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21 15:12

그래서 나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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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너무 앞서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그녀가 녀석을 흘깃 바라본 것이나 떨어진 교통카드를 주워준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어떤 행동이나 사건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의미의 소비자가 필요한 법이다. 녀석은 언제나 밑도 끝도 없는 맹목적인 짝사랑 소비자였고 그래서 이번에도 많으면 3번 정도의 술자리 안주로나 치부될 소모적인 감정 노동을 벌이는 거라 생각했다.
 
정말이라니까. 오늘도 분명히 날 봤어.”
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을 한 건 아닌데어쨌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녀석은 언제나처럼 눈빛을 반짝거리며 민트 초코를 쪽쪽 빨아댔다. 커피를 안 마시면서 카페를 좋아하는 건 잘못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쳤다. 하긴 나도 아메리카노의 쓴맛이 싫어서 시럽을 많이 넣어 달달하게 마시긴 한다. 너나 나나 일반적인 커피 소비자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일반적인 사랑을 생각하지 마. 사랑의 방식이란 건 사람 수만큼 다양하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내가 녀석의 삶의 방식을 너무 잘 아는 게 문제다. 지난 달에도 겨자색 니트에 짧은 스커트를 찰랑거리던 여자에게 치근대다가 혼쭐이 났으니 말이다.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고,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 여자가 쳐다보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술 먹고 뻗어있다가 깨어났을 때 눈과 코 밑에 치약이 잔뜩 발라져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정 못 믿겠으면 내일 같이 출근 해.”
 
집에 돌아와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보고, 신라면에 식은 밥까지 말아 훌훌 삼키고 나서야 후회가 됐다. 녀석이랑 같이 출근하려면 지하철 두 정거장을 거꾸로 가야 하는데 내가 왜 굳이? 누워서 카톡을 하려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가끔은 일찍 일어나는 것도 괜찮겠지.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감돌았다. 꿈을 꾼 것 같은데 어떤 꿈인지 기억 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팔뚝 언저리가 저렸다. 멍하니 천장을 보면서 뒹굴 거리다가 억지로 일어났다. 민트향 치약을 새로 꺼내 열심히 양치를 했는데도 기분은 나아지질 않았다. 저번 주에 클럽에 갔다가 불가피한 월차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쉬었을 텐데.
 
요즘 들어 날씨도 뒤죽박죽이다. 늦겨울이 다시 오는 건지 쌀쌀하다가 어느새 이른봄 쨍쨍한 햇살이 비춰 나른해지기도 했다. 덕분에 아침마다 뭘 입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한다. 얇은 티셔츠에 가디건을 걸칠까, 가디건보다 야상도 괜찮을 것 같은데두 가지를 고민하다가 예상보다 늦게 밖으로 나섰다. 녀석이 보낸 카톡을 확인하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날씨도 좋은 데 아침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달리게 됐다.
 
결국 지하철은 놓쳤다. 교통카드를 찍을 때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타지 못했다. 앞에 서 있던 할머니가 조금만 서둘러줬더라면 탈 수 있었는데세월에는 장사가 없다지. 녀석이 타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데 준비물 까먹은 초등학생 마냥 발만 동동거리다가 말았다. 그리고 녀석의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봤다. 스모키 화장처럼 짙은 눈매에 약간 들린 코, 작지만 도톰한 입술.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야상을 걸치고 긴 머리를 올려 묶어 시원해 보였다. 어쨌든, 걱정스러워 하는 그녀의 얼굴은 곧 오른쪽으로 휑하니 지나가 버렸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뒤숭숭한 꿈자리가 예언이었다는 듯 골치 아픈 일이 계속됐다. 가끔은 내가 하지 않은 일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한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며 수십 번이나 겪었지만 이번에도 기분이 좋진 않다. 자판기 커피에 담배 하나를 태우며 둘둘 말린 스트레스를 천천히 날려보냈다. 과장은 자기 때는 훨씬 더했다며 재미없는 어른 코스프레를 했다.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이며 시계를 봤다. 일이 힘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긴 한다.
 
