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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무언가가 잔디를 짓이기며 눈앞에 떨어졌다. 그것은 요즘엔 동굴의 도토리보듯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발이었다.
헌데, 이제껏 보아온 것들과는 생김새가 유별났다. 그 발은 동물들의 가죽을 이용하여 발을 싸맨다는 인간들의 습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 대신으로 보이는 것은, 수북한 흰색 갈기가 자리잡혀 새벽바람에 문질러지는 모습이었다.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인간 따위의 발이 마치 늑대처럼 갈기에 덮여 위용을 풍기는 모습! 이를 보게 된다면, 이 광활한 숲의 어느 누구든 감탄을 무수한 도토리의 수만큼 터뜨릴 것이다! 이건 혁명이야, 혁명.
하고 생각하던 중, 나무의 뒷목과 같은 으슥한 그림자가 눈앞에 그늘을 드리웠다. 아차, 실수했다. 너무나 빼어난 위용에 그만 몸을 숨기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내 버리지 않았는가, 어서 도망치자!



사사삭-



풀 헤치는 소리가 숲 안에 퍼졌다. 동시에 '갈기털 인간' 백랑은 눈썹을 찌푸렸다.



" 도망쳤잖아…오랜만에 만나보는 동물이었는데. "



하지만 그 자신도 동물에 가깝다. 꼴에 인간 행세를 하려는 것인지 동물이란 말을 입 밖에 내자, 백랑은 반사적으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방금과 같은 말은 동물들의 세계에서 몰매와 함께 문전박대를 당할 발언, 최근 들어 인간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아지다보니 절로 심취되는 우월감이라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때문일까, 숲 한가운데에 혼자 선 백랑은 뚜렷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벌벌 몸을 떨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
발드와 아비가 주도면밀한 '보호' 계획을 세운 것 같더니, 백랑 자신은 정작 숲 한복판에 허수아비마냥 서 있지 않은가. 또한, 단지 이 행동만으로도 계획이 반이나 성공한다는 사실은 왠만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믿기 힘들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숲 한복판에 넋놓은 듯 가만히 있는 것이 엘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백랑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 눈치다.
왜냐하면, 여기가 바로 어제 새벽, 엘프에게 쫓김을 당한 장소인 것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발을 잘못 내딛어 꺾어버린 나뭇가지와 풀밭 곳곳에 보이는 음푹한 발자국, 그리고 거목 한 그루의 허리 부분이 날카로운 것에 반쯤 잘려진 광경은 백랑의 안구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확신을 갖도록 만들었다.
헌데, 발드는 그걸 듣고서도 이곳에 백랑을 세워둔 것이다. 물론, 계획 자체는 지금 백랑의 행동을 시작으로 한 구체적인 내용이 충실히 짜여 있다.
백랑은 다시 한 번 그것을 되새겨 보았다. 영상 하나가 뇌리에서 메아리처럼 퍼져나간다.



' 미끼야. '
' 예? '
' 자세히 알 건 없고, 넌 그냥 골 나간 것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면 돼. '



이것이 계획 및 당부의 끝이었다. 제일 강렬하게 울린 메아리는 물론 '미끼' 라는 단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미끼로 쓰이는 상황은 심히 못미더웠지만, 백랑으로서는 발드에게 의지하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음 속에 떠오른 불신을 일시적으로나마 지웠다.
그래도, 등골을 헤엄치는 오싹함까지 지울 수는 없는 모양이다.



부스럭-
" 히익! "



풀결 흔들리는 소리가 백랑의 등을 쭈뼛이 세웠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흐릿한 인영 다수가 눈앞의 풀밭 사이사이를 빠르게 헤치며 계속 풀을 흔들었던 것이다. 인영들은 백랑을 원형으로 감싸고는 풀밭에 몸을 숨겼는데, 늑대 무리의 계획적인 사냥을 보는 것 같은 그 광경은 백랑으로 하여금 사색을 지어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풀결에 몸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나 엘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을 인식한 백랑은 얼굴 가득 채워진 공포를 조금씩 덜어내면서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알고 보니, 둘러싼 인영들은 모조리 겁쟁이인 것 같았다. 그들은 백랑을 중심으로 둘러쌌을 뿐, 풀결 뒤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백랑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우우우우우―――――――――――――――――――!!



