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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영원을 꿈꾸곤 한다. 그런 소박한 마음으로 기대를 품고는 한다. 그래, 인간은 꿈과 함께 살아간다. 그렇다면 꿈이 없는 인간은 어떻게 될까. 그 긴 인생을 난 대체 뭘 위해 살아온 것일까?

거리는 노래로 가득 차 있었다. 본래라면 조용할 저녁이었지만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하얗게 쌓이자, 축제라도 난 듯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유독 조용한 집이 하나 있다.

그 집은 낡았다. 전등은 수명이 다해 깜빡였고 문틈 사이로는 바람이 들어올 만큼 허름했다. 그 곳에서 작은 소녀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커다란 케이크 앞에 앉아 있었다. 창문 밖에서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이 날을 즐기고 있건만 그녀는 혼자였다. 바늘이 부러진 자명종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지만 외로움은 더해간다. 소녀는 한 숨을 쉬며 장난감 전화기를 들었다. 카세트 테이프를 넣어서 음성을 녹음할 수 있는 이 전화기는 본래 늦게 들어오던 아버지에게 메세지를 남기는 용도로 사용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그저 이 텅 빈 방 안에서 그녀를 달래줄 유일한 친구이다. 소녀는 쓸쓸한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녹음을 하였다.

"여보세요, 아빠? 잘 지내세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오늘도 엄마는 늦게 들어온대요. 케이크를 사주시기는 했지만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싫네요. 아빠는 학교를 다니면 즐거울 거라고 했지만 학교만큼 짜증나는 곳도 없을 거에요. 이제는 밖에 나가기도 싫어요. 혹시나 가능하다면……."

그녀는 전화기를 고쳐 들며 말했다.

"올 해는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것을 끝으로 소녀는 수화기를 내렸다. 장난감 톱니가 삐그덕 거리며 녹음을 마치자 다시 정적이 집안을 감싼다. 이제 또 울다 잠들겠지. 그녀에게 있어 일상이란 감옥에 불과하다.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인 장난감 같은 일생. 하지만 오늘 밤은 조금 달랐다. 누가 그랬던가? 변화란 소리 없이 찾아온다고.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난데없이 하늘이 번쩍이며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폭탄이라도 터진 건가?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왜인이 다른 사람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마치 억지로 잊어버린 듯 오직 그녀만이 이 사건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후, 소녀는 하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우오오옷!"

그는 추락하고 있었다. 네모난 캡슐에 매달린 채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주위에는 낙하산도 비행기도 아무것도 없다. 믿을 거라고는 입고 있는 낡은 기계 갑옷 하나. 한 걸음 그는 몸을 움직여 캡슐 위에 섰다. 연기는 이제 은은한 보랏빛을 내고 있었다. 그 작은 반딧불이 모여 하나의 형체가 태어난다. 보랏빛 눈에 보랏빛 이빨, 그리고 보랏빛 칼날. 흉측한 몰골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쌈과 동시, 충격이 그를 덮쳤다.

"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뚱이가 캡슐 밖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뿅망치에 얻어 맞은 듯이 머리가 띵하게 아찔하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지상까지 떨어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여전히 공중에 떠있는 자기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떨어지고 있었다. 다만 투명한 발판에 기댄 것처럼 몸이 캡슐에서 조금 떨어져있을 뿐이었다. 아하, 그럼 그렇지. 싱글벙글 남자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역장! 맞다. 깜빡 잊어먹을 뻔 했어."

철그덕. 연기는 이제 사슬과 날붙이를 이어서 훨씬 더 흉측한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메기스'라고 불리는 이 생명체는 순식간에 어떤 형체로든 변할 수 있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강도는 때로는 물처럼 부드럽지만 원하기만 하면 강철도 자를 수 있고, 더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역장(force-field)을 펼치면 돌풍 속에서도 연기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보통 상대라면 이렇게 녀석들과 대놓고 맞붙었을 때 무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 보통이라면 말이다.