퇴근길에 카페에서 녀석과 또 만났다. 민트초코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통유리가 있어 탁 트인 느낌도 들고 사람도 별로 없어 좋다. 게다가 사거리에서 흡연실이 있는 카페는 딱 한군데 이곳 뿐이다. 녀석은 대한민국이 흡연자들을 너무 홀대한다며 말을 시작했다. 흡연실이 많아지면 오히려 흡연자들이 줄어들 거라고 했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며. 그러고 나선 회사에서 있었던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하루하루가 비슷한 일상. 너나 나나 비슷하구나.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일은 재미가 없다.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일에 흥미를 느끼는 법이지 않은가?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
 
녀석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이윽고 다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못 들은 모양이다. 대신 클럽에 갔다가 만난 이상한 여자에 대한 얘기를 했다. 감정의 편차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이었다. 취기가 오르더니 한참 동안 자기 눈을 노려보다가 불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고 한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환상적인 키스가 끝나고 바로 따귀를 날렸다고. 어이없는 기분을 표현하기도 전에 길 고양이처럼 휙 하고 사라져서 더욱 억울했단다. 여자들 중에 이중적인 사람을 많이 만나봤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건 처음이었다고. 지하철에 대해서는 다시 물어보기도 뭐해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어쩌면 내일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로마 향초를 켜놓고 누워 담배를 피웠다. 짐 정리를 해야 하는 데.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풀지 않은 박스가 2개나 남아 있었다. 책이랑 잡동사니들인데 테이프와 노끈으로 꽁꽁 묶여있어서 풀기가 귀찮았다. 커터 칼로 열어보니 잠깐 동안 정리하긴 부담스러운 양 같았다. 내일 넉넉히 시간을 잡아놓고 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불을 끄고 누웠다. 또 기분 나쁜 꿈을 꾸면 어쩌나 살짝 걱정은 됐지만 생각보다 쉽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은 평소와 살짝 달랐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일어났고 옷장을 열자마자 입고 싶고 날씨에도 딱 맞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잘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가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오히려 불편했다. 삶은 항상 불규칙적이고 알 수 없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인데, 세상이 나의 생각과 행동에 너무 알맞게 돌아가니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따로 시간을 체크하지 않았는데도 버스정류장에 가자마자 버스가 도착하고 천천히 내 속도로 걸어갔는데 딱 맞게 지하철이 도착했다. 항상 늘어서 있던 줄도 그날따라 한산한 편이었다. 이런 날은 오히려 막판에 안 좋은 일이 거칠게 뒤통수를 칠 것만 같아 불안하다.
 
구로 디지털단지 역 5-2번 출구로 올라타는 순간, 가득 찬 사람들 틈에서 그녀가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스모키처럼 짙은 눈이 아니라 실제로 스모키 화장을 한 것이었다. 머리는 어제처럼 똑같이 올려 묶었고 커다란 박스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민트색 운동화를 신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사당쯤 갔을까, 그녀가 문득 말을 걸었다.
 
요즘은 무슨 일해?”
 
그제야 슥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귀밑머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너무 허전하지도 풍성하지도 않은 적절한 숱의 귀밑머리. 세상에 딱 하나뿐일 것 같은 질감의 귀밑머리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인생이란 항상 그런 것 같다. 삶의 일부분이 빠질 때는 한 없이 허무하고 걱정스럽지만 결국 언젠가는 꼭 빠진 만큼이 다시 채워지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 카페에 들렀다. 녀석은 3층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민트 초코를 건네주니 씩 웃으며 받았다. 나 역시 시럽이 가득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꿀꺽꿀꺽 삼키고 담배를 꺼냈다. 우리는 앉아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창 밖을 보았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참 많았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것이 떠올랐다. 평생의 시간을 나눴을 때 혼자 있는 시간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딱 2배만큼 더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외롭지 않은 순간보다 외로운 순간이 딱 2배만큼 더 많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대학 때부터 모았던 쓸데없는 전공서적들, 생긴 것만 보고 샀지만 첫 페이지도 읽지 않은 책들을 꺼냈다. 그리고 낡은 mp3와 헤드셋 사이에서 손바닥만한 수첩을 하나 발견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로 만든 일종의 추억 앨범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별로 늙지도 않은 것 같다. 어릴 때는 참 나이 들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스모키 화장이 지금 생각해보면 딱 적당한 나이 대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자로서 가장 매력적인 나이 대랄까? 정확히 표현하긴 힘들지만 20대 중반 가량인 것 같다.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귀밑머리는 여전했다. 책장에 책을 우겨 넣고 수첩은 재활용품 수거함에 버렸다.
 
