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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연기가 하늘의 구름을 대신이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솟았다.
근원지는 알사로스 탑에 훤히 드러난 지붕 아래 한 칸의 방. 푸른 장발의 소녀 한 명이 도구를 쭉 늘어놓고 알 수 없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다색 매캐한 연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모인 연기는 탑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여서 소녀가 질식사를 당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녀는 늘어진 등과 함께 멀쩡히 손을 놀렸는데, 이는 만들어진 연기 전부가 훤히 드러난 천장에 놀라운 속도로 새어나가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붕 자체가 없었기에 드러난 천장은 넓은 편이었다.
헌데,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연기가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정 중앙 부분뿐이다. 화산이 내뿜는 용암처럼 한 점에 집중된 연기는 알사로스 탑의 하늘에 큼지막한 버섯 구름을 만들어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아무래도 소녀는 방 안에 연기만 들어차지 않으면 그 외의 자잘한 것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소녀의 양 옆에는 두 개의 책상이 놓여, 평범한 약초부터 정체불명의 생물 기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들이 늘어져 있었다. 정면에는 연금술사들이 쓸 법한 분위기의 거대한 플라스크가 보이고, 그 주변에는 자그마한 시약병들이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플라스크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에 한계를 느낄 것만 같은 오묘한 색의 액체가 국을 끓이는 듯 기포를 띄우고 있었다. 소녀는 왼쪽 책상에서 하얀 색의 길쭉한 잎사귀 두 가닥을 집어낸 뒤 그것을 플라스크의 액체에 오른손으로 쓸어넣었다.
다크서클이 두드러진 소녀의 눈이 이십 초쯤 플라스크를 주시했다. 그 후, 용액의 보글거림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무언가의 변화를 나타냈다. 그러자 소녀는 곧장 시약병 하나를 꺼내 플라스크 안에 던졌고, 수면에 뜬 채로 가득 액체를 담게 된 시약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손에 의해 꺼내어졌다.
엄지와 검지 끄트머리로 시약병을 집어든 소녀는,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기운 빠진 목소리를 울렸다.



" 122번째. "



늘어진 등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눈가 역시 검게 빛을 띄웠지만, 소녀의 눈동자만은 빛을 잃지 않고 초롱초롱한 채여서 피로에 맞서는 확고한 의지가 단면적으로 드러났다.
소녀는 왼쪽 책상에 다시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책상 아래에 달린 액자만한 크기의 서랍이었는데, 손잡이를 잡고 그것을 열자 곧 괴기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물론 일반인에 한해서이겠지만, 서랍에는 찍찍거리는 회색빛 쥐가 떼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몰려 있는 게 아니라 쌓여 있는 정도였으니 방 안은 금새 쥐들의 재잘거림과 서랍 맨 아래에 깔린 몇몇 불쌍한 쥐들의 비명이 섞여 퍼졌다.
대부분의 여자애라면 기겁을 하고 도망칠 상황이다. 그러나, 일반인이 아닌 소녀는 눈꼽만큼의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쥐 한 마리의 꼬리를 손끝으로 집어내고는 서랍을 닫았다. 손가락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쥐의 모습이 흡사 말라버릴 위기에 놓인 나뭇가지와 비슷한 느낌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비가 베풀어질 리는 없었다. 쥐의 양쪽 볼을 압박하여 입을 벌린 소녀는 시약병에 찰랑거리던 오묘한 색의 액체를 단숨에 그 안으로 쏟아부었다. 쥐가 목으로 침투하는 정체불명의 액체에 격한 몸부림을 부리기 시작하자, 소녀는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변화를 관찰했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동안 몸부림치던 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축 늘어뜨리며 영원의 황천길 여행을 떠났다. 상상을 초월하여 싱겁게 끝나버린 실험에 허망한 눈빛을 띄운 소녀는 잠시동안 쥐의 시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오른손을 아래로 휘둘러 쥐고 있던 시약병을 바닥에 깨뜨렸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소녀는 남은 쥐의 시체마저 바닥에 내던져버리고는 오른쪽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가죽 장갑이 무수한 갯수로 쌓여 있었는데, 소녀는 그 중 한 켤레를 꺼내어 손에 착용하기 시작했다.
장갑을 끼던 중 아래로 시선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바닥에는 쥐 시체들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이곳저곳에 즐비해 있었다. 아까와 같은 과격한 행동은 한 번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치울 새 없이 실험을 계속하고 싶었던 소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을 감싼 슬리퍼 표면은 마치 갑옷처럼 유리 조각의 날카로움을 막아냈다.
소녀가 당도한 곳은 플라스크 바로 앞이었다. 소녀는 걸음을 멈춘 뒤 천천히 두 손을 앞으로 뻗었는데, 그것이 향하는 곳은 놀랍게도 플라스크의 바깥면이 아니라 내부의 액체였다. 곧 수면을 관통한 손이 잔잔한 물결 파문을 그렸고, 그 끝을 잠잠히 지켜보던 소녀는 어둡게 그늘진 눈을 갑작스레 희번뜩했다.



" 염원원원(炎原元願, 불의 근원이 으뜸으로 바라는 것). "



주문이 영창되자 소녀가 끼고 있던 한 켤례 장갑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동시에, 수면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가 아비의 얼굴을 문질렀다.
드러난 두 손은 순백색의 빛을 발산했다. 놀랍게도, 액체 속에서 강력한 열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잠깐이었다. 두 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원색으로 되돌아와 곧장 플라스크에서 빼내어졌다.
그리고 플라스크엔 아무 것도 없었다. 종적을 감춘 용액은 언제부터인가 천장의 중앙을 향하여 빠르게 새어나가는 다색의 연기 중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극도의 백색열로 인해 기화가 된 듯하다.
작업 하나를 마친 소녀는 한숨 한 번을 푹 내쉬고는 다시금 왼쪽 책상에 손을 뻗어 정체불명의 푸르딩딩한 열매 두 알을 꺼냈다. 다음 실험에 착수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소녀의 축 늘어진 등 뒤로 나뭇가지가 우거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이 섞였다.



