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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어서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진연은 바리를 두고 온 문 너머를 계속 의식했다.


 "정말 맘에 안 드는 일 뿐이래도, 이 세상은."


 문 안으로 들어선 이후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마녀조차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전해져오는 얘기가 있어. 이 세계에만 전해져오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얘기야."


 어째서 마녀는 이 상황에 옛날이야기를 꺼내려는 걸까? 진연은 마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태초에 이 세상엔 거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이, 하늘도, 땅도, 바다도 없던 시절에 오로지 그 거인 혼자 이 세상에 존재했다. 그 사실을,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거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야기를 들려준다기보다 무언가 적혀진 것을 읽어 내리는 듯 무덤덤한 어조였다. 그래서 더 아득하고 먼 과거에 실제로 있었음직한 이야기로 들렸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녀 자신이 현실과는 거리를 둔 존재 아니던가.


 "죽은 거인의 시신이 이 세상을 낳았다. 해와 달을 낳고, 대지를 이루고, 물과 공기를 만들어 내었다. 수많은 산 것들이 태어났다. 개중에 인간도 있어서, 그가 우리의 시조가 되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마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빼놓을 수 없어 꺼내긴 했지만 인간들의 계보 따윈 사실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되짚는 건 보다 낯설고 은밀한 계보, 버려지고 잊힌 자들에 관한 계통수였다.


 "이 모든 것을 낳고도 거인의 시신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을 만들고 남은 잔재, 아무 쓸모도 없는 자투리 살점들이 흩어지지 않고 제멋대로 뭉쳐 이름도 형체도 없이 사방을 떠돌았다. 누군가 그들을 봐주기 전까지, 그들은 줄곧 하나이자 여럿으로,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헤매고 또 헤맸다."


 그리고 그 기집애가 이름을 붙여줬지.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느라 마녀는 다시 말을 잠시 끊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마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느새 머나먼 과거 일이 아닌 현재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리란 말은 말이지, 버려졌다는 뜻이야. 근데 저 바보 같은 앤 그걸 진짜 제 이름으로 삼아 버렸어. 윤주 그 년은 정작, 아무 생각 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뿐인데. '그러면 너희는 바리데기, 바리구나.' '그러면 너희는 버려진 잡동사니일 뿐이구나.'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주겠단 생각 따위, 그 년에겐 없었을 거라고."

 "그런 거야?"

 "자신이 무엇인지 몰랐을 땐 괜찮았어. 자기가 세상 만물을 낳은 태곳적 거인이 남긴 잔해라는 걸 알았을 때, 바리 저 년은 자기가 그 거인인 양 굴었어. 세상 모든 이들 기쁨이 제 기쁨인 양, 모든 슬픔이 제 슬픔인 양. 마찬가지로 모든 죄가 다 자신이 지은 죄인 양."


 그게 우리가 문 밖에 놓아둔 녀석이야. 그 말을 끝으로 마녀는 입을 다물었다. 진연은 잠시 혼자 생각하곤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홀로 되뇌었다.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사악한 자를 사랑하는 거야."

 "네?"


 곁에 있던 반려 아가씨가 반응을 보였다. 의도치 않게 진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히 떠오르는 걸 기다린 탓이었다.


 "세상 모든 걸 불쌍히 여길 정도로 착한 애가, 모든 인간을 저주하는 '사랑하는 딸'을 사랑하고 있어요.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라고 해버리면 간단하지만, 어쩐지 전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바리가 '사랑하는 딸'을 각별히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부모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진연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심경이 복잡해져서요. 부모란 다들 그런 건지, 죄다 자기 자식에겐 무조건 사랑을 바치는지 싶었거든요. 그러니까, 역시 엄마도 제게 그랬던 걸까, 싶어서."

 "진연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되돌아온 질문에 진연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엄마 윤주가 자신을 위해 뭔가 해준 게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진연이 엄마 윤주에게 받은 건 수도 없이 많았다. 옷이니, 도시락이니, 책이니, 음악 CD니…….


 "하지만 역시 엄마에게 가장 소중했던 건 제가 아니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 유일한 주인이었고, 저도 모르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마녀도 있었잖아요."


 마녀, 란 이름을 대기 전 진연은 조금 망설였다. 행여 자신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저질러 버렸다, 하고 생각한 순간 진연은 스스로도 걷잡을 수 없이 쌓였던 감정들을 실어 말을 뱉었다.


