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6 20:32

Neptunus Story

조회 수 1636 추천 수 2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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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혹여왕 -


 가짜 하늘에도 해와 달이 떠오를 수 있을까?


 예상 외로 확 트인 시야 탓에선지, 에트랑쥬는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는 착각을 했다. 고개를 들어보자, 진짜 하늘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돔 천장이 그녀 머리 위로부터 끝도 없이 뻗어나가 있었다.


 복잡하게 발달한 슬럼가를 막 빠져나온 에트랑쥬는 해변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눈부실 정도로 환한 빛을 받은 물결은 새하얗게 빛나 그녀 시선을 사로잡았고, 모래밭은 그녀 발밑에서 마치 눈처럼 서걱대며 밟혔다. 한동안 그녀는 해변에 서서 인공으로 만든 이 가짜 바다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겨우 인공 해변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에트랑쥬가 바라보는 건 하늘 높이 치솟아 돔 천장마저 뚫고 나간 거대한 사령탑이었다. 누군가는 비꼬아 '옛 왕들의 옥좌'라고 불렀던 바로 그 탑이다. 탑의 첫인상에 대해선 에트랑쥬 역시 아직 만나지 못한 그 누군가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다만 반응만은 그와는 전혀 달랐으니,


 "바로 이거에요, 후후후. 새로 시작하는 왕국의 중심지가 저 정도는 돼야지 않겠어요?"


 황당무계한 야심에서 시작된 망상은 그녀 머릿속에서 끊이지도 않고 이어졌다. 사령탑을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애써 모른 채 피해 다녔다.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넵튜누스 호 가장 위의 지면, 배로 치자면 최상갑판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에트랑쥬는 완전히 인간과 똑같아 보였다. 형태도 흐릿함 없이 뚜렷하고 인공 태양빛 아래 그림자도 선명하다. 다만 그 차림, 아무 특색 없는 새하얀 원피스에 쓰레기장에서 주울 법한 얼룩덜룩한 넝마 한 장을 숄처럼 두른 것이나, 모래사장 한가운데 떡 하니 서서 심해 맨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듯 낮고 조그맣게 후후후, 하고 웃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머리에 나사 몇 개풀린 년인 양 생각되는 거다.


 한참 사람들 비밀스런 시선을 한 몸에 모아 받던 에트랑쥬가 웃음을 뚝 그쳤다. 입을 다문 대신 가만히 있던 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 끝내 닿을 곳은 뻔했다. 예기치 않는 방해만 없었더라면.


 "헤이, 거기 아가씨!"


 처음에 에트랑쥬는 그 말을 무시했다. 자신을 부르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해서였다. 상대방은 다시 몇 번인가 그녀를 불렀다. 소리치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거기다 여럿이 성큼성큼 내딛는 발자국 소리도 에트랑쥬에 점차 가까워왔다. 에트랑쥬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부르던 건 해수욕을 즐기던 놈팡이 셋, 여자 앞에서나 잔뜩 폼 재는 어린애들이었다.


 "아가씨, 부르는지 몰랐어?"
 "당신들은 누구죠?"
 "우리말이야?"


 하핫, 애써 호탕한 웃음을 가장하는 녀석들 입 언저리엔 아직 솜털이 새하얬다.


 "아가씨 첨보는 얼굴이네? 이 동네 출신은 아닌가봐?"
 "야, 딱 보면 모르냐, 그걸?"
 "하기야 너처럼 온 동네 치마 두른 건 개라도 쫓아다니는 녀석들 같으면 금방 알겠지."
 "뭐, 인마?"
 "우린 그 뭐냐, 한화의…사관생이랄까?"
 "아, 그래! 그거야. 사관생."


 낄낄대면서,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사내들은 경례 흉내를 냈다. 장교 흉내 내는 얼치기들, 돼먹지 않은 솜씨나 뽐내는 풋내기들이란 건 새삼 확인할 것도 없는 사실이겠지만 에트랑쥬는 그 작자들 얘기를 완전히 믿는 눈치였다.


