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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다. 사랑이 넘친다는 크리스마스였지만, 코를 에이는 추위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이런 날씨에 바깥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린다는 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요즘 들어 영 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어떻게든 소재를 구하고자 취재차 나오긴 했지만, 볼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는 내 의지를 마구잡이로 흔들어댔다.
  

 ‘그냥 들어가 버릴까?’

 

 나는 어깨에 멘 가방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토요일까지 편집부에 넘겨야 하는 원고가 걱정이긴 했지만, 이러다 덜컥 감기라도 걸리면 그건 정말 곤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자니 그것도 참으로 대책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냥 집에나 가서 따뜻한 커피나 마실까? 그래 어떻게든 머리를 짜내면 뭐라도 나올지도 몰라.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책상에 앉아서 머리만 쥐어뜯었을 뿐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귀찮음과 찬 공기를 가로질러 여의도 공원에 나와있는게 아니겠는가.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찡그러트리며 나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지만 여기저기 사람들이 꾀나 모여 있었다. 2012년부터 시작된 이벤트가 이제는 제법 서울의 축제 같은 것이 돼버려서 이제는 해외토픽에도 나올 정도고 외국인들도 많이 참여한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외롭기는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가져온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몇 방 찍었다. 일찌감치 경계 태세인 경찰의 모습과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는 남자 무리를 서넛, 그리고 길거리 노점상들의 모습.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어묵꼬치가 무척 맛있어 보여 그것도 한 장 찍었다. 물론 하나 사먹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어물어물 먹다보니,
 
 어묵 국물이 참 시원하니 맛있다. 물론 조미료 맛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에 따뜻한 국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금세 기분이 넉넉해진다. 나는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어묵값 천원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무엇이 그토록 간절해서, 도대체 외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다들 이렇게 이곳에 모여드는 걸까? 세상에는 혼자서도 즐길 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영화도 볼 수 있고, 컴퓨터 게임을 보거나 여행을 하거나. 예전처럼 어둑어둑해지면 할 게 없던 시절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그들은 왜 현대 문명의 이기를 재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돈, 혼자서는 이만큼을 즐길 수 있다면 두 사람은 반밖에 즐기질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저기 저 사람이 들고 있는 커피도 나눠 먹으면 반 밖에 마실 수 없고 나눠먹기가 민망해 두 잔을 산다면 역시 돈이 두 배가 들어간다. 차를 타도 한사람이 더해진 만큼 연료비도 더 들어가고야 만다.

 

 게다가 혼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자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고 내가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내 주위의 친구들을 봐도 여자 친구들한테 붙들려 쉬지도 못하고 주말을 날려버리는 녀석들을 보면 정말 안쓰러울 뿐이다. 게다가 그녀의 마음에 들고자 항상 노심초사, 술을 마시다가도 여자 친구 전화에 소환되듯 자리를 떠나고. 그런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톡왔숑]
  

 주머니에서 앙증맞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무치는 존재의 외로움으로 나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예쁘장한 김슬기짱의 대기화면 위로 친구 녀석의 ‘어디냐’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언제 봐도 안구가 정화되는 슬기짱의 얼굴이 그녀석의 흉측한 프로필 사진으로 더렵혀지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대화창 화면을 열었다.
  

 [왜?]
  

 추워서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힘겹게 문자를 써서 보내자 미리 입력이라도 해놓은 듯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왜긴,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
  

 술이라니, 무척이나 마음이 동하는 제안이었지만 저녁에는 오늘 취재한 것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혹시 좋은 소재라도 떠오르면 그 감각이 사리지기 전에 서둘러 정리해 놔야 하니까.

  

 [나 오늘은 바빠]
 [웃기시네. 어차피 여자 친구도 없으면서 집에만 있을 거 아냐]
 [나 지금 밖이다]
 
 아까 먹은 어묵국물 때문인지 콧물이 찔끔 났다. 훌쩍거리며 차가워진 콧물을 비강으로 빨아들였다.

