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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겔리스 거리는 시장과 광장을 잇는 곡선형의 도로였다. 미리 사둔 도시지도를 통해 겔리스 거리의 구조를 파악한 크림슨은 광장 쪽에서 출발해 겔리스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걷다보면 듀아린 남작과 마주칠 수 있겠지.

  크림슨은 깔끔한 석조바닥을 밟고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벅저벅 듣기 좋은 발소리와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 장사를 끝마치고 점포를 정리하는 사람. 어깨동무를 하고 주점으로 향하는 사내들. 찬거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아낙네. 해지는 줄 모르고 뛰어노는 아이들. 그리고 축제준비에 한창인 사람들까지. 평화로운 정경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크림슨의 귓속으로 누군가의 외침이 흘러들어왔다.


  “영주님 납시오!”


  크림슨은 굳은 얼굴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길지 않은 행렬의 맨 앞에 선 중년 남자가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백마를 탄 금발의 청년이 푸른 눈을 빛내며 주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님이 책 밖으로 나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물론 그의 외모 때문에 거리의 모든 주민들이 행동을 멈추고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아닐 테지만. 아무래도 이 남자가 소문의 로드니 듀아린일 것이다.


  ‘확실하다.’


  마음속으로 단언하며 크림슨은 계속해서 로드니를 응시했다. 언제부턴가 저녁노을처럼 아니, 마치 핏방울처럼 붉게 물든 두 눈동자를 통해.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인 주민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던 로드니의 눈이 크림슨에게서 멈췄다. 로드니는 말을 세우고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반갑소. 여행자인 모양이구려. 난 이곳 알테르의 영주인 로드니 듀아린이라 하오만.”


  “크림슨 블레온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영주님. 알테르의 주민들 모두 한목소리로 영주님을 존경스러운 지도자라고 평하더군요.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주민들처럼 고개를 숙이며 어느새 예의 흑갈색 눈동자로 돌아온 크림슨이 대답했다. 그의 왼손이 나무칼집 위로 얹혀졌다. 호위는 10여 명. 예상 외로 적다. 중앙귀족들이 실제로 암살자를 보내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이 자들 또한 로드니의 정체를 알고, 따르고 있다던가. 만약 후자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어쨌거나 지금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그러나 크림슨은 이내 칼집에서 손을 뗐다.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검을 뽑는다면…….


  ‘주변 사람들까지 위험해진다.’


  결국 크림슨은 고심 끝에 검을 뽑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었다. 로드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려. 아무쪼록 이 알테르에서 편하게 지내다 가시구려. 그럼 우리도 이만 가지.”


  로드니의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짧은 행렬이었지만 로드니의 온화한 미소와 조용한 위엄은 그것을 충분히 메우고도 남았다.


  “수상한 자로군요. 저들도 중앙귀족들이 보낸 암살자일까요?”


  크림슨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지자, 행렬의 맨 앞에 서있던 중년남자가 로드니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로드니의 빛에 가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2m를 훌쩍 넘기는 키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거구의 사내였다. 로드니만 아니었다면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로드니는 여전히 길가의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남자에게 말했다.


  “글쎄. 하지만 상관없어. 그런 쓰레기들의 저열한 수작에 당할 만큼 나는 약하지 않아. 지난번처럼 모조리 죽여버리면 돼. 안 그런가, 카슨?”


  “그렇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주인님의 초인적인 능력을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로드니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들어 저녁놀의 부드러운 빛을 느꼈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깔보는 듯한 조소. 그 오만함과 그에 대응하는 강력한 힘에 전율을 느끼며 카슨은 말을 전했다.


  “그리고… 주문한 물건들은 오늘밤 저택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물건이란 말은 빼라, 카슨. 그들 또한 인간이다.”


  로드니는 조용히 눈을 떴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분노와 서글픔에 가득 차있었다. 카슨은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만월의 밤에는 흡혈의 충동을 주체할 수 없다. 할 수없이 노예를 밀매해서라도 갈증을 채워야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행동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들에게는 무릎 꿇고 사죄해야해. 헌데 그들을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짓이냐?”


  “죄, 죄송합니다, 남작님! 부디 용서를…….”


  로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아무튼 그들에게 사죄할 방법은 하루빨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뿐이다.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난 ‘그들’을 누르고, 나와 그들을 만든 ‘아버지’께 인정받아서…….”


  해가 거의 사라진 하늘위로 불길한 어둠이 소리 없이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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