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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가들이 거리에 쭉 늘어서 있다. 사람들의 시선에 돋보이기 위한 쓸데없이 큰 간판들이 우스꽝스러운 활기를 띠고, 그것은 곧 거리에 전염되어 행인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그리고, 이가 반복되어 번화가라는 하나의 개성 있는 장소가 만들어진다.
이곳이 딱 그러하다. 지네발처럼 늘어진 가지각색의 간판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길을 거니는 행인들이 적은 곳이라면 이렇듯 상가들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허나 이 시각, 거리에서는 인기척 하나 귀에 담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의 달이 기울기 시작하는 새벽대의 시간이니까 말이다. 주위를 노랗게 태우던 등불 여러 개는 이미 불빛을 감춰 거리에 찬 한적함을 더욱 가득하게 했고, 겨우날 쌀쌀한 바람 덕분에 들이는 손님 수가 적어졌는지 대부분의 상가는 일찌감치 문을 닫고 잠을 자러 갔다.
그런데, 도깨비들이 거리를 활보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 위 어딘가에서는 한창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철컹 철컹.



이런 새벽이 되어서야 가게 문을 내리는 쇳소리와,



" 어휴, 이거 언제 한 번 고쳐야 할 텐데. "



하고 투덜대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들이다. 비록 시끄럽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소리였지만, 짙은 어둠깔린 새벽의 정적 사이에서 그것은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는 듯한 소음이나 다름없다. 다른 가게들은 밤중의 손님을 포기하고 밤잠을 설치러 간 데 비해, 어느 가게는 새벽 중 요란스럽게 문을 닫고 있다니?
독특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이유가 두 가지나 존재했다.
하나는, 이 가게가 종사하는 업종이 밤중의 극락이라 불리우는 주점이라는 것이다. 어둠을 초월한 새벽까지 문을 닫지 않은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주점 안쪽에서 투덜거리며 철문을 내리는 청년 한 명의 생김새다.
귀를 덮다시피 한 연두빛 머리칼과 조금 튀어나온 턱,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이목구비는 분명 피곤에 찌들어 있어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을 청할 것 같았지만, 입가에서 배어나오는 은은한 웃음엔 삶에 대한 만족감이 적당히 묻어 있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불만이 그닥 없어 보였다. 삶의 풍요로움을 즐기는 듯한 표정.
수많은 이들이 지니지 못한 그것을, 연두머리의 청년은 늘상 피곤이란 구렁텅이에서 몸뚱이를 굴리고 있음에도 감히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펴 주어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지속하게끔 만들어 준다.



쾅!



요란한 소리 끝에 철문이 내려갔다.
청년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하품 한 번을 길게 내뱉더니 곧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주점의 목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을 보였다.
생각해보면 이 곳은 특별했다. 청년은 문을 닫은 뒤 집으로 가지 않고 주점으로 들어갔다. 이는 주점을 집으로 삼아 취침을 한다는 것이다. 집과 주점을 혼용해서 사용한다면 건물 내부 어딘가에 개인용 침실은 아니더라도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한 세면실과 옷가지를 널어 놓는 베란다가 존재한다는 뜻, 특별하다 칭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로부터 약 일 분쯤이 지났을까, 어찌된 일인지 낮이 되기 전에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주점의 문이 다시금 끼익 소리를 냈다.
문 뒤에서는 아까의 연두머리 청년이 귀찮음 가득한 얼굴로 모습을 보였는데, 그는 손만 빼꼼 내밀고 표 같은 무언가를 문고리에 걸어놓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깜빡 잊어버린 일과였던 모양이다.
대롱거리는 표 같은 것, 거기에는 목탄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쓰여진 글자가 있었다.



' 케 토낫 '



이 지역의 통치국인 리갈 제국의 언어다. 열두 시 정각이라는 상징적 단어였는데, 이 때 다시 가게를 연다는 뜻이었다. 꽤나 늑장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주점들은 실제로 아침에 손님을 맞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열두 시 즈음에 문을 여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이 주점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새벽 늦게 잠을 자러 간 점장이 아침에 일어나게 된다면 상쾌한 기분으로 일에 임할 리 만무할 것이다.
…어쨌든, 오늘도 연두머리의 청년은 여차저차 문을 닫는 데 성공한 모양.
그 때문일 것이다.
거리에 다시 바람 소리만이 가득 차게 된 것은, 분명 한적함을 메우던 요란스러운 철문 소리가 사라진 것 때문이리라.
진정으로 도깨비가 튀어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길가 너머에서 그림자에 둘러싸인 인간 형상이 새파란 불꽃을 눈과 입에 휘감고 씨익 웃은 채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그만큼,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리란 허공이 바람에 갈라질 때마다 도깨비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게 만드는 묘한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도깨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만이 가득한 거리,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로 한적함을 밀어내는 한 마리 도깨비가 있다.
물론 진짜 도깨비는 아니다. 다만 그 발걸음의 주인이 그림자보다 깊은 농도의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힘 없이 허리를 늘어뜨리며 걸었기에 마치 도깨비 같은 느낌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등판에는 하얀 천에 둘둘 감싸진 길쭉한 무언가가 매여 있었는데, 천을 풀어내면 왠지 모르게 도깨비 방망이 따위의 요술 도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길을 거닐던 어느 순간 발을 세우고 시선을 왼쪽에 향했다. 그의 눈꺼풀 두 장은 방금 잠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한 듯 무거웠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방금 전에 문을 닫은 주점의 이름 '종말의 보고' 가 이 층의 자그마한 간판에 글자로 쓰여져 대롱거렸다. 술로 재산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정도로 돈이 넉넉치 않으면 종말을 각오하라는 의미였는데, 주점 앞에 우뚝 선 남자는 놀랍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이 남자와 연두머리의 청년은 구면이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겠다.