" 우캬햐햐햐햐햐햑――――――――――――?! "



비명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소녀의 방까지 도달했다. 얼마 안 가, 얼굴이 당근처럼 벌겋게 변한 채 벽에 기대어 있는 발드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언가 봉변을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허나, 소녀는 실험 내내 쭉 굳어 있었던 얼굴에 고의적인 웃음을 씨익 하고 지어내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 편하게 잤어, 발드? "



발드는 얼굴을 구겼다. 거친 숨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 아비, 왠 짓거리냐? "
" 짓거리라니, 말이 좀 심하네. "



아비라 불리운 소녀는 다시금 등을 돌려 플라스크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왼손의 열매 두 알이 손바닥에 꽉 쥐어져 즙을 만들었고, 그것은 곧 플라스크 바닥에 샘물처럼 쪼르르 떨어졌다.
그 행동을 하던 중, 아비는 발드의 질문에 관한 대답을 꺼냈다.



" 먼저 자명종 역할도 있고… "



발드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비가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되는 정체불명의 버섯구름이 잔뜩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연기 반경 밖은 햇님이 눈부시게 은총을 내리는 한바탕 아침이다. 새벽 늦게 잠을 잔 사람을 이렇게 일찍 기상을 시키다니 발드로서는 어처구니가 없게 되었다.
발드의 가득한 짜증을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아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 게다가, 내가 피워준 꽃은 '라도셰크의 열매' 야. 탁월한 각성 효과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 피로에 지친 발드에게는 안성맞춤 아니겠어? "



라도셰크의 열매, '라도셰크' 란 자연을 관장하는 리갈의 신이다. 피로에 찌든 농부에게 이 꽃향을 맡아주면 금새 기운을 차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그에 따라 수확되는 곡물 역시 많아진다는 데에서 유래된 꽃 이름.
하지만 말이 좋을 뿐이지 마약과 다를 게 없다. 일시적으로 몸의 피로를 덜어주지만 약효가 떨어진 뒤에는 덜어진 피로 전부가 몰려서 닥쳐오기 때문에 말 그대로 순수한 각성제임과 동시에 결국 사용시마다 더 많은 양을 사용하게 된다.
주체 못할 활력에 벌개진 얼굴을 감출 수 없었던 발드는 왼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다 쓸어내린 것은 아니었다. 이마 부분에서 시작하여 입가 부분에 이르자 손을 멈춘 발드는 툴툴대며 말했다.



" 침대 옆에서 큼지막한 꽃이 피어나는 건 뜬금없다고 생각 안 해? "
" 새벽에 잠든 발드를 활동시킬 방법은 이 수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



아비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폈다. 오늘 새벽, 발드가 농부 이야기를 꺼낼 때 보였던 손짓과 판박이였다.



" 꽃은 곧 말라죽을 거야, 처리는 발드가 해. "



발드가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 아니, 피운 건 너인데 처리는 내가 하라고? "
" 저런, 아침 일찍 깨워줬으면 불평 말고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겠어. "



뒷처리하는 것으로 감사를 표하라는 말이었다. 물론 발드는 단순 헛소리로 취급하고 반발한다.



" 너 임마… "



하지만,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아비의 신경질 가득한 외침이 앞을 가로막았다.



" 시끄럿, 얼른 정리하고 도둑 놈이나 잡으러 가! "



발드가 경련하듯 고개를 떨었다. 하룻밤 사이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잠시 후, 발드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마지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에 몰입중인 아비가 그것을 보았을 리 만무했지만, 발드의 침묵은 명령에 승복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투덜대며 다시 아비를 바라본 발드는 방금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버섯구름의 근원, 즉 플라스크와 주변에 즐비한 쥐들의 시체, 깨진 유리 조각들이 속속히 눈에 들어왔다.
헛웃음이 절로 터진다.



" 구름이 무지개를 흡수했나, 색이 왜 저래? 이것들은 또 뭐고. "



아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꼬집을 거리를 찾아냈다는 듯, 골목대장의 장난기 짙은 미소가 발드의 얼굴에 퍼져나갔다.



" 애초에 이 방, 꼴이 왜 이런지 설명좀 해 주실까.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발드는 의아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빽 소리지르던 아비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다니?
발드는 방 안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 시끄럽다니까… "



흐려지는 말꼬리와 함께, 아비의 몸이 기울었다.
발드는 기겁하여 안으로 달려들었다. 저대로라면 일차적으로 책상에 머리를 부딪히고, 이차적으로는 바닥에 즐비한 유리 조각이 전신에 상처를 파묻을 터였다. 발드로서는 빠르게 달려가서 쓰러지는 아비의 몸을 받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기울어지는 몸은 처음엔 느릿했으나 점차 중력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속도를 달리했다. 느릿느릿, 서서히, 점점, 그리고 빠르게!
그 때, 발드는 아비가 있는 곳에 도달해 왼손으로 머리를 받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지탱시켰다.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발드는 발바닥으로부터 치솟는 아픔에 살짝 몸을 떨었다.