 

 [밖? 어디?]
 [여의도공원]

 잠시 녀석의 카톡이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자꾸 흘러나오는 콧물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그렇게 외롭냐? 형한테 말하지. 그럼 내가 여자 몇 명은 소개시켜 줄 텐데]
 [무슨 헛소리. 취재하러 나온 거야. 그리고 너도 여자 친구 없잖아. 일단 자기 스스로부터 구원하는 게 어때?]
 [인마, 나는 인마.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랄까.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달까. 올해는 기어코 혼자이지만 내년 크리스마스엔 김태희 같은 여자랑 사귀고 있을 테니 걱정 마셔]
 

 ‘으으 추워.’
 

 난데없이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뼈가 사무쳤다.
  

 [김태희 같은 여자 좋아하네. 어디 치마라도 두른 사람이라도 한번 데려나 와봐라]
 [내가 못할 것 같냐?]
 [응]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긴 이 녀석이 내 친구들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여자라는 생물체에 익숙한 녀석이었다. 위에도 누나가 둘씩이나 있다고 하고. 김태희는 둘째치더라도 친구들 중에 여자 친구가 생길 법한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었다.

 

 [여의도 공원이라고 그랬지?]
 

 티격태격 하며 별 의미 없는 말들이 몇 번 오가자 녀석이 뜬금없이 장소를 되물었다. 아마 휴일에 할 일이 너무 없는 나머지 여기까지 찾아올 모양이었다.
 
 [왜? 오려고? 아까 말했잖아 나 오늘 취재한 것도 정리해야 되서 바쁘다고]
 [어허, 친구. 하루쯤 논다고 세상이 망하냐? 내일 해도 되잖아]
 [이번 주 내내 허탕 쳤단 말이다. 이번 주 토요일까지 원고 넘겨야 하는데]
  

 하지만 나의 의견은 접수하지 않겠다는 듯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이따 간다]
 [오지 말라고. 날씨도 겁나 추운데 그냥 집에 있어]
 [싫어]
 
 어이 내 말 좀 들으라고. 나는 어느새 사람이 많이 들어찬 공원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다들 추운지 발을 굴리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기도 하고 친구하고 술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럼 술은 네가 사라]
 [...]
 [왜 싫어?]
  

 다시 보채어 물었지만 녀석에겐 대답이 없었다. 정곡을 찌른 셈인가. 아마 아킬레스건을 바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번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먼저 만나자고 한사람이 술값을 내는 건 우리들 사이에선 불문율에 가까웠다.

 

 [아 몰라, 어쨌든 이따 퇴근하는 데로 갈 테니까 기다려]
 

 한동안 말이 없길래 그만 포기한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불쌍한 녀석. 술값 내는 것보다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게 더 비참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누구에게나 그리고 나에게도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은 역시 심장이 비비꼬여드는 시간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니까.
 
 나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추위에 잔뜩 목을 움츠린 채 차가워진 얼굴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코언저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먹먹했다.
 