차캉! 남자는 갑옷의 양팔에서 총구를 꺼냈다. 하얀 탄환이 한발한발 메기스를 향해 쏘아진다. 설령 빌딩 한 채를 뚫어버릴 철갑탄이 있다 해도 놈들에게는 무의미하다. 강도로도 당연 뚫지 못할뿐더러 혹여 뚫린다 하더라도 메기스의 몸은 자동적으로 연기처럼 흩어졌다 다시 붙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기는 아예 종류 자체가 달랐다. 빛처럼 밝은 탄환이 놈들의 몸에 닿자마자 하얗게 가루마냥 분해시켰다. 흡사 한여름의 폭죽이 터진 것처럼 메기스의 몸은 하나하나 반짝거리며 폭발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몸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영영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마지막 하나만이 간신히 상반신만 유지한 채 그와 캡슐 위에서 마주쳤다. 이빨을 빠드득 갈며 메기스가 분노에 섞인 목소리로 외친다.

"너는 여기서 환영 받지 못한다, 이방인아."

"아 그래? 너희들이 저지른 일도 별로 축하 받을 것 같지는 않은데?"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몇 번이고 싸울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녀석이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그 속에서 떨어진 톱니 조각 하나는 곧 돌다가 멈췄고, 멈추자 연기가 되었고, 연기가 되자 가루로 변해 없어졌다. 총구를 다시 집어넣으며 그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다음부터는 이럴 거면 전화를 걸어. 인형이랑 말하니까 나 혼자 쑥스럽잖아."

덜컹! 말을 마치자 캡슐이 흔들거린다. 아차 떨어지는 도중이었지. 남자는 계기판을 찾아서 몸을 숙였다. 그렇게 몸을 숙이자 갑자기 다리가 붕 떠오른다. 덩달아 몸 전체가 진짜로 '떨어지는' 마냥 캡슐 위에서 나풀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리자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해답이 보였다. 캡슐 사이드에 어느 샌가 턱하니 꽂혀있는 보라색 칼날 하나. 그것이 픽하니 그의 분노를 터뜨렸다.

"야이! 남은 그냥 보내줬건만!!"

애초에 그럼 싸움을 벌이지 말 것이지. 자기자신한테 불평하고 딴지걸며 그는 캡슐과 함께 떨어졌다. 이제는 아까와 달리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게 캡슐도 덩달아 정신을 놓은 것 같다. 최대한 앞 쪽으로 기어가서는 뱃머리를 돌리듯 캡슐을 운전해본다. 뭐 물론 될 리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신 다른 것은 찾을 수 있었다.

캡슐이 향하는 곳, 그 일직선 상에 있는 낡은 집 하나, 그 곳 창가에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소녀. 마침내 그 또한 그녀를 발견했다. 멍청하게 자기를 바라보며 곧 다가올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그녀를 말이다!

"이 바보야! 도망쳐!"

팔까지 휘저으며 모션을 취하자 그제서야 소녀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있는 힘껏 팔로 캡슐을 내려친다. 한번 두번 세번 계속 내려쳐서 방향을 튼다. 움직일 때마다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는 게 아무래도 갑옷을 너무 혹사시킨 모양이다. 배터리가 닳아서 꺼지는 전등마냥 갑옷 또한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남자는 힘껏 캡슐을 내리쳤다.

"우오오아아악악!!"

하얀색 박스는 휘청거리다 마침내 원래 착지점보다 앞의 땅바닥에 처박혔고 그 또한 나가 떨어져 눈 속에 머리를 푹 박았다. 잠시 후, 허겁지겁 장갑과 모자를 끼고 소녀가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야말로 난장판. 울타리는 캠프파이어, 마당은 화산 폭발. 그 곳을 장식하는 하얀 박스와 하얀 갑옷. 다리를 바둥거리며 남자가 눈 속에서 나와 털썩 주저 앉았다. 아장아장 소녀도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하얀 헬멧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푸른 빛 기계 눈동자. 다 뜯어진 머플러를 두른 짧은 하얀머리 꼬마. 그렇게 둘은 서로를 한참 마주 본다.

"여어!"

그리고 남자가 먼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 여어!"

그러자 소녀도 손을 들어 따라 했다. 이에 냉큼 갑옷이 일어서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바보라고 소리쳐서 미안해! 별 다른 뜻은 없었어.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냥 언제든 바~보~라고 하거든. 아, 하지만 욕이 될 수도 있으니 자주 쓰는 것은 안 좋아! 이번 건은 그냥 장난친 거라고 생각해 줘, 레이디(lady)."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대답은 커녕 듣고 있는 것도 벅차다. 손가락을 튕기며 멋지게 레이디라고 말해 놓고서는 뭔가를 놓쳤는지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제서야 박스에서 타오른 불길에 눈알이 뒤집어진다.

