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Secret (3)

by 윤주[尹主] posted Jan 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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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윤주의 시신은 그 다음날 화장터로 들어갔다.


 장례식장엔 진연을 제외하곤 상조회사 직원과 평소 윤주를 알고 지낸 동네 사람 몇몇만이 찾아왔다. 진연은 민망해져서 줄곧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바라봤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젊은 아가씨가 충격이 컸나보다 여겨선지 별다른 말 묻지도 않고 얼굴만 잠깐 비췄다 사라졌다.


 결국 소각로 앞까지 따라간 건 진연 혼자였다. 하나 있는 남동생은 미국에 있어서 오지 못했고, 친척들이나 평소 엄마 윤주와 친하게 지낸 사람들과는 도통 연락이 되지 않거나 아예 연락처를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시대를 사반세기쯤 앞서 나간 1남 2녀 가정의 맏딸이었던 엄마 윤주에게 친척이라 할 사람 수 자체가 많지 않았던 탓도 있다. 평소 좀처럼 뭘 적으려 들지 않는 윤주 그녀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근데 정말 이유는 그뿐인 걸까?


 관이 소각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TV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진연이 떠올린 건 전날 그녀에게 전화를 건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대체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엄마 윤주가 죽었단 걸 가장 먼저 알려주고, 집안 정돈에다 시체 입관까지 해놓고 사라져 정작 장례식 당일엔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친척?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 얼굴이며 목소리 따위 외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전화로 들으면 생각나지 않을 리 없었다. 엄마 친구? 타당한 가설이다. 나이대로 봐서 무리란 사실만 빼고 생각하면. 행여나 최소 스무 살 이상 될 법한 나이차를 극복하고 생각한데도 죽은 사람 혼자 집에 팽개치고 나 몰라라 도망치는 친구가 과연 있을까? 무서웠던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전화상으로 들어본 목소리는 겁먹었다기보다 도리어 지나치게 쾌활해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뭔가……."


 진연이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곁에서 화면을 지켜보던 직원이 묘한 탄식을 내었다. 진연도 젊은 여자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소각로 안을 비추는 화면을 보았다. 관이 들어가는 순간 불길이 기름을 부은 듯 확 솟구쳐 오르더니 화면 전체가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 장면을 보면서 진연은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학창 시절 과학 선생이 알코올램프에 불을 켜두고 보란 듯이 가져다놓은 마그네슘 조각이, 불길 위에서 환한 빛을 내면서 타오르는 광경이었다. 엄마 윤주의 관 타는 모습이 딱 마그네슘 조각 타던 그대로였다.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죠?"


 직원에게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당혹스런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진연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묘한 향기가 진연의 코끝을 간질였다.


 "어디서 달달한 냄새가 나지 않아요?"

 "이상하다, 이 날씨에 밖에서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은데……."


 복도 쪽에서도 같은 향을 맡았는지 웅성대는 소리가 진연이 대기하고 있는 방 안까지 들려왔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화장터 건물 내부가 온통 그 향기로 가득 차 있단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향기는 은은하면서도 달콤하고 한편으론 묘한 청량감도 있었다.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게 진정되면서도 은근히 사람을 간절하게 하는 매력 또한 가졌다.


 "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모시고 갑니다."


 옆에 있던 직원이 무전기로 뭔가를 지시받고는 진연에게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좀 밖에 나가 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진연이 묻는 말에 직원은 이상하게도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게, 저희도 뭐라 말씀드리기가 조금……."


 직원의 태도가 불확실했기에 진연은 다소 불안감을 안고 안내에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마당에 몇몇 사람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든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진연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로 안내받았다. 무슨 팀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는 진연에게 어딘가를 가리키며 그 쪽을 보라고 했다. 모 팀장이 가리키는 방향을 올려다본 진연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장터 소각로 굴뚝에서 막 태운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연기는 공장 매연처럼 검지도, 새하얗지도, 그렇다고 일설에서처럼 약간 푸른빛을 띠고 있지도 않았다. 오색 빛깔의 구름. 연기를 보면서 진연은 곧 그것이 오색 구름 같단 생각을 했다. 옅은 색색 기운들, 희고 검은 기운에 붉고 노랗거나 파란 기운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감도는 연기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화장터 일대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제야 진연은 왜 이 사람들이 자신을 밖으로 굳이 데려와 이 광경을 보여주는지 알았다. 그 시각 소각장에 들어간 시신은 엄마 윤주 것밖엔 없었다.