 다시 주변을 살폈다. 카메라를 앞세운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KBS, SBS, MBC 공중파들도 보였고 그 외 여러 방송국이 나와 있는 듯 했다. 벌써 멘트를 따고 있는지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 서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나에게도 말을 걸어올까 싶어 그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축제의 참여자는 아니었다. 앞에도 말했지만 나는 관찰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거리로 뛰쳐나온 불쌍한 인간으로 TV에 출연하기는 싫었다.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원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말하자면 도대체 이런데 나올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멀쭉한 훈남도 있었고, 솔로인 이유가 명확해 보이는 그러니까 남자가 봐도 얼굴이 썩 아름답지 못한 남자도 있었다. 물론, 세상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우리 사회에선 외모가 기준미달이면 다른 요소를 평가받을 기회마저 박탈되어 버린다는 게 문제였다. 비단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 따위는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여자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축제의 첫 해에는 남자만 드글드글 하다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명성을 얻으면서 여성참여자들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 남자 많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참여자 수가 점차 느는 걸 보면 그만큼 이 시대에 외로운 사람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부끄럽게도, 아니 부끄러운 게 아니지. 나는 당당하다. 다만 아직 사랑을 겪어보지 않았을 뿐,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되는 감정으로 지정되는 것이라면, 나는 아직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 그렇게 애절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혹시 그런 감정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경험해본사람은 다시 그리워 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감정이 강렬한 것이라면 사랑을 찾아 헤메이는 이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삐리리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된 듯 여기저기서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올해는 다들 휴대폰 알람을 잘 맞춰 온 모양이었다. 알람이 울리면 행사가 시작이란 뜻이었다. 오후 3시. 첫해에는 알람이고 뭐고 상황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올해는 나름 체계가 잡힌 모양새였다.
 
 “사랑합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어났다. 저 앞에선 어떤 남자가 여성에게 장미꽃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장미처럼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여자는 당황한 듯 안절부절해 보였다. 친구들이 옆에서 뭐해 어서 받아, 하며 부추겼지만 여자는 혼란의 구덩이에 빠진 듯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연말에 외로움이 사무친 나머지 여기까지 나왔으면 찬물 더운물 가릴 바는 아닐 텐데 여자가 아직 덜 외로운 모양이었다. 남자도 대충 그럴 듯하게 생겼는데 말이다.
 
 “우와.”
  

 저쪽 방향에서는 방금 커플이 탄생했는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참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저렇게도 다들 고백하고 순식간에 커플이 되다니, 나 같으면 창피해서 도망칠 텐데 다들 용기가 대단했다.

 

 어느새 손까지 잡고 활짝 웃고 있는 크리스마스이브 급조 커플의 모습을 한 장 찍었다. 이런 인연이 얼마나 이어질까. 크리스마스 이브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달래고 나면 이용가치가 떨어져 버려지는 건 아닐까? 아님 둘만이 소중한 추억이 될까?

 

 ‘음, 이거 괜찮은데?’
 
  난 서둘러 수첩을 꺼냈다. 그래 솔로 대첩에서 만난 연인의 유통기간에 대해 쓰면 좋을 거야.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까? 사람의 내면을 보지 않고 단순히 첫인상만으로 이뤄진 인연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그들은 어떤 사랑을 하게 될 것인가? 그들이 헤어지는 모습을 그리면 어떨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연인의 유통기간은 어때? 크리스마스 효과라고도 불러도 될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보니 남자친구라고 사귀기로 했던 남자는 다시 보니 세상에 둘도 없는 찌질남이고. 이건 서로 마찬가지 그러니까 내가 미쳤지 하고 서로가 서로를 아찔해하면서 다시 평상시에 자신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거야.

 

