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6 19:02

영웅의 발자취 序

조회 수 149 추천 수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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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을 보다가 문득 데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쓴웃음을 한
번 짓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말을 몰았다. 헛? 뭐지? 뭐 실수한 게
있나?


 


내가 긴장하고 있는 동안, 그는 아가씨들에게 목례를 하고 내 곁
으로 다가왔다.


 


“아, 역시 자네 같은 미남은 신분에 무관하게 빛나는 것일까? 이
렇게 많은 레이디들의 곁을 지키는 영광을 누리다니 말이야.”


 


이 친구 설마, 그 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에이, 저 같은 범부(凡夫)에게 그리 말씀하십니까? 닥터 컨프턴
의 광채에 어디 발끝이나 따르려구요?”


 


솔직한 심정이다. 나도 어렸을 적 여자깨나 울린(아니, 이거 자랑
하는 거 아니다. 잘못했다는 거 이젠 잘 안다구!) 반반한 상판을 갖
고 있지만 저 데니스의 부드럽고도 강한 멋은 일종의 아름다움이었
다. 내가 댈 바는 아닌 것 같다.


 


“거, 별 말을 다. 이미 이 레이디들이 증명해 주셨지 않나? 자넨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멋진 대장부야.”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음, 데니스는 아무래도 내게 꽤 호감을 가진 듯하다. 다행히 이상
한 쪽의 호감은 아닌 것 같지만, 순수하게 웃으며 날 칭찬하는 백작
영식을 난 어디까지 가깝게 대해도 되는 건지 고민했다. 너무 친해
져도 곤란한데 말씀이야.


 


우리가 그렇게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며 조금 앞서 나가자 페넬로
페 아가씨가 말을 이끌어 우리 곁에 왔다. 왠지 좀 화가 난 표정이
었다.


 


“닥터 컨프턴, 루포리와 언제 그렇게 친해지신 거죠?”


 


“아, 이거 결례를 범했네요, 레이디 클라시에. 양해도 없이 대화상
대를 빼앗다니, 제가 나빴군요.”


 


“별 말씀을요, 닥터 컨프턴.”


 


말은 그렇게 하면서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페넬로페 아가씨. 그
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는다. 변색이 여간 빠른 게 아니
다.


 


마주 웃어 보이며 속으로 데굴데굴 염두를 굴린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 날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글쎄, 여자 좀 겪어 본 내가 하
는 말이니 분명하다. 이건 먹이를 앞에 두고 언제 잡아먹을까 고민
하는 창공의 솔개…… 아니지, 그게 아니라, 원하는 남자의 마음을
잡기 위해 수많은 계책을 짜는 여성의 눈이다!


 


그야 한때 여러모로 문란한 시절을 보냈던 내겐 이런 것쯤 사소
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그 때 함께 밤을 보낸
레이디들관 다르게 처녀다. 시집도 안 간 귀족 숙녀의 몸에 흔적이
라도 남겼다간…… 음, 이젠 말 안 해도 잘 알 거다. 형장의 그거다.


 


저 아가씨하곤 너무 가까워져선 안 된다. 내게 어떤 끌림을 느끼
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다. 거 참, 데니스와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원래 성격은 쿨한 것 같은데, 왜 나 따위 용
병에게 관심을 갖는 거야?


 


“레이디 클라시에, 제게 두 백작가의 귀족 분들을 모실 영광을 주
시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에구, 제 못난 손은 말고삐를
잡는 데에 하나를 쓰지 않을 수 없거든요.”


 


내 주제에 두 사람을 수행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이따 보자고
빙빙 돌려 말해 봤지만 페넬로페 아가씨는 아미(蛾眉)를 찌푸리곤
오히려 내 곁에 말을 더 붙였다.


 


“손 하나는 닥터 컨프턴에게 줘도 좋아. 내 팔을 네게 줄 테니.
어때?”


 


오오, 그녀는 고삐를 쥔 내 팔에 오른손을 살며시 얹는다. 그건
그냥 비유인데! 이렇게 대담할 데가!


 


끙끙 앓으며 말을 못 잇는 날 보며 데니스가 끙차, 하며 끼어들었
다.


 


“레이디 클라시에, 어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눈이 많습
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불민한 입이 오늘의 일
을 이야기한다면, 어떠할까요?”


 


데니스가 주변을 살짝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
하기 시작한 이 아가씨는 조금 놀란 듯 내게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곁에서 말을 걷는다. 아무튼 데니스 녀석 좋은 녀석. 덕
분에 형장까진 갔지만 이슬이 맺히지 않았다.