늑대 인간의 울음이 넓은 아하메드의 삼림을 뒤흔들었다. 보름달에 사로잡힌 늑대들이 내지른다는 울음, 하울링(Howling)이었다.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이 하울링은 무엇보다 동물들의 사이에서 효과가 두드러졌다. 밤중의 숲을 혼자 거닐어선 안 된다, 하울링이 귓가에 담긴 이후에는 머지않아 목숨을 잃어버릴 테니까――라는 둥의 생각을 자기들 세계의 상식으로 삼을 정도로, 하울링은 동물들에게 있어 인간들 입장에서의 종소리 경보와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효과는 즉시 확인됐다. 울음소리가 길게 퍼져나가자 풀결 사이의 인영들이 흔란에 빠진 것이다. 어떤 것은 놀란 나머지 뒤로 벌렁 넘어지기까지 한다.
그 모습에, 백랑은 입을 닫고는 굵직한 목소리를 울렸다.



그르릉!



그것은 겨우 소리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목소리 자체의 강세가 조절되어 있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숲의 언어' 인 모양이었는데, 지금의 것은 과격한 느낌을 담은 협박조였다.
잠시 후, 풀결 사이에서 인영 하나가 벌벌 몸을 떨며 모습을 드러냈다. 백랑과는 달리 회색의 털로 전신을 뒤덮은 모습, 그 중에서도 특히 얼굴 쪽의 덥수룩한 수염이 흡사 신선과 같이 보이는 외모였다.
그를 본 백랑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 고블린? "



중얼거림이 토해지자 풀결에 몸을 숨겼던 모든 인영들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백랑을 원 형태로 감싼 채 말이다.
백랑은 꽤나 놀랐다. 숲의 요정인 그들의 손에 조악하게 깎인 나무 작살이 보였기 때문이다. 고블린들은 본디 평화적이다. 긴장감 가득한 채로 벌벌 몸을 떨어대는 녀석들이 적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백랑은 아까 전 그르릉댔던 것과 같은 '숲의 언어' 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릉…그르르륵?



수북한 수염을 기른 고블린이 그에 대답한다.



게게켁그에익, 게야일…



그 고블린은 말을 하면서 두 손을 맞딱뜨리고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말은 둘째치고, 행동만 보아도 용서해달라는 뜻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백랑은 의기양양한 표정과 함께 콧방귀를 뀌었다.



킁!



그것은 위협이었던 모양이다. 고블린들은 작살을 바닥에 내던지더니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부는 아니었다.
수북한 수염의 고블린은 백랑의 주시에 홀로 남아 빼도박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통솔력이 없어서야, 이 고블린은 리더로서 부적합했다. 백랑이 늑대 인간인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고블린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백랑이 장난스레 표정지으며 천천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 자…그럼 어디 정보를. "



그런데, 포로가 된 고블린이 돌연 실실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떠오른 웃음이 수북한 수염에 묻혀 희미하게 드러났다.
너무 공포스러운 나머지 미쳐버린 건가? 백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백랑의 뒤통수에 넓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백랑은 식은땀과 함께 양 옆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림자는 눈동자의 시야 범위를 가뿐히 넘어섰다. 통나무 하나의 크기를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다시 앞을 바라보니, 고블린은 승리라도 한 듯한 웃음기를 사악하게 머금고 있었다. 백랑의 몸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긴장과 식은땀을 채워나갔다. 그러던 중, 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뒤를 돌아보자, 자신의 머리통 위를 살랑거리는 큼지막한 어금니가 냇물처럼 침을 쏟는 모습이 보인다.



" 로글?! "



갑자기 등장한 로글의 모습에 백랑은 기겁을 하며 잽싸게 몸을 돌렸다. 틈을 탄 고블린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당장 머리통이 터져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을 앞에 두고 다른 사소한 것에 신경쓸 새는 없었다.
눈앞의 로글은 크게 입을 벌려 괴성을 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엑-!



어제의 로글과는 다른 녀석이었다. 미쳐있지 않고 또렷이 광을 내는 빨간 색 눈과, 마구잡이로 굴려지지 않고 균형 잡힌 몸통은 진정으로 숲의 수호자라도 되는 듯 분위기가 어제의 로글과는 극과 극을 달렸다.
백랑은 곧장 전투 태세를 취했다. 일단 머리통을 위협하는 어금니 두 개로부터 몸을 내빼는 것으로 시작…
할 예정이었으나, 그 행동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유인즉슨, 로글이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글은 오히려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고블린의 앞을 갑각발로 내리찍어 길을 차단시켰다. 떨어진 발이 쿵 소리와 함께 먼지를 일자, 소스라친 고블린은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로글은 큼지막한 머리로 백랑을 가리키면서 무언가의 지시를 했다. 숲의 세계에서 강자의 명령은 혼을 팔아넘겨서라도 승복해야만 하는 법, 고블린은 덮쳐오는 공포 앞에 벌벌 몸을 떨면서도 재빨리 제자리로 회귀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백랑의 다리를 걷어차면서 숲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 마디 '숲의 언어' 도 포함해서다.



