈.

 

"빨리 입기나 해. 짐은 네가 드는 거 알고 있지?"

 

"하아......"

 

다 차려 입자, 안박사와 김병장은 별로 덩치 차이도 안 나는 모양새가 되었다. 똑같이, 달 탐사라도 하러 나온 것 같은 괴이한 꼴. 안 박사가 화구로 내려갔고, 이어 김병장이 짐을 가득 들고 내려갔다. 아래는 열기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용암이 식어 디딜만한 부분은 어느 정도 있었다. 바로 옆에서 솟아오르는 가스에 기겁하며, 김병장은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안 박사를 따라갔다.

 

"그런데 안 박사임, 이번에는 대체 뭘 보러 온 겁니까?"

 

"공문 봤잖아, 멍청아."

 

"아니, 공문이라고 해 봐야 만날 똑같은 내용이지 말입니다. 대민지원이니, 출장이니. 저는 제발 사람 좀 봤으면 하는 생각인데 말입니다."

 

"저기 있네." 안 박사가 말했다. 그랬다. 그들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병장과 안 박사와는 다르게 가벼운 사파리복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총까지 들고 있었다. 옆에 상태 안 좋은 동물 시체라도 있었으면 완벽한 밀렵꾼 상이었을 것이다.

 

"아...... 휴가 나가서 피해야 될 부류 넘버 쓰리지 말임다." 이제 그들은 손에 든 걸 김병장과 안 박사에게 겨누고 있었다.

 

“원이랑 투는 뭔데.” 둘은 슬슬 뒷걸음질을 쳤지만, 무법자 무리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간격은 벌어질 줄 몰랐다.

 

“보증 서달라는 친구랑 빚쟁이지 말입니다.”

 

"야, 이 새끼들아! 이건 12게이지 샷건이여! 바닥에서 용암찜질이나 하고 싶은 거 아니면 얌전히 가진 것 전부 내려놓고 손들고 있더라고!" 그들 중 하나가 외쳤다. 안 박사와 김병장은 생각할 것도 없이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안 박사는 한참 뛰다가, 김병장이 가져온 도구를 내팽개치고 달리고 있던 걸 알아챘다.

 

"멍청아, 그걸 놓고 오면 어떻게 해!"

 

"목숨이 달렸는데 어쩔 검까!" 뒤에서 샷건 든 친구들이 쫓아왔다. 아무래도 들고만 있지 쏠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멍청한 것만큼이나 방호복은 뛰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질 않아서, 안 박사와 김병장은 거의 붙잡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미친 놈아, 저거 잃어버렸다간 징계로는 안 끝난다고!" 안 박사가 말했다. 뒤에서 샷건 든 밀렵꾼의 손아귀가 안 박사의 머리 위를 스쳤다.

 

"알 게 뭐야. 어떻게 좀 해 보십쇼!"

 

"......아아, 물론이지. 용서해라 김병장!" 안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서 한참 달리고 있던 김병장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김병장은 바닥에서 뒹굴다가 결국 밀렵꾼들에게 붙잡혔고, 안 박사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빠른 움직임으로 화구를 올랐다.

 

"야, 이 망할 새끼야! 이대로는 안 끝난다! 여기서 멀쩡히 살아 나오면 네놈은 꼭 죽여버릴 거야!" 바닥에 암락이 걸린 채로 엎어져 있던 김병장이 외쳤다.

 

"죽이건 말건 맘대로 떠들어라! 내가 다시 돌아오면 너 무진장 고맙게 생각할걸!" 안 박사가 힘겹게 화구를 기어오르는 가운데, 그의 밑으로 밀렵꾼 일당이 기어 올라왔다. 안 박사는 돌이니 먼지를 그들에게 닥치는 대로 뿌리며 따돌렸다.

 

"개소리 집어쳐! 이..." 김 병장은 목 뒤에 길고 딱딱한 것이 와 닿는 것을 느끼며, 올라오던 말을 삼켰다.