 나는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것을 종이에 옮겼지만 이따 친구 녀석을 만나기 전에 잠깐 카페에 들려서 정리해도 되고, 일단은 떠오르는 생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이 생각이란 게 편도행 열차라서 한번 끈을 놓아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때 내 시아에 뭔가 수상쩍은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뭔가 소중한걸 지키려는 듯 속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채로 일정한 장소를 오가고 있었다. 키는 작은 편이었고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그의 얼굴은 꾀나 살집이 있어 보였다. 겨울이라 두꺼운 옷 속에 감춰져 있지만 옷을 벗겨보면 그 안에도 분명 푸짐한 살덩어리들이 출렁이고 있을 것 같았다. 뭔가가 맘에 안 드는지 인상을 팍 쓴 채로 여기저길 쏘아보는데 이런 사랑이 넘치는 장소에 와서 저런 심각한 표정을 지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순간 그 남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이것저것 행색을 살피느라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가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회피했지만 남자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곧이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젠장, 괜히 이런 데까지 와서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나에겐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는지 그냥 옆을 지나쳐버렸다. 그리곤 곧바로 내 뒤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있던 여자에게 다가갔다. 내가 아니라 저 여자를 바라본 거였군. 나는 속으로 작게 안도하며 그 남자가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여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듯 여자에게 고백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흠, 저기 시간 괘, 괜찮으시면 저랑 차 한 잔만 해주십쇼.”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여자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솔직히 내가 봤을 때도 그 남자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입고나온 차림새나 외형적인 조건들로 봤을 때 여자가 승낙할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일행이 있어서요.”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선 사람을 외모로밖에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저런 남자의 외모를 좋아할 여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남자 앞에 선 여자는 불행히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음침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왜? 못생긴 남자는 아예 기회조차 없는 거야?”
 “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 씨발, 개 같은 년아. 내, 내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갑자기 남자가 욕을 하며 여자를 밀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품속에서 꺼내들었다.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이질적인 물건에 몸서리를 쳤다. 칼이었다. 칼을 마주한 여자도 쓰러진 채 비명을 질렀다. 칼이라니.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래서 나는 잠시 동안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과연 여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이렇게 칼까지 뽑아들 일인지 자문해야 했다.

 

 “나, 나도 조,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싶었어. 잘 살아보고 싶었어. 그, 그런데 뭐? 내가 취직도 못하고 집에만 있는게 그렇게 아니꼬아?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어? 취직 못한 게 내 잘못이야? 대학도 모,못나오고 이렇게 사는 게 다 내 잘못이냐고? 나도 잘 살고 싶다고. 떵떵거리고 싶다고.”
 
 남자가 울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목소리도 울먹이는 것이 이미 정신이 반쯤 돌아버린 상태인 듯 했다. 다행히 남자가 나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을 들고 있는 남자는 만고불변, 세계 공통으로 위험한 존재였다. 남자는 그 후로도 뭐라고 더 중얼거리며 여자를 향해 다가섰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자는 놀라 엉금엉금 물러섰지만 남자가 다가오는 속도보다 빠를 리가 없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꺼라고.”
 
 어떻게 해야 할까? 겨울이라 추울 텐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혹시나 하고 나는 남자가 든 칼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장난감 칼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칼이 칼이 아닌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칼은 굳건히 금속 특유의 번들거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투박한 부엌칼이었지만 평소 주방에서 보던 그 칼의 느낌이 아니었다. 거리한복판에서 보는 칼은 뭔가 상당히 괴이했고 섬뜩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깝게 그들의 옆에 서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 남자의 뒤쪽에 서있었던 탓에 잘만 파고들면 남자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저 칼은, 저 칼은 어떡하지. 시퍼렇게 번쩍이는 칼. 저 칼을 어떡하지.
 
 카메라가 접근했다. 누군가가 경찰을 불러온다며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경찰이라, 경찰이 오면 다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저 남자가 나를 향해 돌아서지 않기를 빌며 가만히 서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 애써 외면하려던 나의 눈이 쓰러져 있던 여자와 눈과 마주쳤다. 여자는 잔뜩 얼어붙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살려 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남자는 어느새 여자의 발밑까지 다가선 상황이었고, 경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 상황에서 말도 안 되지만
 
 성큼 남자의 뒤로 다가섰다. 움직이는 내내 털이 곤두서서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더 지체했다가는 여자에게 큰일이 생길 것 같았다. 눈앞에서 여자가 찔린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평생 후회될 것 같았다. 한 발짝 나서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고 원망할 것 같았다.
 
 “덮쳐버려.”
 

 거의 남자에게 다가섰을 무렵, 어떤 멍청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이런 젠장. 나는 황급히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남자도 그 소리에 내 존재를 알아챈 듯 악의에 찬 얼굴로 칼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나 역시도 집에서 글이나 쓰는 입장이라 호신술이니 제압 술이니 이런걸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불행스럽게도 남자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칼에 팔이 베인 것인지 팔목 부분이 화끈거렸다. 꾀나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옷이 한 번에 베어져나갔다.
  