그레렉 키게레엑!



백랑이 눈썹을 찌푸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지시를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백랑의 눈이 주위를 쓱 훑으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큼지막한 로글의 내려다보는 감시 하에서 안전하다고 볼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다.
잠시 후, 백랑의 시선이 로글을 넘어 오른쪽의 숲으로 날아갔다. 그곳엔 나무와 풀숲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존재치 않았다.
허나, 바라보는 자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



계획대로라면, 이 주변 어딘가에 발드와 아비가 숨어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백랑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솟구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분명 무슨 수가 있는 듯 자랑스럽게 말하더니, 막상 일이 터진 후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으니 당연할만도 하다.
고블린이 다시 한 번 다리를 걷어찼다. 움찔한 백랑은 상념에서 깨어나 마지못한 태도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도중, 문득 이러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 설마 나, 버림받은 건가? "



의구심은 풍선에 숨이 들어차는 듯 점점 커져만 갔다.


 


 


 


-


 


 


 


안개처럼 떠오른 은색 연기가 제각기 허공에 뭉쳐 마법진을 그렸다. 크기는 원형 방패 정도.
그 중심에는, 푸른 장발의 마법사 소녀 아비가 눈을 감은 채 마법을 시전하고 있다. 주문은 이미 영창된 듯 입을 움직이지 않았고, 주위를 떠도는 은색 연기가 소녀의 허리에 걸쳐진 마법진에 끊임없이 적당량 스며들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마법사들의 전매 특허라고 할 수 있는 신비로운 손짓을 휘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다는 것인데, 실제의 아비는 여유로움과 거리를 멀리하고 있었다.
아비는 표정을 시시각각 변화시켰다. 대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시로 눈썹을 찌푸렸지만, 무언가에 놀라기라도 한 듯 짧게 등을 경련하는 모습도 이따금씩 볼 수 있었다.
비록 팔짱을 끼고 있어 진지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모습 자체는 엄연히 마법이라는 것을 구사하는 복잡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외투까지 입고서 집중하는 아비의 모습이 마법사라는 직업에 대한 열의를 또렷하게 풍겼다.
한편, 그 복잡한 작업의 앞에서는.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우물거리는 입근육 활동이 모습을 보였다. 잠시 후, 무언가가 잘게 으깨지는 소리가 덧붙여진다.
풀밭을 깔고 앉은 발드가 가죽 주머니에서 감자칩을 꺼내 연신 입으로 투입했기에 일어나는 소리였다. 여전히 검은 옷 그대로인 그는 서커스같은 아비의 표정 변화를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계속 감자칩을 투입했다. 주점에서도 그렇고 탑에서도 그렇고, 이 발드라는 남자는 감자칩을 밥먹듯 섭취하는 게 습관인 것 같았다.
그런 발드가 마악 주머니를 거덜낼 즈음이었을까, 마법에 집중하고 있던 아비가 갑자기 몸을 휘청거리더니 뒤로 몸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발드는 저번과 같이 쓰러지는 아비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과, 털썩 하고 풀밭 으스러지는 소리가 숲으로 퍼져나갔다.
뒤로 쓰러진 아비는 벌떡 일어나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등판을 연신 매만지는 것을 보니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 멍하게 앉아서 뭘 하고 있어? "


 


들려오는 호통에 발드는 어색하게 웃음지으며 손바닥을 허리 위로 폈다.



" 아, 미안, 깜빡 잠들었나 봐. "
" 에잇, 정말이지… "



물론 그 말은 백보 양보한다 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비가 쓰러지는 사이 발드가 한 행동은 맛나게 섭취한 감자칩을 마무리짓는 일로, 가죽 주머니의 종적을 감추는 것이었다.
아비는 모르는 눈치…라고 생각한 발드는 포커페이스를 그대로 이끌며 질문 하나를 던졌다.



" 그런데, 벌써 알아낸 거야? "



그 말에 아비는 찡그려진 얼굴을 단박에 밝게 했다. 그리고는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다.



" 아, 맞아. 진짜였어, 진짜로 있었다구! 그건 분명 엘프였어! "
" 녀석아, 앞뒤를 맞춰서 설명해. "



아비는 천천히 목을 가다듬어 자신을 진정시킨 뒤 설명을 늘어놓았다.