" 아얏. "



크고 작은 유리 조각들이 그의 두 발바닥에 날카롭게 이빨을 박고 있었다. 엄습하는 고통에 발드의 발이 부르르 떨렸다. 간신히 그것을 견딘 발드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다크서클이 그늘진 눈을 감은 채 곤히 잠을 자는 아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발드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이제 꿈나라로 돌아가냐, 정도껏 무리를 해야지 원. "



말을 끝마친 발드는 아비를 등에 업었다. 짓누르는 무게에 의해 발바닥이 더욱 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유리 조각을 빼내는 일도 방을 벗어나서 해야만 했기에 고통을 감수하고 발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느릿하게 거닐었기에 한 번 발을 내딛을 때마다 찾아오는 고통은 상상 외로 강력했다. 고문을 받는 듯 안면을 꿈틀대던 발드는 결국 방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아 약한 신음을 토했다.
상처는 더욱 벌어져 있었다. 발드는 곧장 살점에 박힌 유리 조각들을 차례로 빼내었지만, 예상 외로 깊숙히 꿰뚫린 부분이 있어 출혈이 심한 편이었다. 작업을 마쳤을 때, 발바닥 표면은 유리 조각 대신 붉은 피가 범벅이 되어 자리잡았다.
하지만, 발드는 흘린 식은땀에 비해 속이 후련한 듯 웃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운까지 도둑맞기라도 한 모양이군. "



투덜거린 발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방을 정리하기 위한 빗자루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비단 아비의 연구실뿐만 아니라, 발드의 침대 옆에서 수액을 쏟으며 말라가고 있을 라도셰크의 열매 역시 치워내야 했기에 발드로서는 빗질을 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해진 셈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 끝에 남은 라도셰크의 열매 향이 닥쳐오는 노동으로부터 발드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상처 가득한 발로 바닥을 거닐면서도, 그의 얼굴은 태연함의 극을 달리는 것이다.


 


 


-


 


 


"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



시끌벅적한 주점 안, 점장인 이샤는 카운터 일을 맡으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 앞에는 발드가 안주로 쓰이는 감자칩을 물고 빤히 시선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술에 취한 듯 벌개진 얼굴이 눈에 띄어 이샤로서는 약간 대화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샤가 느끼는 부담이란 다른 쪽으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새벽 약속한 것을 태평한 얼굴로 깨뜨리는 발드의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그 태도란 이러했다.



" 속는 셈 치고 이따마한 어금니 달린 괴수 수배서 한 장만 더 줘. "



이샤는 어이가 없는 듯 손을 내저었다.



" 로글이 술안주냐, 넘쳐 흐르게. "



발드가 손뼉을 쳤다.



" 그거 좋네, 로글의 갑각으로 과자를 만들면 황실 요리 대회에 입선할만큼 혁신적이겠어. "
" 이빨이 박살나버릴걸. "
" 그걸 목적으로 만드는거야, 황제에게 선보이면 암살도 가능하겠군. "



말을 끝마친 발드는 돌연 왼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입 안에서 으적거리는 감자칩 소리가 요란했다.
이샤는 오늘 발드의 상태가 상당히 비정상적이라고 느꼈다. 달구어진 쇠처럼 벌개진 얼굴, 그리고 활력 가득한 몸을 이끌고서 피곤하다며 눈을 가리는 저 행동만 보아도 무언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고 생각됐다.
로글에게 당해 사고 구조가 문제를 일으킨 것인가, 하고 추측한 이샤는 조심스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막았다.



" 아무튼 납득이 안 돼, 정말 로글을 조지긴 한 거야? "



발드는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샤는 답답하면서도 발드를 더 미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욱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 그…암만 생각해도 현상금을 타오지 못했다는 건 이해가 안 가서 말이다. "
" 도둑맞았다네. "



뜬금없는 소리에 이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 현상금을? "



발드는 갑자칩이 떨어진 그릇을 앞에 내밀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이샤는 한숨과 함께 감자칩 한 줌을 그릇에 떨궈 준다.



" 로글을, 멍청아. "
" 아하, 인간이 로글을 번쩍 들고 달아났다고? "



이샤는 귀를 후볐다.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 그게 변명이야? 이봐요, 인간 씨. 로글을 못 잡았으면 못 잡았다고 말을 하면 되잖아. 분수에 맞춰 삶을 살아야지! 애초에 인간 혼자서 로글을 때려잡는다는 게 얼마나 미친 소리로 들리는 지 알아? "



발드는 감자칩 두 조각을 겹쳐 입 안에 집어넣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계속 입을 우물거리기만 하자, 격분한 이샤는 발드 앞에 놓인 감자칩 그릇을 뺏어들었다.
하지만, 발드는 감자칩을 빼앗겼음에도 불구, 몸 한 번 움찔거리지 않고 혼이 빠져나간 것마냥 멀거니 자리에 앉아 있다.
이샤는 의아하여 질문을 추가하려 했다.
그때였다. 주점 어딘가에서 외침과 함께 주문이 들어왔다. 이샤는 곧장 갑자칩 그릇을 발드에게 돌려 주고 선반에서 싸구려 술 네 병을 꺼내 카운터를 나섰다. 이샤는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손가락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 갑자칩이나 씹고 있어. "



졸지에 감자칩 이하로 평가받은 발드가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샤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무표정한 얼굴에 찡그림을 더한 그는 화풀이를 하듯 그릇에 담긴 감자칩 전부를 모조리 입에 쓸어담았다.
그 결과, 발드는 목이 막혀 콜록대는 기침 증세를 일으켰다. 물, 아니면 술을 찾기 위해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발드는, 어느 새인가 자기의 오른쪽에 사람 한 명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라보니, 비옷 같은 회색 로브로 전신을 감싼 그는 키가 큰 편은 아니었다. 마악 철이 들기 시작한 나잇대의 느낌, 상체의 체구 등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자면 성인은 아닌 듯했다. 손에 낀 장갑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흔히들 상상하는 첩보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제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물컵을 건네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이 막혀 가슴을 부여잡던 발드는 반색하며 물컵을 받아들였고, 곧 그것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목젖을 정확히 두 번 꿈틀거린 뒤 크게 숨을 내뱉은 발드는 고개를 돌려 망토 인간에게 감사를 표했다.



" 고맙… "



그런데, 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호기심으로 망토 안을 유심히 쳐다본 발드의 시야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망토 안에 얼굴을 감추었다 해도 햇빛이 약간씩 새어드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발드 역시 그 중 하나의 예로써, 망토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에 문득 무언가를 느끼고는 발작하듯 등을 추켜세웠다.
이후 벌어진 일은, 별안간 발드가 벌떡 일어나면서 망토 인간의 멱살을 부여잡는 행동이었다.