 


내가 감사의 염을 담아 멋쩍게 웃자 그도 다 안다는 듯 씨익 웃
어 줬다. 응응, 그래, 넌 이런 경험 많을 테니 내 심정 알거야.
내가 좀 더 애절한 눈빛을 보내자, 그는 안 되겠다는 듯 쓴웃음
지으며 페넬로페 아가씨에게 낮게 말했다.


 


“실은 제가 루포리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끼어들었습니다,
레이디 클라시에. 잠시면 되니, 제게 이 친구를 좀 빌려주실 수 없
을까요?”


 


아가씨는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그의 정중한 청을 승낙했다. 당
장 노호성이 터져 나오지 않은 게 신기했다. 난 겁을 집어먹은 채
데니스를 따라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져 나왔다. 데니스는 내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며 허탈한 듯 웃었다.


 


“자네, 참 능력도 좋은데? 어느 새 저 도도한 레이디 클라시에를
꼬신 건가?”


 


“으악, 큰일 날 말씀이십니다! 제가 어떻게 겁 없이 백작 영애께
흑심이나마 품을까요. 저로서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왜 보잘
것없는 용병에게 이리도 과분한 관심을 보이시는 걸까요?”


 


데니스는 잠깐 말없이 걸었다. 아니, 말이 없는 건 그가 말을 안
한 거고, 걷는 건 그가 탄 말이다. 그가 말에서 내려 걸은 것이 아
니다.


 


난 그렇게 헛생각을 잠깐 하고 있고 데니스는 저쪽의 페넬로페
아가씨를 주시하고 있었다.


 


음, 내가 볼 땐 무척 애틋한 눈빛이다.


 


“페넬로페의 집안은, 명망 높은 무가야.”


 


어라? 레이디 클라시에에서 페넬로페로 바뀌었다. 그리고 말투도
조금. 데니스는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아니, 무가였지. 그녀는 카운트 클라시에의 외동딸이야. 이제 그
가문에는 대를 이을 무장이 없어.”


 


내가 어벙한 표정을 지은 모양이다.


 


“아,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 그녀밖에 젊은 클라시에가 없다는
말이 아니야. 분가의 클라시에가 모두 무를 버리고 문을 택했기에,
클라시에의 마지막 무장은 현 카운트 클라시에 뿐이란 말이야. 탓할
수도 없지, 이미 임펠런 왕도 내엔 무(武)가 문(文)의 아래에 짓밟혀
있으니. 누군들 남의 하수인 소리나 들을 기술을 배우고 싶겠어? 그
런데도 그녀는, 꼭 가문의 전통을 잇고 싶었나봐. 무술을 열심히 익
혔지. 그러나 얻게 된 건, 그녀에게 만성의 심한 천식이 있다는 사
실을 안 것뿐이었어. 그 때 저 아이, 자기 아픔보다도 무술을 익힐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슬퍼했어.”


 


데니스는 다시 페넬로페 아가씨를 보고 있다. 내가 볼 땐 무척 애
틋한…… 이건 했던 말 같지?


 


아무래도 이들 사이엔 내가 모르는 깊은 유대가 있는 모양이다.


 


“닥터 컨프턴께선 레이디 클라시에와는……”


 


“…… 소꿉친구야. 이제 저 앤 그렇게 생각지 않는 듯하지만.”


 


내가 벙쪄서 말없이 있자, 데니스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이 년쯤 전인가, 내 아버지께서 카운트 클라시에를 폄하했어. 머
리에 든 게 없는 인간 병기라고. 그 이후로 페넬로페는 날 남처럼
대하더라. 나도 거기 맞춰주고 있고.”


 


아아! 이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 청년에게 날 구해달라고
보채다니, 내가 정말 미안한 짓을 하고 말았다. 그는 괜한 일로 페
넬로페 아가씨에게 더 미움 받고 말았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 친구 이거 너무 성격이 좋은 거 아냐?


 


아니, 그나저나, 방금 나, 그녀는 외동딸임과 동시에, 확고한 후계
자란 얘길 들은 건가?


 


“닥터 컨프턴, 혹시 레이디 클라시에는, 저어……”


 


내 입으론 차마 꺼내기 힘들었다.


