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Secret(31) - Ch. 11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지는 않아서

by 윤주[尹主] posted May 2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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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안개 속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던 진연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나무에 기댄 모습은 분명 사람의 것이었고, 게다가 옷차림도 신부의 것처럼 풍성한 치맛자락이 아니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정신 차려 봐요!"


 나무에 기대선 것이 정신을 잃은 반려란 걸 알고 진연은 화들짝 놀랐다. 분명 반려는 마녀가 들쳐 업고 도망쳤던 것으로 기억했다. 마녀는 어떻게 된 거지? 진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마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움직이지 마."


 돌연 철컥, 하는 소리가 왼편에서 들려왔다. 진연은 조심스레 고개만 돌려 상대를 보았다. 구식 권총을 든 신부가 두 사람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신부는 대뜸 마녀부터 찾았다.


 "마녀는 어디 있지?"

 "그건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야. 마녀는 어쨌어? 설마 죽인 거야?"


 진연이 묻자 신부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또 도망쳤나보네. 휴, 이젠 지긋지긋해. 정말이지."

 "도망쳤다고? 반려가 여기 있는데?"

 "무슨 말하는 거야?"


 진연이 한 말에 신부는 황당해했다.


 "마녀 그 여자가 누굴 챙기고 다닐 리 없잖아. 저 반려란 여자도, 분명 재밌으니까 데리고 다니는 거라고. 방해되니까 버리고 간 거고."

 "하긴……."


 이것만큼은 신부 말이 옳다고 진연은 생각했다. 마녀가 자기 발목 잡혀가면서 누군가를 지켜줄 위인은 못 되니까. 평소 마녀 모습을 떠올리자 진연도 신부와 마찬가지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튼 도망간 녀석은 도망간 거고."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신부는 다시 진연과 반려 아가씨를 향해 총을 겨눴다.


 "사랑하는 딸이 말했어. 너희가 죽고, 마녀가 죽으면 내 복수는 끝나는 거라고. 그 녀석이 왕좌를 가진 채 끝이 났으면 더 좋았을 거야.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면 내가 받은 고통도 보상해주겠다고 했거든. 신랑을 되살려주건, 인간들에게 복수하건, 내가 원하는 건 어떤 것이든 들어 준댔어. 하지만 마녀와 그녀 가족들에겐, 내가 직접 복수해야 한다고도 했어."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우리에게 복수하는 거?"


 진연이 묻자 신부는 키득키득 웃었다.


 "복수하는 걸 원하느냐고? 그래. 난 그걸 원해. 내가 받은 고통을 너희도 똑같이, 아니 몇 배로 받았으면 좋겠어."

 "어째서? 우린 너한테 고통 준 적 없는데."

 "너희가 고통 준적은 없지! 하지만 마녀, 그 년은 내게 고통을 줬어."


 별안간 신부 목소리가 커졌다. 진연은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신부는, 그런 진연은 신경 쓰지 않고 얘길 계속했다.


 "그 여잔 애초부터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됐어. 마녀, 그년이 이 세상으로 넘어오지만 않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구. 그 여자가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세계가 이상해졌고, 세계가 이상해져서 나 같은 게 태어나 버렸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고통과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이런데도 내가, 마녀에게 보복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할 거야?"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마녀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니?"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주, 애당초 그 마녀를 불러온 그녀에게도 보복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복수하진 못해. 그러면 하다못해 그 딸이라도,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어.

 하지만 그보단 마녀에게 복수할 목적이 먼저였던 건 사실이야. 마녀는 윤주 그 년과 너를 보호해주기로 약속했었어. 마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할 너를 그녀 손에서 빼어내 내 손으로 죽인다면, 그 여잔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 어떤 기분일까? 아마 무척이나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날 죽인다고 마녀가 슬퍼하기나 할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고, 신부는 덧붙였다.


 "얘, 이건 어린 아이 장난감 뺏기나 마찬가지야. 장난감을 뺏는다고 그 어린애가 죽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애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울어. 그거랑 같아. 너와 저 반려란 여자, 너희 둘은 마녀에게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야. 난 그 장난감을 뺏어서, 다시는 갖고 놀 수 없게 망가뜨려줄 거야. 그년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상처 입히고 비참한 마음이 들게 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할 거야."


 신부는 다시 방아쇠를 잡았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총알은 언제든지 총구에서 발사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진연은 긴장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하고 진연이 내뱉은 것도 사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무심결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넌 애당초 상처 따윈 입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네."

 "무슨 말을 또 하려고?"


 신부는 진연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방아쇠에 걸친 손은 놓지 않았다. 진연은 입천장이 바짝 말라오는 걸 느꼈지만 어찌됐건 계속했다.


 "너도 사랑하는 딸과 마찬가지인 거잖아. 상처 따윈 입고 싶지 않다고, 애초부터 상처 입지 않는 세계였다면 좋았다고. 그렇게 바라는 거잖아."

 "당연하지. 누가 고통 받고 싶어 하겠어? 누가 괴로워하고 싶어 하겠냐고."

 "그게 네가 혼자라는 증거야."


 자기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상대를 몰아세우는 느낌이 들었기에 진연은 조금 흠칫 놀랐다. 방아쇠를 잡은 건 상대방이었다. 그 상대방을 화내게 해서 어쩌겠다고? 진연은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지만 이미 꺼낸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날 비웃는 거야? 겨우 네깟 게?"

 "누군가와 함께인 사람은 상처 입길 두려워하지 않아. 그 상처를 돌봐줄 누군가가 있단 걸 알기 때문이야."


