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7 01:53

반죽

조회 수 353 추천 수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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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부기는 앞에 놓인 눈물과 진흙으로 빚어진 반죽을 보며 말했다.

- 어머니, 저는 반죽을 해 본 적이 없어요.

- 그냥 마음가는대로 하렴.

뜸부기는 마지못해 반죽을 시작한다. 눈물의 짠 내가 코를 찌른다.

반죽 한 번에 나를 반성.

반죽 두 번에 너에 대한 나를 반성.

반죽 세 번에 세상에 대한 나를 반성.

뜸부기의 눈물도 반죽위에 뚝뚝 떨어진다.


갑자기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며 하늘에서 빨간 사이렌이 울린다.

- 북한의 공습이 시작됐다. 진돗개 하나 발령! 모두 위치로!

뜸부기는 소스라치며 반죽을 내팽개치곤 책상위로 뛰어올라갔다.

- 젠장! 이제 평화는 모두 끝났군.

세상이 밑으로 꺼지는 추락감을 느끼며 그는 책상에서 케케묵은 전투복과 오래 전 받은 전투상황 시 행동요령에 관한 우편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았다. 찾다보니 웃기기 시작했다.

- 아니. 전투복 따위가 책상 서랍이나 책꽂이 따위에 박혀있을 리 없잖아?


열려진 동풍 사이로 문틈이 불어왔다. 아니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동풍이 불어온 건가.

동풍은 장난기 넘치는 몸놀림으로 시제를 바꾸어 뜸부기를 혼란에 빠뜨리곤 방안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다, 문득 떠올렸던 그의 의문을 도둑질 해 남쪽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뜸부기는 다시 아무생각 없이 전투복을 찾기 위해 책상을 뒤졌다.


찾아도 나올 리 없는 전투복을 찾던 도중 동풍에 대한 울분이 쌓여갔다.

- 그 놈이 내 의문을 빼앗아가지만 않았어도 난 지금쯤 오래된 안경곽이나 누나의 숨겨둔 보석함을 뒤져 전투복을 찾아내었을 텐데 말이야!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허나 모든 일엔 이유가 있는 법인가 보다. 먼지가 잔뜩 쌓인 책꽂이 맨 위 칸에서 앨범 하나를 찾았다. 앨범은 몹시도 오래된 듯 곳곳이 낡아있었다. 펼쳐보니 거기엔 수많은 우표들이 꽂혀있었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에 우표 수집을 하라고 부모님이 사 오신 우표 수집 앨범이었다. 가까스로 떠올린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먼 옛날, 뜸부기는 소행성이었다. 그는 열심히 공전하고 있었고 이웃한 행성들을 지켜보며 하루하루를 자연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었다.

뜸부기는 아차 싶어 미래로 되돌아간다. 도저히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때를 회상하는 것은 너무나 슬프고 아파서 떠올리는 것조차 괴롭다. 실수로 먼 과거까지 갔었지만 곧 그의 유년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뜸부기는 우표를 수집하기 위해 남의 집 우편함에 있는 편지란 편지의 우표는 죄다 뜯어내 앨범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저씨에게 걸려 남의 우표를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라며 혼쭐이 났다. 호되게 혼났지만 아저씨는 마지막에 자상하게 웃으며 우표를 하나 주었다.

그 때 그 아저씨의 얼굴은

아니 그 아저씨의 미소는

...


뜸부기는 아저씨의 얼굴은커녕 미소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상실감에 놀라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 절대 그럴 리 없어.

급한 손놀림으로 앨범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 곳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이천 원짜리 우표가 있었다. 이건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우표가 틀림없었다.

- 이 우표는 사촌형이 주었던 거지! 아니야, 동네 친구에게 받았던 건가? 아닌가.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에 햇살과 함께 날려 온 우표였던가...


뜸부기는 무릎 꿇었다. 기억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무릎 앞에 놓인 우표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우표 하나하나에 담겨 그것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사연 혹은 그것에 얽힌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었다. 추억 없는 우표는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우표에 불과했다.