덜컹, 덜컹.



서로 아는 사이인 주제에, 남자는 민폐스러운 짓을 잘도 벌이고 있었다. 지금처럼 연달아 철문을 흔들거리는 등의 행동 말이다. 그의 졸린 눈덩이에 점차 흥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남자는 돌연 주먹을 철문에 내질러 캉 하는 소리를 울려내고는 입을 열었다.



" 이샤, 아침이야! 일어나라구! "



꽤나 요란스러웠음에도 주점 쪽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부러 반응을 안하는 듯도 보인다. 지금 그의 행동은 민폐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씨익 하는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 이래도 안 일어날래? "



그는 발을 뒤로 들어올리는 큰 동작을 취한 다음, 공을 다루는 것마냥 강하게 철문을 찼다. 캉 하는 쇠울림이 떠나갈 듯 거리에 울렸다.
남자의 졸린 얼굴에 급속도로 고통이 떠올랐다. 그 다음으로는, 그의 몸이 발차기한 자세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업자득이다. 그는 고작 철문과의 대결에서 패배를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남자가 신발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 즈음이었을까, 주점의 문이 열리며 연두머리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림과 더불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을 양 옆으로 가늘게 했다. 남자를 보통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 새벽에 왠 민폐람. "



그 말이 끝맺힐 즈음, 남자는 이미 일어서서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는 어깨부터 무릎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흙먼지를 흩어놓고는, 연두머리 청년의 짜증 앞에 웃음지은 표정을 내보였다.



" 민폐가 아니지, 이 주변에서 곯아떨어질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



이샤라 불리운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 그는 남자의 말에 주변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끝에 가서는 목 뒤를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어라, 많지는 않더라도 가게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꼭 몇몇 있었는데. "
" 네 오만한 줏대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니란다. "



이샤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코웃음까지 두어 번쯤 치며 대답했다.



" 지붕 통째로 뚫린 일 층짜리 탑이 거주지인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진 않군. "



남자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돌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방향은 분명 이샤를 가리켰으나, 이 경우에서 그가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서로의 앞을 가로막는 철문이었다.



" 그보다, 이것부터 올리고 이야기하자구. "



쇠창살에 가로막혀 바깥에 멀뚱히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은근 감옥에 수감된 죄수같이 보였다. 아니, 건물 안에 있는 건 나니까 죄수는 내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으로 지긋이 웃은 이샤는 퉁명스레 답했다.



" 내가 왜, 이 민폐 덩어리야. "



남자는 이샤의 잠을 방해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이샤는 말을 톡 쏘아붙힌 뒤 등을 돌리고는, 주점의 문고리를 잡아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남자가 쇠창살에 바짝 달라붙어 다급한 표정을 만면에 채웠다.



" 이봐 친구, 서로의 삶에 유익한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 없어? "



말하는 투가 꼭 길거리에서 가끔씩 볼 수 있는 선교사들과 비슷하다.
허나 그만큼 유별나고, 때문에 재미났고, 또 원체 장난스레 등을 돌린 행동이었기에 이샤는 남자의 말에 솔깃하는 체하며 슬쩍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쇠창살에 매달린 남자의 모습이 새장의 새처럼 보인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제야 이샤는 환영하는 밝은 웃음투를 앞에 보여주었다.



"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



철문이 한 차례 다시 울리며 위로 올라갔다. 이샤는 남자를 뒤로 하고 주점의 문을 활짝 열어 안에 들어갔다.
새벽의 주점은 불이 꺼져 낮밤의 활기를 잃어버리고 쓸쓸한 공기에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혼잡한 것으로 유명한 주점이었기에 더하게 느껴졌다.
이샤를 따라 들어온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검은색 상의를 벗었다. 외투같은 것이었는데, 실내에서 입기엔 꽤나 두터웠던 것이다. 상의를 어깨에 걸친 그는 이샤의 뒷꽁무니를 따라가다가 탁자 하나에 시선을 옮겼다.
어둠 속 희미하게 보이는 탁자 위엔 본디 있어야 할 술병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깔끔한 탁자와 의자 사이로 빛을 밝히기 위해 성냥 하나를 태우는 이샤의 모습에서 자기 가게를 꾸준히 꾸려나가는 정성이란 것이 강하게 풍겨나왔다.
남자가 탄식을 내뱉었다.



" 짜식, 여전히 공 많이 들이는구만. "



그 말이 끝을 맺자마자, 탁자 위 그릇에 놓인 양초 한 개가 붉은 색 모자를 썼다. 이샤는 손을 한 번 홰치는 것으로 성냥불을 끄고는 멋쩍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 아부는 집어치워. 그래서, 어쩐 일로 온 거야? "



남자는 의자 한 개를 멋대로 골라 쓰러지듯 앉았다. 그리고는, 아까 전과는 달리 확연하게 다른 어조로 답했다.



