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3 06:38

시크릿 Secret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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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를 가게에 맡겨두고 나온 진연은 다시 시장터로 들어갔다. 지나오던 길에 얼핏 장갑 따위 소품을 파는 가게를 본 거 같아서였다. 바리와 제 것까지 해서 장갑 두 벌, 그리고 목도리 한 개를 사 들고 나오면서 진연은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은 오늘 처음 본 그 애에게 이토록 신경을 쓰는 걸까? 그냥 불쌍한 마음에? 물론 길을 걷다가 노숙자를 보고 안쓰럽게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 마음은 대개 다음 순간 산산 조각나는데, 이쪽에서 조금이라도 경계를 풀고 안타깝게 여기는 순간, 노숙자들은 그 낌새를 귀신같이 눈치 채고 달려들어 돈을 내놓으라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얼마간 돈을 쥐어주면 그들도, 돈을 쥐어준 이도 더 이상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도시에선 처음 보는 이에게 함부로 마음을 여는 것조차 자주 이용당한다.


 하지만 바리라는 그 애는 달랐다. 먹을 것을 주며 달래도 보고, 매몰차게 내쳐도 봤지만 하룻강아지마냥 졸졸 진연을 따라다니는 걸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진연이 바리를 노숙자들처럼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바리가 좀 더 끈질기기 때문일까? 진연 자신이 바리에게 그렇게 지극정성인 이유를 설명하기엔 좀 부족한 것도 같은데.


 어쩌면, 진연은 걸음을 멈췄다. 어쩌면 바리에게서 엄마 윤주의 모습을 보는 게 아닐까? 살아생전 그녀에게 진연이 해준 것이 없어서 죄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안다는 저 꼬마아이에게 유독 신경써주는 건 아닐까? 마치 그녀가 배부르면 한 줌 재로 변한 엄마 윤주도 저승에서 배가 부를 것처럼. 바리 그녀가 따뜻한 열기에 취할 때, 엄마 윤주도 조금이나마 저승 외로움과 추위를 잊을 것처럼. 비현실적이야. 진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건 전부 바보 같은 소리지. 바리와 엄마 윤주는 전혀 별개의 사람인걸.


 정말 비현실적인 일은 바로 그 순간 일어났다.


 "찾았다."


 별안간 주위 기온이 뚝 떨어졌다 싶더니 낯선 목소리가 진연에게 들려왔다. 깜짝 놀라 진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새통을 이루던 사람들 모습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주변 풍경은 분명 진연이 이제까지 있던 시장 골목 그대로였다. 그것이 단지 인기척이 사라졌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나 을씨년스러워보일 수 없었다. 흡사 진연 자신만 방금 전까지 있었던 동네와 겉모습만 비슷한 다른 곳으로 끌려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난 이게 좋더라. 조용하고, 선선하고. 안 그래, 최진연 씨?"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진연 등 뒤로부터였다. 진연은 몸을 돌려 상대를 보았다. 서릿발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드레스 치마폭은 넓고 주름이 많았고, 허리 위로는 코르셋을 한 것처럼 보여서 불편하고 답답해 보였다. 그 옷을 보면서 진연은 어째선지 웨딩드레스를 상기시켰다. 축복받는 신부들이 입는, 가장 아름다우면서 가장 거추장스러운 옷. 문득 그 여자가 진연에게 말했다.


 "아니면 예의를 지켜 이렇게 불러줄까? 작은이모라고?"

 "누구야, 넌?"


 진연이 묻자 여자는 자기 모습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대답을 했다. 신부, 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 신부, 아이슬란드 신부, 세계의 파괴자, 인류 공공의 적."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진연이 떠올린 건 뜬금없게도, 엄마 윤주 부고를 전해들은 그 날 기억이었다. 동기 친구는 오늘도 야근이야, 하면서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굴었지. 친구가 근무하는 곳은 진연네 회사와 같은 계열사 소속인 한 화재보험업체였다. 친구의 일은 각종 해상 보험 관련이다. 대형 화물선, 정유선을 수십 척씩 운영하면서 전 세계를 누비는 상사 업체들이 그녀 고객으로, 최근에 유래 없는 막대한 손실을 겪고 있는 업종이기도 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누비지만 그들과는 달리 파괴하고, 혼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한 인물 탓이다. 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몇몇 나라들은 공식적으로 이 인물로 인한 피해를 '자연재해'로 규정했고 국내에서도 비슷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태풍, 쓰나미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는 건 속칭 '신부', 그러니까 지금 진연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다. 만일 그 친구가, 제대로 애인 챙기지도 못하고 며칠 동안 밤샘하는 이유가 여기 있단 걸 알면 어떻게 나올까?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내 이름말이야. 최근 좀 화려하게 들쑤시고 다녔거든."