 

"아무튼 그거 안 잃어버리게 간수해 놔! 빌리 불러올 테니까 좀만 기다려!" 안 박사가 화구 위로 사라졌다. 하지만 안 박사는 열리지 않는 차 문과 씨름하다가, 화구를 기어 올라온 밀렵꾼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안 박사는 1. 열쇠는 김병장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2. 만일 열쇠가 있었더라도 어차피 김병장이 없으면 자기는 운전을 못 하니까, 아래로 내려가는 건 꿈도 못 꿨을 거란 사실을 떠올렸다. 잠시 뒤, 그는 강도 일당에게 흠씬 얻어터진 상태로, 길쭉한 바위에 묶여 있던 김병장 옆에 내팽개쳐졌다.

 

"그래도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이 살아있기는 한 모양이지 말임다, 안 박사임." 김병장은 내심 고소하다는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닥쳐." 안 박사는 묶인 채로 김병장의 쪼인트를 걷어찼다.

 

"아야!" 둘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밀렵꾼들이 (방호복 유리 너머로) 험악한 표정을 하고 다가왔다.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김병장과 안 박사는 역시 죽지 않을 정도로 또 두들겨 맞고, 이번에는 서로 등을 맞댄 채로 묶여있게 되었다.

 

#4

 

“저번에 클라우스랑 윌슨만 보낸 건 실수였지.” 밀렵꾼 두목이 말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용암덩어리 비슷한 것을 가운데에 두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안 박사는 꽤나 경악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실수에서 배운 게 좀 있었어. 그 거추장스러운 방호복이 굳이 필요하진 않다는 것과,

 

“맙소사, 일이 커졌군.” 안 박사가 중얼거렸다.

 

“......안 박사임, 저거 뭡니까?”

 

“김병장, 가장 큰 조류의 알은 뭐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타조지 말임다. 어디 잘못 맞으셨슴까?” 안 박사는 김병장을 쥐어박으려다가, 그랑 등을 맞대고 묶여있었던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뭐, 좋아. 그럼 저 놈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저게 거대한 새의 알이라고 하면 믿겠나?”

 

“무슨 개소림까. 신밧드의 모험도 아니고.”

 

“에라이, 짜식아. 묶여서도 입만 살아가지고.” 안 박사는 묶인 팔꿈치로 김병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김병장은 신음소리를 내려다가, 밀렵꾼 두목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 걸 보고 신음을 다시 삼켰다. 안 박사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 치고는 제법 큰 편이었지만, 둘에게는 다행이게도 주변의 땅울림 덕에 그들에게까지 들리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짚었어. 저건 로크, 통칭 ‘화산 새’의 알이다.” 김병장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안박사는 보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화산지대임까?”

 

“알 크기가 저 정도라면, 성체의 크기는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 병아리와 닭의 관계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 거야. 그 덩치를 먹여 살리려면 꽤 먼 곳까지, 그것도 주위 생태계를 거의 절멸시키는 수준으로 사냥할 수밖에 없어. 살기 위해서는 먹을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알을 충분히 품을 시간이 없지. 그렇다면 어미 새는 어떤 곳에 알을 낳으려고 할까.” 밀렵꾼들은 이제 안 박사와 김병장이 묶여 있는 곳 앞에 돌덩이를 가져다 놓았다. 김병장은 마치 곰덫에 놓인 고깃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압수한 짐까지 둘의 앞에 놓고,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 밀렵꾼들은 김병장과 안 박사를 내버려 두고 둔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따뜻한......” 김병장은 뭘 하는 건지, 계속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안 박사는 귀찮아하면서도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꼬마들 운동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꼴사나운 동작이었다.

