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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

 (...)




 "정은섭입니다."


 동균이 이름을 물어오니, 남자는 짧게 답했다. 동균은 테이블 사이에 두고 자신과 마주 앉은 이 남자를 재빠르게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살폈다. 잘 다려진 감색 양복 정장 아래 받쳐 입은 흰 와이셔츠는 흠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얌전한 색상의 넥타이는 목 아래서 완벽한 형태의 매듭을 잡고 있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는, 남자의 겉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약혼 반지거나 결혼 반지일 것이다. 검정 구두는 잘 닦여 있었지만 코와 밑창이 제법 닳아 있었다. 오래 신었거나 외근이 많은 직업인 게 분명하다. 동균은 이 남자가 회사원, 어쩌면 경험 많은 영업 사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걸리는 사실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동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동균은 명함을 한 장 꺼내어 은섭에게 건넸다. 은섭은 두 손으로 명함을 공손히 받아 테이블 위 자기 앞에 놓았다. 자기 명함을 건네줄 생각은 역시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마침 가지고 있는 명함이 없군요."

 "상관없습니다. 나중에 연락처 하나만 남겨 주시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균은 은섭이 정말 명함 한 장 없이 여기에 왔을까 의문을 품었다. 영업사원이라면 항상 처음 만날 사람에 대비해 품에 자기 명함 몇 장 정도는 챙겨놓는 게 보통이다. 애당초 은섭이 명함을 줄 생각이 있었다면, 자신이 이름을 묻기 전에 얼굴을 보자마자 먼저 건넸어야 옳을 것이다. 그는 대체 무엇을 감추고 싶은 것일까? 어차피 조사를 진행하다 보면 전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동균은 더이상 떠보기를 그만두고 곁에 있는 자기 직원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윤세영 군, 저쪽은 조수인 윤세진 양. 둘 다 제 일을 도와주고 있죠."

 "윤세영입니다."


 동균 곁에 앉아 있던 세영은 잠시 일어서 은섭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캐주얼 정장에 가까운 동균의 복장에 비해, 세영의 그것은 더 자유분방했다. 붉은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인 세영은, 설령 대학생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동균의 뒤에 선 세진도 고개를 숙여 보이긴 했지만 세영에 비해 더 차분하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어찌 보면 손님인 은섭을 경계하는 것처럼도 보일 정도다.


 소개를 마친 동균은 다시 은섭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러면 정은섭 씨, 저희에게 의뢰할 게 무언지 한 번 들어 볼까요?"

 "네, 그러면..."


 입으로는 네, 라고 말하면서도 은섭은 쉽게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했다. 동균은 자신이 조금 성급했다고 생각했다. 의뢰인들은 대개 남에게 말하기 힘든 사연을 들고 오기 마련이다. 긴장하고 어려워하는 게 당연하다. 때문에 먼저 자신이 분위기를 풀어주어 은섭이 쉽게 얘기를 꺼낼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하리라.


 "아, 먼저 식기 전에 차를 좀 드시죠. 얘기는 천천히 들어도 상관없으니까요."

 "괜찮습니다. 먼저 얘기부터 하죠."


 은섭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떼었다. 의뢰 내용을 들은 동균은 속으로 안도했다.


 "제 아내, 신미윤에 대해서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전 계단 내려가던 거, 혹시 의뢰인이었어?"


 은섭이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때맞춰 사무실에 온 여자가 동균에게 물었다. 여자가 베이지색 코트를 벗자, 그 아래 입고 있던 옷차림이 겉으로 드러났다. 여자는 인근 여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동균은 이 여자를 잘 알았다. 학생 신분이라도, 동균에게 있어선 중요한 거래처고 사업 파트너였다.


 때문에 세영이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동균은 곧바로 그 머리를 쥐어박았다.


 "여긴 또 뭐하러 왔어, 마녀 꼬맹이가."

 "입조심 좀 해라, 넌."


 세영이 얻어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아픔을 참는 모습을 보며 여학생은 키득키득 웃었다.


 "히히, 꼴 좋다 그래."

 "이씨..."

 "딴 건 괜찮은데, 날보고 마녀라고 하는 건 참아 줬으면 좋겠어. 진짜 마녀에게 실례가 되니깐."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야?"


 동균이 화제를 전환시켜 그녀에게 물었다. 여자는 세영에게서 관심을 돌려 동균을 보았다.


 "뭐긴, 의뢰한 거 제대로 하고 있나 보러 왔지."

 "그거라면 아직 정보수집 중이야."

 "잘됐네. 되도록 빨리 해줬으면 좋겠어."

 "지금도 전력으로 하고 있어."

 "좋아, 잘 하고 있어. 훌륭해. 만족스러워."


 감정 없는 목소리로 감탄사를 연발하던 여자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은섭이 앉아 있더 바로 그 자리였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까지처럼 해줘. 무슨 뜻인지 알지?"

 "물론 지금까지처럼 할 거야. 신경써줄 필요 없어."

 "설령 다른 의뢰가 있더라도, 무조건 내 의뢰를 우선해주라는 얘기야."


 그제야 동균은 이 여자가 무슨 의도로 의뢰 얘기를 꺼낸 건지 이해했다. 여자는 계속해 이야기를 했다.