" 너, 이 자식… "



망토 인간은 안절부절하며 왼손의 검지를 피고는 조용하라는 신호를 내보였다.



" 조용, 조용해 주세요! "



그 말에 발드는 잡았던 멱살을 점차 느슨히 하다가 마침내는 뿌리치듯 풀었다. 격한 몸다툼은 없어서였는지, 다행스럽게도 주점 안의 누구도 발드가 멱살을 잡는 광경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발드의 눈은 여전히 잡아먹을 듯 빛을 냈다. 망토 안의 희미한 실루엣에서 길쭉한 하얀 색 갈기가 눈에 띄일 때마다, 그는 눈동자에 채운 원한의 농도를 점점 더 짙게 했다.
놀랍게도 망토 인간의 정체는 인간이 아니라, 오늘 새벽 로글의 씨앗을 들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던 늑대 인간이었다. 놀라운 점이라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것 정도.
늑대 인간은 망토 안의 어둠 속에서 안도감 깊은 목소리를 냈다.



" 휴, 드디어 찾았다. "



발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도둑질을 해놓고 자기를 찾았다니?
어둠 속, 희미하게 웃음짓는 실루엣이 보인다.



" 잠시 한적한 곳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



그는 늑대임에도 불구, 일반인들과 차이점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의 숙달된 화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열 다섯에서 열 일곱살 즈음의 인간 소년과 다를 게 없어, 언뜻 말만 들으면 그 누구도 늑대라는 의심을 꺼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자그마한 감탄을 터뜨린 발드는 한적한 곳을 찾는다는 요청에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따라오라는 지시였다. 늑대 인간은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발드의 뒤를 지네의 꼬리마냥 순순히 따라갔다.
두 명의 인간, 아니 인간 한 명과 늑대 한 마리는 주점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별실로 걸음을 옮겼다. 발드가 문고리를 잡고 활짝 문을 열자, 늑대는 사람들에게 얼굴이 드러날까 우려했는지 잽싸게 별실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발드는 단지 별실에 있는 것만으로 늑대가 원하는 '한적한' 이라는 조건이 충족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편, 요청받은 주문을 끝낸 이샤는 별실로 들어가는 두 명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황당하게 표정짓고 있었다.


 


 


-


 


 


눈빛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둘밖에 없는 공간에서 죽여버릴 듯 노려보는 발드의 시선은 크나큰 부담이 됐지만, 늑대에게는 발드를 꼭 만나야 할 무언가의 이유가 있었는지 몸을 추스리면서도 도망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늑대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발드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머리에 쓰인 망토를 걷어냈다.
드러난 얼굴은 인간의 몸에 흰 갈기만 수북히 덮인 것 같은 묘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길가를 지나가다가 이따금씩 청년들의 시샘에 쏘여질 것 같은 정도. 그만큼 인간적인 외관과 함께 늑대의 흰 갈기라는 특징이 더해지면서 특유의 매력을 발했다.
하지만, 발드는 생김새가 어떻든 사냥감을 도둑맞은 시점부터 늑대를 사형시킬 계획이었다. 희귀한 흰색 가죽을 벗겨서 시장에 내놓으면 어느 정도 벌어들일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보다 우선순위인 일은, 로글의 씨앗을 이 늑대에게서 돌려받는 것이다.



" 그러면, 로글의 씨앗을 내놓아 주실까. "



늑대가 귀를 쫑긋거렸다. 영락없이 긴장한 꼴이다.
그 반응에 발드는 불길함으로부터 몸을 추스렸다. 설마 아니겠지 하고 생각한 순간, 늑대의 입으로부터 청천벽력같은 말의 전조가 튀어나왔다.



" 죄송해요, 그거… "



늑대가 슬쩍 시선을 흘겼다. 등판을 꼿꼿이 세운 채 완전히 굳어 있는 발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통수를 긁적인 늑대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아니, 그것은 말이 아니다. 예정된 청천벽력이었다.



" 먹었어요. "



발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잠시 그러고 있기를 육 초 쯤일까,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문하는 그의 얼굴에 당황함이 가득 들어찼다.



" 뭐? "
" 먹었단 말입니다. "



그때 보았던 씨앗은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다. 인간의 위장 하나를 통째로 들어차고도 남을 만큼의 크기였던 것이다. 때문에, 발드는 더욱 의심을 채운 눈빛으로 늑대를 쏘아봤다.
늑대는 깊어져가는 의심에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손을 내저으며 다시 말했다.



" 지, 진짜입니다. 야금야금 먹어 치웠어요. "



그 말에 발드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기절한 것처럼 고의로 몸을 뉘인 것이다. 감정 주체가 안 되는 듯한 발드의 행동이 늑대로 하여금 불안감을 점점 증폭시키게 만드는 위협의 역할을 맡았다.
잠깐동안 정적이 흘렀다. 몸을 뉘인 발드가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늑대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막막하여 입을 다문 채로 눈을 흘길 뿐이었다.
정적은 이십 초쯤 후, 발드가 몸을 뉘인 상태에서 말을 꺼내는 것으로 깨어졌다.



" 어이, 늑대. "



늑대가 문득 생각난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 아, 소개가 늦었네요, 백랑(白狼)이라고 불러 주세… "



발드는 몸을 뉘인 상태로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쳤다. 중지하라는 뜻이다.
그것을 본 늑대 백랑은 경련하듯 고개를 떨며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자, 발드가 무감정하게 말한다.



" 그래, 백랑. 내가 한 가지 묻지. "



백랑은 고개를 쳐든 채로 말없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침묵은 요청에 대한 긍정인 법, 대답이 없자 발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 내가 왜 너를 살려둬야 하는지, 납득할만한 이유를 한 가지만 확실히 대 봐. "
" 예? "



백랑은 놀라며 곤란하게 표정지었다. 발드는 몸을 일으킬 생각이 없는 듯, 누워 있는 모습 그대로 대답을 기다렸다. 십 초쯤을 맹렬하게 고민하던 백랑은 생각의 한계에 부딪혔는지 장갑 낀 손으로 머리털을 감싸쥐었다.
그러다가, 돌연 오른쪽 손바닥으로 강하게 탁자를 내리치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탁자는 우지직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손바닥 모양의 상처를 표면에 파묻었다.