" 백랑이 로글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엘프 여자 한 명이 다가오는 거야! 은색의 장발을 지녔는데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어! "



아비는 백랑이 끌려갔다는 대목을 죄책감 하나 없이 일축했다. 그와 반대로, 전설로 남은 종족이라는 엘프를 실물로 봤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흥분하여 펄쩍 뛰는 모습은 평소의 무미건조한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게 보였다. 마법사들의 공통적인 탐구욕 때문일까.
그러나, 발드는 엘프를 보았다는 말에도 별 감흥 없는 대답을 사무적으로 내뱉었다. 아하메드에 로글이 한 마리 더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엘프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의 앞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놀라움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런 건 됐고, 녀석들의 위치만 말해. "



그 순간, 아비가 얼굴을 팍 구겼다. 헌데, 단순히 불쾌한 것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는 입이 그것을 증명했다. 덧붙여, 발드의 쪽을 힐끔힐끔 쳐다본다던가 하는 행동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티를 진득하게 풍겼다.
놀랍게도, 발드는 이미 앞서가서 모든 것을 파악해버린 듯하다.



" 뭐야, 위대한 흑마법사 아비 님이 실패라도 하셨다는 건가? "



그 말은 정곡이었다.
헌데, 아비는 부끄러운 투를 내세우기에 앞서 노려보는 눈빛으로 강한 부정을 보였다.



" 흑마법사라고 지껄이지 마. "



싸늘한 살기가 발드를 덮쳤다. 그러나, 발드는 조소 가득한 미소를 유유하게 입가에 머금어 그에 대항했다.
다행스럽게도 살기는 한순간이었다. 변함없이 여유로운 발드의 태도에 긴장을 끈 잘라내듯 끊어버린 아비는 곧장 얼굴의 싸늘함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 그, 그래. 놓친 것은 맞는데. "
" 오호라, 그렇게 추적을 자신하더니 어떻게 된 일이지? "



발드의 입가에 머금어진 비웃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얄미운 표정에 아비는 퉁명스레 대꾸한다.



" 잘 쫓아가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잃고 뱅뱅 돌지 뭐야! 덕분에 나까지 어지러워져서 집중이 깨어졌어. "



대기의 바람으로 무언가를 추적하는 마법인 듯하다.
발드의 질문이 뒤를 이었다.



" 엘프를 본 다음 바로? "



아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 곧바로는 아냐. 엘프랑 같이 어딘가를 향했는데, 조금 전진하더니 이렇게 된 거야. "



발드는 문득 떠오른 의혹 한 가지를 제시했다.



" 그렇다면 그냥 엘프가 아니라 하이엘프인 모양이군, 마법을 읽는다는. "
" 아, 그건 발드가 알려줘서 숙지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라고 봐. "



발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어 이유를 물었다. 아비가 말을 이어나갔다.



" 그 엘프와 디텍터는 시선을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고, 하이엘프라면 곧바로 마법을 부숴뜨린 뒤 우리를 탐색해야 정상이잖아. 무엇보다, 내가 마법을 거두어 들였는데 어떻게 마법을 부숴뜨릴 수 있겠어? "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발드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하이엘프고 뭐고, 결론적으로는 계획에 차질이 생겨 찾아온 허무가 마음 속 한 켠에 자리잡은 것 때문이었다. 본디 엘프의 본거지를 찾아서 단숨에 강행돌파를 할 예정이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비장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되돌려 입을 열었다. 결단의 내용은 비장했다. 하지만, 짓고 있는 표정은 비장과 거리가 멀었다.



" 계획 변경이다. "



아비가 눈을 깜빡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발드는 씨익 미소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 늑대를 버리고 탑에 돌아가자. "



그렇게 말하고는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핀잔 세례를 받았다. 가해자인 아비의 얼굴이 어이없음으로 가득했다.



" 한번쯤 수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



발드는 여전히 귀찮음 가득한 표정으로 답했다.



" 본디 늑대란 자연의 품에서 뛰놀며 철이 드는 거라고, 어차피 보상금도 없… "
" 안 된다면 안 된다는 줄 알아. "



말허리를 끊은 아비의 얼굴에 거절하는 투가 확연히 떠올랐다. 예상 외로 아비가 설득되지 않자, 발드는 답답한 마음을 질끈 동여매고는 호통치듯 이유를 물었다.



" 왜? "



대답이 또 유별나다.



" 백랑은 내가 애완 동물로 쓸 거란 말야. "



발드는 비웃음으로 상대했다.



" 애완 동물이 아니라 연구 재료겠지. "



들려오는 비웃음에 몸을 돌린 아비는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추적 마법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려는 모양인데, 소녀는 발드가 자신을 따라올 것이라고 확신하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풀밭 위를 걸었다.
하지만, 그 확신과는 달리 발드는 가만히 서서 헛웃음을 터뜨리고만 있었다. 너무도 이기적인 아비의 태도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웃음소리가 숲바람을 타고 귀에 흘러들자, 그제야 발끈한 아비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나 봐? "



발드는 망설임 한 번 거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비는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그럼 발드, 가방 좀 건네줄 수 있어? "
" 가방은 왜? "



잠시 후, 결정타가 이어졌다. 소녀의 얼굴은 미소고 뭐고 없이 싸늘한 눈빛만이 자리잡아 그 심정을 대변했다.