"으악, 내 캡슐!"

가까이서 보니 '관'처럼 생긴 캡슐이 불까지 붙으니 가관이다. 정확히는 보통 관보다 높이며 너비며 두 배 이상이었지만 일단 불타고 나니 크기 따윈 상관없이 재앙이었다. 남자는 다급히 이것저것 눌렀지만 불길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듯 소녀가 다가와 물었다.

"뭐가 안 좋나요?"

"아, 별거 아냐. 아까 그 녀석이 제어판을 먹통으로 만들어놔서 살짝 폭발할 뿐이야."

"살짝요?"

"응. 기껏해야…… 지구가 없어지는 정도."

"네에?!"

버튼을 마구 눌러보지만 불길은 더 요란해지고 이젠 주변 물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남자는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이며 머리를 두들겼다. 소녀도 덩달아 다급해져서 외쳤다.

"저기, 무슨 방법은 없나요?"

"내부 코어를 꺼낸다면 시스템은 정지시킬 수 있는데 잠금장치가 풀리질 않아. 아까 그 녀석 에너지가 우연찮게 흘러 들어가서 강제로 잠겼어. 으아아! 그렇다고 때려부수려 하면 방어기능이 작동할 텐데!"

"내부 뭐요?"

"별 모양에 삼각형이 섞인 건데 지금 과부하를 멈추지 않으면…… 어, 늦었나? 터지나?! 이러면 안되는데!"

소용돌이처럼 사방이 반짝이며 회전한다. 다짜고짜 손바닥에 폭탄을 쥐어준 기분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진짜 폭탄이다. 남자는 정신을 잡지 못하며 갑옷에서 아무 장비나 계속 꺼냈지만 전부 먹히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소녀가 슬며시 다가와 버튼을 하나 꾹 누른다. 물론 그 버튼은 이미 그가 수 차례나 눌렀던 버튼이다. 하지만 주인 만난 강아지마냥 기계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명령에 응했다.

"자요."

손쉽게 코어를 꺼내주며 소녀가 말했다. 들쑥날쑥 커졌던 그의 기계눈동자가 평정을 되찾는다. 아니, 사실 놀라움에 그만 몸이 굳은 것이다.

"너 어떻게……."

천진난만하게 칭찬을 기다리듯 소녀는 에헤헤 웃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조그맣게 보라색 불꽃이 반짝인다. 남자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넌…… 너무 오래 봤구나."

눈이 오는 날, 조금 이른 겨울. 그렇게 둘은 만났다. 그리고 아침이 밝는다.

"……."

조금 전과 다르게 까만 긴 머리칼의 10대 소녀가 침대에서 일어난다. 반쯤 감긴 눈으로 그녀는 창 밖을 바라봤다. 낡은 울타리와 더러운 마당이 어딘가 비슷하다. 한 쪽 가지가 뻥 뚫린 나무도 뭔가를 연상시키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보다, 이제 준비해야지. 소녀는 침대에서 나와 움직였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입고 아침을 2인분 놓는다. 그리고 슬며시 안방 문을 연다.

퀘퀘한 술과 담배 냄새가 엄습하나 이미 익숙하다. 그 쓰레기장 속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자고 있다. '아침 준비했어요'라고 말해도 당연히 대답은 없다. 괜찮다. 이 또한 익숙하다. 소녀는 문을 닫으며 자기에게 속삭였다.

그럼 다시 오늘의 시작이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하고 꿈이 없는 나날, 하지만 어쩐지 조금 다를 오늘의 아침이다.

* * *

햇살이 따가운 만큼 지겨운 날씨도 없다. 가뜩이나 따분한 교실에서 날씨까지 이러면 무엇을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평소 같았으면 인사 정도는 했을 텐데 오늘은 손짓조차 귀찮았다.

"오늘은 뭐가 그리 고민이신가?"

하지만 이 친구는 그런 것은 상관없는 모양이다. 책상 맞은편에서 긴 머리를 내려뜨리며 카노가 수나에게 인사했다. 수나도 가볍게 맞장구 쳤다.

"아무것도. 그냥 좀 우울해서 그래."

"그래?"