"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 요청을 먼저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



호랑이의 포효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방 안을 때리자, 발드는 가위에 눌렸던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발드를 일어나게끔 한 것은 백랑의 큰 목소리가 아니라 탁자의 비명이었다. 기겁한 표정의 발드는 짓이겨진 탁자에 고개를 내밀고 극한의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먹은 백랑은 허둥대는 발드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입더듬이 눈에 띄게 드러났지만.



" 저, 저를 보호해 주세요! "



그 말에, 안절부절하던 발드의 움직임이 절도 있는 군단병의 느낌으로 우뚝 멈췄다. 그리고, 아래를 향한 고개를 서서히 쳐든 그는 백랑의 식은땀과 긴장감 가득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터진 웃음은 정확히 삼십 번을 반복하다가 발드의 얼굴을 싸늘하게 바꾸었다.



" 아…그래. "



다시금 정적이 들어찼다. 이번엔 잠시일 뿐이었다. 발드는 백랑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 네 놈을 삼십육 등분 스테이크로 만들어도 모자랄 상황에, 보호를 해 달라? "



극을 달리는 협박조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백랑의 입이 다급히 열렸다. 급도로 핼쑥해진 백랑의 얼굴이 마음 속 일면을 대변했다.



" 정말로 삼십육 등분 스테이크가 될 지경입니다, 누가 저를 뒤쫓는 지 아십니까?! "



발드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 나. "


 


 


 


-


 


 


 


꽤나 뜻 깊은 말에 백랑의 몸이 살짝 떨렸다.



" 엘프에요, 엘프. 그 전설의 종족 말입니다! "
" 토끼를 잘못 본 거겠지. "



심드렁하게 답하는 발드의 앞에 백랑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발드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백랑의 얼굴이 울먹일 듯 일그러져 있는 것 때문이었다.



" 전 아직 죽기 싫습니다. 당신같이 강한 사람의 보호가 절실해요! "



강하다는 말에 조금 우쭐해진 발드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백랑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던 중, 이내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 엘프가 늑대 인간 한 마리를 두고 왜 헉헉대는데? "



듣고 보니 묘한 뜻의 말이다. 하지만, 백랑은 농담 따먹기를 할 심정이 아니었다.



" 그걸 모르겠어요. 아하메드의 엘프가 절 왜… "



발드가 턱을 괸 손으로 손가락질했다.



" 로글의 씨앗을 먹어치웠기 때문이 아닐까. "
" 아. "



백랑의 입이 떡 벌어져 놀란 표정을 짓는다. 생각해보니, 엘프가 공격은 오늘 새벽에 로글의 씨앗을 훔친 뒤 일어났다. 이를 다른 말로 해석하면, 발드 역시 엘프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
그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 발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앞에서, 백랑은 자신의 하얀 갈기 달린 머리통을 바닥까지 내리며 절을 했다.



"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



이 의뢰를 승락해서 얻는 이익은 먼지 티끌만한 것도 존재치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까지 살아남은 엘프가 있다는 사실이 발드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시켰다.



" 세계수가 붕괴한 뒤 멸종된 줄 알았던 엘프가 아하메드 어딘가에 살고 있다라… "
" 예, 흥미롭지 않습니까? 당신 같은 사냥꾼에게는. "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것을 꼬투리잡는 백랑의 태도에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삶은 소중하다는 교훈을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그렇게 말을 해도 엘프를 사냥할 이유는 없다. 세계 전역에 전설로 남아 있는 엘프라는 종족을 사냥하면 자칫 자신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전투에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제일의 이유였다.
때문에, 발드는 한 쪽 눈썹을 찌푸리고는 백랑의 간절한 애원을 뿌리치듯 손을 홰쳤다.



" 엘프를 왜 사냥해, 그리고 누가 사냥꾼이라는 거야? "



백랑은 다시 한 번 놀랐다.



" 엇, 사냥꾼 아니신가요? 멋진 기술로 로글을 쓰러트리시던데. "
" 그 로글의 씨앗이 네 위장에 들어가 있으니 입 다물어. 아무튼, 난 사냥꾼이 아냐. "



과격한 어조에 등을 축 늘어뜨린 백랑은 입을 다물었다. 영락없이 거절당할 것 같은 상황이다.
얼마 안 가 등줄기에 솟아오른 불안이 극에 달하자, 백랑은 두 손을 맞딱뜨려 다시금 애원을 하려 했다. 두 손을 맞잡은 백랑의 모습은 동물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이 더 충실해 보였다.
헌데, 말을 꺼낸 것은 백랑이 아닌 발드였다.



" 뭐, 그래도 확실히 흥미롭군. "



백랑의 맞붙은 두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하얀색 갈기 사이에 파묻힌 눈동자가 기대에 찼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툭 하고 말을 던지는 발드의 모습이 보인다.



" 좋아, 승락하도록 하지. "



백랑의 표정이 밝아졌다.



" 정말 감사합니다! "



그때였다. 백랑이 팔을 크게 벌려 다시 한 번 절하려는 찰나,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발을 내딛었다.
백랑은 기겁하여 급히 망토를 뒤집어쓰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온 연두빛 머리칼의 청년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백랑은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연두머리의 청년 이샤는 인사를 받아주기는 커녕 손가락질을 하면서 묻는다.



" 저건 뭐야? 진짜 늑대? "



발드의 시선이 이샤의 왼손에 들린 술병에 이르자 고양이처럼 번뜩였다. 그는 단숨에 술병을 뺏어들고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 도둑 놈. "



이샤는 오른손의 오징어 쟁반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합석했다.