 "아, 당신들이 그 한화 사람들이라고요?"
 "그래, 그렇대도. 아이작 로버트 회장님께 경례!"
 "회장님께 경례!"


 구제할 수 없는 바보들 행동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 눈살이 찌푸려졌다. 여자 하나 꾀겠다고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에, 이 넵튜누스 호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 이름까지 끌어대는 건 너무 정도가 심했다. 진짜배기 전쟁터, 항상 별 것 아닌 일로 시비가 붙는 슬럼가나 해적들과 충돌이 잦은 구역에서라면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어디 가던 중이었어?"


 그 바보 녀석들 중 하나가 에트랑쥬에게 물었다. 에트랑쥬는 사령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가려고요."
 "사령탑에? 무슨 일로?"
 "잠깐 들어가 보고 싶어서요. 혹시 어떻게 가면 되는지 알아요?"
 "데려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렇지?"


 사내들은 저네들끼리 눈치를 보냈다. 좀 전 바보와는 또 다른 바보가 에트랑쥬에게 말했다.


 "아가씨,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포기하는 게 좋아. 저긴 간부급들이나 드나드는 데라고."
 "게다가 오늘은 경비도 평소보다 훨씬 엄중하고."
 "왜요?"
 "무슨 회의라던가? 암튼 간부란 간부는 전부 모였다고 하던데."
 "그 바솔로뮤도 들어갔다던데?"
 "윽, 그 해적 바솔로뮤?"
 "멍청한 놈, 해적이 거길 왜 들어가?"
 "내가 아냐? 소문이 그냥 그렇다는 거지."


 사내들이 떠드는 동안 얘기를 듣던 에트랑쥬는 생각에 빠졌다. 사령탑이라면 이 배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 게다가 지금은 각 무리 대표들까지 전부 들어와 있단다. 얼른 생각해 보아도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쉽게 들여보내줄 리 없다. 좀 더 아래쪽 갑판 같으면 벽을 통과해 들어가 보기라도 할 테지만, 여기는 배에서도 위쪽 갑판에 해당된다. 이곳에선 에트랑쥬라도 유령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성 엘모의 불은 써볼 수 있겠지만 그건 살상용이라기엔 너무 시간을 오래 끌고 제압용이라기엔 에트랑쥬 자신의 체력을 너무 깎아먹는 애매한 힘이다. 그것만으론 저 높은 탑 한 개 층도 뚫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한심하기는."


 그때 바보 중의 바보가 입을 열었다.


 "안 된다, 안 된다. 언제까지 그딴 소리나 지껄이고 앉아 있을래? 숙녀 앞에서 볼썽사납게."
 "그럼 넌 어떤데?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안 되면 되게 하라. 남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빤히 쳐다보는 에트랑쥬 손을 덥석 쥐고, 느끼한 얼굴로 쳐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아름다운 레이디를 위해서라면 말이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여기서 딴죽을 걸어야 맞겠지만, 구제할 바 없는 바보들은 일제히 오, 오 떠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바보도 옮는다고, 그들을 보던 에트랑쥬 얼굴에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색이 돌았다.


 "정말, 정말로 도와줄 거야?"
 "뭐든지 말만 하라고."
 "정말, 날 위해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그럼, 아가씨. 물론이지."
 "그럼, 그럼 말이야. 당신들은 강하지?"
 "그래. 당연하지."
 "총도 잘 다루고?"
 "물론."
 "사람도 죽여 봤어?"
 "응?"


 웃고 떠들던 녀석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뭔가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상황에서 혼자 재기발랄하게 떠드는 건 에트랑쥬 혼자뿐이었다.


 "저기, 몇 명이나 죽여 봤어? 열 명? 쉰 명? 백 명?"
 "자, 잠깐만 아가씨."
 "얼마나 죽일 수 있는 거야? 대여섯 정도는 간단해? 그렇겠지? 당신들은 강하니까."
 "무슨 소리하는 거야, 대체."
 "저기 있잖아, 나를 위해 끝까지 따라 와줄 수 있어?"