산더미 같이 쌓인 과자봉지에서 하나를 더 꺼내먹는 모습이 어디가 우울한 걸까. 카노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거지만.

"그보다 저거 봤어?"

카노는 손가락으로 복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들 몇 명이 휴대폰으로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영화마냥 영상 속은 아수라장이다. 잦아지는 테러의 강도가 갈 수록 심해져서 결국 도시 하나가 봉쇄되었다는 뉴스였다.

"어제 들어보니 벌써 저걸로 8번째래. 이미 전쟁급이라는 얘기야. 가장 무서운 것은 공통점이 전혀 없대. 묻지마 범죄 같이 그냥 아무렇게나 일어난다는 거야."

"헤에, 과자나 사재기해둘까?"

"그건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빵빵한 가방을 두들기며 카노가 웃었다. 이윽고 수업 종이 울렸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선생님을 맞이한다. 테러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언가 바뀌기라도 할까? 설령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좋은 점은 없다. 수나는 이미 학교든 집이든 쉴 곳 따윈 없으니까.

톡. 구겨진 휴지조각 하나가 머리를 두들긴다. 수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몇몇 애들이 낄낄거리며 대놓고 다음 총알을 만들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보다 못나 보이니까. 선생도 다른 아이들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한다. 심지어 카노마저도 황급히 눈을 돌렸다. 별로 놀랍지 않다. 이것도 익숙하니까.

수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러라도 일어난 다면 조금은 달라질까? 모두가 힘들어진다면 그녀도 더는 눈에 띄지 않을까? 남들도 그제서야 이해해 주지 않을까? 모든 것은 긍정적인 착각과 희망이다. 하지만 그래도 꿈꾸고 있다. 언젠가 잘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매일 같이 바라고 또 빌고 있다. 그 날은 언제쯤 올까?

"……?"

문득 창가에서 이상한 것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긴 머리의 여성이 난데없이 그녀 앞에 나타나 웃음짓는다. 그리고 창문 하나마다 서린 김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글씨를 적었다.

시. 작. 된. 다. 그 네 글자를 적은 후 그녀는 언제 있었냐는 듯 다시 사라졌다. 글씨도 곧 사라져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되었다. 수나는 멍하니 그대로 창문을 쳐다보았다.

"수나. 지금 어딜 보고 있니?"

그 모습을 선생님이 날카롭게 지적한다. 네? 수나는 다시 얼굴을 돌리며 반사적으로 말했다.

"'네'가 아니잖아. 수업 중에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어벙벙한 표정 때문인지 더욱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가 너는 맨날 얼빵하게 행동하니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 그 네 글자가 적혔던 위치. 그 곳에서부터 뭔가가 오고 있다. 햇빛이 쨍쨍한대도 눈에 띄게 선명하다. 수십 개의 보라색 것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것들이, 놈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애들에게 얕보이……!"

그것을 끝으로 선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며 선생의 몸뚱이가 날아간 탓이다. 이어서 떨어진 다른 운석에 옆 교실이 박살났다. 학교를 포함해서 도시 전체에 투하된 보랏빛 운석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거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조금 전 티비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 수나의 눈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당황함은 만들어선 안 될 틈을 만든다.

"수나야!"

천장이 갈라지며 떨어진 것에 놀라 카노가 그녀를 밀쳐냈다. 찰나의 틈도 없이 학교는 송두리째 무너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 속에서 수나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을 구하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친구가 돌더미에 파묻히는 광경을 말이다.

"카노!"

허무한 외침이 쓸모없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바위는 매정하게 그 위를 연거푸 덮으며 희망을 묵살시켰다. 수나는 덜덜 떨며 손을 돌무더기 쪽으로 향했다. 그 때 누군가 비키라며 그녀의 머리를 치고 간다. 그러자 정신이 돌아온다. 기실 제대로 돈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그녀도 어기적 다른 이를 따라 나선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무리에 섞여 움직였다. 그러다 갑자기 무리가 멈춘다.

잠시 후, 한 쪽에서 들린 비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무언가 있다. 그것은 장애물은 돌이며 사람이며 보이는 족족 먹어버리고 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끈적끈적한 보라색 액체덩어리. 꿈에서 봤던 그것과 비슷한 종류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그녀에게는 하얀 캡슐도 갑옷 남자도, 그리고 유일했던 친구도 이제는 없다는 것이었다.