 

“그래. 올라오는 지열만으로도 익어버릴 것 같은 이런 곳을 택하겠지. 알은 자연히 화산탄과도 구분이 잘 가지도 않고,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깨뜨릴 수 없는 무시무시한 껍질을 가지게 될 거고 말야.” 그 때, 열심히 떠들고 있던 안 박사와 김병장, 그리고 작당하고 있던 밀렵꾼들 모두 먼 곳에서 들리는,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사냥감의 마음속에 절망만을 심어놓고, 이제 곧 뱃속에 들어갈 거라고 체념하게 만드는 그런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밀렵꾼들은 더 필사적으로 둔덕을 올라갔다. 고산지대라서 그런지, 아까는 맑은 편이던 날씨가 어느 새 우중충해져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무슨 소리임까?”

 

“보통 새끼가 있는 동물은 더 난폭해지게 마련이지. 하물며 이렇게 알을 품고 있는 어미라면 말할 것도 없어. 우린 이제 죽었다, 김병장.”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십쇼. 다 끊었......” 순간, 저 위에서 구름이 형체를 이뤘다. 구름을 휘감고 낙하하는 무언가가, 아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덮쳐왔다. 누구도 움직이기 전, 놈의 치명적인 발톱이 김병장과 안 박사의 불과 0.5미터 옆에 꽂혔다. 재가 위로 피어오르며 자욱한 구름을 피워 올렸다. ‘그것’은 거대한 새였다. 만일 날개를 편다면, 여객기랑 거의 비슷한 크기가 될 정도로 거대한 새. 온 몸이 잿빛의 깃털로 덮여 있었고, 깃털은 깃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식은 용암과 질감이 비슷해 보였다. 놈이 장검과 맞먹는 길이의 발톱을 땅에서 뽑아내느라 씨름하는 걸 보며, 둘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한참 발톱을 뽑아내려다가, 새는 머리를 쳐들어 둘을 내려다봤다. 끓어오르는 용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현실적인 주황빛 눈이었다. 핏발이 잔뜩 서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김병장은 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이런 생물이 지구상에 남아 있었다고? 괴물 새가 아직도 발톱을 뽑아내느라 애쓰고 있는 동안, 김병장은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이 끊어지자마자 안 박사를 등으로 밀어내고 뛰었다. 안 박사 역시 김병장의 뒤를 따라 뛰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여기저기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5

 

“똥물에도 파도가 있는데 어디 이놈이 어른을 쳐!” 안 박사가 외쳤다. 그는 어인 일로 가방타령을 하지 않았는데, 김병장이 현명하게도 그걸 들고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점점 더 많아져, 안에는 거의 짙은 안개까지 껴 있었다.

 

“잔소리 말고 빨리 오기나 하십쇼!” 그들이 오십 자 정도 간격을 벌렸을 때, 화산 새는 바위틈에서 발톱을 완전히 뽑아내 버렸다. 그리고 괴성을 지르며 김병장과 안 박사의 뒤를 쫓았다. 제 아무리 빨리 달려도, 간격이 벌려져 있어도, 둘은 방호복을 입은 데다가 괴물 새에 비하면 보폭도 턱없이 작았다. 놈이 뛸 때마다 안개가 어지럽게 요동치며, 조금씩 걷혔다.

 

“이런 젠......” 거의 둔덕에 다 왔을 때, 안 박사의 발이 젖은 바위에 미끄러졌다. 그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다 뭔가 붙잡는다는 게, 하필이면 한발 차로 앞서가고 있던 김병장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덕분에 김병장도 나란히 넘어졌고, 결국 둘은 괴물 새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안 박사임, 마지막까지 정말 이러시김까.” 김병장이 웅얼거렸다. 아니, 그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아니, 거, 미안하구만. 고의로 한 건 아니고. 김병장, 유서는 써 놨나?”

 

“이,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박사님 욕보다는 부모님께 죄, 죄송하다고 써놓는 거였는데 말임다.”

