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Secret (4)

by 윤주[尹主] posted Jan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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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진 남친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대학교 다닐 때 진연은 그 숱한 캠퍼스 커플들이 어떤 처참한 말로를 맡는지 수없이 지켜보았다. 초반부와 중반부는 캠퍼스 커플, 소위 CC라는 이들도 다른 커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단계를 밟는다. 서로 눈이 맞고, 격렬하게 사랑하고,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굴더니 어느 순간 열정은 급격히 시들해진다. CC가 비참해지는 건 그 다음이다.


 유독 CC가 해어질 때, 그 여파는 두 사람을 떠나 캠퍼스 일대로 일파만파 번져나간다. 그동안 너무도 잘 알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주치면 머쓱한 사이가 되어 버리고, 그전까진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했던 사람인데 단지 내 친구의 전 애인의 친구란 이유 하나 때문에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수십 번은 고민하게 된다. 평화롭게 헤어진 거면 그나마 낫지만, 감정이라도 얽혀서 헤어진 경우라면 졸지에 '네편 아니면 내편' 하는 유치한 상황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엄마 윤주 집을 정리하면서 진연은 그녀 유품들이 마치 '네편 아니면 내편'의 선택에 직면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 편' 그러니까 진연 편인 유품들은 모두 마루 위에 있었다. 헌 옷이라던가 이불 따위는 마을 노인정이나 복지회관 등에서 가져갈 모양이었다. 얼마 안 되는 귀중품류는 사진첩들과 함께 일단 가지고 있기로 했다. 오래된 책들은 읽거나 헌책방에 팔아넘길 생각이었고.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 엄마 윤주가 심심풀이삼아 모아둔 천 자투리나 종잇조각 같은 잡동사니들은 '네 편'이 되어 마당 위에 내던져졌다. 윤주가 쓰던 수저가락이나 밥그릇, 국그릇 따위도 마당으로 나왔다. 분명 죽은 사람 식기구는 쓰지 말고 버리라고 가르쳐준 건 엄마였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진연은 밥그릇과 국그릇을 깨뜨려 사금파리로 만들어 버렸다. 수저나 젓가락은 별 수 없이 재활용 쓰레기와 같이 내다 놓았다. 조각난 물품들은 잡동사니들과 한데 쓸어 모아 뒷마당으로 가져갔다.


 주위 낙엽을 대충 쓸어놓은 뒷마당 구석진 곳에 잡동사니를 쌓아 두고, 진연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처음엔 그냥 천 조각에 불을 붙여서 태울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불은 잘 붙지 않았다. 그 때 진연 머릿속에 생각난 게 어제 본 그 편지였다.


 헤어진 남친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수신자 불명인 편지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또 다른 나의 딸? 뭐야, 그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걸. 진연은 봉투를 뜯지도 않고 그대로 라이터 불을 가져다 대었다. 종이봉투는 조금 그을리기만 하나 싶더니 어느새 불길이 일면서 서서히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정도 봉투가 타는 듯하자 진연은 그것을 잡동사니 위로 내던졌다. 봉투에서 번지기 시작한 불길은 같은 종잇조각들로, 천 조각들로 번지더니 조금 지나자 잡동사니 더미 전체가 큰 불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당 구석진 곳 담장 앞에서 태우는 거니 다른 곳으로 번질 위험은 없을 거다. 타오르는 불길을 진연은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그날따라 바람 한 점 없어서 불길로부터 피어오르는 연기는 사방으로 흩날리지 않고 그대로 곧게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 광경을 보면서 진연은 막연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곧게 하늘로 오르는 연기는 엄마 윤주를 상기시켰다. 그래, 죽어서도 제 고집대로 하겠다 이거요? 또 다른 딸내미라니, 나한텐 그런 얘기 한 번도 없었으면서! 진연에겐 마치 그 연기가 불태워진 자기 편지를 받아가려 윤주가 손을 뻗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건 알았다. 무엇보다 진연 자신이 평소 그런 비정상적인 현상을 믿어본 적이 없었다. 귀신이란 사람들이 헛것을 보고 하는 소리고, 외계인이란 상상력의 결실이며, 초능력 따위는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이 진연의 생각이었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지. 언젠가 신입사원 하나가 기가 어쩌니 도가 저쩌니 하면서 다가왔을 때 진연이 쏘아붙이던 와중에 한 소리다. 상대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믿지 않는 건 진연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던가, 같이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단 걸 느끼게 된다던가 하면서 싫다는 사람 붙들고 매달리던 상대방 역시 인물은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가 알지 못한 게 있었다. 진연 또한 그 못지않게 한 고집 하는 성격이란 사실 말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도 마. 왜 내가 같이 그 쓰잘데기 없는 공부를 하는데? 믿으니까 공부를 하는 거잖아. 공부를 해서 믿게 되는 게 아니라."