" 생활을 윤택히 만들고자 여기에 왔다. 말했지 않았나? "
" …그러면 확인 차 물을게, 누구의 생활이지? "



핵심적인 질문에 남자는 코를 후비며 대답하는 것을 지체했다.
그러나, 이후 내뱉는 대답에는 망설임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 당연히 이 발드 님의 생활이지. "



그 말에 이샤는 말을 잃어버렸다. 입을 다문 채 담담하다.
그 앞에서, 발드라 불리운 한 명의 남자는 거주창스러울 정도로 길쭉한 무언가를 등판에 매고 그것을 걸리적거리며 미친놈마냥 웃고 있었다.


 


 


-


 


 


작은 등불 아래, 의자 두 개가 탁자를 끼고 놓여 한 명의 남자를 떠받들고 있다. 나머지 한 개는 부재.
부재의 주인공인 이샤는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이제 돌아오는 중이었다. 왼손에는 왠 종이 다발이 한 움큼 쥐어져 있고, 오른손에는 등불 때문에 노랗게 광이 나는 매끈한 술병 하나가 보였다.
이샤는 의자에 앉자마자 탁자 중앙에 술병을 꽂았다. 그리고는 왼손의 종이 다발을 발드의 쪽으로 미끄러뜨리듯 던졌는데, 정작 발드는 술보다는 눈앞의 종잇쪼가리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종이 다발을 지폐처럼 쭉 나열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고, 이샤는 잠시동안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중 문득 생각난 듯 히죽거렸다.



" 발드가 새벽에 몸을 움직이다니, 재앙이 닥칠 징조로군. "



발드는 시선을 그대로 종이 다발에 두며 대답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것이 보였다.



" 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과 재앙이 연결될 수 있는지 의문이야. "
" 그렇다 치더라도 말야. 너, 한달 전부터 묘하게 일상이 바뀌었잖아? 무슨 일 있었어? "



발드는 대답 대신으로 종이 한 장을 이샤의 앞에 들이밀었다.
종이들 전부는 네모로 만들어진 틀 안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수배서였다. 발드가 내민 것엔 입이 양쪽으로 길게 찢어져 그 양끝에 큼지막한 어금니가 달려 있는 괴물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턱을 괴고 발드를 쳐다보던 이샤는 그 수배서에 눈길이 가자 아까 질문했던 것은 지우개 칠하듯 까맣게 잊어버렸다. 동시에, 놀라며 말했다.



" 그건 고대 식충 희귀종, 로글의 수배서잖아? "
" 그래, 이 녀석을 족쳐 삶의 윤택을 누려볼 생각이야. "



장난스럽게 말하는 발드의 목소리에 가벼움이 담겼다. 더한 것을 찾기 힘들 정도의 깃털 같은 느낌.
이샤는 그와 정반대로 어이가 없는 듯 손을 내저었다.



" 미친 놈, 로글을 족치려면 기사단까지 동원해야 할 걸. "



일러 주는 이샤의 말에도 불구하고, 발드는 내밀었던 로글 수배서를 하의 주머니에 꼬깃꼬깃 구겨넣고는 심드렁하게 표정지었다.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친구. "



그런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발드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것은 이샤가 손가락질하며 따져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됬다.



" 야, 수배서는 가져가는 게 아니야. 구입하는 거라구? "



주점은 술만 디립다 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가끔씩 괴수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사냥꾼이나 투사 등 별의별 사람들이 들렀기 때문에 늘 이러한 수배서들을 벽면에 몇 장씩 붙여 둔다.
발드가 들고 있는 종이 다발은 전부 그런 것들을 모아둔 것으로써, 통치국인 리갈에서 내려오는 물건인지라 반 강제적으로 부착해둬야 하는 이샤의 입장에서는 수배서를 돈을 주고 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요는 있었다. 수배 대상을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수배서가 없으면 보상금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 없는 펜과 마찬가지인 꼴이다.
물론, 발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이샤는 정 한 가지만으로 발드를 놓아줄 생각이 절대로 없는 것 같다.
발드가 화내듯 말했다.



" 아따, 보상금으로 갚으면 되지. 말했잖아? 서로에게 유익하자고. "



이샤가 콧방귀를 뿜었다.



" 내일 당장 로글의 이빨에 꿰뚫려 대롱거릴지도 모르는 놈을 어떻게 믿어? "
" 9 : 1. "



갑작스러운 말, 그에 이샤는 맑게 눈을 빛냈다.
웃기게도, 발드가 로글을 족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배분 비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니 단박에 주제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 택도 안되지, 반반씩 나눠야 정상 아냐? "



그 말에 발드는 발을 구르며 버럭 화를 냈다.



" 이게 개념을 잃었구만, 로글을 내가 잡지 네가 잡냐? "
" 후불을 하겠다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



담화는 그럭저럭 짧게 끝을 냈다. 결과는 단순했다, 물주인 이샤가 똥고집을 부리며 5:5를 주장하는 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헛웃음을 연발하는 발드의 얼굴에 원망이 오만가지로 떠올랐다. 검은색 상의를 다시 껴입은 그는 등판에 맨 길쭉한 무언가의 줄을 고쳐맨 뒤 주점의 밖을 향했다.
그 뒤를 이샤의 부름이 붙잡았다.