다음 날은 오랜 만에 버스로 출근했다. 입사 초에는 버스로 곧잘 출근하곤 했다. 가끔 재수없는 타이밍에 길이 막히면 늦을 수 있어서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사실 버스로 출근하는 쪽이 일반적으로는 더 빠르긴 했다. 일찍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면 일찍 퇴근할 수 있다! 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날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 말했듯이 빠지는 곳엔 딱 그 만큼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마칠 때쯤 녀석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늘 만남 주선했으니 와서 분위기 띄우도록!’ 이렇게 짧은 글과 시간, 장소가 왔다. 치킨에 맥주라너무 상투적인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만족했으니 상투적인 장소가 되었겠지. 그러고 보면 세상일이란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제 시간에 도착했지만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담배를 3개나 피워야 했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담배를 피우게 된다. 그렇다고 막힌 속이 뻥 뚫리진 않는다. 물리적으로 봤을 때도 연기가 폐를 채우니 오히려 더 막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로가 된다. 담배가 좋은 점은 어떤 상황에서든 묘하게 위로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가운데 기둥 옆에 두 여자가 앉아있다. 나는 그리로 가서 목례를 하고 사뿐히 앉았다. 나름 웃는 다고 했는데 표정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기분이었다.
 
치킨 좀 더 시키자
 
녀석은 몇 번 벨을 누르다가 반응이 없자 카운터로 향했다. 나는 반쯤 뜯긴 간장치킨을 허겁지겁 뜯기 시작했다. 그녀는 포크 2개를 건넸다. 간장 치킨이 목에 탁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소개팅이야?”
오해하지마. 나 말고 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끄덕였다.
 
그 다음엔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변덕 심한 날씨부터 연예인 얘기, 최근에 봤던 영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나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잘 맞는 것 같았다. 곧 깊은 애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말했듯이 이미 아는 이야기는 영 흥미가 없는 편이라 딴 생각을 많이 했다. 언젠가 여름에 부산에 여행을 갔었다.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해운대 밤바다를 보게 되었고 블랙앤화이트라는 모텔에 묵었다. 치킨에 맥주를 배불리 먹고 시덥잖지만 재미있는 대화를 나눴다. 거기는 욕실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다 보이는 구조였다. 아이폰으로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매끈한 곡선에 거품이 흐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평생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아름답고 극적인 순간이었다.
 
헤어지고 녀석과 나는 카페에 들렀다. 녀석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민트 초코를 쪽쪽 빨았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광대뼈를 움찔대며 계속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정말 잘 될 것 같아.”
?”
못 봤어? 내가 얘기할 때마다 웃는 거? 완전 푹 빠진 것 같다니까.”
 
뭐랄까, 어떤 얘기를 해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녀석은 최근 나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는 친구고 사랑스러운 녀석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바램이 이루어질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어쨌든 서운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진 않았다. 애꿎은 담배연기만 창 밖으로 날려보내며 나는 녀석의 이야기를 최대한 성의 있게 열심히 들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내일 카페에서 만나면 솔직하게 애기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모르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알아야만 하는 것, 결국에는 알게 되는 것. 녀석을 위해서라기 보단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그녀를 위해서일 수도 있고.
 
집 앞에 도착했는데 그녀를 봤다. 그녀는 손목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담배가 무지 땡겼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서 말했다.
 
한잔 더 할래?”
 