" 감자칩 전부를 박살내버릴 거야. "



발드의 안색에서 빠르게 핏기가 빠져나갔다.


 


 


 


-


 


 


 


" 안녕, 또 만나네. "



눈앞의 엘프가 살짝 몸을 굽혀 긴 은발을 치렁거리며 인사했다. 정말로 아름다운 외모다. 말로만 듣던 희귀한 종족이기 때문일까,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란 것이 강하게 묻어나와 백랑의 눈을 간질였다. 그는 긴장감을 삼키는 한편 감탄을 연신 터뜨렸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아름다은 외모는 둘째치고, 이 엘프가 어제 새벽 자신에게 공격을 퍼부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백랑은 목소리에 한가득 의심을 채워 물었다.



" 날 어쩔 셈이지? "



은발의 엘프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결과적으로는 백랑만 더 불안에 휩싸였지만.
백랑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 로글의 씨앗은 나에게 없어. "



은발의 엘프는 여전히 싱긋 웃고 있는 채다.



" 있잖아, 네 뱃속에. "



백랑이 소스라치며 뒷걸음질하자, 엘프가 말을 덧붙였다.



" 엘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
" 잠깐, 씨앗이 사라졌다면 날 쫓아올 이유는 없는 것 아냐! "



잠시 후, 뒷걸음치던 백랑의 등이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큼지막한 어금니와 자신의 등을 받친 로글의 딱딱한 갑각이다.
앞뒤로 빠져나갈 길이 막힌 것을 깨달은 백랑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 반응에, 은발의 엘프가 공성차처럼 버티고 서 있는 로글에게 무슨 눈짓을 했다.
그에 대한 로글의 반응은 이러했다.



키에에에엑――――――――――――――!!



반항이라도 하는 듯한 괴성.
헌데, 은발의 엘프는 떡 벌어진 로글의 입 앞에서 부릅 눈을 뜬 채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작 노려보는 눈빛 한 번에 못마땅한 듯 자리를 이탈하는 로글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것은 옆에 멀거니 서 있던 덥수룩 수염의 고블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랑과 엘프, 둘을 제외한 생물들이 순식간에 숲의 녹빛에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
로글의 거대한 몸통이 더는 보이지 않고 이따금씩 숲을 헤치는 소리만 울리자, 엘프는 뒤로 몸을 돌리더니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 찰랑거리는 은발의 머릿결 옆에 손가락 하나가 까딱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 따라와. "



붙잡은 죄수를 이송할때나 쓸 법한 말이었다. 허나, 목소리 자체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의도를 알 수 없었던 백랑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도 의심조로 물었다.



" 어디로 가는 거야? "



엘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 늑대 인간, 어디서 왔어? 혼자야? "



동문서답이라니, 백랑은 눈썹을 찌푸렸으나 대꾸할 수는 없었다. 비록 반항은 있었지만, 로글을 눈빛 하나로 통제하는 엘프의 비범함이 전신에 와닿아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침묵이 이어지자, 그녀는 다시 말을 꺼냈다.



" 인간들한테 쫒겨난 모양이네, 가여워라. "



백랑은 속으로 조그맣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발드와 아비가 자신을 미끼로 삼은 지금 상황이 엘프의 말과 대충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뜬금없이 질문 하나가 날아들었다.



" 그러면 말야, 혹시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어? "



엘프는 뒤통수만을 보이고 있었기에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목소리는 진지함이 한가득했다.
물론 백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발의 엘프는 거침없이 말을 잇는다.
그런데, 이어지는 목소리에 싸늘함이 담겼다.



" 인간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다…라던가. "



싸늘함뿐만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엔 특정 대상, 즉 '인간들' 에 대한 원한이 한귀에 알아챌 정도로 강렬하게 서려 있었다.
뜻밖의 질문과 목소리에 흠칫한 백랑은 은발로 가꾸어진 엘프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밖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마음 속에 삭힌 분노를 부르르 몸을 떨어 간신히 방출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를 본 백랑은, 이 엘프의 마음 속을 한 번 떠보기로 했다.



" 물론 해 봤지, 실제로 사지를 찢어본 적도 있고. "



백랑은 말하는 도중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조소를 날렸다. 실제로 사지를 찢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상상이나 인간들에게 맺힌 한적인 생각은 수도 없이 거듭해본 적이 있었다.