" 왜 하필 늑대야, 빨간 망토 이야기냐. "
" 그보다, 내일 안에 돈을 갖고 올 테니 오늘은 좀 봐줘. "



발드가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가라앉았던 방 안이 금새 술기운에 채워져 활기를 띈다.
이샤는 쟁반에 놓인 술잔 세 개를 각각의 앞에 미끄러트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나야 원래 술이나 같이 마시는 걸로 족했다고. "



말을 마친 이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발드에게 보여주었다.
양쪽으로 길게 찢어진 입과 큼지막한 어금니, 그리고 갈색 갑각을 지닌 괴수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였다. 로글의 수배서였다. 그림은 오늘 새벽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아래에 쓰여 있는 글자수가 적은 것을 보면 아하메드 외의 다른 지방에서 날뛰는 종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발드는 이미 다른 의뢰를 승락한 터이라 손을 내저으며 거부를 표했다.



" 됐어, 이 늑대한테 막 일거리를 받은 참이야. "
" 오, 의외인데. "


 


이샤의 고개가 다시금 돌아가 백랑을 바라본다. 백랑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샤를 상대함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백랑에게, 환하게 웃음지어주는 이샤였다.



" 안녕? 난 이샤스 아그라몬디야, 앞으로도 많이 들려 줘. "



본디 통성명이란 상대가 이름을 말했다면 그 다음엔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백랑은 초면인 인간에게 자신의 갈기 달린 몸을 보여줬다는 데 대한 당황감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듯했다.
발드가 대신 말을 꺼냈다.



" 백랑이라 불러달라더군. "



그 말에, 이샤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 네 이름은 알려 줬어? "



발드는 술잔에 술을 채우고 들이키는 것을 반복할 뿐, 대답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샤는 한숨지으며 다시 백랑을 바라보고는 손바닥으로 발드를 가리켜 소개했다.



" 이 녀석은 가리에 발드, 본래 이름으로 불러야 옳겠지만 그냥 발드라고 불러. 이유는 묻지 말고. "



백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가득 웃음짓는 이샤의 태도에 점차로 긴장감을 풀어내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점은 있는 모양이었다. 입을 우물거리던 백랑은 이윽고 말을 꺼냈다.



" 저기, 어떻게 절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으시죠? "



이샤는 조금 놀라버렸다. 이 늑대는 인간의 체형을 지녔지만, 흰 갈기 때문에 심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망토로 얼굴을 가리려는 허겁지겁한 행동, 그리고 지금의 태도가 그것을 짐작케 해 주었다.
이샤는 고민했다. 효과적인 대답을 찾지 않으면 이 하얀 갈기의 늑대 인간은 평생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쩔쩔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고민은 잠시, 안성맞춤인 대답을 생각해낸 이샤는 곧장 입을 열어 그것을 말했다.



" 발드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독특해서, 이젠 놀랍기보다는 흥미롭기까지 하거든. "



발드가 술잔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 내가 왜 늑대 놈의 친구야. "
" 녀석아, 분위기를 좀 파악하면서 세상을 살아 봐라. "



티격태격하는 두 명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백랑의 입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이샤가 백랑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 그거야. "



백랑이 다시 움찔했다. 이샤의 손가락을 무언가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와 정반대의 의미였다.



" 네가 인간과 동급의 지능을 가졌다면, 생김새 따위로 하찮은 인간들에게 오그라들 필요가 없잖아. "



말을 경청하는 백랑의 눈이 말똥말똥 뜨였다. 새 지식을 획득한 우등생같은 모습이다.
그 앞, 술잔을 채우던 발드가 핀잔을 던졌다.



" 인간이면서 인간을 하찮다고 하다니, 너 그거 존엄성 모독이야. "



그 말에 이샤가 발끈했다. 그런데, 반발하려는 이샤의 말을 끊듯 발드의 말이 이어졌다.



" 게다가, 생김새란 확실히 중요한 거야. 사람들의 머릿골에 박힌 고정 관념이란 꽤나 무서운 거거든. 인간들 서로조차 미(美)와 추(醜)를 쉽게 구분지어 우열을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 범주를 훨씬 벗어난 늑대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를 활보할 수 있다고 생각해? "



극히 비관적인 어조였다. 백랑이 눈썹을 찌푸리며 화를 돋울 정도.
그 모습에 발드는 코웃음치며 말을 이었다.



"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도 안되어 어디 게을러터진 방범대한테 몽둥이 찜질을 당하겠지. "



이샤의 눈이 발드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코웃음 한 차례를 더 쳐냈고, 이후엔 술잔을 채우고 비우는 행동을 반복하기만 했다. 백랑은 부르르 몸을 떨어 분노를 발산했으나 로글을 때려잡는 발드의 강함,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이 깨어질까 하는 우려 때문에 섣불리 몸을 감정에 맡길 수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샤는 곧 발드에게 맞섰다. 표정은 아까 전과 같이 노려보는 눈빛이 아닌, 해바라기를 연상케 하는 활짝 핀 웃음이다.



" 그런 건 백랑의 장점으로 채워버리면 돼. "



발드는 술을 따르기 위해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려 이샤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의아함 반, 비웃음 반이 채워져 있었다.
이샤는 그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 잽싼 몸놀림이라던가, 굉장히 힘이 세다던가…이외에도 꽤 있지 않아? "



발드의 눈이 반쯤의 의아함을 지워버리고 비웃음에 채워졌다.



" 도둑 놈의 소질에 꼭 맞는 장점이군. "
" 그게 아니지. 가령, 인간으로서는 한계에 부딪히는 물리적 일을 도와준다던가, 마을을 대표하여 괴수의 습격에 맞선다던가, 충분히 넓은 범주로 생각해 볼 수 있어. "



발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반쯤 뒤로 몸을 넘기는 과장된 몸짓까지 보인다.



" 오, 이런 데서 친구와 가치관 차이를 나누게 되다니. "



이샤는 발드를 무시하고 시선을 백랑에게 향했다.
백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 속에서 복잡한 생각의 연쇄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샤는 두 손바닥을 펼치며 위로하려 들었다.