* * *

사람이란 놀랄 만큼 적응력이 뛰어나다. 처음에는 신기했던 것도 자꾸 보다보면 어느 샌가 자기도 모르게 질려버린다. 이는 미각, 후각, 청각 등등 많은 것에 작용한다. 그러니 상황이란 것도 같다. 학교든 군대든 직장이든 몇 번 경험하다 보면 언제부터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한 부분이 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가끔 그런 것이 껄끄러운 결과를 나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직 멀었냐!"

그런 의미에서 이 꼬마 아가씨의 적응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남자는 갑옷 여기저기에서 총구를 꺼내 메기스와 쉴 틈 없이 겨루고 있는 반면, 그녀는 느긋이 캡슐 한쪽에서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음, 이것도 아니고 또 이것도 아니네."

"작고 동그란데 길고 빨간 버튼이 달린 거라니까!"

"아 찾았다!"

그 말에 어서 내놓으라며 남자가 갑옷을 걸친 손으로 도둑처럼 그것을 뺏어 든다. 음료수 캔처럼 생긴 그 통의 이름은 경계차단 역장탄. 물론 이 쓸데없는 네이밍 센스는 그가 직접 붙인 탓이다. 이름과 겉모습은 영 초라하지만 일단 작동시키면 일정 수치 이상의 반경 10km내 영역 에너지는 예외 없이 날려버릴 수 있다.

"좋았어!"

파칭! 역장탄이 작동하자 금새 웃음을 되찾는 남자. 곧이어 터진 에너지 장막은 주변 메기스를 깨끗하게 분해시키고는 하얗게 터지며 사라졌다. 소녀는 그 불꽃놀이에 박수치며 환성을 질렀다.

"예에스! 이제 끝난 거에요?"

"그럴 리가 있나! 애당초 너가 문제라고, 너가."

그는 퉁명스럽게 얘기하고는 캡슐 옆에 털썩 앉았다. 힘든 내색을 갑옷으로도 감출 수가 없는 게 팍팍 티가 나건만 이 꼬마 아가씨는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지 옆에 와서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보랏빛 불꽃을 간직한 채.

"일단 이대로 두면 넌 평생 이놈들에게 쫓겨 다닐 테니 그 점부터 어떻게 해보자."

"고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리고 난 좀 비싸다."

"흐엑! 돈 받는 거에요?"

"돈은 필요 없어! 그딴 것보다 난 좀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을 원해. 딱 절반만 가져갈 꺼야."

남자는 조금 전에 빼놓았던 별조각 모양의 코어를 반으로 나누어서는 절반은 캡슐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소녀에게 넘겨주었다.

"우와, 주는 거에요?"

"빌려주는 거다. 과열이 심해서 빼놓을 겸. 일단 세팅을 바꿔 놓았으니 집 안에만 놔두어도 별 문제는 없을 꺼야."

"집 밖으로는 나가면 안돼요?"

"아니 돼. 도시 밖으로만 안 나가면 아마 괜찮을 걸?"

그럼 굳이 집안에 두지 않아도 되잖아.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남자와는 조금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편이 나아 보이니까.

"그리고 네 몸을 고칠 방법이라면 역시 이게 최고지."

캡슐 안을 뒤적거리며 남자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소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두 손 모아 감추고 있던 것을 펼치자 하얀 빛덩이가 모습을 보였다. 마치 눈처럼 하얀 그것은 남자의 손을 떠나자 천천히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건 뭐에요?"

"'인텍트'란 거야. 좀 추상적인 것인데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개념 같은 것이지."

"추상? 개념?"

"음 그러니까 형체가 없는 뭔가 법칙이나 원리 같은 거야. 중력이나 온도 같은 거 생각하면 이해가 좀 되겠어?"

"아니요."

"으음, 그냥 움직이는 생각이라고 생각해둬."

"생각치고는 예쁜데요?"

"그건 네 눈에만 그렇지. 나한테는 그냥 아무것도 안보여."

"네? 왜요?"

"나한테는 이게 별거 아니니까. 딱히 신기하지도 않으니 하찮게 보이는 거지. 너야 뭔가 예쁜 것을 기대해서 그런 것 일테고."

