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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허구입니다. 실제 인물, 단체, 기타 등등 실재하는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버스가 위협적인 ‘쉿’ 소리를 내며 떠났다. 나와 함께 내린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이었다. 빌 브라이슨이 말한 대로, 세계 어딜 가나 관광객들은 최대한 못나 보이게 입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튀어나온 배에, 두 겹으로 접힌 턱살에, 걸어 다닐 때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명치를 치는 비싼 카메라에.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날은 궂었고, 분위기는 몹시 음산했다. 강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묘지 전체를 얇게 덮고 있었다. 뭘 보러 여기 왔냐는 양 가랑비까지 뿌렸다. 여기저기서 우산 펼치는 소리가 났다. 내가 이번 여행 마지막 일정으로 이 곳 프로비던스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 여기에 H. P. 러브크래프트가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언저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구는 ‘볼 거라고는 하나도 없고, 매년 해 뜬 날이라고는 손에 꼽고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구질구질한 동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었던 탓에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도 꽤 오래 걸어야 했다.

 

“이봐, 형씨. 사진 좀 찍어주지 않을래?”

 

공원 어귀에서 뚱보 관광객 하나가 말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이런 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야 무슨 목적으로 왔을지는 뻔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동지들. 아, 본부대로 합지요. 나는 있는 기교 없는 기교 다 부려가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내 사진도 흔쾌히 찍어 주었다.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볼 만하지. 내가 용건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꽤나 있는 편이었다. 묘지는 묘지라기보다는 공원에 더 가까웠다. 넓기도 꽤 넓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만 아니었다면 꽤 상쾌한 기분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걸어가자, 저 멀리 유난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나 있었다.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떠나는 사람들 사이로 그의 묘비가 보였다. 가족 기념비 뒤쪽의 조그마한 묘비.

 

HOWARD PHILLIPS

LOVECRAFT

AUGUST 20 1890

    MARCH 15, 1937
________

I AM PROVIDENCE

 

묘비 주위에는 조잡한 반인 반 문어 상이나 꽃, 그리고 그의 코팅된 사진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틈으로 가져온 꽃을 뒀다. 꽃잎 겉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빛 바랜 사진 속의 러브크래프트가 이쪽을 쳐다봤다. 사람보다는 물고기를 닮았을 길쭉한 얼굴.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그 눈빛. 평생 음울하게 살아온 은둔자. ‘예? 호러 작가라고요? 에드거 앨런 포도 그랬고, 러브크래프트도 그랬고, 다 불행하게 살았잖아요.’ 스티븐 킹이 그랬었던가. 그래, 거기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다음에 더 높이 평가받고. 인격파탄자에, 머릿속에 든 것도 제대로 이룬 거라고는 하나도 없고,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관광객용 팜플렛 이상으로 얇은 인간관계 같은 걸 보면 나는 이미 호러 작가의 조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건만. 하느님은 내게 너저분한 인격은 주었지만 글재주는 주지 않으셨으니까. 시계를 보니 세 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공원에 들어온 지 약 삼십분이 지났는데, 그 중 20분은 묘지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아, 차라리 세일럼에 가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러브크래프트의 묘지를 뒤로 하고 걷기 시작하자, 저쪽 강에서 안개가 더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멀리서 관광객의 장난인지 ‘Iä! Iä! C'thulu fhtagn!' 하는 소리도 얼핏 들린 것 같았다. 뭐, 알게 뭐야. 어차피 언젠가 별들은 올바른 위치로 돌아올 것이고, 꿈꾸며 기다리는 자는 석조도시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숙소로 돌아가서, 에그노그라도 마시면서 오늘 하루를 곱씹어 볼 것이다. 강 둔치를 따라 계속 걷다가, 나는 저 멀리서 비쩍 마르고 길쭉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봤다. 그는 들고 있는 책을 낭독하다가-뱃사람 신밧드의 이름을 들었다-내 쪽을 보고는, 웃는 건지 웃으려고 애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띄우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안개 속으로 녹아 들어가 사라졌다.

 

아, 헛것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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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12.24 06:10
    그 러브크래프트의 무덤이네요. 누군가의 무덤을 방문한다는 건 과연 실제론 어떤 기분일까요? 궁금해집니다.
    혹여나 글 속 주인공같은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ㅎ 잘 봤습니다.
  • profile
    욀슨 2012.12.24 09:47
    흔히 묘지에 가볼 수 있는 기회라면 현충원이나, 명절 성묘 정도겠군요. 사실 글이 가보지 못한 곳이 아니라 가보고 싶은 곳으로 좀 흐르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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