 "아까 그 남자, 의뢰하러 온 거지? 보아하니 맡기로 한 모양이네. 그것까진 좋아. 당신이 일을 얼마나 벌여놓건 나랑은 관계없으니깐."

 "..."

 "하지만 당신이 여기저기 일을 벌여놓은 것 때문에 내 일마저 지장이 생기는 건 안 돼. 내 신뢰가 걸린 문제고, 당신 신뢰가 걸린 문제야. 내 말 가볍게 넘기지 말라고."

 "가볍게 넘기지 않아. 알잖아? 이제까지처럼 네 의뢰는 내가 직접 맡아 해결할 거야."

 "그럼 방금 전 의뢰는? 그것도 직접 맡을 거 아냐?"


 여자아이 질문에 동균은 시선을 옮겨 어딘가로 향했다. 여자도 그 시선을 따라 동균이 바라보는 그것을 똑같이 보았다. 동균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여자는 그 시선으로 그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완전히 이해했다.


 "그거 진심이야?"

 "응, 아까 의뢰는 세영에게 맡길 참이야."

 "형, 진짜로?"

 "한동균!"


 세영과 세진에게서 놀람과 경악의 표정이 제각각 떠올랐다. 동균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어려운 일 아니잖아. 그저 그 신미윤이라는 여자 행적 감시해서 나중에 보고만 해주면 되는 건데."

 "그치만 이거, 아무리 봐도 불륜 조산데..."


 세진이 반발하는 것을 동균은 간단히 무시했다. 어차피 그녀는 항상 그랬다. 도덕 교과서대로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말한다. 이번엔 의뢰 내용이 불륜 조사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거리라. 그녀 말에 따라 의뢰를 걸러냈다간 이 해결사 사무소는 아무런 의뢰도 맡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해결사 사무소를 찾아올 정도 사람들이면 법이나 도덕에 구애받으면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연들을 가진 게 당연하기에.


 "그리고 언제까지 나 혼자 사무소 일을 전부 할 순 없잖아. 세영이도 이 일 어느정도 할 줄 알아야 내가 안심하고 일을 맡기지. 지금까지 따라다니면서 배운 것도 있을 테니까, 이번엔 혼자 알아서 해 봐. 모르거나 막히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연락하고."

 "형, 진짜 고마워! 나 이거 끝내주게 잘 해올께."

 "기세만은 칭찬할 만 하네."


 가만히 있던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 남자 의뢰가 고작 불륜 조사였다니 말야. 난 좀 더 재밌는 손님일 줄 알았는데."

 "어째서?"

 "왜냐니? 원래 그랬잖아, 여긴. 사람들에게보다 사람 아닌 것들에게 더 인기 있는 해결사 사무소. 그렇지 않아?"


 '사람 아닌 것들'이라는 말에, 세진은 두 손을 꼭 붙들어 쥐었다. 마치 떨리는 것을 억지로 감추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세진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동균을 향해 몸을 돌린 채, 그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탓이다.


 "저기, 이번처럼 사람에게 의뢰 받아본 거, 얼마만이야? 일년? 오육년? 십 년?"

 "글쎄, 생각나지 않는데."

 "감사해 둬. 내가 아니었으면, 그런 의뢰들조차 받지 못했을 테니까."

 "만물관장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 '그쪽' 정보는 전부 널 통해서 받고 있으니까 말야."


 동균이 한 말에, 그 여자, 만물관장은 후후,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에 바로 앉았고, 세진에게 차 한 잔을 부탁했다. 동균이 눈짓하자, 세영이 우두커니 서 있는 세진을 데리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그 사이, 만물관장은 소파 뒤에 서 있는 동균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고맙다고 생각하면 이번 일, 빨리 처리해 줘. 부탁할게."

 "최선을 다해 처리해 줄게."


 대답하면서, 동균은 만물관장이 부탁한 의뢰 내용을 머릿속으로 재정리했다.


 그것은 어떤 여자 둘을 찾아내 데려오는 일이었다. 만물관장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은섭이 가져온 의뢰가 비교적 간단한 일이라 다행이다. 동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뒤, 의뢰 보고를 받은 은섭의 반응은 동균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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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후에 다른 글 도입부 한 화를 또 올려볼 계획입니다. 금주 내에 가능하면 올릴 계획이고요.
 연재를 하게 된다면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될 거 같네요. 아직 판단이 안 섭니다; 다른 분들 반응도 보고 싶네요 ㅎ;

 참고로 다른 글은 판타지 장르입니다. 조만간 한 화 올리겠습니다.
?
  • profile
    시우처럼 2012.12.04 08:38
    오 뭔가 친숙한 이름이 나오네요 마녀가 나오는 걸 보니 찾는 두 여자는 예전에 봤던 그 둘인가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12.04 08:43
    같은 세계관이지만 다른 인물, 다른 배경의 이야기가 될 전망입니다. 이전에 쓴 마녀나 진연 얘기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될 거에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12.07 15:48
    처용가 내용을 가지고 구상해본 게 맞아요 ㅎ 퓨전 판타지라고 보시면 될 거 같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의 경우는, 저는 작무님과 반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니 뭐...딱히 할말이 없네요;;
  • profile
    욀슨 2012.12.09 09:34
    개인취향으로는 이쪽이 연재되는 걸 보고 싶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0 04:57
    욀슨 님께선 이쪽이 맞으시군요 ㅎ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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