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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나와 소녀의 첫 만남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한다면, 당신 또한 알겠지.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그 꼬맹인 애초부터 사람을 만만히 보고 있었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놨더니 봇짐 내놓으란다고, 불쌍해 보여 가게로 들여 놓고 지극정성 몸을 말리고선 흑심 한 점 섞이지 않은 오로지 순수한 선의에서 발언권을 줬더니 순식간에 내 주도권 플러스 자주권까지 강탈해 버리지 않았나. 과장해 말하면 폭거요, 강제합방인데 인심 좋은 집주인이 참아주고 있는 꼴이다. 참고로 집주인이란 바로 나고.



 본디 남한테 성 못내는 성격인데다, 간밤 잠을 설치는 바람에 이 낯선 침입자를 몰아낼 기력도 없다. 잠을 설친 건 모두 그놈의 악몽 때문이다. 커다란 상자. 상자 속 고양이. 상자를 비집고 들어오는, 검고 붉은 메스. 험상궂은 날붙이가 가른 그 얇은 틈새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과연 고양이는 죽어 있을까, 살아 있을까. 질문은 내게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꿈에서 나는 단지 고양이었을 뿐이다. 상자 속에 웅크린 채 앉아, 잠자코 바깥 누군가의 판정을 기다리던 작고 연약한 고양이. 고양이에게 있어, 그 메스는 날카로웠고 또 너무 깊이 들어왔다.



 "뭐에요,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사람 같은 얼굴 하고서."



 하긴 간밤 꾼 악몽가지고 고민할 때는 아니지. 당장 눈앞에 닥친 고민거리가 없지 않은데.



 눈앞에 닥친 고민거리, 소녀는 내가 정말 궁금해 하는 게 '자신이 누구인가'랬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걔가 누군지 알게 되면 걔네 가족이 누군지, 어떤 사람들인지, 어디에 사는지도 알 수 있으니 집까지 바래다줄 수 있을 테니까. 한편으론 그 꼬맹이 집이 어딘가 하는 것 이외에 그녀가 멋대로 떠벌릴 이야기 대다수는 내게 있어 쓸데없는 가십에 지나지 않는다. '탤런트 T씨, 충격고백'이나 '가수 M씨가 말하는 연예 뒷담화'같은 싸구려 여성지 타이틀 따위에선 일찍부터 관심을 끈 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딴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겠나?



 대충 몸을 닦긴 했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무래도 보기도 안 좋고 불편한데다 건강에도 염려되었다.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사람 같은 얼굴'을 보며 웃던 아이는 갑자기 잔기침을 해댔고, 그 바람에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라,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다.



 소녀는 이제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었다.



 어째선지 소녀는 가게 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아는 듯했다. 대뜸 스텝실 몇 번째 선반 위 어느 어느 곳을 찾아보래서 손을 넣어보니, 커다란 샤워 타월이 나왔다. 이런 게 왜 여기 있느냐고 묻기도 전에 소녀는 돌연 스텝 실에서 나를 쫓아내곤 문을 걸어 잠갔다. 문 너머에서 사락사락 옷자락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금 후, 소녀는 그 커다란 샤워 타월 한 장만 몸에 단단히 두르고 나왔다.



 '단단히'라고 말했던가? '당당히'라고 할 걸 잘못 말했군.



 스텝 실에 들어가 보니 바닥엔 물기가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어 건조까지 맞춰 돌려두고 나왔다.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창가 쪽 테이블로 이동해 앉아 있었다. 그 때 내 감상이 어떠했느냐고? 순간 소름이 쫙 끼치면서 오들오들 떨었다. 어쩌다 길을 지나가던 누군가 이 꼬락서니를 본다면 무슨 사단이 있을 지 예상할 수 없기에.



 애당초 장사는 그른 날이었다. 가게 문을 일찌감치 닫고 창문마다 블라인드를 쳤다. 순식간에 가게 안은 어두침침해졌지만 불을 켜두니 오히려 블라인드를 치기 전보다 환했다. 먹구름 때문에 햇빛이라곤 기대할 수 없었던 날이니 당연한 결과였을까.



 문단속을 마치고 소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타월 한 장 걸친 여자애가 카페에 앉아있는 모습은 어색하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 겨우 초등학교 2, 3학년밖에 되지 않았을 꼬맹이 때문에 얼굴 붉힐 일이 생긴다면 그거야말로 정상은 아닐 테니까. 거기 당신, 미심쩍단 눈으로 자꾸 보지 마란 말이야!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볼까요?"
 "그 전에, 넌 대체 누구지?"



 까르르르, 하고 소녀는 웃었다.



 "아이 참, 기억 안 나세요? 제가 말하려던 게 바로 그거라고요. 왜, 아저씨가 물어본 거 아녜요?"



 아 참, 그랬던가. 일말 의심도 없이 남 말을 믿어 버리는 나쁜 성격이 거기서 다시 도졌다.



 그 사이 소녀는 제 앞에 놓인 머그컵을 들었다. 남은 핫초코를 할짝대며 한 모금인가 마시곤, 그녀는 비로소 마각을 드러내놓았다. 내가 물었다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소개할게요. 저는 '인간의 왕'입니다."



…….



 "뭐라고?"


 


=====================================================================================================================


 추가로 수건도 없는 가게에 왠 샤워타월, 하고 생각하면 지는 겁니다...


 


 아무튼 '인간의 왕'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그 다음 회가 될지, 그 다음다음 회일지 몰라요;;

?
  • profile
    시우처럼 2010.09.09 00:34
    그 소녀가 샤워타월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그 곳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샤워타월이 있게 되는 건가요?
    세상의 왕이니까 주인공의 현실인식이나 가계에 뭐가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 쉽게 바꿔버릴수도 있겠네요.

    제가 만화를 좋아해서 자꾸 그거랑 비교하게 되는데 어찌보면
    소녀에게서 스즈미야 하루히와 같은 권능이 느껴질라 한다고 할까요.(어쩌면 제가 작품을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요)
  • profile
    윤주[尹主] 2010.09.09 21:29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를 수도 있고요.
    그것 또한 천천히 판단해 주세요^^
  • profile
    클레어^^ 2010.09.09 04:12
    허걱, 인간의 왕이... 소녀의 몸을 입고 강림했다?
    흐음... 부제를 보니까 점점 심오해지는 거 같군요...;;
  • profile
    윤주[尹主] 2010.09.09 21:30
    부제라면...제목 얘기하시는 걸까요??
    심오하다기보단 점점 지루해지지나 않을지 모르겠네요ㅠㅠ
  • ?
    비벗 2010.09.09 08:27
    이렇게 해서 처음의 상황이군요. 헤에... 흥미진진합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0.09.09 21:31
    사실 처음 상황으로 돌아가려면 좀 더 진행되어야 한답니다...이쯤에서 돌아갈까 생각 안한 것도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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