" 어이, 술 한 잔 하고 가지? 좋잖아, 새벽 술. "



발드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 너, 술 퍼마시면 내일 영업은 어떻게? "



이샤는 실실 웃음지으며 좌우로 손을 흔들었다. 발드의 말에 부정하는 태도가 영락없이 방금 전 발드가 로글의 사냥에 보인 근거 없는 자신감과 비슷했다.
손을 내젓는 이샤의 모습에 발드는 피식 하고 숨을 내뱉었다.



" 게다가, 지금 술을 마셔버리면 음주 사냥이 되어버린다고. "



이샤의 몸이 움찔했다. 동그랗게 치켜떠진 눈알이 얼굴에 돋보였다.



" 잠깐, 지금 사냥하러 갈 셈이야? "
" 물론. "



그에 대답은 없었다. 이샤는 그저 의아하다는 표정만을 띄우며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발드는 이샤의 표정을 쳐다보며 당연한 것 아니냐는 태도로 다시금 말을 꺼냈다.



" 뭐가 그리 궁금한 표정이야, 로글은 새벽 이외에는 활동하지 않잖아? "



이샤는 몸을 굳혔다. 그런 지식을 자신이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로글이란 식충은 대륙에 질펀하게 널린 흔한 괴수가 아니다. 때문에 서식하는 곳이라거나 특징 등을 알아내기는 거의 하늘에 별 따기와 마찬가지다.
헌데, 이샤는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한다.



" 아…그래, 넌 '가스펠' 이었지. 여전히 부러운 능력이군. "



발드와 자신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을 느낀 이샤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발드는 이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태도로 주점 밖을 향했다. 희귀종이라는 로글을 잡으러 간다는데, 가스펠(Gospel)이라 불리운 발드는 그것을 길바닥에 걷어차이는 돌멩이와 다를 것 없이 취급하고 있는 듯하다.
잠시 후, 발드가 문을 활짝 열자 비교적 따뜻했던 주점 안에 차가운 새벽 바람이 술잔 위의 내용물처럼 새어들었다. 급격한 온도 변화에 이샤는 굳힌 몸을 살짝 떨었고, 발드는 바깥을 향해 걸음을 내딛음과 함께 고개를 뒤를 돌리고 오른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 그럼, 내일 보자. "



닫히는 문 사이로, 발드의 중얼거림이 한 차례를 더했다.



" 아, 새벽이니까 벌써 내일이구만…. "



점점 작아지는 중얼거림과 함께 주점의 문이 덜컹 하고 소리를 냈다.
다시금 쓸쓸해진 주점에는 노오란 등불빛이 이샤의 아름다운 연두머리를 부드럽게 비추었다. 하지만, 탁자의 술병은 그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못하고 마개도 따이지 못한 채 쓸쓸히 남겨졌다.
결과적으로 취침 시간만 줄여버린 꼴이 되었다. 이샤는 입으로 무언가 투덜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점 '종말의 보고' 에 들어온 희미한 불빛이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였다.


 


 


-


 


 


아하메드 대삼림.
리갈 제국과 메노하샤크 공화국을 연결짓는 곳, 간편한 통행을 위해 인간들은 숲 중심에 대로 하나를 만들어 아하메드를 완전히 반으로 쪼개버렸다. 광활한 숲 아래서부터 위쪽까지 드러난 길은 하루 밤낮을 꼬박 걸어야 상대국에 도착할만큼 길었지만, 다른 방법은 배를 타거나 고생스럽게 산을 넘어야 하는 일 따위의 고역이 전부였다. 고작 하루를 걸어서 양 국가를 왕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는 물론이요, 무엇보다 상인들에게 천금과 같았다.
때문에 아하메드에 뻥 뚫린 길 중간중간에는 자연스럽게 두 개의 마을이 정착했다. 각각 리갈과 메노하샤크의 영향력에 놓인 두 마을은 고되어 지쳐 있는 상인과 여행자를 언제나 환영했고, 자연 친화적인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어 이따금씩 일반인들의 눈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마을 밖에는 한 마리의 로글이 괴성을 내지르며 숲을 배회하고 있다.
눈은 빨갛게 빛나고, 양쪽으로 길게 찢어진 입이 양 끝으로 삐져나온 큼지막한 어금니를 날카로이 세웠다. 그 주위와 몸통을 빈틈없이 감싸든 갈색 갑각은 마치 전쟁 성루의 철벽을 보는 듯하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웅장함과 공포감을 풍겼다.
로글은 왠지 미쳐 있는 듯했다. 새벽에만 깨어나는 특이 체질의 몸통을 숲 여기저기에 굴리면서 점차로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쓰러져가는 댓 개의 나무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궁시렁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로글이 미치다니, 별 꼴을 다 보는군. "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 한 명이, 큼지막한 석궁을 어깨에 짊어진 모습으로 떡하니 로글의 앞에 서 있었다. 거대한 어금니 앞에서도 태연히 말을 중얼거리는 그 사람은 바로 발드다. 뜬금없이 나타난 석궁은 등판에 천으로 싸여 있던 길쭉한 것인 듯 했는데, 거기에는 그 크기만큼이나 어울리는 큼지막한 화살 한 발이 이빨을 빛내고 있었다.
로글은 혼자서 모습을 드러낸 이 인간에게 빨간 눈을 한 점에 모아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로글 자신도 황당함과 의구심을 숨길 수 없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
그저 먹잇감 한 마리이다, 하고 생각한 로글은 곧장 입을 찢어 어금니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괴성이 흘러나왔다. 양쪽으로 넓게 찢어진 입은 그것만으로도 발드 한 명의 신체보다 월등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벌어진 입이 정면을 덮칠 찰나였다.
발드는 석궁을 앞에 겨냥해 미리 장전된 큼지막한 화살, 강노(强弩)를 발사했다. 발드의 몸이 강노 발사의 강력한 반동에 일순간 뒤로 휘청거렸다.
그런데, 바람을 가른 화살은 놀랍게도 로글의 입 속이 아닌 단단한 갑각에 둘러진 머리통을 향했다.



