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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할게요. 저는 '인간의 왕'입니다."



…….



 "뭐라고?"



 대뜸 소녀가 던진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인간의 왕'이라니. '왕'은 당연히 흔히 생각하는 그것을 의미하겠지? 하지만 인간의 왕이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고구려의 왕, 일본의 천황, 왕처럼 군림하는 독재 대통령. 지구상에 수없이 많은 왕이 있어왔지만, 인류 전체의 왕을 자처한 이가 지금껏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자칭 인간의 왕이란 소녀를 홀로 마주한 내 상태는 문자 그대로 망연자실, 흡사 해설 없는 답지를 보고 좌절한 꼴이었다.



 "혹시 풀이 없냐?"
 "풀이라니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대뜸 '인간의 왕'이라고 해도, 난 그게 뭔지도 모르는걸. 그러니까 조금 설명이라도 해주란 말이지."
 "으음, 풀이라…….일단 본풀이는 있는데요. 짤막하게나마."
 "뭐, 암튼 설명이란 거지? 한 번 얘기해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별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애들끼리 지어낸 소꿉놀이 얘기일 테니까, 적당히 장단 맞춰준다 생각하고 듣지 정도였을 뿐.



 가벼운 마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 앉아 이야기를 기다리는데, 테이블 맞은편에서 격하게 목을 푸는 소리가 났다. 대기실에 앉아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오페라 가수처럼 한참 목청을 트이게 하더니, 소녀는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준비 다 됐는데요."
 "얘기해봐."
 "이제부터 할 텐데, 뭐 아무것도 없어요?"



 또 뭐가 필요한 거냐.



 "아니, 장구라던가, 징이라던가, 태평소라던가. 반주 맞춰줄 거 말이에요."
 "아예 판을 차리시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한 마디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럼 판도 벌이지 않는 본풀이도 있어요?"



 진짜 굿이라도 할 생각인가?
 내가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소녀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손뼉을 딱 쳤다.



 "아저씨, 본풀이가 뭔지도 모르죠?"
 "설명이라며, 아냐?"



 설명이 맞기는 하지만, 하면서 소녀는 머리를 짚었다. 조금 후 다시 물었다.



 "아저씨, 신은 믿어요?"
 "주말에 교회는 나가지만."
 "평소엔요?"
 "아니, 애초에 교회 나간다고 딱히 믿는 건 아니야. 내 경우엔 모태신앙이었고, 어려서부터 부모님 따라 주말마다 다니다보니 습관처럼 가는 것뿐이라고."
 "그거 몰라요? 가신 먼저, 그 다음이 동신, 국가신. 교회는 가장 마지막에 챙기는 거라고요."



 어째선지 양쪽 모두 저마다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만. 가신이니 동신이니 해봐야 전혀 이해 못한다고. 교회 다니면서 할 얘긴 아니지만, 솔직히 난 신이 있단 것도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기보단 상관없다고 해야 하나."
 "신이 있단 걸 믿지 않나요?"



 진지한 눈으로 소녀가 물었다.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있단 증거가 어디 있겠어?



 소녀는 돌연, 유리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덩달아 나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그쪽을 보았다. 블라인더가 내려진 유리창을 보면서 소녀는 말했다.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보이지 않겠죠?"



 나도 그러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때도, 혹은 지금까지도 소녀는 타월 하나 몸에 걸친 채니까.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인즉, 저들에겐 우리가 여기 있단 증거가 없는 거네요?"
 "잠깐만, 그건 다른 문제잖아. 신이 있는지 없는 지랑, 우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뇨, 같은 문제에요."



 너무나도 확고하게 단정 지어 말하기 때문일까. 나는 주눅 들어 좀처럼 그녀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소녀는 거듭 두 개가 서로 같은 문제라고 이야기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왜냐면, 둘 다 상자 속에 들어간 고양이 얘기와 마찬가지인걸요."


 


=====================================================================================================================


 


 자칭 '인간의 왕' 소녀의 본풀이, 혹은 내력, 유래 풀이는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오전 일찍 수업이라 오늘은 좀 늦게 올리네요;; 왠만하면 이후로도 계속 아침 시간에 올라갈 것같습니다만, 별 상관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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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시우처럼 2010.09.10 03:57
    '풀이 없냐' 는 주인공의 말에서 순간 저는 딱풀이 물풀 같은 풀 종류를 생각했다는. ㅋㅋ
    고양이 소녀의 말대로,
    신이 있다는 증거 따윈 없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신이 없다는 증거도 존재하지 않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판단을 보류하는 것을 불가지론이라고 하나요?

    아무튼, 상자속에 살고 있는 신세는 지구인들도 마찬가지인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에 저 멀리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문명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현재 그들을 인지하지 못하듯 그들 역시 우리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들과 우리는 과연 우주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까요?

    실제로 지구 위에서 살고있는 우리에 입장에선, 그러니까 아직 열리지 않은 상자속에 들어있는 고양이의 입장에선
    상자를 열어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고양이의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그들의 말이 그저 억지스런 말장난일 뿐이겠지만, 어쩌면 행여나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숨겨진 진실인지도 모르죠.


    그나저나 왜 난 애초에 이렇게 심각해져버린거지? 라는 생각을 마사키는 해봅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0.09.10 15:46
    논문 같은 데 보면 그런 태도 많이 보이죠. '이상의 관계를 명확히 밝혀낼 수 없었다'던지, '분명치 않다'든지.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판단을 보류해 둔단 생각이 듭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뭐 그건 그거고, 어쨌거나 고양이 얘기는 계속해서 다음 회에...
  • profile
    클레어^^ 2010.09.10 08:09
    흐음...
    알고보니 주인공도 상자 속의 고양이?
    점점 어려워지네요 ㅠㅠ
  • profile
    윤주[尹主] 2010.09.10 15:47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ㅠㅠ 암튼 설명은 다음 회에 약간 나옵니다...
  • ?
    비벗 2010.09.10 08:35
    아, 저 장구 칠 줄 압니다. (상관없어!)
    귀여운 소녀로군요. 소녀 전하 ;-)
  • profile
    윤주[尹主] 2010.09.10 15:49
    민폐 소녀겠죠;; 암튼 장구 좋네요. 전 한두 번 두들겨보기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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