 “으아악.”
 

 팔이 베었다는 공포감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놈의 팔을 붙잡았다. 녀석은 나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듯 바둥거렸다. 예상외로 녀석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나는 녀석에 팔을 붙잡은 채 볼썽사납게 바둥거릴 뿐이었다.
 
  “도와주세요.”
 
 이대로는 뭔가 사단이 나겠다 싶었다. 녀석을 제압하지 못하면 녀석의 무지막지한 분노는 나를 충분히 난도질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이제는 여자를 구해야한다는 목적의식보다는 내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꼴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근처에 서있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몇몇 남자가 달려들어 녀석의 몸을 붙잡았다. 녀석은 끝까지 악다구니를 부리며 저항했지만 장정이 셋이나 달라붙자 마침내 칼을 빼앗기고 바닥에 뒹굴었다.

 

 “와아.”
 

 근처에 서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붙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뭔가에 이렇게 베여 본적은 처음인지라 상처부위가 더 쓰리고 아프게 느껴졌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발로 저 멀리 차버렸다. 잠시 후 경찰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이거 놔, 이거 안 놔?”
 

 경찰은 쓰러져 있는 남자의 팔을 등 뒤로 해서 수갑을 채웠다. 하지만 남자는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쳤다.
 
  “조용히 안 해!”
 
  아마 형사인 듯 사복을 입은 경찰이 녀석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형사의 말에 남자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아니 사실은 다물었다기 보다는 소리를 지르던 것 대신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남자가 경찰에 이끌려 공원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아픈 팔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쓰러져 있던 여자도 좀 안심이 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 네, 뭐 좀 베이긴 했지만요.”
  

 나는 대답을 하며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상당히 미안해하는 표정이... 음, 어딘가 김슬기짱을 좀 닮은 얼굴이다. 하지만 난 흔들리지 않는다. 김슬기짱은 나의 영원한 정신적 우상, 이뤄질 순 없지만 그런 이유로 영원할 수밖에 없는 나만의 그녀였다. 단지 조금 닮았다는 이유로 나는 흔들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자가 계속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내 눈을 뚫어버릴 듯 내 눈동자를 응시 해온다. 그녀의 시선이 내 심연을 바닥까지 긁어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흠, 흠.”
 
 나는 조금 당황해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오오, 잘 어울린다.”
 
 누군가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내 뱉는다. 나는 왠지 컥하고 가슴이 막혀왔다. 하지만, 어이 여보게들. 난 솔로를 탈출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네. 그리고 나는 혼자여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의지는 입을 통해 밖으로 전해지질 못했고 나는 더욱 당황스러워져서 부끄럽게도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이었다.

 

 “애인 있으세요?”
 
 

 뭐? 나는 느닷없는 그녀의 돌직구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이 여자는 뭔가 범상치 않은 여자가 분명했다. 방금까지 그렇게 큰일을 당하고도 이 여자는 어찌도 이리 대범하단 말인가.
  

 “사궈라, 사궈라.”
 

 내가 대답을 못하고 쭈뼛거리자 이번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쳐대기 시작했다. 마침 사건을 취재하던 방송국 카메라가 나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잡는다. 분명 나의 시뻘개진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잡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나는 취재를 하러...’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는 어쩔 줄을 몰라 계속 쭈뼛거렸다. 나는 다시 올망졸망 나를 바라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일행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여자는 이미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에 레이저를 단 채 나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지, 나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안간힘을 다해 적절한 해결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쪽팔리지 않게 자리를 벗어날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냥 도망치자니 카메라가 찍어대는 판에 전국에 찌질한 모습이 있는 대로 다 드러날 것 같고. 가만히 대답도 안하고 서 있자니 너무 소심한 것 같고.