" 오호. "



의외라는 투의 목소리에 백랑은 흠칫했다. 너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나 하고 생각할 즈음, 다행스럽게도 말이 이어졌다.



" 그러면 이야기하기 한결 쉽겠어. "



뭔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듯하다. 백랑은 속으로 안도하면서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 원한이 인내를 초과해 살인을 했다면, 그건 그만큼 인간들이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지. "



백랑은 넌지시 물었다.



" 꽤나 맺힌 게 많은 것 같은데? "
" 너무 맺혀서 이젠 한계야, 더 쌓이지도 않아. "



말을 마친 엘프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백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주위는 까마득한 새벽이 들어찬 숲 한복판, 딱히 특별한 것 눈에 띄지 않는 배경에 백랑은 여기서 멈춰선 이유를 파악할 수 없는 눈치였다.
백랑은 따져들기 위해 입을 열었다. 헌데, 그 순간 엘프가 씁쓸하게 웃음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 굳이 말하자면…인생의 목적이 된 꼴이지. "



그때, 백랑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순도 짙은 원한을 눈앞의 엘프로부터 엿봤다. 순간적인 바람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말이었다.
엘프의 기나긴 수명 아래, 그들의 원한을 한계에 다다를 만큼 쌓아낼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절대로 많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극소수를 제외하고 전무하다고 봐야 옳을 정도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간이 그 '극소수' 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백랑으로 하여금 이유를 짐작하기 불가능하게끔 만들었다.
은발의 엘프는 두 팔을 벌려 말을 이었다.



" 우습지? 인간들은 더 우습게 생각할 걸!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면서, 세상을 정복이라도 한 듯한 표정을 띄우며 말이지! 분명 우리를 눈엣가시마냥 취급하고 있을꺼야. 패배자란 소리지, 난 그게 정말 싫어! 이기심을 우선으로 내세우는 동물보다 못한 것들이 속임수 따위로 우리 위에 눌러앉아 있는 게 꼴보기 싫어! "



엘프는 벌린 두 팔을 움직여 아하메드의 광활함을 지적했다.



" 아하메드를 봐, 여기가 바로 그 증거야. 엘프들이 멸종하다시피한 상황이 되니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숲을 반으로 갈라놓았어. 이게 무슨 짓이지? 녀석들은 절대자로 군림할 궁리만 끙끙 앓을 뿐, 이익 없는 타협엔 눈꼽만큼도 관심을 쏟지 않아. 미래에 가서는 인간 외의 종족을 이물로 간주하여 쓸어내기라도 하고 말 거야. 그래서는 데빌과 하등의 차이가 없잖아! "



데빌(Devil), 모든 종족을 지배해서 공포의 상징으로써 군림하겠다는 종족이다. 먼 옛날에 일어난 대전쟁, 가슈트리버 성전에서 역으로 말살당해 이제는 책의 글자로만 전해질 뿐, 자세한 특징이 알려져 있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은 현재의 엘프와 같다.
인간과 데빌을 동격으로 취급하다니, 심하다고 생각한 백랑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간신히 그것을 다시 넓혔다.
은발의 엘프는 말을 쏟아내던 중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숨을 고르더니, 잠시 후 씨익 하는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 인간들은 언젠가 성전의 적으로 낙인찍힐 거야. 남을 배려하지 않는 녀석들은 일삼은 악행만큼 쓴 맛을 봐야 해. "



그 순간, 엘프가 아름다운 은발 사이로 쾌락에 잠긴 표정을 내보였다. 단순한 쾌락이 아닌, 미래같은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부터 전달되는 표정이었다.



" 그 성전이 내일로 다가왔다면 믿을 수 있겠어? "



백랑은 눈을 휘둥그레했다. 믿기지 않는 말에 머리가 급속도로 혼란해진다.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애써 침착한 백랑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 겸 대답을 꺼냈다.



" 에이, 농담하지 마. 공격할 수단도 병력도 없는데? "



그러자, 은발의 엘프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 때문에 흠칫해버린 백랑의 앞에 목소리가 여유롭게 이어졌다.



" 너, 일단 알아둬. 로글을 먹어치운 이상, 너는 그 자리를 대신해야만 해. "



꼭 일단의 병력을 눈앞에 둔 것처럼 말하는 태도였다.
병력?
백랑의 뇌리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가 불안감을 무럭무럭 솟게 만들었다.
그 불안을 심화시키는 한 마디가 바깥에서 귓구멍을 파고든다.