빠각.



기세 좋게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갑각과 맞딱뜨렸다.
철제 갑옷이라도 손쉽게 꿰뚫을 수 있는 크기의 화살이었다. 하지만, 발드가 지금 상대하는 것은 오우거(Oger)의 주먹도 거뜬히 버텨낼 수 있는 방어력을 지닌 로글이었다.
결국 화살은 갑각을 뚫지 못하고 허무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에 따라, 로글은 빨간 눈을 다시 한 번 빛내며 걸림돌 하나 없이 발드를 덮쳤다.
허나, 걸림돌은 분명 존재했다.
그 걸림돌이 효능을 발휘했을 때, 로글은 갑작스레 부르르 몸을 떨면서 마비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어금니 두 개가 우뚝 멈춰 발드의 양 허리 바로 옆 아슬아슬한 위치에 자리잡았다.
이상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발드는 여유로이 미소지었다.



" 로글을 사냥하는 법. "



발드의 말이 끝을 맺자마자, 부르르 떨던 로글의 몸이 갑작스레 아래로 푹 주저앉았다.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보는 로글의 시야에 강노 하나를 더 빼든 발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덧붙여, 발드는 허리춤에 대롱거리던 주머니 한 자루를 떼어내더니 매듭진 입구를 풀었다.
손가락 세 개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는 잠시 후 용도를 알 수 없는 붉은 가루 한 줌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화살촉 군데군데에 뿌렸는데, 그 작업을 실행하는 중 다시금 입을 여는 모습이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 신경이 넓은 것 때문에, 이마에 강한 충격을 주면 마비 증세를 갖지. "



발드는 석궁을 다시 한 번 앞에 겨냥했다.



" 제일(第一)의 약점은… "



발드는 말꼬리를 흘리며 석궁의 방아쇠를 눌렀다. 붉은 가루가 처리된 강노가 로글에게 쏘아졌고, 이번의 화살이 향한 곳은 머리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로글의 내부를 노렸다.
화살은 바람을 쪼개고 쏜살같이 로글의 입 안에 들어갔다. 콰직 하는 살 찢어지는 소리가 내부에 성공적으로 화살이 꽂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로글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뜻모를 괴성을 짧게 내지르더니 마비 증세를 멈추고 주저앉은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화살에 맞은 고통 때문에 신경이 회복된 듯했다. 로글에게 있어 그것은 고통이 아닌 단순 따가움 정도로 해석될 것이겠지만. 마비에서 회복된 로글은 눈앞의 발드를 향해 한 차례 분노의 괴성을 내지른 뒤 어금니를 다시 위협적으로 벌렸다.
그런데, 발드는 생명의 위협이 덮쳐오는 상황에서도 방금 전 화살을 발사한 행동을 마지막으로 멀뚱히 서 있기만 하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발드가 쏜 화살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대로였다. 상황은 발드가 예측한 길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쿵.



하고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로글의 몸이 다시 한 번 무너졌다. 흙먼지가 풀결 위를 덮쳤다.
아까 전과 같은 마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벌 떼에게 쏘이는 듯 고통스럽게 몸을 뒤척이는 로글의 행동이 그것을 증명했다. 한편, 발드는 이 모든 일을 예상했는지 로글을 처음 맞딱뜨렸을 때 지어낸 여유로운 미소를 아직까지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붕괴될 것 같지 않던 철벽의 갈색 성채에, 주홍빛 섬광 줄기가 번쩍 하고 새어나온 것은.
쓰러져가는 나무들 사이로 한 마리의 로글이 온 몸에 화염을 휘감은 채 몸을 뒹굴며 하늘 높이 울부짖었다. 그 앞에서는 발드가 쏟아지는 열기 때문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 로글의 위산은 활활 잘 타지, 기름 보듯. "



