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00 추천 수 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동백꽃, 올해도 예쁘게 폈죠?"


문득 아가씨가 말을 꺼냈다.


"무화과, 철쭉. 다른 나무도 많지만 저렇게 꽃이 핀 동백처럼 눈을 사로잡는 건 없는 거 같아요. 처음 여기 와서도, 저 꽃이 어찌나 예쁜지 한동안 넋을 잃고 본 적도 있답니다."


"저도요. 차를 몰고 오다가 마을 어귀에서, 동백꽃을 보면 그때야 안심이 되죠. 아, 집에 왔구나 하고요."


물론 나도 아가씨 말에 동의했다. 아가씨는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면 아가씨 집에선 동백 안 피겠어요? 더 북쪽이고."


"그래서 이 집에 오게 되나 봐요. 저런 꽃을 볼 수 없다는 게 섭섭해서."


"그런 거였어?"


갑자기 나타난 유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언제 왔어?"


"방금 방에서 나와서 두 사람 얘기를 들었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아가씨를 보고 '반려, 그냥 앉아 있어.'라고 하고는 자리에 앉은 아가씨 곁에 기대앉은 뒤, 유희는 마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꽃이 어디가 좋아서?"


"예쁘잖아."


그럴까, 마녀는 기분 나쁘게 중얼거렸다.


"난 차라리 무화과가 좋더라. 맛있잖아. 이번에 무화과 잼 만들었는데, 조금 얻어 갈래?"


"안 받아."


거절한 건, 물론 유희가 못마땅해서이기도 했지만, 본래 무화과를 잘 먹지 않아서였다. 어려서부터 입이 짧아서 음식을 이것저것 가렸다. 반면 엄마는 한 번에 많이 먹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가림 없이 먹는 편이었다. 엄마 입맛 안 닮았다란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닐 정도니까.


"윤주라면 좋다고 받았을 텐데."


하지만 같은 뜻으로 한 말이더라도 마녀가 한 말에는 어쩐지 더 기분이 나빴다. 울컥 해서 돌아보았더니, 슬쩍 시선을 피해 아가씨를 보고 말한다.


"생각난 김에, 지난번에 딴 새싹, 비빔밥 해서 먹어버릴까. 꽃전도 부치고."


"꽃잎은 전에 자기가 다 먹어놓고."


"진짜? 그럼 비빔밥만."


알았다면서 아가씨가 부엌으로 가고, 다시 마루에 나와 유희가 남았다. 나는 대들보에 기대어, 유희는 마룻바닥에 몸을 옆으로 뉘어 마당에 내리쬐는 햇볕을 바라보았다. 여기 도착했을 때보다 시간은 상당히 흘러, 처마지붕이 드리운 그늘이 마루를 넘어 마당까지 드리웠다.


가만히 있던 유희가 말했다.


"이렇게 누워 있으면서 말하면, 자기 말이 마루에 울려 들린다. 재밌지 않니?"


"유치하게."


어렸을 때 그렇게 해 본 기억이 나서,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걸 감추느라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등 뒤에서 유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실은 내가 어떻게 반응하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요즘 꽤 시끄러워졌지? 아이슬란드 신부니 뭐니 하는 것들 말이야."


아이슬란드 신부라는 건 죽음과 혼돈을 뿌리고 다닌다는 악령이라고들 얘기하지만, 공식적으론 전염병이나 정신병 따위를 세계 여기저기에 옮기는 숙주다. 귀신이나 유령 따위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현대 과학에게, 그것을 접촉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할 방법이 달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파괴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정체모를 이상한 능력을 주는 여자를 단지 그렇게만 설명하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아이슬란드 신부 신드롬, 이라고 뉴스나 신문에선 말하지만 그 웨딩드레스 차림 여자와 함께 나타나는 괴물들, 죽음을 피하고 여자를 만난 이들이 갑작스럽게 가지게 된 능력들을 한꺼번에 증후군이라고 하는 게 옳을까."


"그럼 뭐라고 할 건데?"


마녀에게 묻자, 그녀는 당연하잖아, 라며 답했다.


"저주야."


"신부의 저주? 공포영화 타이틀도 아니고."


"그게 신부인 것도 아니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 과학자들이 숙주라고 말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며 유희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분명 누군가 귀띔해 준 적 있다. 신부라는 그 여자, 실은 유희의 딸 같은 거라고.


"이 부근은 아직까진 조용하지만, 언제 그 저주가 여기까지 닥칠지 몰라.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네가?"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던 엄마의 다른 모습, 엄마를 '주인'으로 부르며 역시 평범함과 거리가 먼,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 이 모든 이상을 경험하면서도 줄곧 자신과는 상관없는 양 일상적이기 그지없는 생활을 계속해온 너라도, 이 이상 일상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는 소리일 수도 있다. 자신이 속한 세계로 나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선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보기 전엔 모르잖아.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삶을 앞으로도 그대로 살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은지."