 

괴물 새는 그들을 앞에 두고,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놈의 주황빛 눈은 사냥감에 대한 사악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대로 부리나 발톱만 살짝 움직여도, 둘의 목숨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악운은 그들 편에 있었다. 새의 뒤쪽에서 폭음과 함께 열기가 훅 치솟았다. 김병장은 흐려진 시야로 괴물 새의 건너편을 봤는데, 안개 사이로 밀렵꾼 놈 두엇이 둔덕에 엎드려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무반동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참 안된 사실이지만, 포탄은 괴물 새의 한참 뒤에 화구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는 본인들만 알 것이다. 농담 따먹기라도 하다가 방아쇠를 잘못 당겼다던가, 아니면 안개 때문에 김병장과 안 박사가 이미 죽은 줄 알았다던가, 뭐 등등. 어떤 이유였건 간에, 그리 현명한 짓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 빗소리와 땅울림만 들리는 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괴물 새가 놈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다시 피가 식는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분화구와 내려앉은 안개의 베일이 통째로 떨리는 것 같았다.

 

“뭐, 무반동총까지는 칭찬해 줘야겠군.” 안 박사가 일어나며 말했다.

 

“거, 거기다 덕분에 목숨까지 건졌고 말임다.” 새는 이제 김병장과 안 박사를 내버려 두고, 용암호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김병장은 밀렵꾼들이 짓고 있을 표정이 눈에 선했다. 저 쪽에서 끔찍한 비명소리와, 새가 질러대는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그들은 몹시 여유롭게, 짐을 챙겨서 둔덕을 올랐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복귀하는 것만 남았지 말임다. 아, 온통 땀 범벅이네. 두 번 다시 입을 일 없었으면 좋겠슴다.” 김병장은 방호복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차 문을 열었다.

 

“임마, 개 놓고 타, 개 놓고!” 안 박사는 김병장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만 좀 때리십쇼! 방금도 같이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셨지 않슴까!”

 

“목숨 건졌으면 됐지. 아무튼 그거랑 그건 별개야.” 김 병장은 안 박사에게 꿀밤을 또 맞고, 그걸 잘 개서 넣어놓은 다음에야 차를 탈 수 있었다. 빗발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고물 픽업트럭은 털털거리며 비탈을 내려갔다.

 

“안 박사임, 이제 어쩌실 검까.” 김병장이 말했다. 그는 아직도 약간 창백한 얼굴이었다. 윈드실드는 바람에 내려앉은 화산재와 빗물이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일단은 빌리랑 합류해야지. 원래는 알만 회수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보다시피 그건 글렀고. 게다가 저놈은 이미 사람 맛을 봤으니까 처분해야지. 내버려 두면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니까.”

 

“그럼 빌리를 처음부터 불러왔으면 얼마나 좋았슴까.”

 

“그 아저씨가 자기 휴가 중에 건드리는 거 싫어하는 거 너도 알잖아, 이 자식아. 일단......” 실없는 소리나 주고받던 도중, 김병장은 멀리서 희미한 비명소리 같은 걸 들었다. 그는 순간 클러치에서 발이 미끄러질 뻔했다. 김 병장은 뻣뻣한 목을 돌려 조수석 쪽을 봤는데, 빌리랑 한창 통화하고 있던 안 박사도 어딘지 더 질린 표정이었다. 안 박사의 말이 점점 빨라지고, 억양이 제멋대로 춤췄다.

 

"들으셨슴까?”

 

“그래.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밟으라고, 멍청아.” 안 박사의 얼굴은 계속 시퍼래졌다가 시뻘개지더니, 이내 다 포기했다는 양 몹시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김병장은 그걸 보고 더 불안해졌다.

 

“밟으라고 하셔도 내리막길......” 순간 차 주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커다란 발톱들이, 양 옆의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김병장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차는 점점 땅에서 떨어졌다. 새가 날개를 치는 것에 따라 차는 아래위로 요동쳤고, 둘이 뒤집어 쓴 깨진 유리도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비바람이 치고 들어와 안은 더더욱 개판이 되었다.

 

“안 박사임, 놈이 우리를 처치하려고 쫓아왔슴다!”

 

“아니, 딱히 우리를 처치하러 온 건 아니라 봐. 지금은 극도로 히스테릭해져 있으니까, 움직이는 모든 건 공격하려고 들겠지.”