 "십년 가까이 여기 근무하신 분도 저런 광경은 처음이랍니다. 다들 그러더군요, 이건 기적이다, 좋은 징조다라고요."


 제 딴에는 위로라도 해보겠다는 요량인지 팀장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친께선 분명 좋은 데로 가셨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진연이 한 대답은 무뚝뚝하게 들렸다. 모모 씨 팀장은 힐끗 그녀 얼굴을 살폈다. 다소 수척하지만 선이 분명한 진연의 얼굴엔 아무런 감상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흔 줄이 되어 가는 팀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독한 년 같으니, 눈물 정돈 흘릴 법도 한데 말이지.


 사실 진연에겐 이 모든 일이 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갑자기 활활 타오르는 관? 이상한 향기? 오색 연기? 그런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해프닝에 불과한데.


 평소에도 진연은 기적이나 징조 따윈 믿지 않았다. 그런 건 전부 단순한 우연, 어쩌다 일어나는 의외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우연에 일일이 감동하고 슬퍼하는 사람을 진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만 해도 진연은 알지 못했다. 엄마 윤주를 화장시키며 나오는 오색 연기며 향기를 주목하는 게 마당에 뿔뿔이 서서 지켜보던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죽었다."

 "주인이 죽었어."

 "좋은 향이다."

 "누가 왔지?"

 "그 꼬맹이야, 주인의 인간 자식."


 웅성웅성 대는 틈에서 누군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드레스, 길게 길러 어깨 바로 아래까지 자연스레 내린 금발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훑어 귀 뒤로 정리해 넘기며 그녀가 바로 서자 방금 전까지 떠들어대던 자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그 침묵을 뚫고 하얀 드레스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약속대로, 그 햇강아지에게 잠깐 인사 좀 하고 올께. 약속은 잊지 않았지?"


 그녀 주위로 무리 진 자들로부터 꽤 떨어진 곳 으슥한 그늘을 향해 여자는 물었다. 어둠 속에서 딸랑, 하고 유리종 소리가, 키득 키득대는 소리와 함께 새어나는가 싶더니 이윽고 한 목소리가 여자에게 답했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어린 소녀 것처럼 들렸다.


 "물론이에요오. 당신에겐, 당신만의 기회가 주어질 거에요오. 반드시이."

 "됐어, 그거면."


 대답을 들은 여자는 만족스러운 듯 그늘로부터 몸을 돌렸다. 주위를 둘러싼 자들을 대충 둘러본 뒤 그녀는 자못 비장하게 선언했다.


 "자, 갚아줄 시간이다."


 그 말과 함께 여자는 스스로 먼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어 나섰다. 뒤를 이어 십 수 명이나 되는 자들이 여자 뒤를 따랐다. 그들이 일제히 향하는 곳은 바로 진연이 있는 마을 읍내였다.


     *               *               *               *               *


 "재 말고는 안 남았더라고요."


 진연에게 유골함을 건네는 남자는 이 말을 하면서 힐끔 진연의 눈치를 살폈다.

 스님들조차 시신을 태우면 사리가 나오고, 동물이라도 타고 남은 자리를 뒤적이면 하다못해 대퇴골 조각이라도 나오는데, 윤주 시신을 태운 자리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이 흰 재 뿐이었다. 남자는 그것이 마치 자기네들 잘못이라도 되는 양 굽실댔지만 정작 진연은 그것이 엄마 윤주답다고 느꼈다. 엉뚱하게 사람을 놀래는 구석이라던가, 무언가 남겨두고 떠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성미 같은 게. 진연이 별달리 불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조금 안도한 눈치였다. 진연이 무슨 트러블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연이 하얀 천에 싼 유골함을 받아들자, 남자는 다시 탁자 위에 있던 물품들과 함께 방명록 명부처럼 생긴 문서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고인께서 남기신 물건입니다. 확인해 주시고 여기랑 여기 싸인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가리키는 곳에 서명을 하면서 진연은 곁눈질로 엄마 윤주의 유품을 확인했다. 낡은 손목시계 한 자루, 결혼반지 하나, 갈대 줄기 두 가닥을 서로 꼬아 만든, 애들 소꿉놀이할 때나 볼 법한 팔찌 한 개. 그리고 어쩐지 좀 불룩해 보이는 하얀 편지봉투 한 장.


 "이건 뭔가요?"

 "편지 같습니다만. 물론 읽어본 건 아닙니다. 유언이건 사적인 편지건 고객님 문서는 함부로 뜯어보지 않으니까요."