당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아직까진 자신도 있었다. 마법이니 뭐니 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도 지금 사는 방식이 쉽게 붕괴되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유희는 다시 웃었다.


"역시 윤주 자식이라니까."


"남의 엄마 함부로 부르지 말아줄래?"


발끈해 말했더니, 갑자기 상대가 정색하며 말했다.


"말은 그래도, 실은 우리도, 이런 얘기도 싫지만은 않지?"


"무슨 소리야!"


"저 동백꽃하고 똑같아."


뜬금없는 말에 나는 뭐라 대꾸할지 망설였다. 유희는 뉘었던 몸을 일으켜 동백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동백꽃을 좋아하는 건, 색깔이나 모양 같은 것 때문이겠지? 그걸 보고 비로소 집에 왔다고 생각한단 데서 보면 추억도 조금 있는 거 같고.


하지만 사실 저건 그렇게 감상할 만한 꽃은 아닌걸. 벌도 많이 모이고, 꽃도 커서 꽃잎 떨어질 때는 쓸어내지 않으면 금방 지저분해지고. 물론 넌 그런 거 생각 안했겠지. 그러니까 저걸 좋아하는 걸 테고."


유희 말대로, 동백꽃이 피면 벌레도 많이 꼬이고 질 때는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다. 그런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도 옳은 말이다.


그것이 내가 유희를, 평범함과 거리가 먼 그들의 세계를 싫어하지 않는단 근거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좋아하는 것을 보고 싫어하는 것을 떠올릴 순 없어. 안 그래?"


그녀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당황하면서 적절한 반론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동백꽃 이야기를 하던 유희 말에 빠져든 내게, 그녀 말에 반대할 것을 금세 떠오를 리 없었다.


날은 무덥고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어쩐지 마당 한구석 동백꽃이 색이 바란 듯 보였다. 더 이상 그 꽃을 좋아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화려해서 부담스럽고, 보고 있으면 어쩐지 짜증이 났다.


"사람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떠올리고 싶어 하니까. 겉으론 싫어하는 척해도."


그 때 유희가 내 속을 전부 읽은 듯 덧붙여 말하자, 나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그 일이 있기 전 내 책장엔 우연히 산 동백꽃 사진 액자가 올라 있었다. 엄마 옛날 집에 다녀와 유희와 그런 얘기를 나눈 이후로도, 그 액자는 한 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것을 보면 여전히 엄마와, 그 한옥 집과, 거기 사는 두 여자가 어쩔 수 없이 떠오르고 만다.


 


=====================================================================================================================


...소리소문없이 완결짓습니다.


쓰는 입장에선 재미없는 글도 필요하고 재미있는 글도 필요하지만, 읽는 입장에선 역시 아니겠죠?


 


암튼, 시험 끝나고 새로이 글 쓰게 되면 다시 연재글로 뵙겠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4220 [꿈꾸는 마녀]동백꽃 피는 집 misfect 2009.06.08 428 2
4219 [꿈꾸는 마녀]동백꽃 피는 집 misfect 2009.06.08 375 1
4218 샤이니스 4 file 샤이, 2009.06.12 449 2
» [꿈꾸는 마녀]동백꽃 피는 집 misfect 2009.06.12 500 2
4216 샤이니스 file 샤이, 2009.06.12 467 1
4215 샤이니스 file 샤이, 2009.06.12 523 1
4214 Undertopia 2 Salvador 2009.06.15 550 2
4213 A creative duty 3 팹시사이다 2009.06.15 570 2
4212 복수찬미가#4 2 허무공 2009.06.17 571 2
4211 색채연가 2 클레어^^ 2009.06.17 554 1
4210 [FateX네기마] 도서관 전투록 미네바 2009.06.17 723 1
4209 샤이니스 2 file 샤이, 2009.06.19 551 2
4208 복수찬미가#5 허무공 2009.06.19 603 1
4207 [꿈꾸는 마녀]마녀의 꿈 misfect 2009.06.19 538 0
4206 복수찬미가 허무공 2009.06.19 550 0
4205 나이트 매지션 팹시사이다 2009.06.19 487 0
4204 Heroes of Bargonia 4 후냥 2009.06.23 565 1
4203 Heroes of Bargonia 4 후냥 2009.06.25 508 2
4202 진멸전쟁 ~시간의 왕~ 盡滅관찰자 2009.06.25 643 0
4201 번역 기계 4 오메가 2009.06.26 628 2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