사르륵 부드럽게 움직이며 인텍트가 그녀에게 다가간다. 하얀 머리칼과 하얀 인텍트. 천천히 다시 인텍트는 그녀의 곁을 한 바퀴 돌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앗, 없어졌어요."

"없어진 게 아니라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거야, 레이디. 레이디는 그 보라색 때문에 죽고 싶지 않지?"

"네."

"그럼 그렇게 빌면 돼. 그럼 인텍트가 자연스럽게 그 바램을 이루어 줄 꺼야."

"그럼 전 영원히 살 수도 있나요?"

"그건 아니야. 이건 은근히 쓸모가 없어서 마치 도박과 같거든."

남자는 수북이 쌓인 눈더미를 잡고는 허공에 뿌렸다.

"이 많은 눈 속에서 하나를 콕 집어서 찾아내는 거랑 비슷한 거야.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지. 하지만 네 안에 들어간 그것도 원래는 그래서는 안될 것이야. 그러니 그 소원은 틀림없이 이루어 줄 꺼야. 하지만 네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은 막을 수 없어. 남들과 똑같이 늙고 아프고 조심하지 않으면 차에 치일 수도 있지."

"의외로 쓸모가 없네요."

소녀는 실망하며 눈조각을 하나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남자는 바닥에서 다시 눈을 긁어모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계속 네 곁에 머물며 지켜보고 있을 꺼야. 그러니 혹시 알아? 자꾸 하다 보면 언젠가 한두 개쯤은 도와줄지도 몰라. 이건 네가 아무것도 안하고 바라기만 하면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안 할 테지만 움직이며 행동하면 똑같이 움직이거든. 그야말로 작고 덧없는 희망이지만 분명히 있지. 그리고 나도 있을테고."

"아저씨도요?"

그 말에 소녀가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그럼. 확실히 인텍트가 치료할 때까지는 있어야지. 그러려고 받는 대가니까. 자, 그러면 내 보수를 슬슬 받아보실까?"

슥슥 손을 비비며 능청스럽게 걸어오는 모습이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소녀는 집안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는 일단 가진 것을 하나둘 꺼내 보였다.

"제 저금통이요. 50트룬은 될 거에요." (돈의 단위. 1트룬당 약 1,000원)

"돈은 필요 없어."

그는 깜빡이는 전등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대답했다. 그러자 전등의 빛이 전처럼 환하게 돌아오더니 새것처럼 변했다.

"작년에 선물로 받은 스웨터요. 아직 한 번 밖에 못 입어서 새거나 마찬가지에요."

"옷은 신경 안 써. 날 보라고 이 갑옷이면 다 해결되지."

짜증. 소녀는 순간 처음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는 깨진 창문을 고치더니 이제는 유리에 서린 김에 낙서를 하며 낄낄 웃고 있다. 정말 소중하고 귀한 것을 가져와라. 그런 게 이 집안에 있기나 할까. 망설이다 그녀는 결국 그 장난감 전화기를 가져왔다.

"아빠가 멀리 가기 전에 유일히 준 선물이에요. 녹음도 되고요."

"녹음?"

"네. 전에는 가끔씩 오셨을 때 제가 자고 있어서 이걸로 대화했거든요. 지금은 잘 오지 않아요."

"야, 그럼 안되지. 다른 거."

"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요?"

 

"글쎄, 아까부터 찾고는 있는데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어."

 

냉장고 쪽을 기웃거리다 그는 찬장 안에 있던 쿠키를 집으며 말했다.

 

"무언가 간단하고 명백하고 쉽고 빠른 것이면 될 텐데 뭐가 있으려나."

 

헬멧을 쓴 것을 잊었는지 그대로 입에다 쿠키를 쑤셔 박는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설탕 봉지를 집더니 그걸 얼굴에 통째로 부었다.

 

"아무거나! 그래, 아무거나 좋은 것이면 얼마나 좋든 다 좋을텐데!"

 

이번에는 밀가루를 그대로 거꾸로 머리에 붓자 펑하니 가루가 소리 내며 흩날렸다. 그 바람에 주춤거리며 쓰러지다 탁자 위에 놓여진 케이크를 찾아낸다.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둥그렇고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지지 않은 평범한 케이크다.

 

"아하!"

 

신이 난 듯 그가 다시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뭘 받아야 할지 알 것 같아."