" 소개할게, 그리고 환영해. "



백랑의 설마는 적중했다.
빽빽한 나무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던 허공의 공간이 일순간 일렁이더니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 뒤편에 감추어진 광경이 모습을 드러내자, 백랑의 얼굴엔 놀라움 외의 표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움직일 생각을 않고 고정된 백랑의 시선 옆에, 은발의 머릿결이 살짝 보이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인간들의 마지막, '인간종결전쟁(人間終結戰爭)' 에 합류한 것을. "



이후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하지만, 백랑은 넋나간 사람마냥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 너라면 발 벗고 나서 주겠지? "


 


 


 


-


 


 


 


장소는 여전히 무성한 나무들 사이, 풀벌레 소리가 자욱하게 들어찬 숲 아래로 발드와 아비 두 명이 마냥 길을 걷고 있었다.
둘은 잡담을 나누며 길을 거닐었다. 말상대인 발드는 감상조차 귀찮다는 얼굴로 걸음을 터벅댔고, 아비는 말을 쏟아내면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흥분을 눈동자에 가득 파묻고 있었다.
그렇게, 아비가 쉴새없이 말을 내던지는 중 발드가 질린 얼굴로 한 마디 던졌다.



" 엘프가 그렇게 신기하냐? "



아비는 곧장 불쾌한 투를 띄웠다.



" 내가 발드랑 똑같은 줄 알아? 나한테는 해적의 보물을 찾은 것과 마찬가지란 말야. "



발드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전히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알려진 엘프가 멸종되다시피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데, 그것을 아침 식탁의 밥풀 바라보듯 말하는 태도는 다른 무엇보다 신기했다. 이 무감상적인 반응의 이유는, 방금 전 아비의 말이 간접적으로 증명했듯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어린애를 보는 듯 귀찮음 가득하게 아비를 상대하던 발드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이유인즉슨, 마법의 흔적을 안내하던 아비가 어느새 멈춰서 있는 것 때문이었다.
주변에 눈에 띄는 건 나무와 풀결이 무성한 숲 처음과 같은 광경이었다. 다른 곳과 똑같이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을 앞에 두자, 발드는 여기서 멈춰선 아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 의아함 한가득을 얼굴에 담았다.
아비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지 주위를 연신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발드의 의아한 얼굴을 보게 되자, 고의적인 헛기침 두어 번을 내뿜고는 말을 꺼냈다.



" 여기야. "



발드는 유별난 것 없는 숲의 광경을 다시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역시나 한눈에 들어오는 특징 따위는 없다. 잠시 후, 그는 정적 사이에서 뒤통수를 긁적여 난감함을 표현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아비의 눈을 응시하니,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불신 그 자체다.



" 마법사 씨, 지금 장난질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백랑이 불 위에 올라가 먹음직스런 스테이크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
" 엘프는 고기를 먹지 않잖아. "



세간의 상식적인 말에 헛웃음을 터뜨린 발드는 다시 한 번 따져들었다.



" 그래서, 결국 여긴 뭐야? 진보된 문명에 걸맞는 나뭇잎 문 따위를 기대했는데 말이지. "



아비는 잠시 궁리에 빠져들었으나 탐지 마법의 바람이 별 신호도 없이 고장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궁리의 결과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다.



" 분명 여긴데… "
" 마법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나 하나뿐일까나~ "



다시 들려온 비웃음에 아비는 언제나 그렇듯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허나, 발드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면의 무성한 나무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비는 분을 풀기 위해 마악 분을 쏟아내려 했다. 헌데, 그것은 실행되 못했다.
더러운 오물이라도 바라보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린 발드의 눈을 본 것이다. 그 불쾌함은 아비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숲 한가운데만을 꿰뚫고 있다.
아비가 분노를 사그러뜨릴 즈음이었을까, 발드가 별안간 요청 한 가지를 해온다.



" 불좀 밝혀줄 수 있어? "



보통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며 마구 비난을 쏟아냈을 아비였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다. 거기에 자신을 맞추고자, 아비는 솟구치는 불만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한숨지으며 요청을 승락했다.
아비의 주위를 일상으로 떠도는 푸른 색 연기가 살짝 요동쳤다. 그것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정도를 더해서, 마침내는 격렬하게 휘날리며 붉은 색으로 탈바꿈하더니 아비의 의지에 복종을 표했다.
이후 아비가 앞으로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펴자, 그 표면에 다홍색 불꽃이 일어났다.



푸쉬이-
" 헛고생만 하지 않는다면야. "



불꽃은 붉은 색 연기를 계속 흡수하며 크기를 더했다. 그에 따라 두 사람 주위의 숲이 불꽃에 걸맞는 옅은 붉은 빛에 밝혀져갔고, 새벽의 어둠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발드는 곧바로 숲 한가운데를 향해 크게 눈을 치켜떴다.
잠시 후, 발드의 눈썹이 더욱 찌푸림을 더했다.