" 미안, 오늘 발드가 헛소리를 많이 하네. "



발드는 더 핀잔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오징어 다리 두 가닥을 질겅질겅 씹으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그것을 바로잡고자, 이샤는 박수 두어 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 자자! 심각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밤까지 실컷 마셔 보자. 더 가져올게. "



발드가 왼손에 볼을 받힌 자세로 질문을 던졌다.



" 장사 안해? "
" 점장이 없을 때에는 양심껏 돈을 내고 가는 것, 그것이 우리 주점의 법이지. "



말이 좋지 주인이 자리를 비운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가게가 어찌되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던 발드는 이샤가 가게를 관리하는 태도가 재미있었는지 실실대며 웃었다. 이샤는 그 모습에 살짝 눈썹을 찌푸리다가 문을 열었다.
주점 안을 꽉 들어찬 시끌벅적한 소리가 순식간에 새어들었다. 이샤는 재빨리 밖으로 나간 뒤 문을 닫고는 모습을 감췄다.
일시적으로나마, 방 안에는 다시 둘만 있게 되었다.
발드와 백랑은 처음 만남때보다 강렬한 어색함을 사이에 뒀다. 물론 그것은 백랑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도 없는 이 상황은 지나가는 누가 보아도 어색하다 느낄 것이다.


 


 


 


-


 


 


 


알사로스 탑.
탑 위를 덮었던 무지갯빛 연기는 반나절만에 모습을 지웠다. 그 대신, 밝은 달과 그 주변에 장식된 별이 한 폭의 그림같이 자리잡아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꺼풀을 걷어내자마자 환하게 내리쬐이는 보름달 세례, 화려한 장신구처럼 눈에 띄는 별빛 무더기!
헌데, 아비가 보인 행동은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 잤었나. "



주위를 두리번거려 본다. 장소는 탑의 철문이 눈앞에 보이는 발드의 침대였다. 주변엔 아비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침대의 주인은 벌써 오래 전에 외출을 한 모양, 예의 도둑 잡기를 실천하러 갔을 것이리라.
잠에서 깬 아비는 졸음이 남아 있는 몸을 이끌고 곧장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오늘 새벽부터 아침에 이르기까지 버섯구름을 뭉게뭉게 방출하던 연구실이었다. 소녀는 기지개를 펴서 졸음을 떨쳐낸 뒤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탑은 넓이로만 따지면 왠만한 저택을 쉽게 넘나들 정도여서, 걸음으로 원하고자 하는 방에 도달하려면 어느 정도 발을 재촉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연구실에 도달한 아비는 발을 내딛기 전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 안에 있었던 물건이 사라진 것이다. 실험 도구인 플라스크와 책상, 재료들은 건재했다. 없어진 것은 바로 바닥에 모이 뿌리듯 즐비해 있었던 쥐의 시체와 유리 조각이었다.
그렇게 바닥을 향해 시선을 보내던 중, 아비의 시야에 유별난 것이 들어왔다. 회색으로 깔린 바닥의 표면에, 걸음 한 단위마다 새빨간 흔적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채색된 물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말라버린 피다.
소녀는 문득 자신의 피가 아닐까 생각하여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렇게 곰곰히 생각하며 핏물의 근원을 탐색하던 중, 어느 순간 아비의 뇌리에 스쳐가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귀찮아하는 얼굴을 이끌고 세상 만사의 일을 하찮게 내려다보는 남자, 발드다.
아비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 쓸데 없는 짓을… "



대충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너무 과로해서 유리밭 위로 쓰러지는 자신을, 발드가 황급히 달려와서 받아준 것이다.
툴툴대던 아비는 발드가 자신의 생명을 구원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는 괜시리 화를 터뜨렸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지만, 소녀는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하등하게 취급받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아비의 뒤에서 덜컹 하는 철문 소리가 울렸다. 곧장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니, 복도 너머에는 잠시 후 발드의 검은색 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의적으로 등을 늘어뜨리고 피곤한 척을 하는 모습, 언제건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런 발드에 비해, 오늘의 아비는 어찌된 일인지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평소에 음식물 쓰레기보다 못하게 취급하던 발드의 맞이를 하려는 듯, 복도로 발을 내딛은 것이다.
허나, 소녀의 시선은 발드가 아닌 그 옆, 목덜미를 잡혀 있는 사람에게 머물러 있다.
아비는 그 사람을 상당히 특이하게 여겼다. 왠지 눈처럼 하얗더라니, 사람의 몸에 늑대를 연상시키는 하얀 갈기가 망토 위에 드러난 얼굴을 무성히 덮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원래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설정이어야 훨씬 옳겠지.
발드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왔다. 그러나, 아비는 자기 흥미 본위의 행동, 즉 백랑의 외양을 샅샅이 훑어보기만 할 뿐 인사는 온데간데 없었다.
발드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 이 늑대가 나로 보이냐? "



아비는 백랑을 살펴볼 때의 눈빛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싸늘함으로 발드의 시선을 응시했다. 순식간에 달라지는 태도에 발드는 차별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하지만, 아비는 애초에 상대를 존중해 줄 생각이 없었다. 소녀는 눈썹을 찌푸리는 발드의 행동마저 적당히 무시해 넘겨버리고는, 손가락으로 백랑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 애완 동물? "



잠자코 있던 백랑이 흠칫 놀라 아비와 눈을 마주했다. 주점의 때와는 달리 인간과의 어색함은 떨쳐냈는지, 아비의 말에 크게 당황했을 뿐 고개는 쳐든 그대로였다.
바로 옆, 발드가 고개를 흔들며 답한다.



" 보신용. "



이때, 소스라친 백랑이 발드를 향해 시선을 꽂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


 


 


 


탑의 철문이 눈앞에 보이는 넓다란 방.
그곳은 언제나 그렇듯 침대 하나만이 구석을 들어차고서 공간을 낭비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바닥에 늘어진 먹거리와 세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한적함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수인(獸人).
그 세 명 중에서, 아비가 먼저 대화의 장을 연다.



