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1 08:19

시크릿Secret (5)

조회 수 489 추천 수 1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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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Secret>


 진연이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평소보다 몸은 거뜬했다. 딱딱한 방바닥 위에 요 한 장, 이불 한 장 깔고 잔 것뿐이지만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것보다 훨씬 개운하고 고질병이던 어깨 결림도 덜했다. 올라가면 당장 매트릭스부터 바꿔야할까 보다. 그렇게 중얼대면서 진연은 느릿느릿 이불에서 기어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수세식으로 고치긴 했지만 여전히 엄마 윤주의 집에서 화장실은 집 밖에 따로 있었다.


 진연으로선 오랜만에 갖는 여유였다. 평소엔 출근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하고 시끌시끌하던 아침 시간이지만 시골 마을에서 보내는 아침은 느긋하고 조용했다. 간혹 동네 어느 집에선가 개가 짖었고, 축사가 있는지 닭 우는 소리, 소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사람들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만큼 귀에 거슬리진 않았다. 요리라도 좀 해볼까. 마음에 여유가 생긴 진연은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향했다.


 예상만큼은 아니었지만 부엌엔 제법 식재료가 종류별로 있었다. 진연은 냉장고를 뒤져 김치와 애호박, 당근과 파를 찾아냈고, 냉동실을 뒤져서 손질한 바지락 약간과 얼린 시레기를 찾아내었다. 안 쓰는 화덕 위에선 계란 여섯 개와 감자 열댓 개를 발견했다. 수납장엔 제법 다양한 양념이며 조미료와 함께 햄과 참치 캔 하나씩이 있었다. 보통 때라면 김치에 물만 데워서 밥을 말아 먹었을 테지만, 그날따라 진연은 유난히 식욕이 당기고 의욕적이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들여 진연은 계란말이에 애호박전, 시레기 된장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프라이팬에서 부치던 계란말이를 꺼내어 썰어둘 때쯤 전기밥솥에서 뜸들이기를 막 마쳤다는 알림이 울렸다.


 작은 개다리소반에 밑반찬 약간하고 해놓은 반찬을 담아 들고 진연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마루에 나가 먹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기엔 아침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소반을 놓고 다시 부엌으로 가 국과 밥을 담아다 안으로 들고 갔을 땐 이미 시간은 아홉시 반이 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정리며 씻는 걸 마치고나니 이미 시간이 11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나가볼까. 문득 진연이 이런 생각을 한 건, 그날따라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고 집 안에 홀로 있기는 너무 갑갑하고 지루했던 탓이다.


 예닐곱 집 남짓 모여 있는 작은 동네라 진연이 골목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자 사방에서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었다. 비탈진 골목길을 걸으며 이리저리 둘러보던 진연은 그 마을에 젊은 사람이나 아이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미 학교나 일터에 나간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도 마을엔 지나치게 활기가 없어 보였다. 남겨진 노인들은 뭔가 손으로 조물조물 간단한 일을 하거나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다 진연이 집 앞을 지나가면 경계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곤 했다. 그네들은 벌써 오랜 시간 젊은 사람을 보지도 못한 것만 같았다.


 몇몇 집들은 인기척이 전혀 없는데도 대문을 활짝 열어둔 곳도 있었다. 실제 사람이 사는 집도 있었지만, 그 중 한 집은 버려진 듯 겉으로 보기에도 위험해 보일 정도로 낡고 허름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어쩐지 섬뜩해져서 진연은 그 집 대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최대한 반대편 벽에 붙어 걸었다.


 마을 어귀 강을 건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비로소 진연은 다시 들뜬 기분이 되었다. 버스가 오기까진 10분가량 기다려야 하는 듯 했지만 처음 올 때와는 달리 전혀 초조하거나 불안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막 도착한 버스를 진연이 올라탔을 때 한참 백미러로 그녀를 힐끔 쳐다보던 버스기사가 바로 뒷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표정이 밝으시네요."

 "네?"


 그제야 진연은 버스 기사 인상을 유심히 살폈다. 버스 기사는 지난번 진연을 마을까지 태워줬던 바로 그 운전수였다.


 "아, 그때 한 번 뵀었죠."

 "옷이 바뀌어서 그런가요. 지난번 봤을 땐 너무 침울해 보이셔서 아무 얘기도 못 걸었는데, 오늘 타는 거 보니까 안색부터 확 다르시더라고요."


 그런 이유도 분명 있겠지, 하고 진연은 생각했다. 마을로 올 때는 검은색 쓰리 피스 정장을 입고 왔었다. 사실상 상주인 만큼 아무렇게나 입고 올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날은 평소 입던 편한 밝은 색 면바지에 초콜릿 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낙타처럼 밝은 황색 코트를 입고 나왔다. 코트는 예전에 엄마 윤주가 진연네 집에 와서 근처 옷가게로 구경 나갔다가 탐을 내던 걸 진연이 사준 것이었다. 한동안 엄마 윤주가 입고 다니긴 했지만 사실 50대 아줌마에게보다 2, 30대 젊은 사람들에게 더 잘 어울릴 옷이었다.