집에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카페로 갔다. 희고 동그란 80년 대에 썼을 법한 커피잔에 커피가 나왔다. 네모난 각설탕이 하나 밖에 안 나와서 아줌마에게 각설탕을 좀 더 달라고 했다.
 
커피 아직도 달게 마셔? 건강에 안 좋다니까…”
사람이 쉽게 변하나. 난 이게 좋아.”
 
음악도 나오지 않는 조용하고 낡은 카페. 각설탕을 녹이려고 스푼을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달그락, 달그락. 그녀가 말했다.
 
얼마 전에 부산 갔었어.”
누구랑 갔는데?”
혼자. 아침에 일어났는데 되게 기분이 이상한 거야. 꿈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인지는 모르겠고. 기분이 나쁜데 왜 나쁜지 모르니까 더 기분 나쁘고아프다고 월차 쓰고 누워있는데 왠지 시간이 아까워서 뭐든 해야겠더라. 어디라도 가볼까, 하다가 부산 생각이 나서. 아직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갔어.”
그 녀석한테 빨리 말해줘.”
?”
너도 알겠지만 녀석이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니면 확실하게 끊어달라고. 나한텐 소중한 친구야.”
친구 맞아?”
. 친구. 너한테 관심 있는 것도 맞고.”
그래난 아직 여자엔 관심이 없는데.”
그러니까 빨리 말해달라고. 녀석이 제대로 오해하기 전에. 자주 그러니까 빨리 말해주면 크게 상처 안받을 거야.”
그 사람 좋아해?”
말했잖아. 친구라고.”
왜 하필 그런 사람이 친구야?”
시비 거는 거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너무 예쁘고 재미있는 분이길래.”
진짜 그냥 친구야. 성적 취향이 다른 것뿐이고.”
그럼넌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
 
그때, 주인 아줌마가 와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길게 하품을 하며 귀찮은 티를 팍팍 내니 뭐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탈 수 있는 큰길까지 걸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거리엔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술기운이 슬슬 날아가니 추위가 느껴졌다.
 
얼른 가. 춥다.”
 
집업을 코까지 올리고 말했다. 문득 그녀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녀는 머리를 풀었다가 다시 올려 묶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갔다. 날씨가 추웠지만 담배를 반갑이나 피고 나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말했다시피 담배는 어떤 상황에서든 묘하게 위로가 된다.
 
다음 날, 지하철을 탔는데 그녀는 없었다. 여느 날과 다름 없는 하루를 보내고 언제나처럼 카페에 들렀다. 녀석은 반쯤 얼빠진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잘못하긴, 그냥 잘못 짚은 거지. 길에서 너랑 같은 취향의 여자를 만나는 게 어디 쉽겠냐.”
, 위로는 못해줄 망정…”
그러니까 운명적인 사랑 찾지 말고 그냥 너네 커뮤니티에서 알아봐.”
싫어. 난 서로 알고 만나는 사람 말고,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눈맞고 싶단 말야. 운명적으로!”
운명 같은 소리하네. 언제 철들래?”
아 몰라.”
 
녀석은 입을 삐죽 내밀고 민트 초코를 신경질 적으로 마셨다. 나는 창 밖을 보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나는 왜 그녀를 잡지 않았을까? 여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다시 만났는데, 그걸 알면서도 끝내 거부하게 만든 이유는 뭐였을까?
 
가끔은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나의 말과 행동은 온전히 내 것일 것 같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나도 모르게 하는 말과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들. 어떨 땐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내가 아는 나보다 훨씬 나 같기도 하다. 운명이나 인연, 삶에서 완연하게 빛나는 특별한 순간들은 어쩌면 내가 잊고 있던 나 때문에 벌어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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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ㄷㅇ 2014.04.22 00:31

    멋있다

  • ?
    러크 2014.04.22 00:42

    우와 ㅠㅠ

    필체와 느낌이 꼭 일본 연애소설 읽는느낌~

    일본 연애소설 별로 읽어본게 많진않지만 ㅎㅎ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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