" 신기해, 인간의 말을 할 줄 알다니. "
" 그래봤자 평범한 사람들에겐 괴물로밖에 안 보이겠지. "



감자칩을 입에 문 발드의 비관에 아비가 살짝 웃음짓는다.



" 여전히 하찮게 보는 눈빛이네. "



둘의 사이에서 묵묵히 건포를 씹고 있던 백랑은 아비가 꺼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의아하게 표정지은 백랑에게 다시 한 번 아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건 그렇고, 발드는 간도 크구나. "



발드는 감자칩을 우물거리던 중 눈을 동그랗게 했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 반응에 아비는 안면 가득 놀란 표정을 띄웠다.



" 어라, 모르겠어? "



반응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자, 아비는 상쾌하게 드러난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오늘, 보름달이잖아. "



발드는 입 근육의 우물거림 운동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과연, 하늘에는 환한 달빛이 둥근 형상으로 지상에 내려오고 있었다.
아비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라이칸들이 송곳니에 생피를 묻히고 살육제를 벌이는 때. "



그 말에 발드는 흠칫하여 백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등을 굽힌 채 사육장의 개마냥 육포를 물어뜯는 모습 뿐, 광기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날뛸 기미는 먼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발드는 호기심을 품었다.
그것을 알아챈 백랑이 곧장 시선을 응시하며 말을 한다.



" 이제야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늑대 인간이 아니에요. "
" 뭐? "



이 반문은 아비의 것이었다. 때문에, 백랑은 시선을 아비에게 돌리고 다시 말했다. 물론, 아비의 나잇대가 어린 만큼 사용하는 말투 역시 변모했다.



" 나도 내가 뭔지 모르겠어, 고향이 어떤 곳이었는지도 모르거든. 먼 옛날의 과거는 단 한 가지도 기억나는 게 없어."



그 말에 아비는 턱을 손에 괴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유심히 백랑을 쳐다보았다. 영락없는 라이칸스로프다. 달빛의 내리쬠에 광기를 느끼지 못할 뿐, 백랑의 아무리 외양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늑대 인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 시선에 백랑이 부담을 느낄 즈음이었을까, 발드가 상황을 중재하고 나섰다.



" 그런 얘기는 됐고, 훨씬 중요한 일이 있어. "



심드렁한 대답이 아비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 지금 나에겐 달빛에 취하지 않는 늑대 인간이 제일 중요해. "
" 알았으니까 좀 들어 봐. "



아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져 발드를 향했다.
맘이 바뀌기라도 할세라 발드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 일단 이 늑대를 탑 안에 들인 이유를 설명해야겠지. "



발드는 백랑이 놓인 상황과 의뢰받은 내용을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을 경청하는 아비에게는 백랑이 로글의 씨앗을 훔친 대목에서 살짝 백랑을 노려본 것 빼고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설명이 끝을 맺은 뒤, 아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감상을 토했다.



" 저기,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혹시 엘프라고 말했어? "



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비는 쉽게 그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백랑이 발드를 거들었다.



" 사실이야! 그 토끼 같은 놈들에게 고깃덩어리가 될 뻔했어! "



엘프를 토끼에 비유하다니,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비의 눈동자로부터 쏘아졌다. 원래는 발드의 입에서 유래된 말이었지만, 아비에게 있어 그 말은 발드가 뱉으나 백랑이 뱉으나 똑같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 눈빛도 잠시, 아비는 엘프라는 말에 점차로 흥미를 느꼈다.



" 그거야 내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고…남은 문제는 철부지 발드가 늑대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것인데. "



발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그는 잠자코 앉아 육포를 뜯고 있는 백랑의 목덜미를 부여잡아 팔짱을 꼈다. 난데없이 목을 조른 팔뚝에 당황한 백랑은 입에 물고 있었던 육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 철부지라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이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



아비가 의외라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들자, 발드는 우쭐거리며 말을 이었다.



" 우선 아비, 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 아~ 빙빙 말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



아비가 신경질을 부리며 재촉하자, 발드는 팔짱낀 백랑의 목을 더욱 졸라매어 가까이하고는 대답했다.



" 우린 엘프들의 본거지에 쳐들어가기로 했어. "



목을 졸라매인 백랑의 고개가 휙 돌아가 놀란 표정을 보였다. 아비 역시 살짝 놀란 표정을 보였지만, 백랑의 기겁한 모습을 보자 곧장 비웃음으로 얼굴을 채우며 말한다.



" '우리' 가 아닌 것 같은데? "



발드는 손을 내저었다.



" 사소한 건 집어치워,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갈게. "



그 때, 아비는 엄지와 집게 손가락을 딱 소리내어 튕겨 쏟아지려 하는 말을 틀어막았다.
발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아비는 손가락을 튕긴 왼손으로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 저기, 난 승락했다는 말을 꺼낸 기억이 없는데? "



공격적인 어조. 허나, 발드의 얼굴에 떠오른 회심의 미소는 여전히 건재했다.



" 넌 나한테 빚이 있으니까, 협상 끝. "



아비는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뜻을 파악할 수 없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드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바라볼수록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이 아비의 미간을 좁혀갔다. 거기에까지 이르자, 발드는 씨익 웃어 아비의 화를 더욱 돋구었다. 그래, 있었다. 분명 오늘 아침, 얄미운 빚이 딱 한 가지 있다.
때문에 반발할 수가 없었다. 아비는 어쩔 수 없는 사실에 부르르 몸을 떨면서 오늘 하루동안만은 발드의 말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 옆, 백랑은 의외로 쉽게 승복한 아비의 태도와 빚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 가득한 표정을 발하고 있다.
한편, 발드는 목을 가다듬어 말을 길게 늘어놓을 준비를 마쳤다. 두 명의 인간, 아니 인간 한 명과 수인 한 명을 상대로 한 설명은 이제 막 서론을 떼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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