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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의 등에는 커다란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정수리 아래 가늘고 새하얀 목이 우아하게 뻗어내리는 그 선상에서 솟아나와 펼쳐진 꽃받침이 그것을 떠받치고 있었다. 연꽃처럼 만개한 겹겹 꽃잎은 새하얘서 마치 천사 날개처럼 보였다. 소녀는 그 '날개'에 기댄 듯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일순 소녀 주위를 휘감듯 바람이 일었다. 소녀는 한 손에 든 검을 다잡았다. 주변을 맴도는 공기 흐름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 소녀는 검을 쥐지 않은 손을 펼쳐 바닥을 위로 오게 놓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장미 덩굴이 그 손목을 휘감아 소녀를 상처입혔다.  긁힌 상처에선 비정상적으로 많은 피가 새어 나와 주위에 흩뿌려졌다. 일부는 소녀를 휘감은 바람 줄기에 색을 입혔고, 다른 일부는 그대로 소녀 손목 위에 피어 또 한 송이 꽃이 되었다. 등에 핀 꽃은 새하얗지만, 손목에서 핀 꽃은 피를 머금은 듯 붉었다. 꽃잎이 상처를 덮자, 더이상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바람 줄기를 응시했다. 더이상 바람은 무색투명한 것이 아니었다. 소녀 피가 닿은 부분으로부터 그것은 형태를 갖추고 색을 입기 시작했다. 심해어처럼 눈이 없고 긴 주둥이가 비정상적으로 큰 그것은 한 쌍 날개와 뱀과 같은 몸뚱이를 뽐내듯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무기라고도 하고 용이라고도 하는 그것은, 태초부터 숱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던 존재였다.


 소녀는 지금 그것에 맞서려 하고 있었다.


 소녀가 등에 진 꽃 향기가 늙은 용을 끌어들였다. 용은 긴 몸을 크게 뒤틀며 소녀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 유유히 비행했다.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소녀 하나쯤은 언제라도 집어삼킬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소녀는 심호흡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도리어 저것에 집어삼켜지리라.


 등에 핀 꽃은 정신 아찔할 정도로 짙은 향을 풍기고 있었다. 꽃은 소녀의 정수였다. 소녀의 몸 곳곳에 뿌리박은 혈관과 척수를 뿌리처럼 취하고, 그 사지 전부로부터 양분을 취해 꽃은 시들 기색 없이 생생했다. 늙은 용은 그 향기 짙은 꽃송이를 좋아했다. 젊은 여성에게서 피어나는 그 꽃을 먹기 위해 마을을 습격하고 제물을 요구했다. 효과는 언제나 있었다. 습격당한 마을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무사안일을 위해 꽃 핀 소녀를 제물로 바치거나, 아니면 용을 퇴치하기 위해 고용해 떠밀었다. 혹은 둘 다이기도 했다. 이번엔 우연히 후자가 도착했을 뿐이다. 결국 잡아먹힌다는 사실은 달라질 리 없었다.


 바람이 불며 소녀 등 뒤에 핀 꽃잎이 살짝 흔들렸다. 강렬한 꽃향기가 눈 없는 용을 끌어당겼다. 용은 유혹을 참지 못하고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소녀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소녀에겐 이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지금껏 몇 번이고 같은 위험을 경험했었고, 매번 그것을 넘겨오곤 했다. 등에 핀 꽃도 소녀가 원해서 억지로 개화시킨 것이었다. 그 꽃이 없으면 저 교활한 용과 이무기들을 둥지로부터 끌어낼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전문적인 용 퇴치사였다. 문명이 발전하고, 인간은 점점 더 살 곳을 개척해 나가지만, 여전히 인간에겐 숱한 위협이 도처에 산재했다. 소녀의 일은 그런 위협들을 제거해가는 숱한 인간의 시도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소녀는 그 일을 매우 능숙하게 해냈다.


 소녀가 상대하는 용과 같은 존재들은 각지에서 빠른 속도로 줄어가고 있었다. 용이 줄어드는 것과 더불어 소녀와 같은 존재들도 눈에 띄게 줄어만 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꽃은 전신의 생명을 빨아들여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다. 억지로든 자연적으로든 일단 꽃이 피어나버리면 일찍 죽는 건 피할 수 없다. 용 퇴치사들은, 그 짧은 수명을 오로지 더 많은 용을 죽이는 데만 집중해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이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꽃으로 인해 죽건, 용에 의해 죽건, 소녀 자신은 길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죽음이 목전에 이른들 새삼 두려워할 게 무어며, 회피할 건 무어란 말인가. 오로지 꿋꿋이, 당당하게 다가오는 죽음과 맞서자.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마지막 기쁨이기에.


 용이 막 소녀 어깨에 닿기 직전, 소녀가 든 검이 그것의 목줄기에 서늘하게 닿았다. 새하얀 꽃잎 몇 장이 소녀의 격렬한 몸놀림에 떨어져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와 함께 소녀의 눈에서도, 미처 참아내지 못한 눈물 한 줄기가 꽃잎과 더불어 흩날려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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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미지]라고만 하면, 보통은 촬영 사진을 생각하게 되려나요;;;
 저는 이미지만 생각해 버려서, 일찌감치 일러스트를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일러스트 첨부합니다.

신체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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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욀슨 2012.12.09 09:36
    사냥감이 없다면 엽사도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런 딜레마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잘 봤어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0 05:02
    댓글 감사합니다~
  • ?
    모에니즘 2012.12.09 21:45
    용을 죽여야하는 소녀와 소녀를 죽여야하는 용....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순 없을까요 하하.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0 05:02
    좀 개드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용과 소녀가 담합하면 됩니다 ㅎ
  • profile
    시우처럼 2012.12.11 07:25
    당당하게 죽음에 맞서는 자세라고 하지만 역시 산자는 소멸에 대해 담담할 수 만은 없는 것 같아요
  • ?
    카디스 에트라마 디 라이제르 2012.12.11 07:25
    보너스 포인트를 받아라. 네게는 이 포인트를 받을 자격이 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1 07:34
    스스로도, 만약 그런 날이 오면 담담하게 있을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ㅎ;
    그저 덜 추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네요.
  • profile
    Yes늙은조카Man 2012.12.11 23:01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가오지도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매일 밤 두려움에 떠는 것도 이제 지겹습니다...ㅠㅠ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2 07:23
    요즘 안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댓글 내용이 저로선 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 profile
    Yes늙은조카Man 2012.12.12 15:42
    좀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등의 엔딩에서,
    죽음을 앞 둔 주인공이 천운으로든 착각으로든 죽지않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런 걸 바란답니다 ㅋㅋ
  • profile
    yarsas 2012.12.15 05:25
    제가 최근에 구상 중인 이야기와 흡사한 부분이 많네요 ㅎ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5 06:13
    언데드 후속 내용과 관련있나요?? 궁금해지네요.
  • profile
    yarsas 2012.12.15 06:35
    아, 언데드와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 언데드를 완성하고 나면 두드릴 그 몇 개 중에 하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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