 이런 말을 하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양보도 없이 계속 상대를 몰아세우는 통에 결국 사소한 얘기는 말다툼으로까지 이어졌다. 누군가 말려서 겨우 사태가 마무리되었을 때, 진연이 대뜸 꺼낸 얘기가 이랬다.


 "그러면서 지가 가르치긴 누굴 가르친다고. 공부 했단 게 겨우 이거니? 핏줄 세우고 트집 잡는 거? 그딴 거 나 필요 없거든?"


 나중에 누군가 진연에게 반쯤 농담 삼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진연 씨 고집은 누구 닮은 거야? 좀 실례 아냐 생각하면서도 굳이 반문하지 않은 건 농담으로 한 소리란 걸 알기 때문도, 장소가 술자리기 때문인 것도 아니었다. 얘기 꺼낸 게 상사만 아니었어도 정색하고 따졌겠지만 겨우 어른의 자비심(?)을 발휘해 어찌어찌 넘긴 것뿐이었다. 나중에 생각하고 보니 대답은 역시 뻔했다. 고집 세고, 좀처럼 물러서질 못하는 성격은 분명 엄마 윤주를 꼭 닮아 있었다.


*               *               *               *               *

 엄마 윤주의 어릴 적 이름은 윤공주였다. 50년도 출생인 것을 감안하면 딱히 잘 지은 것도, 못 지은 것도 아닌 평범한 이름이었지 않나 진연은 그렇게 여겼다. 다만 7살 윤주,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꼬맹이에게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전해지는 소문으론 어린 윤주가 자기 부모, 그러니까 진연에겐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공주란 자기 이름을 바꿔주라고 떼를 썼다고 했다. 한두 번이었다면 단순히 어린 아이 변덕이러니 생각했을 테지만, 수십 번 거듭해 날마다 반복되는 칭얼거림에 지쳐서 결국 기관에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주인 주(主) 한 자로 이름을 바꾸었단다. 그 말을 듣고 진연은, 왜 엄마 윤주가 그렇게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는지 물었다. 윤주는 잠시 동안 생각하더니, 다른 부연 설명 없이 딱 잘라 이렇게만 말했다.


 "그 편이 뜻풀이가 더 좋아서."


 자세한 사연은 들어본 적 없고, 이제는 물어 보려도 죽어서 없는 사람이니 물을 수도 없다. 다만 진연 혼자 나름 내린 결론은 이랬다. 엄마 윤주는 만인에게 사랑받는 공주(公主)가 되기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주인(主)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얌전히 앉아서 왕자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기보다, 스스로 왕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라면, 이건 그저 지나치게 미화한 생각인 걸까?


 아니, 됐어. 생각에 잠겨 있던 진연은 스스로 머리를 도리질해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엄마는 주인은커녕 공주조차 못 되었는걸. 다시 한 번 얘기하는 거지만, 헤어진 남친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죽은 엄마 윤주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녀가 무엇을 했건, 무엇이 되고 싶었건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얘기일 뿐이다. 격렬하게 타오르던 관도, 오색 연기도, 묘한 향기도 진연에겐 이젠 그만 잊고 싶은 기억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도. 죽은 여자의 스캔들 따위는, 이제 와선 진실이건 거짓이건 아무 상관없는 얘기일 뿐이지.


 조금 지쳤다고 진연은 생각했다. 기둥에 기대어,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쭈그려 앉아 진연은 이젠 서서히 사그라지는 불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엄마 윤주의 뒤처리도, 집 정리도 슬슬 마무리되어갔다. 오늘 당장 집으로, 직장으로 돌아간대도 아마 별 문제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몸이 너무 피곤했다. 불필요한 것들을 꺼낸답시고 무리하기라도 한 걸까? 오전에 화장터 가서 계속 서 있었던 게 힘들었을까? 아니면 얇게 입고 온 옷 탓에 감기라도 든 걸까?


 깜빡 잠이 들 것처럼 졸던 진연은 얼마 못 가 화들짝 놀라 깨었다. 몸이 살짝 식었던지 그새 으슬으슬 추웠다. 불은 이미 완전히 사그라졌는지 연기조차 나지 않았고, 다 탄 자리엔 재만 조금 남아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진연은 남은 재를 쓸어 모아 버리곤,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깔고 누웠다. 몸이 따뜻해지기 때문인지 마음도 살짝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체가 있던 방인데 전혀 무섭다거나 거리껴지지 않은 게 진연 스스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연은 또다시 누운 채 잠이 들었다. 그녀 자신은 잠깐 눈을 붙일 요량이었지만, 그 사이 해는 서서히 저물어 노을을 물들여갔고, 마당에는 땅거미가 시커멓게 내렸다. 오로지 진연만 그 사실을 모르고 새근새근,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깊은 잠을 잔 건 진연에게도 무척 오래간만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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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릿>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 얘기는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로 꾸며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