 진연이 배시시 웃는 것을 보고 버스 기사도 껄껄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웃으세요. 웃어야 복이 온다 합디다. 오늘 당장 세상 망할 것처럼 축 쳐져서 다녀야 쓰겠어요, 젊은 사람이?"


 좋은 말이라고 진연은 생각했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은 강사나 문필가에게서가 아니라 장터 상인이나 운전기사들에게서 나온다. 진연은 버스 기사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말한 뒤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어 제 얼굴을 비춰가며 씨익 웃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얼굴 근육이 굳은 탓인지 표정은 생각만큼 그리 환해지지 않았다.


 진연이 도착한 곳은 바로 그녀가 처음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그 정류장이었다. 확실히 읍내 분위기는 영유산 앞마당 작은 동네보다 훨씬 활달해 보였다. 장터가 서고, 여기저기서 손님을 끄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런가 하면, 조금 떨어진 학교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뛰놀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진연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갑작스런 엄마 윤주의 죽음 탓에 마음 편하지 못했지만, 대충 뒷수습이 마무리되니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이다. 그녀는 조금 들떠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터 안으로 막 발을 들어서려 했다. 그 때 누군가 그녀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언니, 언니."


 잡아끄는 힘이 어른들처럼 세지 않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진연도 눈치 채지 못할 뻔했다. 진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초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애매모호한 나이대 여자아이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오른 손으론 진연의 코트 자락을 붙들고, 왼손에는 무언가를 꼭 쥔 채였다.


 "왜 그러니?"

 "이거 언니가 떨어트린 거예요. 제가 주웠어요."


 여자아이가 내민 것은 낯익은 흰색 편지 봉투였다. 설마, 하면서 받아든 진연은 그 겉모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편지는 바로 전날 그녀가 다른 잡동사니와 함께 불태웠던 엄마 윤주의 것이었다.


 "이게 어째서 여기에……."


 놀란 진연이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씨익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같은 나이 대 평범한 아이들이 간혹 지어 보이는 천진난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함,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동정으로 가득 찬 성숙함, 어린 소녀 얼굴에서 그런 표정들이 드러날 수 있단 사실을 진연은 처음 알았다. 그보다 진연을 놀래킨 건 이 애늙은이 소녀의 그런 인상이 묘하게 엄마 윤주를 상기시키는 구석이 있단 사실이었다.


 "넌 대체 누구, 니?"


 이 소녀에게 하대를 하는 게 진연은 영 어색하기만 했다. 반면 소녀는 이 같은 상황이 어색하지 않은지 여유 있는 태도로 진연을 상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창세잔재, 인간의 왕, 어떻게 부르시건 상관없어요. 다만 제 가장 친한 사람들은 저를 '바리'라고 부른답니다."


 스스로 바리라고 칭한 그녀는 여태껏 진연이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그런 인종이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진연은 소녀를 어딘가 좀 이상한 괴짜로밖에 보지 않았을 것이다. 바리라는 그녀가 단순히 주위에서 보는, 허세만 가득한 괴짜들과 다른 인종이란 증거가 진연 손에 들려 있는 바로 그 윤주의 편지였다. 아무 특색 없는 하얀 봉투, 받는 사람 란 옆에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지운 문제의 호칭. '또 다른 내 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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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시동 들어갑니다. 역시 캐릭터가 나와줘야 이야기 진행이 되는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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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1.01.11 08:39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후의 평화로운 일상일 줄 알았는데 저 '바리'란 소녀가 나타났네요.

    바리가 윤주 여사의 '또 다른 딸'이라면... 진연씨와는 배다른 자매?

    (아 진연이 하니까 또 그 동창 생각나네... 빼빼로데이 때, 그 친구가 아예 빼빼로로 작은 집(담장 포함) 만들어서 좋아하는 오빠에게 줬다는 어마어마한 기억이 있다 보니...)

  • profile
    윤주[尹主] 2011.01.11 08:47

     대단한 친구분이시네요. 반쯤 농담말로, 다른 사람에게 내놓고 자랑해도 될 만한 친구분이세요 ㅎㅎ

     바리에 대해서는....다시 다음 화를 기대해 주세요^^;; 어쩐지 요즘 이 멘트 많이 써먹네요;

  • ?
    다시 2011.01.11 08:39

    역시 섬세하시다니까 부럽

  • profile
    윤주[尹主] 2011.01.11 08:49

     섬세....할까요? 암튼 감사합니다.

     잘 쓰시는 다른 분들이 워낙 많아서, 과분한 칭찬받은 것같네요;;

  • profile
    시우처럼 2011.01.15 06:47

    잘봤습니다. 드디어 인간의 왕이 등장하는거군요?

    그리고 불태워버린 편지가 다시 나타난 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탁월한 장치인 것 같아요.

    역시, 윤주님의 센스가 돋보인다는. ㅎㅎ

     

    다음 화 계속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1.01.15 08:09

     감사합니다 ㅎㅎ

     다음 화 지금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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