"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



아비는 손에 불꽃을 지핀 채로 발드를 쳐다봤다. 발드의 찌푸려진 얼굴이 서서히 옅은 웃음을 띄어갔다. 무언가를 알아낸 모양이다.
그는 숲을 그대로 응시하면서 '수상쩍은 것' 에 대한 설명의 서론을 뗐다.



" 아비, 저기 나무들 중 뭔가 수상쩍어 보이는 것 없어? "
" 무슨 말이야? "



아비는 의아하게 물으면서도 눈앞의 숲을 바라봤다. 그러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당연했다. 발드가 꿰뚫어 보는 실체같은 것을 아비는 볼 수 없었다.
잠시 뒤 아비의 얼굴이 찡그려질 지경에 처하자, 발드는 아비에게 고개를 돌려 힌트 하나를 던져주었다.



" 아하메드로부터 따돌림당하는 나무들이 이따금씩 보이잖아. "



그 때까지만 해도 아비는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조금 뒤 이어진 발드의 한 마디가 강력한 힌트를 제공했다.



" 다르게 표현하면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정도? "



아비의 눈은 그제야 발드가 지목한 '나무' 를 발견했다. 또렷이 보였다. 그 '나무' 는 고작 한 그루가 아니라 발드의 말대로 이따금씩 눈에 띄는 적지 않은 갯수였다.
불규칙하게 자란 수없는 나무들 중 약간 더 녹빛을 띄고, 약간 더 열매를 피운 나무가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고작 조금 더 눈에 띌 뿐인 '나무' 의 녹빛은 막상 알아채고 나니 주변의 숲과 심각한 이질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나무' 에 열린 열매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결코 만날 수 없는 기묘한 열매들이 '나무' 의 가지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아비가 머리를 흠칫하여 깨달았다는 표를 냈다. 그러자, 발드는 옅게 웃음지은 표정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 요컨대 결계… "



한 마디를 내뱉고 말꼬리를 흐린 발드는 등에 매인 길쭉한 것을 빼들어 감싸진 천을 풀었다. 천이 풀어지자 큼지막한 석궁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허리와 허벅지 사이에 끈으로 묶인 화살통에서 화살 한 개를 꺼내 석궁에 장착했다.
그리고는 곧장 발사했다. 나아간 화살이 새벽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며 예의 수상쩍은 '나무' 에 꽂혔다.
턱, 하고 화살 부딪히는 소리가 숲에 퍼졌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던 아비의 눈은 겨우 화살이 나무에 박힌 광경에 큼지막해져 놀라움을 표했다.
화살이 나무에 꽂혔지만, 그것이 박혀 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화살은 냇물에 던진 돌멩이처럼 부드럽게 나무를 통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비정상적인 광경이다. 관통당한 나무가 꿰뚫린 흔적도 없이 그대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광경은 소녀로 하여금 놀라움을 심화시켰다..
화살은 '나무' 너머의 나무에 꽂혀 소리를 퍼뜨렸다. 발드는 방금 전 흐렸던 말꼬리를 이어붙였다.



" 랑은 조금 틀리군. "



발드가 뒷통수를 긁적였다.



" 이걸 전부 구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초월적인 시간이 필요하겠는데. "



옆에서 아비가 의견을 말한다.



" 그 말은 정해진 길이 존재한다는 뜻이잖아. "
" 물론, 하지만… "



또다시 말꼬리를 흐린 발드는, 잠시 후 회심의 미소를 만면에 채우며 말을 이었다.



" 이 발드 님에게 길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



허세로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자신감이었다. 그것은 아비로 하여금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



발드가 다시 시선을 응시했다. 그는 말 한번 꺼내지 않고 아비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정적이 흘렀다. 정적 도중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정말 모르겠냐' 라는 질문을 밖에 내보였다.
그러자, 아비는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 아. "



이어지는 목소리에 기대가 가득 찼다.



" 그래, 발드는 '가스펠' 이니까… "



가스펠(Gospel)이란 호칭으로 불리워진 발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다시 정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진실과 거짓이 교묘히 엮인 저곳은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한 번 없이 확실한 자신감으로 앞을 걷고 있었다.
한편, 아비는 발드의 기고만장함이 못마땅했는지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이를 달리 말하면, 발드가 저 환상 사이를 성공적으로 빠져나갈 역량이 충분하다는 증거가 된다.
아비의 눈이 기대를 담았다.



" 솜씨를 지켜보도록 할게. "



뒤통수 너머의 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 솜씨를 발휘해야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



아비가 눈을 동그랗게 하며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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