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31 09:26

그 특수한 조건

조회 수 156 추천 수 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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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는…… TV에 나온 전 세계 뉴스의 전쟁보다 더 실감하는 위기를 겪고 있다. 바로 오른손에 들려있는 라면이다. 분명 없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가스렌즈를 청소하다가 그게 부엌 청소로 변질되어버려서 싱크대 밑을 여는 순간, 저 구석에 뽀얀 먼지를 휘두른 라면 봉지가 보였다. 그 때 그냥 장을 닫고, 아무것도 못 보았다고 우겨야했다! 그래야했다! 그랬어야 했다구!
“하아, 칼로리 때문이 아냐, 영양 때문에 먹으면 안 돼.”
 이미 먼지까지 닫고는 자연스럽게 눈이 간 칼로리. 나름 ‘다이어트’ 중이라고 6시 이후 금식 중인데, 다이어트하면서 먹어서는 안 되는 ‘라면과 치킨’ 중에 TV에서 라면 먹는 장면만 보면 참을 수 없다는 라면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거다. 이건 안 돼.
“5?… 514! 말도 안 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514kcal라니! 혼자 야밤에 부엌에 한 손에는 라면을 잡고 비명을 지르는 내 모습도 웃기지만, 그런 514에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한 쪽 머리가 더 공포다. 한 쪽에서는 ‘인생의 질과 라면의 상관관계’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라면의 유해성’이라는 오래된 옛날 다큐를 보여주고 있다.
 허벅지를 만지자, 부드러운 살이 내 손을 감아왔다. 그 상태로 주물주물했지만, 여전히 다른 손에 든 라면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생의 질과 라면의 상관관계’ 세미나의 두 번째 강연자가 올라왔다. 첫 번째 강연자는 ‘먹는 것은 즐거움’이라고 말했지만, 두 번째 강연자는 무언가 달랐다. ‘라면은 삶의 질을 망가트리지 않는다’라는 강연을 하는 것이다! 놀라웠다! 저런 발상의 전환이라니!
“라면은…… 그리 살찌지 않을 지도 몰라.”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건 알지만, 스스로 내려다보면서 그랬다. 그래, 난 아침을 굶었으니까. 어디선가 봤다. 500~600kcal의 식사를 꼬박꼬박 해주라고. 거기에 이 라면은 매우 합당했다! 당연하다는 거다. 거기에 500대 초반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차마 라면을 뜯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오래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요새는 그 놈의 웰빙바람이 라면에까지 불어서는 라면의 유통기간도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우선 웰빙을 할 거면 라면을 안 먹으면 될 것을, 괜히 라면까지 강제로 웰빙을 시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불만을 라면회사에 보낼까 했지만, 그들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보면서 유통기한을 내려다보았다. 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어!
‘너무 안 먹으면, 나중에 스트레스로 폭식할 지도 몰라’
 갑자기 라면의 친절한 권유에 나는 천천히 무너져 내려갔다. 그래, 그러는 거야. 먹는 거야. 괜찮을 거야. 그렇겠지? 게다가 한 달 밖에 안 남아서 아깝잖아. 아니, 오히려 기간이 남은 건 먹으라는 신의 계시였을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라면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천천히 그 가냘픈 봉지 끝을 잡았다. 그래 이 감각이야! 게임기 앞에서 버튼을 연타하고, 노래방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그 감각! 그 불가항력! 그 의지! 그 마음! 그 희망! 아아!
“그래, 이 라면은 안 먹으면, 스트레스로 폭식할 지도 몰라!” 천천히 뜯기는 소리를 내면서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이 라면……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면이다. 그렇기에 예전에 많이 먹었었는데. 사실 나는 그리 다이어트가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이 너무 마른 거라고. 이 정도면 건강한 거야.
 그렇게 라면 안을 보는 순간,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뭘까, 이 어색함은. 그래도 괜찮았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어색한거다. 그렇다.
 라면 스프와 면과 물을 동시에 넣는 라면의 신의 실력인 나는 얼른 냄비에 물을 담아서 면을 넣고 가스 불을 켰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이 라면……
“스프가 없잖아!”
 아아아! 끓어오르지 않는 라면을 보면서 황망하게 라면 봉지를 다시 쳐다봤지만 소용없었다. 없는 건 없는 거였다.
 그 날은 내 최악의 날로, 스트레스가 심해진 나는 부엌 청소를 끝내지 못한 채,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컵라면에 삼각깁밥을 먹고 말았다. 말했잖아! 그 라면을 못 먹으면 스트레스로 폭식을 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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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에서 일반이 없어지고, 기타가 생겼네요;


기타가 원래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라면에 관한 엽편입니다!


 


물론 실화는 아닙니다...


왜냐면 지금 집에는 라면이 없으니까요...

?
  • ?
    비벗 2010.08.31 09:26
    스프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겠네요.
    군자대로행이외다. 칼로리를 신경쓰는 건 소인의 행동이외다... (두툼한 군자의 뱃살!)
  • profile
    idtptkd 2010.09.03 05:29
    이상하게 그래도 신경 쓰게 되더라구요ㅠ 왜 전 뱃살은 있는데, 군자가 되지는 못 하는 걸까요... 하아...
  • profile
    윤주[尹主] 2010.08.31 16:33
    이런 글이 좋아요. 소소하고, 유쾌하고.
    혹시 글감은 어떻게 얻으세요? 세상님 글 보면 산뜻하고 신선하단 생각이 들어서요^^
  • profile
    idtptkd 2010.09.03 05:30
    칭찬 감사합니다//ㅈ// 부끄럽네요.
    글감은 이전에 적어놓은 소재 목록보다가 떠오르면 쓰고 하는 식으로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막연히 글쓰자보다는 그래도 소재목록(이래봤자 단어들)을 보면 뭔가 나은 느낌이라서요.
  • ?
    乾天HaNeuL 2010.08.31 20:17
    실화 같은데...(응???!!!!!!!!!)
  • profile
    idtptkd 2010.09.03 05:30
    그, 그렇지 않습니다!! 칼로리로 고민한 부분까지는 맞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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