뜸부기는 어느새 나이를 먹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반죽법에 대한 고민, 동풍에 대한 울분 따위의 쓸데없는 것들로 머릿속을 꽉꽉 채워 넣기 바빠졌고 어느새 우표 앨범을 모으던 그의 옛 모습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우표 앨범마저 잊어버리게 되면 유년 시절 그의 모습 중 하나였던 우표 수집이 취미인 뜸부기의 모습은 아예 사라질 것이다.


그 깊은 상실감에 뜸부기는 엎드려 울었다.

찔레꽃처럼 울었다.

찔레꽃처럼 목 놓아 울었다.

찔레꽃처럼 밤 새워 울었다.

곧 뜸부기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흘러넘친다. 불어난 눈물의 강의 급류에 휩쓸려 뜸부기의 어머니가 쓸려 내려간다.

- 어머니...!

그의 시야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슬픔 때문에 어머니마저 잃어버린 뜸부기는 한층 더 외로워졌다. 감당할 수 없게 된 그는 잔뜩 화난 목소리로 내게 외쳤다.

- 이 개자식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미안. 하지만 이건 네 이야기야.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고.”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라도 알려줘, 제발.

“나는 감당할 수 없을 때 말도 안 되는 글을 휘갈기거나, 말도 안 되는 낙서를 끄적여.”

-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야?

“무언가에 집중하는 동안은 괴로운 마음을 못 본 체할 수 있거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늘 그렇듯이 아팠던 순간마저 잊어버리게 돼. 그 때를 조용히 기다리는 거야.”

- 비겁한 놈. 그건 근본적인 해결이 아냐. 도망치는 거지.

“나약한 놈이라고 해 줘. 난 나름의 방법으로 견디는 거야.”

뜸부기는 말이 없어졌다.


사실 그는 나와 닮아있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 의문을 앗아간 동풍이 나쁜 게 아니라, 동풍 따위에 날아가게 의문을 방치했던 내 잘못이었다. 때문에 난 의문이 없어져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며 살아가게 되었고, 동풍의 장난질에 시제가 바뀌어 무엇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혼란에 빠져버렸다.


과거 소행성이었던 그는 아픔을 몰랐지만 지금은 인간이 되 버린 이상 필연적으로 외롭고 슬프고 상처입고 울 수밖에 없다. 반죽하는 법을 몰라 두려워하거나 우표에 얽힌 사연들을 까먹어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들을 반복하며 훗날 상실감에 허우적댈 거야.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좋은 순간들을 끄집어 회상하며 상처를 회복하거나, 어제 오늘 혹은 내일 일어날 좋은 일들을 기대하며 설렐 수도 있을 거다. 만약 뜸부기가 먼 훗날 성숙해질 수 있다면, 과거나 외부의 것들로부터 위안을 얻기보다는 자신에게서 행복을 찾아내는 법을 배워 어쩔 수 없이 입게 되는 상처들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도 있게 될 거다.

강이 되어 불어났던 눈물을 반죽이 모두 머금어 버렸다. 뜸부기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반죽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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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없는인생 2012.12.17 03:00
    용호작무님 과분한 칭찬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네요.. 좋은 하루 되세여 ^^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7 08:40
    우울한 얘기네요. 정도 차만 있지 실은 다들 저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profile
    Yes늙은조카Man 2012.12.17 09:09
    첫 부분을 읽다가 제가 써서 창도에 올렸건 삼단뛰기라는 시가 떠올랐네요.

    희로애락의 시초는 외부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감정으로서 결론 짓는 것은 나 스스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떨어지는 나뭇잎만 봐도 슬픈 존재 잖아요.

    장사익선생님의 찔레꽃은 라이브로 몇번 들은 적이 있어요. 자주 듣는 건 아니지만 가끔 둗고 싶을 때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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