 

“죽을 거야! 이제 전부 글렀다고!” 그 와중에도 차는 계속 아래위로 요동쳤다. 덕분에 김병장도 속이 뒤집어졌는지, 그는 발밑에 토했다. 한참을 매달려 가다가, 두꺼운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말도 해 보기 전에, 새의 발톱에는 붙잡고 있었던 차의 천정과 창문 일부만이 남았다. 차는 비탈을 따라 수 바퀴를 굴러 내려가다가 큰 바위를 받고 그대로 멈춰 섰다. 김병장과 안 박사가 차에서 튕겨 나와 진흙투성이 바닥에 뒹구는 가운데, 새가 그들 근처에 내려앉았다. 김병장은 열기를 느꼈다. 거의 분화구 근처까지 끌려온 것 같았다.

 

“그래도 어디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참 다행이야.” 안 박사가 말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진흙과, 진흙과 비슷한 것, 그리고 유리조각과 긁힌 상처에서 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잘 쳐줘봐야 재난영화에 나온 엑스트라 같은 꼴이었다. 김병장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놈이 한 발짝씩 디디며 김병장과 안 박사 쪽으로 다가왔다. 진흙이 둘이 있는 곳까지 튀었다.

 

“다 죽게 생겼는데 뭐 이리 침착하심까!”

 

“소리 안 들리냐. 놈이다.” 소리는 이제 김병장의 귀에도 분명히 들렸다. 만화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오래된 비행기 특유의 소리가. 그리고 안개를 뚫고, 에나멜 흰 빛으로 칠한 경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조종간에는 익숙한 얼굴이 앉아 있었다.

조종석이 좁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덩치에, 얼굴 가득 띄운 눈부신 미소의 백인 중년 남성. 빌리였다. 

 

"HAHAHAHA! Kill-Da-Ho! Bi*ch!" 기총이 불을 토했다. 동시에 괴물 새의 몸 여기저기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놈은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다가, 순간적으로 도약해 경비행기를 덮쳤다. 빌리는 그 고물 비행기로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법한 움직임으로 상승해 그걸 피했다. 괴물 새가 몇 번을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경비행기는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피해버렸다. 하지만 빌리가 열심히 갈겨대는 기총도 크게 타격은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색만 돌 빛인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왜 경비행기임까......” 김병장이 말했다. 괴물 새와 빌리가 탄 경비행기는 점점 분화구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뜰 수 있는 게 저것밖에 없었다는데.” 안 박사는 둔덕을 기어올라서,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려는 모양이었다. 김병장 역시 뒤로 따라가 붙었다.

 

“그것보다 보통 경비행기로 저런 움직임이 나옴까?”

 

“몰라, 멍청아. 그것보다, 내가 너라면 몸을 좀 숙일걸.” 안 박사가 몸을 둔덕 밑으로 숨겼다.

 

“그게 무슨......” 김병장은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괴물 새가 그들 앞쪽에 있는 걸 보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가 미처 숙이기도 전, 둔덕 앞쪽에 작은 먼지기둥들이 일제히 솟았다.

 

“으아,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김병장은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가차 없다니깐, 정말.” 안 박사는 그런 김병장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김병장은 온 몸을 툭툭 치며,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굴러댔다. “아이고, 나 죽는다! 안 박사임! 한 대 맞은 것 같슴다!”

 

“시끄러 임마. 싸움구경하다가 도탄 맞아서 죽기 싫으면 몸 좀 사려.”

 

둘이 떠들고 있는 동안, 경비행기와 괴물 새는, 아니. 적어도 괴물 새는 들이받을 시점만 노리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새를 들이받고 무사할 리가 없었으니까. 용암호의 잿빛 표면에서는 자욱하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밑에 있는 게 용암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살얼음판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기총은 쉴 새 없이 불을 뿜었지만, 완전히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애용하던 대전차 로켓이나, 헬기의 미사일 정도가 아닌 이상 흠집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밀리고 있는데 말임다.” 김병장이 말했다.