 "엄마 죽은 걸 생판 남한테서, 그것도 제일 보기 싫은 녀석 입을 통해 들었어요. 별 생각 없이 내려왔는데, 생명의 위협까지 당했고요. 게다가 지금은 내 목숨 노린다는 여자를 만나러 가고 있잖아요? 그것도 엄마 딸이라는 이유 단 하나 때문에."

 "그건 윤주 씨도 바란 결과가 아닐 거예요."

 "그 여자, '사랑하는 딸'조차 사랑받고 있어요."


 앞서가던 마녀가 걸음을 멈춘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진연은 말을 계속했다.


 "가장 사악한 사람조차 부모 사랑을 받는다면, 남들과 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전 어째서 엄마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한 거죠? 정말 소중하다면,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믿고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기이, 방금 그 얘기에 대해선, 할 말이 있는 데요오."


 낯선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자 진연은 화들짝 놀라 정면을 보았다. 마녀 어깨 너머로 그녀와 대치하는 상대 모습이 진연 눈에 들어왔다. 울긋불긋 화려하고 이국적인 옷차림에 커다란 창을 든 소녀가 빙긋이 웃으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느긋한 태도에다 말끝을 길게 늘이는 버릇 탓에 소녀 얘기는 조금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길어졌다.


 "일다안, 전 '가장'이라고 덧붙일 정도로 사악하지 않아요오. 둘, 부모 사랑을 받는다는 건 잘못 아신 거예요오. 절 사랑해주는 거언, 여기 그림자들 뿐이죠오."


 커다란 개 위에 앉아 소녀가 털을 쓰다듬자, 등이 푸르스름한 삽살개는 쩍 커다랗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소녀는 물론이고 반려 아가씨나 마녀보다도 훨씬 큰 몸집을 한 개였다.


 "사악하지 않다고?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마녀가 끼어들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 한 쪽으로 숙였다. 몸 곳곳에 매단 장신구 탓인지 가볍게 짤랑대는 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쳐 울리듯 들렸다.


 "당신은,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요오. 얼마 전 신세를 크게 졌었죠오?"

 "여전하네. 그 답답한 말버릇하며, 태도하며."

 "이 애, '적막'도 여전하답니다. 그때부터 줄곧 마녀 씨 목덜미를 물어뜯어보고 싶어 했거든요."


 상대가 마녀인 걸 확인하자 소녀는 기쁜 듯 웃었다.


 "우리이, 할 얘기가 좀 남지 않았나요오?"

 "또 그 시시껄렁한 얘기나 하려고? 다툼 없는 유토피아, 상처 주고받지 않는 세상, 이딴 거? 그거라면 이미 말했잖니. 난 생각 없어."


 반려도 마찬가지고. 마녀는 반려 아가씨를 한 팔로 끌어당겨 제 곁에 딱 붙여 안았다. 그들을 뚫어져라 보던 소녀는 이번엔 진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연 씨는 어때요오? 어쩐지 관심 있을 것 같은데에, 제 얘기."

 "넌,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

 "미안한데, 여기에 네 얘기 궁금한 사람 아무도 없거든?"


 소녀에게 쏘아붙이고 마녀는 진연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뻔 하잖아. 여기 달리 누가 또 있겠어?"

 "그럼 저 애가, '사랑하는 딸'이야?"


  맞아, 하고 마녀는 목소리를 다시 높였다.


 "저 꼬맹이가 바로 우리 최악의 적이야."

 "당신이 제게 있어 최악의 적이겠죠오."


 '사랑하는 딸'은 마녀를 노려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지난 번 일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어요오. 하나도 빠짐없이이."

 "지난번이라니?"

 "악연이 있었거든, 저 애랑."


 마녀 대답을 듣고서 진연이 언뜻 보니, 반려 아가씨조차 평소보다 긴장한테가 역력했다. 뭔가 큰 일이 있었겠거니, 진연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번 일 기억하면 알겠네. 쓸데없는 재주는 부릴 필요 없어. 어차피 안 통할 테니까."

 "네에, 저도 그래서어 이번엔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나가보려고 해요오."


 제 키보다도 큰 창자루를 사랑하는 딸이 고쳐 잡는 것을 보고 마녀는 반려 아가씨에게 눈짓했다. 반려 아가씨가 진연에게 속삭이는 동안 마녀는 사랑하는 딸에게 말을 걸어 시간을 벌었다.


 "진연 씨는 일단 피해 계세요. 저 애는 저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듣자하니 윤주 물건 네가 갖고 있다면서?"

 "'왕좌'를 얘기하는 건가요오?"


 사랑하는 딸은 쿡쿡 웃었다.