로글의 약점은 딱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발드는 꼬리를 들어올린 스컹크를 보듯 모든 걸 파악하고 행동하여 사냥을 성공시켰다. 이는 놀랍기보다는 신기한 일이었다. 돈 밝히는 사냥꾼의 느낌을 풀풀 풍기는 발드에게서는 지식을 충실히 섭렵하고자 하는 의지를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희귀종이라는 괴수를 신체로부터 우러나오는 '힘' 이 아닌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기술' 로 무너뜨린 것이다.
잠시 후, 이리저리 요동치던 로글의 몸통이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그에 따라 발드의 얼굴 앞까지 세력을 떨쳤던 열기 역시 점차로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허나 불꽃만은 여전히 하늘 높이 치솟았다. 거대한 로글의 몸통을 태우고 있기 때문일까, 불길은 꺼질 기미는 커녕 주변에 쓰러진 나무들에게 본체를 전염시키며 일대를 주홍빛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발드는 어쩐 일인지 여유에 가득 찬 얼굴을 급속도로 슬프게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딱한 것. "



발드가 말하는 대상은 오직 로글 하나 뿐, 주변에 널부러진 나무들이 아니었다. 로글의 꺼져가는 눈을 응시한 발드는 점차로 녹아 사라지는 거대한 신체를 슬피 올려다보고 있다.
왜?
갑작스레 나타나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든 주제에, 이제 와서 로글을 딱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살인한 사람을 제사지내주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지만, 발드는 순간적인 바람으로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설령 바람이었을지라도, 어떤 일반인도 로글이 죽어가고 있다고 해서 거기에 연민의 시선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 다음 생엔 인간이 되길. "



이 로글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서 수배에 오르기까지는 분명 무언가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발드가 아는 바로는 로글이 어금니를 휘두르는 대상은 오직 자신을 적대한 생물에 한정될 뿐, 세간의 소문처럼 눈을 맞딱뜨리기만 해도 난동을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로글은 어째서 괴성을 밥먹듯 지르며 마을을 향해 전진했을까? 이것의 해답이 발드가 슬퍼하는 이유의 중점이었다.
생각해보면 실로 간단한 것이 아닌가?
아하메드에 거대한 대로를 뚫고 마을을 세워 숲 군데군데에 상처를 새기는 그 '생물' 들. 이따금씩 마을을 거치는 '생물' 들 중 몇몇 별종은 숲 이곳저곳을 헤집기까지 하며 상처를 더욱 확장시키는 짓을 일삼는다. 로글은 자연 앞에 겸허할 줄 모르는 그 '생물' 의 특이함에 분노한 것이다. 발드는 그 '생물' 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기 또한 그 '생물' 과 같은 종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씁쓸함은 배로 찾아왔을 것이다.
인간에게 해를 당한 자연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실체가 되어 역으로 공격을 가한다. 미쳐버린 로글 또한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드는 당당하게 그것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는 눈물짓거나 하는 둥의 죄책감은 결코 갖지 않았다. 분명 자기 생각대로라면 삶 자체에 짐을 진 것처럼 자괴감을 가져도 부족할 마당인데, 이 발드라는 남자는 슬픈 표정을 배경으로 한 눈길만을 보냈지 자신이 죽인 로글에 대한 속죄는 단 일말도 한 것이 없었다.
로글에 대해 연민을 지녔으나 그것을 딱하게 생각할 뿐, 인간들에게 혐오감을 갖는다던가 하는 속죄엔 관심이 없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발드라는 남자가 표현하고 있는 미묘한 형태의 태도다.
뭐랄까…그것은.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그것을 작게 축약하여 인생의 일부분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하찮게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풍겼다.
이제, 그 느낌이 담긴 눈빛은 불꽃을 사그러뜨리는 로글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몸통도 아니었다. 치솟은 불꽃은 어느새 로글의 갑각과 내부 기관을 전부 녹여버리고 숲에 감도는 싸늘한 바람을 이용해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로글의 몸통이 종적을 감춘 뒤,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왠 초록색으로 잔뜩 물든 뼈다귀 하나였다. 아니, 뼈다귀라기보다는 만물의 근원, 인간들에게 있어 심장과 비교할 수 있는 활력 가득한 씨앗 형태의 모습이었다.
발드는 발걸음을 그 씨앗에 향했다. 지니고 다니기엔 꺼림칙한 물건임이 분명한데도 주우러 가는 것을 보면, 로글을 죽였다는 증표로 사용할 셈인 듯했다.
그리고, 마악 그것에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나뭇가지가 사삭거렸다. 그와 동시에 튀어나온 무언가, 아니 인간의 형상이 씨앗을 낚아채갔다.
돌발적인 상황을 맞이한 발드가 눈을 휘둥그레했다.



" 어? "



그것은 분명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늑대의 것 같은 하얀색 갈기가 전신에 붙어 흩날렸다. 물건을 낚아챌 때는 이족보행을 했지만, 꽁무니를 빼며 도망치는 지금 순간엔 영락없는 사족보행, 동물의 자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인간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힘든 특징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재빨랐다. 아니, 재빠른 정도가 아니라 껑충 뛰어올라 나뭇가지를 잡고 오르는 원숭이 같은 짓까지 보인다. 나무 위에 올라간 그것은 곧장 다른 나무 위를 타기 시작하면서 발드의 시야를 벗어나려 했다.
발드는 당황하여 양손을 갈무리한 뒤 석궁을 들었다. 더듬거리지 않는 손이 도망치는 형상의 뒤통수를 정확히 조준했다. 헌데, 손더듬 외의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화살이다.
보니까 화살이 장전되지 않아서 그는 허겁지겁 아무 화살이나 빼들었다. 허나, 석궁에 화살을 장착시킬 즈음엔 이미 형상을 시야에서 놓친 뒤였다.
발드는 형상이 사라진 나뭇가지 사이를 멍하게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 형상은 발드가 로글과 첫 대면했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계획적으로 튀어나와 씨앗을 낚아채갔다.
아니, 그보다 인간 같지도 않은 동물이 그 씨앗을 가져가서 무엇에 쓰겠다는 말인가? 그 생각에 발드는 더욱 억울해졌다. 마음 속 한 켠에 자리잡을 예정이었던 돈다발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먼짓덩어리로 변모해 나풀거렸다.