 

그 순간, 두꺼운 깡통 찢는 것 같은 소리가 분화구에 울려 퍼졌다. 김병장은 비행기의 날개 한 쪽이 너덜너덜한 채로 동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봤다. 경비행기는 비틀거리며 단말마를 지르다가, 날개가 뜯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길 없는, 지옥의 하강곡선을 그리며. 뜯어져나간 날개는 용암호의 거죽을 깨뜨리고 반쯤 잠겨 있었다. 새는 떨어지는 비행기 앞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는데, 놈의 부리가 용암의 주홍빛 을 받아 기괴한 조소를 띄웠다.

 

“안 박사임, 다음은 우리 차례지 말임다.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빨리 도망가는 게......”

 

“차 없으면 어차피 도망치는 건 글렀어, 멍청아. 근데 너 한번이라도 저 아저씨가 죽는다던가 그런 상상 해본 적 있냐?” 안 박사가 말했다.

 

“전혀 없는데 말임다.”

 

“그러니까.”

 

“근데 그거랑 아저씨가 살아 나오는 건 별개의 문제지 않슴까.” 김병장이 말했다. 그 순간, 경비행기에서 작살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새 입장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작살은 깃털과 깃털 사이를 비집고, 정확히 동체 한 가운데에 꽂혔다.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며 날개를 쳤지만, 부상을 입은 탓에 점점 끌려 내려갈 뿐이었다. 작살이라는 물건의 특성 상 쉽게 빠질 리도 없었다. 이제 보니 빌리는 작살 총을 들고 있었고, 거기서 뻗어 나온 와이어를 경비행기 동체에 단단히 묶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게 끝나자마자, 조종간을 박차고 밑으로 뛰어내렸다. 팔을 옆으로 쭉 편 채로.

 

“Go to hell, Mother****er! HA!" 김병장은 그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 아닌지 눈을 의심하다가,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비볐다. 이제 보니 빌리의 팔과 다리 사이에는 천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다. 빌리는 눈부신 동작으로, 아주 사뿐히 둔덕 쪽에 착지했다.

 

한편, 새는 점점 밑으로 끌려 내려갔다. 놈은 마구 날뛰다가, 재수 없게도 작살의 와이어가 돌고 있던 프로펠러에 말려들어가 버렸다. 와이어가 춤추며 놈의 날개니 목을 옭아맸고, 괴물 새는 그대로 용암호에 곤두박질쳤다. 곧 두꺼운 기왓장이라도 깨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끔찍한 비명이 화구를 가득 메웠다. 빌리는 놈이 용암에 서서히 가라앉아서 죽어가는 걸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비행기는 처음부터 때려 박을 생각으로 가져왔던 모양이군.”

 

“저것도 취미임까?”

 

“몰라, 임마.” 안 박사가 말했다. 김병장은 그를 따라 둔덕을 내려가며, 대체 빌리는 어디에서 돈이 나서 경비행기를 무슨 총알이라도 되는 양 갖다 박을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내 적어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생각을 그만뒀다. 안 박사는 몇 번이나 김병장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가방에서 이런저런 도구를 꺼내, 바닥에 떨어진 괴물 새의 깃털 조각이니 말라붙은 혈액 샘플을 채취하고 있었다.

 

“어휴......” 김병장은 그걸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쪽 어딘가에 있던 화산 새의 알 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자기 일이 될 테니까. 안 박사는 핏자국을 긁어내다 말고 김병장에게 로프를 던졌다.

 

“잘 묶어 놓으라고.” 안 박사가 말했다. 김병장은 그걸 받고 분화구 저 너머를 바라봤다. 그는 이제 차도 없는데 짐은 늘어났다던가, 빌리의 부담스러운 눈길을 버티면서 복귀해야 한다는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괴물 새의 밥이 되거나, 용암호에서 목욕하는 일은 면했으니까. 어쨌거나 그는 살아 있었으니까. 어느새 하늘은 잿빛 장막 사이로 약간의 푸른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E

 

“그래,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국장이 시가 끄트머리를 씹으며 말했다. 밖에는 눈이 펑펑 오고 있었고, 부식 보관용 냉동고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사무실보다는 따뜻할 게 분명했다. 김병장이 몇 번이나 히터 관련해서 공문을 띄웠지만, 이대로 가다간 겨울이 끝날 때가 되어서나 따뜻한 바람을 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덕분에 이 추운 날씨에도 반팔 반바지만 입고 있는 빌리만 제외하고는,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예. 이번에 보셨듯이 저희도 위에 말해서 인력을......”