 


“응, 그러니까, 후대에 카운티스 클라시에가 될 몸이야. 당연히 평
민 첩 두엇쯤 거느려도 무방하지. 그리고 저 아인, 튼튼한 아버지에
게서 씨를 얻어야 튼튼한 아이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어. 그도 그럴
게, 저 애 어머니도 약한 천식이 있으시거든. 관계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야.”


 


으아아, 노골적이야! 나는 그럼 종마로 간택된 거란 말인가?!


 


내 충격에 아랑곳 않고 데니스는 말을 이었다.


 


“물론 내 추측일 뿐이야. 하지만 아까 새벽에, 페넬로페는 마물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너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 나로선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선택은 루포리, 네 몫이야. 나는…… 모르겠어. 네
가 저 앨 정말 충심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래 줬으면 싶기도 해.
혹시 불쾌한가?”


 


악! 소리 나는 요청이긴 했지만 나는 그것관 다른 것에 불쾌해하
고 있었다.


 


“왜 접니까?”


 


“응? 무슨 말이야, 방금 다 설명 했잖아.”


 


나는 또 불쾌해졌다.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친구.


 


“왜 당신이 아니고 접니까? 그게 궁금합니다, 전.”


 


직선적인 물음에 데니스가 당황했다. 나도 당황했다. 이거 예의고
뭐고 팔아먹은 말인데 화내면 어떡하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왜 나와 페넬로페를 그렇게 보는 거지? 아까도 봤
잖아, 저 앤 날 이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아! 저번엔 편지로 벌레의
자식이라고까지 말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저 앨 날더
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의 슬픔이 절절이 느껴졌다. 아아, 청춘이로고. 내가 좀 뛰어난
인재이긴 해도, 고작 이 나이에 귀족 총각의 사랑 상담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씀이야.


 


“그래도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학자면서도 열심히 몸도 만들고,
무술도 단련한 거 아닙니까? 숨길 생각 말아요, 저 숙련된 교관입니
다.”


 


단호하게 말하자 데니스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더니 끙, 하고 앓는
소릴 냈다. 그의 몸은 마침 좀 작은 옷을 입어서 불끈불끈한 근육을
여기저기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는 신기하게도 금세 내 얘길 인정했다. 자기 마음은 사실 알고
있었던 걸까?


 


“눈치 빠른 친구로구만. 그래, 네 말이 맞다 치자. 허나 그런들
어쩌겠어? 내가 그녈 위해 뭘 할 수 있겠냐구. 아버지께 카운트 클
라시에께 공식으로 사과하라는 부탁이라도 드리란 말인가? 무장을
발톱을 때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그 분께? 난 고작 컨프턴 가의 열
두 번째 아들일 뿐이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음, 그건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잘 생기고, 성격도 좋으며 건강했
고, 내가 볼 땐 학식과 지혜도 얕지 않은 듯했으나 그것이 사람의
사회적 능력을 측량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겐 페넬
로페 아가씨를 도울 힘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 잘못이 아님
에도 고개를 들고 그 아가씨를 대할 수 없는 것이다.


 


크으, 이 착한 청년을 이대로 좌절하게 둘 수 없다는 관대하고 숭
고한 사명감 따위가 내면에서 마구 솟구쳤다. 안 돼, 이거 무척 어
렵고 귀찮은 일이 될 거야, 하면서 막아 봐도 이미 내 입은 열리고
있었다.


 


“닥터 컨프턴, 당신은 비천한 저를 벗의 예로 대우해 주었고 제
입의 무거움을 믿고 숨기고 싶은 일들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어떻게든 레이디 클라시에와 당신의 관계
를 회복하겠습니다.”


 


아아아, 이런 넓은 오지랖 밟고 넘어져 코 깨질 녀석!


 


데니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멍하니 날 쳐다보
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힘없이 웃었다.


 


“옛 사람들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보답 받는다는 말 믿진 않았는데 오늘 그 말을 뼈저리게 느껴. 고맙
다, 루포리. 네겐 순간적인 충동일지 몰라도, 내게 네 뜨거운 말은
평생 기억될 거야.”


 


아무래도 내 능력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음만 고맙
게 받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뭐 좋아, 내 능력이야 나도 믿지 못하
니까. 그렇지만 시도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페넬
로페 아가씨는 내게 관심이 많은 듯하니까, 얘길 하다보면 자연스레
말을 꺼낼 수 있겠지. 난 그렇게 다짐하며 겉으론 송구하다는 듯 고
개를 깊이 숙였다.

?
  • profile
    윤주[尹主] 2010.08.16 19:02
    어쩐지 이번 회는 좀 묘한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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