 


 


-


 


 


동이 트려 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붉게 쏘아지는 빛이 시간이 경과할수록 점점 농도를 더했다.
그것은 넘실거리는 바다의 푸른 색마저 붉게 물들였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높다란 절벽 역시 그랬고, 절벽 위에 깔린 풀밭의 꽃들도 새벽바람의 최후에 몸을 눕히며 연한 붉은 빛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절벽 위 풀밭의 중심, 크림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처럼 덩그러니 놓여진 한 채의 탑 역시 마찬가지다.
일 층짜리 탑, 아니 일 층밖에 남지 않은 탑의 지붕은 통째로 드러나 있어 그 내부에 햇빛을 받았다. 지붕이 있었을 것이라 유추되는 부분엔 이 층을 잇고 있었던 벽돌이 허리가 잘린 모습을 쓸쓸히 보였는데, 일 층 자체가 왠만한 민간 주택은 비교조차 거부할 정도로 큼지막해서 이전엔 탑이 꽤 높았다는 것을 짐작케 해 주었다.
절벽 반대방향, 즉 탑의 정면은 햇빛을 받지 못하고 기울기에 따른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입구의 철제 문을 꾹 닫고 있다. 문이 철제이기 때문일까, 전체적인 탑의 모습이 전달하는 느낌은 개방적인 것이 아닌 함부로 접근하면 안될 던전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지금, 탑 앞에 한 명의 사람이 접근했다.
검은색 옷, 등판에 천으로 대충 둘러싼 길쭉한 무언가로 보아 그는 발드였다. 그는 졸린 기운 가득한 실눈으로 문 앞에 다가가더니, 별안간 손바닥으로 문 표면을 소리내어 때리기 시작했다. 손등으로는 노크가 곤란한 재질의 문인지라 손바닥을 대신 사용하는 것이다.
두어 번 쯤 노크하고 잠시 기다리자, 탑의 문이 끼익 소리와 함께 살짝 열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그 누군가는 소녀였다. 푸른 색 장발을 지녔고, 졸린 눈을 부벼대고, 알 수 없는 퍼런 연기가 주변에 은은히 감도는 소녀 말이다.
소녀가 모습을 보이자, 발드는 힘없이 왼손을 펴 인사했다.



" 좋은 아침. "



서로는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내밀고 졸린 눈만을 부비는 것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잠에서 막 깨어난 게 아니라 밤을 샜다고 봐야 했다.
답답해진 것인지, 발드는 펴낸 왼손을 내리고 따지듯 말을 이었다.



" 좋은 점심, 좋은 밤. "



그 말에 소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의식을 또렷하게 하고는 힘껏 문을 밀었다. 문 자체의 무게가 꽤나 나가는지, 찰싹 몸을 붙여 밀어도 문은 느릿느릿 열릴 뿐이었다.
발드가 오른손을 문에 걸쳐 여는 것을 거들자, 소녀는 한시름을 놓고 문에 찰싹 붙어 말했다.



" 그건 뭐야? "



축 늘어진 몸을 이끈 발드는 그대로 소녀를 지나쳐 탑 안에 들어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탑 안은 무진장 넓었다. 넓은 방과 좁은 방이 각기 수십 개로 연결된 이 탑은 입구에서부터 큼지막한 방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공간이 넓은 데 비해 내용물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입구의 방에는 바닥을 들어찬 붉은 카펫과 침대 하나만이 쓸쓸히 놓여 있었다. 서랍 등의 생활 필수품은 전부 다른 방에 들여놓았는지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 탑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밀려오는 공허감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입구의 방은 정말 침대 하나만 설치되어 있었다. 그 외엔 뻥 뚫린 천장으로 보이는 여명의 하늘만이 괜찮은 볼거리를 이룰 뿐이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천장은 바깥의 경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어떤 조치를 했는지 바람 한 점 새어들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긴 발드는 소녀의 질문을 무시하는가 싶더니, 터벅터벅 걷던 도중 목소리를 흘렸다.



" 좋은 아침, 해서 반응이 없길래 암호인 줄 알았지. "



소녀는 닫히는 문을 자신이 닫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하려는지 문고리를 잡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소녀는 오히려 문에 떠밀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내팽개쳐지듯 몸을 휘청거린 소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답했다.



" 헛소리는 됐고, 벌써 일이 끝났어? "



발드는 등에 매인 석궁을 침대 밑으로 집어던져 나뒹굴게 한 뒤 그대로 잠을 청했다. 소녀의 질문 따위,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에 분개한 소녀는 대응으로 무작정 화를 내는 대신 슬쩍 살을 꼬집는 방법을 택했다.