 

“아앙? 규모를 뭐 어쩌고 어째? 어차피 누가 죽거나 병신 되기 전에는 저것들이 지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해줄 거 너도 알잖아, 안 박사. 아무튼 수고했고, 보고서 써서 올려.” 국장은 안 박사에게 서류뭉텅이를 던져줬다. 김병장은 분명히 안 박사가 치명적일 정도로 균형을 잃는 걸 봤지만, 그는 용케도 버텼다. “내일까지는 끝내 놔.” 국장은 시가를 여전히 질겅질겅 씹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안 박사가 빌리에게 영어로 몇 마디 하자,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안 박사는 김병장의 책상 쪽으로 걸음을 뗐다.

 

“자, 다 끝나면 퇴근시켜 줄게.” 안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들고 있던 서류뭉텅이를 김병장의 책상에 패대기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는 걸 보고 얼어붙었다. 국장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벌레 씹은 표정으로 안 박사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하, 하하, 국장님. 이건 다른 게 아니고......” 안 박사는 금방이라도 그 막대기 같은 팔다리가 부러져버릴 것처럼 떨었지만, 국장은 그를 지나쳐서 자기 책상으로 향했다.

 

“뭐, 임마. 라이터 놓고 가서 찾으러 왔다.” 국장은 정말로 놓고 간 라이터를 집어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안 박사가 다시 김병장에게 서류를 떠넘기려는 순간, 문이 또 열렸다. “가끔은 너도 보고서 작성 정도는 하는 게 어때, 안 박사? 그럼 나 간다.” 문이 닫히자, 안 박사는 그제서야 한숨을 쉬며 김병장의 책상에 서류더미를 던져놓을 수 있었다. 무딘 소리와 함께, 출장 동안 쌓인 먼지가 날렸다. 김병장은 그걸 보고 한숨을 쉬며, 차례차례 넘겨봤다.

 

“안 박사임, 그런데 이 세계 밀렵꾼연맹이라는 단체는 뭡니까? 드디어 우리도 범세계적 범죄조직. 악의 신디케이트. 드디어 적 세력다운 적 세력을 만나는 검까.” 김병장은 벌써부터 다 죽어가는 표정이었다.

 

“아, 그거? 저번에 봤던 덜떨어진 밀렵꾼들.” 안 박사가 말했다. 김병장은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안 박사를 쳐다봤다가, 그에게 쪼인트를 까였다.

 

“아야!”

 

“말이 좋아 ‘세계 밀렵꾼 연합’이지, 조직의 구심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딱 더도 덜도 말고 동호회 수준이니까.” 김병장은 정강이를 어루만지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앞으로 전역할 때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까. 몸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겠지. 조금만 더 있으면 용팔이(만드라고라)와 씨름하는 것도, 화산 새의 알이 들어간 인큐베이터를 관리하고 가끔씩 먼지를 털어주는 것도, 안 박사와 국장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생하는 것도, 정조를 위협받는 것도 전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어차피 군 생활은 전역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CASE 3,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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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12.09 08:55
    주인공들은 언제 봐도 유쾌하군요 ㅋ
    잘 봤습니다. 왠지 이번 화까지도 낯이 설지 않네요
  • profile
    욀슨 2012.12.09 10:08

    영화도 대개 3편부터는 팍 쉬는데, 이번에는 좀 그런 감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rofile
    yarsas 2012.12.15 04:33
    잘 봤습니다. 여전히 재미난 듀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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