 "알고 있어. 네 뒷수습하느라 나도 며칠간 제대로 퇴근을 못했거든."


 어째서, 하는 얼굴로 신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귀엽다기보단 요사스럽게 보였다. 길게 대답을 풀어놓는 대신 진연은 짧게 한 단어로 그녀 의문에 답했다.


 "아이슬란드."

 "아, 그래. 나도 기억나. 거기, 지금은 망해 버렸다지? 뭐라더라, 부……."

 "국가 부도. 전부 네 업적이었어. 덕분에 회사에서 운영하던 보험기금들이 피해를 봤었지. 그런 나라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회사에서 투자하던 주식 몇몇이 그 나라 기업이었던 거야."

 "내가 잘 모르는 얘긴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내가 잘 아는 얘기를 해보자."


 이 말을 꺼내는 신부 눈이 살짝 번득인 것처럼 보였다.


 "마녀는 어디 있지?"


 맙소사, 진연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일진 왜 이럴까? 정말 이해 안 되는 것들 투성이다. 세계의 주인, 신부, 그 다음엔 마녀라고?


 "난 몰라. 들어본 적도 없는걸."

 "네가 모른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처구니없단 듯 신부가 웃었다.


 "뭐가 웃긴대?"

 "말이 안 되잖아? 다른 사람이 몰라도 넌 알아야지. 넌 윤주 딸인걸."

 "그러니까, 엄마 딸 인거랑 지금 이거랑 무슨 관계냐고!"


 결국 진연은 폭발했다. 눈앞에 있는 게 신부라는 것도 잊고서 그녀는 꾹꾹 참아왔던 말들을 줄줄이 내뱉었다.


 "뭐냐고, 정말! 아침부터 알지도 못하는 것들에 휘둘려 다니고. 왜 다들 나한테 그래? 난 최진연이지 윤주가 아니야! 왜 자꾸 나한테 엄마 얘길 끄집어내는데? 엄만 엄마고 난 나야! 나라고 궁금하지 않은 줄 알아?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뭘 하고 다녔는지! 어째서 갑자기 그렇게 돌아가신 건지!"


 얘기하던 중간에 진연은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엄마 윤주 부고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참았던 억하심정이 터져 나온 것이다. 끝내 눈물 보이지 않은 건 그녀가 의식하지 않는 듯해도 당장 앞에 있는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부는 처음부터 줄곧 엄마 윤주에 대한 적개심을 알게 모르게 조금씩 내비치고 있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네."


 신부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진연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몰라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너른 치마폭을 뒤져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황당하게도 그건 박물관에서나 가끔 볼 법한 구식 화승총 권총이었다.


 "그치만 어쩔 수 없어. 이미 약속했는걸, 방해가 될 것 같은 상대는 미리 처리해 두자고."


 깔깔대면서 신부는 권총을 겨눴다. 그녀가 장전하는 모습은 본 적도 없지만 진연은 어째선지 그 총에서 탄환이 날아와 제 심장에 박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서 무기를 든 상대가 자신을 위협하는 경험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걸로 되겠어? 장전도 안 돼 있는 총이잖아, 그거."


 진연이 숨을 죽이며 붙박인 듯 상대와 대면한 그 순간 제삼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연은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분명 가게 안에 맡겨두고 왔을 바리가 그녀 눈앞에서 신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겁먹지 말아요, 진연 씨. 여기선 겁먹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바리를 본 신부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마치 그녀가 여기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뜻밖이네? 창세잔재가 여기 있다니."