" 설마 발드가 괴수 하나 못 잡는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



자존심을 꼬집혔음에도, 발드는 침대에 뉘인 채로 몸을 뒤척거리는 태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뒤척거림 끝에 반대로 몸을 뒤집어 엎는 모습까지 보이자, 그제야 소녀는 성질을 부렸다.



" 에잇, 말을 좀 해 봐라! "



그 말에 발드는 대답 대신 엎어진 모습 그대로 왼손을 들었다. 천장을 향한 왼손이 검지만을 핀 모양을 만들었다. 무언가를 주장하려는 모양.
소녀는 의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 뭐야? "
" 한 농부가 80년동안 소작농을 지었습니다. "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야기체에 소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발드가 들어올린 집게 손가락이 묘하게 반발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농부는 두뇌가 너무나 명석해서 한 해의 품삯을 80년 후에 몰아서 받기로 했지요. "



이야기 자체부터가 억지성을 풀풀 풍긴다.



" 그리고 마침내 80년! 농부는 환호했어요. 무려 보리를 백 이십 삼만 가마에 콩은 이천 칠백 육십 구만 되를 받지 뭡니까. 농부는 80년동안 굶은 것을 메울 수 있다는 현실이 기뻤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



발드는 코웃음 한 번을 쳤다. 의도적인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조차도 어이가 없는 듯 뿜어내는 것 같았다.



" 도둑맞았답니다. "
" 엉? "



소녀의 졸린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앞으로 발드의 이야기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 알았냐? 도둑맞았다구요. 그래서 농부는 다시 80년을 농사지은 다음 잘 먹고 잘 살았단다. 이야기 끝. "



그 농부는 드래곤이냐…하고 생각해버린 소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발드가 꺼낸 이야기는 단순 헛소리가 아니라 무언가의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소녀는 곧 머리를 굴려 곰곰히 추측의 늪에 빠져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고 늪을 증발시켜버렸다. 강하게 부정적인 태도였다.



" 잠깐, 수배 대상을 도둑맞았단 말야? "



대답 대신으로 들려온 것은 코 고는 소리였다.
자는 척이라 생각한 소녀는 곧장 넓은 방을 달려 침대까지 도달한 다음 발드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발드는 정말로 피곤한 것인지 곯아떨어져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는지 눈동자에 열기를 더해 평온을 종잇장처럼 태워버릴 준비를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두덩이에 꽉 들어차 있던 졸음의 기운이 그 열기에 재로 화하여 날아갔다.
독하게 마음먹은 소녀는 특단의 조치를 실행했다. 눈을 부릅뜨고 양 손을 허리 위쪽 허공에 차례로 올리니,



푸쉬이-



하고 소리내는 불꽃이 손바닥을 감싸 환한 등불과 같은 형태를 띄었다. 등불이라기엔 성질이 조금 거칠었지만. 소녀의 주위에 조용히 감돌았던 퍼런 연기가 붉게 변모하여 격렬하게 요동쳤다.
방 안은 순식간에 열기로 가득 찼다. 튀어오를 것 같은 불꽃의 느낌이 소녀의 눈동자에 담겨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게 했다.
소녀는 손을 뻗었다. 침대보에 불길을 번지게 하여 혼쭐을 낼 작정이었다.
그때였다. 고의인지 잠꼬대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태연하게 잠을 자는 발드의 입으로부터 쏟아졌다.



" 내일…뒤질 줄…알아라…도둥놈아아…음. "



그 중얼거림에 소녀는 그만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리며 뻗은 손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이었다. 무시당했다는 이유 한 가지로 이런 짖굳은 짓을 벌이려 하다니, 소녀는 자기가 참 많이 졸렸었나보다 하고 대충 넘겨짚고는 다시금 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코는 골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이 곤히 자는 얼굴이었다. 잠자코 바라보고 있자니, 소녀는 돌연 내일 발드가 기상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가능성 여부가 막연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고로, 소녀는 발드가 쉽게 기상하기 위한 선물 한 가지를 준비하고자 마음먹었다.
과정은 단순했다.
이번엔 소녀의 주위로 감도는 퍼런 연기가 초록빛,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자연에 친화적인 녹빛을 띄어 차분히 가라앉았다. 붉은 색일 때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손을 뻗어 침대보를 붙잡은 뒤 입을 여는 것이었다.



" Plant(식물). "



주문을 왼 순간, 소녀의 주위로 차분히 가라앉았던 녹빛 연기가 짧게 요동쳤다.
그것만으로 작업은 끝이 났다. 자신이 선물을 준비했다는 사실에 저절로 기분이 들뜬 소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깡총깡총 뛰며 푸른 색 장발을 찰랑거리는 것이 꼭 어린애의 모습이었다.
허나, 소녀는 잠을 자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소녀는 마법사, 연구의 목적에 달성하기 전에는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하는 둥의 직업근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소녀의 발걸음이 향한 방은 노오란 불빛이 들어와 있었고, 그 안에서는 무언가의 꺼림칙한 연구가 진행되는 듯 새까만 연기가 하늘을 솟았다.
한창 잠을 잘 시기의 나잇대임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눈동자는 말똥말똥 뜨여 그 자체만으로도 광채가 나는 듯했다. 잠을 안 자서 꿈나라에 찾아온 위기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모양.



일 층의 탑 알사로스는 그렇게 아침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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