 '끝까지'란 말이 그렇게 섬뜩하게 들린 건 처음이라고, 사내들은 일제히 생각했다. 떠들썩하던 해변에서 언제부턴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사내들에겐 그렇게 생각되었다. 긴장감 속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잔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저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넌."


 진작부터 물었어야 할 말을 남자들은 너무 뒤늦게 물었다. 에트랑쥬는 사내들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입을 다문 것도,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들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들떠 있었다. 너무나 들떠서 마치 눈앞에 환각이라도 펼쳐진 양 굴었다. 환각 속에서, 그녀는 이미 여왕이었고 그녀 눈앞에 서 있는 그들은 가신이었다. 그녀를 위해 모인 가신들을 향해서 에트랑쥬 여왕은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여기, 이 배에 왕국을 세우는 거야. 내가 첫 여왕이자 재상이고, 너희는 기사가 되는 거지. 그리고 불쌍한 오라버니, 죽어버린 오라버니 제리코의 머리에 처음이자 영원할 왕국의 왕관을 얹겠지.
 그래, 유령 왕국이야. 넵튜누스 전 인류를 신민으로 하는, 바다 위를 영원히 방랑하는 죽은 자의 왕국 말이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어디에도 비할 바 없는 미소를 얼굴에 띤 에트랑쥬를 보면서 사내들은 소름이 쫙 돋았다. 덜덜 떠느라 이빨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결국 그들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겁에 질리고 혼란에 빠진 녀석들은 제각기 숨을 구멍을 찾아 쥐새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에트랑쥬 앞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왕국의 국민은 다시 에트랑쥬 혼자가 되었다.


 마치 춤을 추듯 빙그르르, 빙그르르 돌면서 에트랑쥬는 사령탑으로 향했다. 자기 환각 속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신민들의 응원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묘비처럼 우뚝 솟은 철갑 탑을 향해서, 제 죽을 자리를 찾는 부나방처럼.


===================================================

 어제 올리려 했는데 이제야 겨우 썼네요;;;
 그러고보면 글 쓰는 것도 꽤 오랜만이네요..;
?
  • profile
    갈가마스터 2011.02.27 00:28

    헐? 에트랑쥬가 가는겅미? ㄷㄷ 이거 난감하네 ㅋㅋㅋ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1:44

     헐...혹시 구상하신 거랑 겹치는 건 아니죠;;

     어차피 대판 깨지러 가는 거긴 한데요;

  • ?
    乾天HaNeuL 2011.02.27 01:26

    일단 댓글을 달고. 읽는 건 낼 해야지. 오늘은 왠지 눈 피곤해요. ㅜㅜ

  • profile
    윤주[尹主] 2011.03.01 09:07

     본래 설정은 그냥 조증 캐릭터였던 거 같긴 한데;;;

     이제와서 뭐 별로 상관도 없지 싶은 기분입니다;;;


     ...실은 좀 더 나중에, 다른 이유로 맛이 가길 바랐는데요;

  • ?
    乾天HaNeuL 2011.03.01 02:49

    오늘 읽었다. ㅋㅋㅋㅋㅋㅋ


    저 사람 역시 맛이 갔어. ㅋ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1:47

     선리플 후감상이라니요 ㅎㅎ

     그럼 읽고나서 감상 기대할게요^^

  • profile
    SinJ-★ 2011.02.28 06:19

    오! 벌써 마이 타임?!

  • profile
    윤주[尹主] 2011.03.09 06:35

     무슨 소리십니까 ㅠㅠ 갈가님도 글 보여주셔야죠;;

  • profile
    갈가마스터 2011.03.08 04:40

    하앜 쓸까 말까 쓸가 말까 쓸까 말까 ㅋㅋㅋㅋㅋㅋㅋㅋ

  • profile
    윤주[尹主] 2011.03.01 09:05

    갈가 님 이번엔 올리시지 않나요? 기대하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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