 

 “어머.”
 
 그런데 여자가 놀라는 소리를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자의 반응이 의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여자는 잠시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근처에 상황을 정리하던 경찰이 있었다.
 
 “죄송한데요, 저분이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다치셨습니까?”
 “네, 저 분이.”
  

 여자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그러자 경찰이 날 잠시 쓱 바라보더니 어디론가 무전을 쳤다.
 

 “일단 응급차를 불렀으니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세요. 그리고 경찰서에 와서 조서를 작성하셔야 합니다.”
 
 나는 경찰에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분도 경찰서에 오셔야 한다는 말에 그녀는 내가 치료 받는 걸 보고 같이 경찰서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친구 녀석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주변의 웅성거림과 방송국의 인터뷰요청에 두서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허접하지만 오랜만에 소설이랍시고 나름 길게 뽑아봤습니다.

한 동안 글을 안 쓴 탓인지, 글이나 문장도 엉성하고, 이래저래 제멋대로 인 것 같아요.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의도 공원에서 있었던

'솔로대첩'이 연례행사가 되서 해마다 하게 된다는 설정하에

최근 미국에서도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흉기난동의 이야기를 넣어봤습니다.

나름 밝은 분위기의 글을 써보려고 했는데 다 쓰고 읽어보니 여전히 뭔가 어두운것 같고

쓸데 없는 사족을 우걱우걱 집어넣은 것 같아서 민망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들은 모두 연말연시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그럭저럭 자 살고 있습니다.

?
  • profile
    윤주[尹主] 2012.12.28 21:25
    인간미, 희망같은 게 있어 밝아보이는걸요. 잘 읽었습니다 ㅎ

    '사람이 외롭기는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란 문장에서부터 일관된 주인공의 증언, '사람이 외로운 시대'라는 말에서 감흥이 돋네요. 예기치 못한 행운이란 결말도 연말 분위기 어울리게 드라마틱하고요

    접속사를 전부 쳐내버리면 문장에서 보다 색다른 느낌이 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profile
    시우처럼 2012.12.28 23:25
    검토하면서 접속사를 상당히 쳐낸것 같은데 아직 많이 남아있네요.
    다시 보니까 접속사가 빠져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되고 산듯해지는 무장이 많네요.
    예전에도 접속사 많은건 윤주님에게도 또 다른 분에게도 지적을 받곤 했는데
    그땐 그래야지 했다가도 오랜만에 써보니 폭풍망각하고 또 습관이 터져나온듯

    생각해보면 제가 접속사를 자꾸 쓰는 이유가
    문장과 문장의 연결에 자신이 없어서일까요?
    문단의 흐름이 끊기는 느낌때문에 자꾸 접속사를 쓰는 것 같아요.

    아무튼, 다음번에 또 쓰게 된다면 작정하고 접속사 제로의 글을 써봐야겠어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12.30 05:32
    접속사를 쓰는 건 젓가락질이나 손톱물어뜯기같은 습관인 거 같아요. 저도 의식하면서도 계속 쓰게 되고;;
    접속사 없는 글은 좋은 아이디어같네요 ㅎ
  • profile
    예스맨... 2012.12.29 17:06

    재밌게 봤습니다. ㅋㅋ
    후... 인간이 외로운건 인간이기 때문이죠... 아니, 사실 하나의 필멸적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혼자가 되리라는 것을, 나 스스로 조차 잃어버리리라는 것을 아니까... 있는 기회에 좀 더 목말라 하는 거죠...
    우울하네요...

  • ?
    카디스 에트라마 디 라이제르 2012.12.29 17:06
    보너스 포인트를 받아라. 네게는 이 포인트를 받을 자격이 있다.
  • profile
    시우처럼 2013.01.01 02:59
    성직자들은 그러고보면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양아치 성직자들 말고요

    평생 고독을 음미하잖아요?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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