 "잘못 알고 계세요오. '왕좌'는 누구의 것도 아녜요오."

 "무슨 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왕좌는 계속 세상의 주인에게 물려지는 거잖아. 윤주가 주인이었으니까, 왕좌는 윤주 거 맞지."

 "지금은 주인이 아니죠오. 왜냐며언, 그 여잔 이제 없으니까아."


 사랑하는 딸 말끝에 살짝 적개심 같은 게 묻어났다. 마녀는 이번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몰랐어요오. 당신이 그 여자와 그런 관계였단 거얼. 온 세상을 뒤집고 다니면서, 저와 그림자들이 평화롭게 지내던 세계까지 어지럽혀놓은 건 전부 그 여잘 찾기 위해서였다면서요오?"

 "그게 어쨌다고?"

 "마녀 씨이."


 돌연 사랑하는 딸이 마녀를 불렀다.


 "당신은 정말 믿지 않나요오? 사실 알고 있잖아요오, 그 여잔,"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니까 그만 둬."


 마녀가 내린 경고를 사랑하는 딸은 무시했다.


 "그 여잔 초월했다고요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인 걸요오?"

 "안다고 했잖아."

 "주인으로써 의무도 사명도 버리고, 세상을 더 낫게 하기는커녕 제멋대로 방관하고, 결국엔 당신도 가족도 모두 버리고 떠나버렸어요오. 뭐든지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까요오? 그런 여자에게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서어."

 "시끄러워!"


 마녀는 소리를 질렀다. 기세 좋게 떠들어대던 '사랑하는 딸'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 자리에 있던 이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녀는 사랑하는 딸을 노려보며 혼자 씩씩대기만 했다.



======================================

 <시크릿> 23화, 예고한 대로 올립니다^^;

 이미 연재된 분량에 대해, 최근에 대폭적으로 수정하고 있습니다...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연재 끝나기 전엔 완성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다음 연재분 올릴 때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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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1.05.02 00:50

    헉, 과연 저 사랑하는 딸과 마녀씨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왠지 무서워지네요...;; 워낙 험한 마녀씨다 보니...

  • profile
    윤주[尹主] 2011.05.02 07:00

      <시크릿>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입니다;;

     사실은, 사랑하는 딸은 마녀와 싸워 진 적이 있어요. 반려와 얽힌 일인데...결국 마녀가 사랑하는 딸과 그림자들의 둥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마녀의 심장, 정령의 목소리>란, 과거 올린 소설에 있긴 합니다....


     그런 배경이 있긴 하지만 신경쓰지 않고, 그저 과거 안 좋은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봐주세요^^;;

  • profile
    smilerecan119 2011.05.02 03:25

    음.. 그렇군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5.02 07:13

     관심 감사합니다;;


     <시크릿>은 4일에 한 편 꼴로 연재 생각중입니다. 빨리 그리시는 편인가요?? 그러면 좀 답답하다 싶을 수도 있겠네요;;


     만화라...누군가 제 글 보고 뭔가 만들어내리란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의문점에 대해선,


     <시크릿>의 주인공은 엄마 윤주의 딸, 진연입니다. 윤주에겐 딸 진연 말고도 미국 유학 중인 아들 하나가 있죠.

     그 엄마 윤주 자신이 1남 2녀 가정의 맏딸이 됩니다. 그러니까, 진연에게 이모와 삼촌이 한 분씩 계시다고 봐야 겠지요^^;


     의문의 목소리 녀석들은, 지금까지 연재분에서 등장한 '신부'와 '사랑하는 딸', 그리고 그들이 몰고 다니는 괴물들입니다. '신부'의 경우는 그 장면에서 묘사된 대로 웨딩드레스 차림이고, '사랑하는 딸'은 최근 연재분 가운데(아마도 8장 내에) 있을 텐데 대략 중국 소수민족 전통복식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평상복보단 예복에 가깝게요. 장식적이고, 화려한 쪽으로. 하지만 호복에 가깝게 치마가 아니라, 바지 위에 길이가 긴 상의를 입은 것으로 선택하시면 제가 생각한 이미지와 거의 유사할 것 같네요.

     괴물들은, 저도 대략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백귀야행'이나 맹수들의 무리 같은 이미지를 생각하시면 유사할 겁니다. 각양각색,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괴물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제멋대로 떠드는, 그런 장면이었어요;

     이걸로 도움이 되실지는 모르겠네요;;;; 혹 다른 궁금한 점 있으시다면 언제든 댓글이나 쪽지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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