 남자 말마따나 풀로 봉해진 봉투는 뜯어졌다 새로 붙여놓은 흔적은 없어 보였다. 겉면에는 아무 것도 쓰이지 않았지만 봉투 뒷면엔 뭔가 낙서한 듯 엄마 윤주가 끼적인 것이 조금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어쩐지 싸인 연습이라도 한 것 같다. 엄마도 참, 나이도 들만큼 드신 분이 주책이시람. 진연은 왠지 부끄러워 그 봉투와 다른 유품들을 주섬주섬 챙겨 품 안에 넣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뭔가를 얘기하려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요?"

 "담아가실 거 드릴게요. 봉투라도 하나 해서 담아가야지, 안 그러면 바닥에 흘려요."


 서랍을 뒤적이던 남자는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진연이 편지를 비롯한 유품들을 그 안에 넣자, 남자는 봉투 입을 접어 접착제로 단단히 붙인 다음 다시 진연에게 건넸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배웅 나온 남자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진연은 터벅터벅 화장터를 내려왔다. 받아든 봉투는 잘 접어서 핸드백에 넣고, 유골함은 품에 안은 채였다. 이걸 어디에 뿌릴까. 유골함을 보면서 진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엄마가 강을 좋아했던가? 수목장이란 것도 있다던데 집 뒤 숲에다 뿌려줄까? 차라리 납골당에 맡겨둘 걸 그랬나?


 고민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진연은 유골함을 안은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마루 위 반닫이장 왼편에 바짝 붙여 유골함을 놓아 보았다.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나쁘지 않네, 진연은 이렇게 중얼거리곤 벗은 코트를 안방으로 가져다 걸어 두었다.


 문득 진연은 화장터에서 받은 윤주 유품이 생각났다. 갈색 봉투를 뜯어 귀중품을 따로 놓고, 갈대 팔찌는 대충 둘러보다 곁에 팽개쳐 놓고서 마지막으로 윤주가 썼단 편지를 들었다. 봉투 전면을 보았을 때, 진연은 엄마 윤주가 받는 사람 뒤에 뭔가를 적었다가 다시 지운 흔적을 발견했다. 지우개를 가지고 빡빡 문질러 없앤 것 같긴 했지만 날카로운 무언가로 눌러쓴 글씨인 듯 움푹 팬 자국까진 못 지운 모양이었다.


 봉투를 들고 이리저리 기울여 봤지만 지워진 글씨를 읽기란 쉽지 않았다. 진연은 살짝 오기가 동했다. 집 이곳저곳을 뒤진 끝에 마루 끝 작은 방에서 찾은 연필을 가져온 그녀는 윤주가 지운 글씨 자국 위에 살짝 덧칠을 입혔다. 엄마 윤주가 눌러쓴 글씨가 검은 흑연 바탕 위에 하얀 글자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글씨 중간쯤까지 칠하던 진연이 갑자기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글자는 중간 네 자 가량을 이제 막 드러냈을 뿐이었다. '…다른 내 ㄸ…….' 다른 내 누구를 말하는 걸까? 진연은 다시 연필을 움직였다. 이번엔 전보다 더 동작이 크고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연은 엄마 윤주가 쓴 글자를 모두 똑똑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내 딸에게."


 받는 사람에 쓰인 건 이름이 아니었다. 또 다른 내 딸에게. 진연은 야릇한 표정으로 그 글자를 바라보았다. 엄마 윤주 자식은 진연 자신과 미국에 유학 가 있는 남동생 하나뿐이다. 최소한 진연이 알기론 그랬다. 그렇기에 상식적으론, 이 편지는 말이 되지 않는다. 받을 사람 란에 쓴, '내 또 다른 딸'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대체 엄마 윤주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내려 한 걸까?


 "누구 보란 말예요, 이 편지는?"


 어이가 없어져 진연은 복도 구석 유골함에 대고 물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마치 죄 한 점 없이 편히 잠든 사람처럼 티 하나 없는 흰 명주 천에 싸인 채 그것은 아무 반응도 없었고,


 진연은 그 반응 없음을 탓하듯 한동안 빤히 엄마 윤주의 유골함을 바라보았다.


 늦가을로 접어든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게 마루 위로 불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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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듭 말하지만, 이 글은 판타지입니다. 어딘가 조금 이상해 보이더라도 판타지가 맞아요;

 암튼 천천히 가고 있습니다. 보는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저는 어쩐지 생각보다 전개가 빠르단 느낌도 좀 듭니다만;;;

 그럼 내일 또 다음 화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