 

그리고서 어떻게 됐는지는 사실 별로 말할 거리가 없다. 망가졌던 문짝을 손가락을 튕겨 고치며 그는 코트와 모자를 쓰고는 소녀와 쇼핑을 나섰다. 아무것도 없는 케이크에 장식할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정말 뭐든지 사도 되나요?"

 

"물론이지! 단, 과일은 안돼. 난 과일 케이크는 싫어."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고는 그는 소녀와 함께 초콜릿, 쿠키 등등 고를 수 있는 것은 죄다 산더미처럼 고른다. 그런데 카드 없이 돈을 빼낸 게 범죄 아니냐는 말에 남자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는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얘네는 나한테 빚을 여러 번 졌거든. 100만까지는 마음대로 가져간다고 말해놨어."


그렇게 손에 한가득 먹을 것을 쥐고 둘은 돌아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는 화폐의 가치도 시장의 위치도 아무것도 몰라서 그녀를 데리고 간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11살인 것도 몰라서 처음에는 이상한 옷 입은 놈이 유괴하는 거 아니냐며 오해도 샀다. 물론 잡히기 전에 도망쳐서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먹을려면 그 헬멧은 벗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케이크 위에 잔뜩 장식을 끝낸 후 식탁에 앉은 남자. 그제서야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손바닥을 친다.

"그러게. 깜빡 잊고 있었군."

양 손을 들어 헬멧을 잡는다. 푸쉬쉭. 연기를 뿜으며 갑옷이 벗겨졌다. 헬멧뿐만 아니라 갑옷 전체가 조각조각 분해되더니 이내 사라진다. 이 날은 아주 오랜만에 그녀가 누군가와 눈을 맞대며 먹는 저녁이었다. 마지막으로 벗겨진 헬멧 속의 얼굴을 보며 소녀는 살며시 웃었다.

* * *

앰뷸런스는 시끄럽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고 있었다. 사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사이렌을 켜봤자 누가 신경 쓸 리도 없다. 도시는 이미 운석과 괴물로 넘치고 있으니까. 근데 정작 당사자가 오히려 소리를 못 참나 보다. 뒷좌석에서 중년의 남성이 운전석을 향해 외쳤다.

"이제 그만 끄게, 이빗양. 굳이 켜봤자 비켜줄 사람도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박사님."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여성은 사이렌을 껏다. 짧은 금발에 날카로운 눈매가 어떻게 보면 사이렌보다 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에 비하면 뒤쪽의 박사는 삐죽한 머리가 반은 벗겨진 게 평소에도 소음과 더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듯한 외모였다.

박사라는 호칭에 걸맞게 앰뷸런스 뒷좌석은 의료기구와 잡다한 전자장비가 벽을 꽉 메우고 있다. 그 중 한 스크린에서 갑자기 반짝이는 램프에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찾은 것 같군."

"그렇습니다. 메기스도 이미 포착되었습니다."

차를 세우며 이빗은 밖으로 나왔다. 학교 근처에 내린 그녀의 앞에 걸쭉한 액체덩어리들이 하나둘 다가온다. 그 덩어리에는 자동차, 사람, 개 뭐하나 빠짐없이 잡다한 것들이 온통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살아있으면서 죽은 듯하고 죽은 듯하면서 살아있어 보이는 점이 더욱 끔찍했다.

"목표 확인. 전투를 시작합니다."

철그덕. 이빗의 기계팔이 열렸다 닫히며 총으로 변했다. 거기서 쏟아지는 탄환은 하얗게 메기스를 가루로 터뜨리기 시작한다. 접촉하는 것은 뭐든지 먹어버리고 재구성하는 녀석에게 대항할 유일한 무기. 일전에 한 남자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탄환이다. 다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남자처럼 없애기 보다는 몰아내는 데에 중점을 둔 사격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들의 목표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 곳에 있을 무언가 혹은 누군가와 만나는 것이다.

키이잉. 앰뷸런스에서 전자음이 한 번 울리자 곧 하얀 스파크가 주변을 감싸며 쏘아졌다. 그러자 지속적인 탄환에도 쓰러지지 않던 메기스가 단 번에 가루가 돼버린다.

"이빗양, 배리어를 작동시켰지만 알다시피 유지시간은 10분이네. 빨리 들어가서 확인해보게."