 신부가 화를 내건 말건 진연은 얘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한 마디라도 말을 멈추면, 신부가 곧바로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거란 망상을 했다.


 "이 반려 아가씨도 그래.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는 상처 입은 탓에 마녀를 만나 구원받았어. 뭐 그래, 네 말대로 마녀가 남 챙겨주는 타입은 아니야. 단순히 흥미가 있어서 이 아가씰 곁에 두는 건지도 모르고, 지금처럼 자기가 위험하다 싶으면 버려두고 가기도 할 테지. 그래도 곁에서 보면 생각보다 마녀가 아가씨를 아껴주고 있는 것도 같아.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누구보다도 곁에 두려 하고. 무엇보다 아가씨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나도, 하고 말하려던 찰나 진연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신부가 겨눈 총구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부고 전화를 받고 이 마을에 왔다. 이상한 장례식을 치루고, 생전 처음 보는 엄마 지인들을 만났다. 바리와 마녀, 반려, 위시현. 사랑하는 딸과 지금 눈앞에 있는 신부. 그들은 저마다 엄마 윤주에 대해 서로 다른 얘기를 했지만 그 결과 진연이 깨달은 것은 딱 한 가지 사실뿐이었다.


 "나도 구원받았어. 사실 난 누군가 구원해주길 바랐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어. 바리나 마녀, 반려 아가씨, 시현이, 거기에 엄마에게까지. 엄마가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게 처음엔 화가 났어. 사랑하는 딸 걔처럼 버려졌다고 느꼈고, 지금 너처럼 상처 입었다고 느꼈어. 하지만 결국 그 상처가 아니었더라면 난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고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야. 어째서 엄마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는지 알려고 여기에 왔고, 결국 엄마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슬을 끊고 시현이를 풀어줄 수 있었거든. 방금 깨달은 사실이라 나도 갑작스레 말로 하려니 정리가 잘 안되긴 하지만, 결국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하면 평생 함께 해줄 사람을 만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면 다시 또 상처 입는 게 두려워 혼자가 될 테고."


 기나긴 이야기를 신부는 용케 잘 참고 들어 주었다. 진연은 말을 마치고 크게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이제 끝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기 말을 신부가 납득해주지 않아서, 결국 자신은 여기서 저 총을 맞아 죽는대도 여한이 남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엄마. 이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원해서 혼자가 된 게 아니야."


 잠시 침묵하던 신부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울고 있는 걸까? 면사포에 얼굴이 가린 탓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진연은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함께해 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가 되었다고? 그렇게 말해도 좋아. 애당초 신랑을 죽인 건 너희 인간들이니까."

 "신랑뿐만이 아냐. 가족이 있잖아, 너도!"


 진연이 신부에게 소리쳤다.


 "넌 마녀의 하나뿐인 딸이잖아. 자식들도 있잖아. 그리고 나도, 마녀에게 딸이라면 내게도 딸이나 마찬가지야. 자매인 걸. 제발, 손만 뻗어주면 도와줄 수 있어. 얼마든지 위로해줄 테니까, 이제 복수하는 건 그만 둬."

 "……역시, 그건 안 돼."


 신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뭔가 다짐한 듯 입을 앙다문 채, 진연을 노려본 끝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가짜 가족에게 위로나 평생 받으며 복수하는 걸 그만두라니, 역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너도 알 거 아냐. 당신이 윤주 딸인 것과, 마녀가 윤주 딸인 게 같은 뜻이 아니란 것쯤은."


 탕, 하고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다. 반려 여자를 보호하려는 듯 껴안은 채 진연은 눈을 꼭 감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 몸이 공중으로 끌어올려져 붕 뜨는 듯 느낌을 받았다. 진연은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새 등 위에 자신과 반려가 누워 있는 걸 그녀는 금방 깨달았다.


 "누가 버리고 도망쳤단 거야? 착각은."


 그 위에 그들 말고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온통 검게 차려입은 마녀, 그 여자가 웃는 낯짝으로 진연과 반려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 좀 봐. 신부 녀석이 방방 뛰는 꼴이라니. 쿡쿡, 한동안 더 자기가 만든 안개 속에서 헤매 보라지. 그 사이 우린 집으로 돌아갈 테니."

 "너, 뭐하다 이제 나타난 거야?"


 진연이 묻자 마녀는 비밀, 하고 한 마디로 답했다. 그러고는 진연을 보면서 자꾸만 히죽히죽 웃어댔다. 당연히 진연은 기분 나쁜 듯 마녀를 쳐다보곤 물었다.


 "왜?"

 "아까 말했지? 자매라면서. 결국엔 인정하는 거야?"

 "웃기지마! 내가 언제!"

 "잡아떼시긴. 그래, 자매라면 말인데, 누가 언니라는 거야? 설마 너는 아니지?"

 "에이 씨, 잊어! 잊으라고!"


 진연과 마녀가 아옹다옹하는 사이, 안개 덮인 숲을 빠져나와 새는 순식간에 문이 있는 곳까지 날아갔다. 문을 통과한 일행은 처음 출발했던 폐가로 되돌아왔고 거기서 엄마 윤주 옛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모험은 그것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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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릿> 11장 마칩니다.

 요즘 계속 내용을 채워넣는 작업을 계속 하다보니, 분량 가늠이 잘 안되네요;; 서너 차례 나누어 올려야할 줄 알았더니 11장도, 두 번만에 끝이 나네요;;

 아무튼 길었던 연재도 이렇게 마무리지어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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