 "바리라고 부르렴. 새파란 하룻강아지 주제에."


 서로에게 날을 세운 말을 던지며 바리와 신부는 신경전을 벌였다. 둘 다 마치 진연의 존재는 잊은 것만 같았다.


 "한 번 시험해볼까? 장전돼 있는지, 아닌지 말이야."

 "할 수 있으면 해봐. 네 술수 따위 모두 다 아는걸. 기껏해야 남 겁밖에 줄 줄 모르는 게 까불긴."

 "누가 겁밖에 줄 줄 모른다고?"


 신부가 총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손짓을 보내자, 그녀 주위로 괴상한 생물들이 모여 들었다. 기는 놈, 세 발로 걷는 놈, 집채만 한 놈. 온갖 비정상적이고 흉측한 괴물들이 그녀 주위를 호위하듯 둘러쌓다. 그것을 본 바리가 혀를 차곤 말했다.


 "길들인 개들도 있단 얘긴 못 들었는걸?"

 "나도 언제까지 얘네들한테 쫓겨 다니지만은 않아. 약속했거든. 날 도와주면 언젠가 너희 할머니 시신을 뜯어먹을 수 있을 거라고."

 "그것 참 멋지네. 대를 이은 갈등이라니."

 "그 갈등 먼저 시작한 건 마녀야. 내가 아니라."


 진연은 알지도 못하는 얘기를 놓고 바리와 말싸움하던 신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진연을 보았다. 매섭고 예리한 그녀 눈빛에 진연은 주눅이 들었다. 신부는 손을 들어 진연을 가리키면서 괴물들에게 말했다.


 "자, 저기 너희 외할머니 동생 분이셔. 맘껏 먹으렴."


=====================================

 <시크릿> 8화입니다.
 뭔가 복잡한 설정들이 잔뜩 튀어나오는 것같긴 합니다만, 양해해 주세요;; 혹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지적 부탁드려요. 분량이 많아지다보면 제가 어떤 얘길 했고 어떤 얘길 빼먹었는지 헷갈려서;;

 그러고보면 '왜 진연이 공격받는가' 하는 얘기는 이번 화에서도 안나왔네요;; 확인해보니 다음 화쯤에선 확실히 나올 겁니다. 이번엔 맞을 거에요;
 암튼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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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1.01.23 23:19

    허걱... 한 나라를 통채로 말아먹다니...;;

    바리양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나요?

    진연씨 이름보니까 그 친구가 자꾸 떠오르긴 한데... 워낙 에피소드가 많은 애라서...;;

    (좋아하는 선배 오빠에게 빼빼로로 집 만들어서 줬다는 전설(?)은 이미 말했고..)

    또 뜬금없지만... 진연이란 이름 때문에 소설 이야기를 여기서 하게 되네요. 다음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수난을 당합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1.01.24 08:03

     통채로 말아먹는데도 실은 뭐 별거 없어요 ㅎㅎ 막상 신부 개인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바리도 그렇고요.

     

    <별의 노래>는 또 새로운 에피소드로 들어가나보네요. 기대됩니다^^

  • profile
    시우처럼 2011.01.27 03:14

    '윤주의 부고를 들은 날 친구 녀석이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

    저는 이 말이 있는 문단 전체가쉽게 파악이 안됐습니다.

    두어번 주의 깊게 읽고서 의미를 파악했다고 할까요?

    애초에 친구가 윤주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같이 가줘야 하는데 야근이라서 미안해 하며

    혼자 감정이 격해져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전 이렇게 읽었거든요.

    처음에 그렇게 읽어지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부분이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아무튼, 제 사견이구요.

    역시 글은 재미있어요.

    드디어 신부도 등장하고 바리와의 '결투' 가 나올것 같은데

    다음화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1.02.09 07:29

    '결투'....씁쓸하기만 합니다 능력이 모자란지라ㅠㅠ


     그 부분은 제가 명확히 밝히지 않은 탓도 있죠;; 친구가 야근을 하는 이유가 결국 따지고보면 신부 탓이라는 이야기지만....그 연관관계를 더 자세히 밝히는 건 소설에서 다룰 얘긴 아닌 것같아 대충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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