무전을 통해 박사의 말을 듣고 이빗이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는 배리어 거리가 아슬아슬하니 조심해야 한다. 시각센서를 열심히 움직이며 이빗은 조용히 움직였다. 마침내 목표까지의 거리는 단 5m. 바로 벽 너머다. 하지만 센서에 포착되는 물체는 둘. 이빗이 그 둘을 목격했을 때 그녀는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한껏 거대해진 메기스 앞에서 수나는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와 녀석의 사이를 빛덩이 하나가 가로 막았다. 하얀 눈덩이처럼 밝은 그것은 메기스를 천천히 몰아냈고 이윽고 녀석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자 그 안에 사로잡힌 것들이 풀려 나왔다. 의자, 책상, 돌은 물론 사람까지 먹히기 전에 온전했던 그대로 말이다. 이빗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였다. 빛덩이는 이제 따스히 수나를 감싼다.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고 흥분되었던 가슴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나지막이 장소 한 곳을 보여주었다. 한 때 남자와 소녀가 만났던 그 곳. 둘이 케이크를 먹던 그 곳. 하나를 나눠서 절반을 주고 절반을 숨긴 그 곳. 수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인……텍트?"

잠시 후 빛덩이는 사라졌다. 그녀에게 수수께끼를 하나 남기고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빗은 무전으로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박사님 이건……."

"아무래도 이게 우리를 보낸 이유인 것 같군."

그는 앰뷸런스 안에서 이빗을 통해 학교 안을 보며 대답했다. 앰뷸런스 안에는 전자장비 외에 한가지 더 특별한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하얀 상자다. 작고 길쭉한 관과 같은 네모 박스다. 불에 그을려지고 한쪽 부분은 먼가에 맞은 구부러져있는 캡슐과 수나를 바라보며 박사는 입을 다물었다.

* * *

"그런데 아저씨는 이름이 뭐야?"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토끼 수가 놓인 잠옷을 입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이름이 뭔데?"

"린스테 딘테인. 린스테라고 부르면 돼."

"흐음, 독특한 이름이군."

"아저씨는?"

"나씽(Nothing). 아무 것도 아니야."

바닥에 이불을 깔아주며 그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정말이야. 딱히 아무 것도 아닌걸. 그러니 아무렇게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단, 욕은 안돼."

"아예 이름이 없어?"

"오랜 세월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

불을 끄고 린스테를 눕힌다. 그리고 막 나가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다시 몸을 돌렸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거랬어. 누가 예전에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말랬는데 또 해버렸네."

어둠 속에서 그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차분히 또박또박.

"나는 라펜드. 분명, 날 라펜드라고 했었어."

"라펜드?"

"응. 하지만 그건 이제 지겨워. 아니, 쓰면 안돼. 그러니 다른 이름을 쓸래."

"다른 이름?"

"그래. 뭐가 좋을까?"

린스테는 이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장난감 전화기를 보았다. 레이 딘테인. 전화기에 적어놓은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린스테는 남자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레이펀드. 레이펀드 어때?"

"좋아. 이제부터는 레이펀드군."

그는 다가와 린스테의 곁에 앉았다.

"그러면 잘 자, 린스테."

"응. 잘 자, 레이펀드."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린스테는 다시 이불에서 나와 창문 밖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을 마당에 캡슐과 남자가 있다. 엄마가 오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며 그는 바쁘게 망가진 부분을 고치고 정리한다. 창문 밖에는 이제 누군가가 있다. 전화기와는 달리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
  • ?
    비밀아이 2016.06.13 20:37
    와.. 대단하시네요!
    마치 공포판타지소설을 읽어본 느낌입니다^^ 헤헤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을 쓰실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다음에는 마음에담아낼 수 있는 해피 엔딩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렇게 쓴 것이라면.. 흠.. 뭐라해야하나..
    그.. 마치 어둡다고 느끼게 되네요.. 섭섭합니다..ㅇㅅㅇ;;
  • ?
    비밀아이 2016.06.13 20:39
    "소망을 가진다면 이룰 수있다
    깨닷는 것이다 자유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 profile
    비욘더 2016.06.13 22:47
    재밌게 읽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아앙 너무 기쁘네요!
    일단 해피엔딩을 목표로 다음편도 쓰고 있습니다. 저도 해피엔딩 많이 좋아해서요! @ㅁ@)!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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