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0 22:46

프리라이더 (2)

조회 수 246 추천 수 1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베른스크 사람들은 대부분 독실한 제국 종교회 신자였다. 조상 대대로 내려져온 신앙은 종교회가 유입되자 아무런 저항 없이 자취를 감췄다. 신정관 티르빌은 그 베른스크 사람들 가운데서도 훨씬 더 독실하고 열성적인 신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제국 수도에서 종교회 교리와 사상을 직접 수학한 바 있었다. 종교회는 그를 신정관으로 임명하고, 출신지에 성전을 세우고 신앙 기반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티르빌은 기꺼이 그 제안에 따라 고향인 보름에 내려와 성전을 세웠다.


 한편 야나바는 팜파냐 출신이었다. 그녀 민족은 제국의 병합 시도에 철저히 저항했고, 제국 정책은 물론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팜파냐 족은 다민족 국가인 제국 내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자들이었다.


 따라서 티르빌이 야나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야나바의 태도는 안 그래도 그녀를 고깝게 여기던 마을 사람들을 부채질했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도 무릎꿇지 않을 듯 고고한 바로 그 태도 말이다.


 요한이 내심 불안하게 두 사람, 즉 티르빌과 야나바의 충돌을 지켜본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수습 기사니 뭐니 떠들고 다녀도 요한도 천성이 베른스크 사람이요, 한적한 시골 마을 어린애였다. 조용하던 마을이 말싸움과 주먹다짐으로 시끌벅적해지는 걸 그는 바라지 않았다. 상황은 분명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가는 듯했지만.


 그러나 한참 뒤, 두 사람 간 설전은 요한이 생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혼은 신이 준 고귀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팜파냐 인들의 믿음이지. 육체는 영혼이 거하는 곳이요, 영혼을 물질 세계로부터 보호하는 갑옷이 된다. 고귀한 영혼에게 예속된 탈 것이다. 영혼은 육체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 그것은 길리엄의 영육이분설이 아닌가! 바로 그렇네. 우리 영혼은 성스러운 신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니, 갈고 닦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걸세. 반면 육신은 더러운 것이요, 욕망의 근원이니 절제하고 억눌러 신의 섭리와 목적에 봉사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째서 그대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천하게 여기는가? 예컨대 그대들은 청소하지 않은 낡은 집에 들어가 살면서 그대들 몸은 티끌 하나 묻지 않고 청결하기를 바라는가? 그럴 순 없다. 영혼이 순결하고자 하면 우선 그 육신이 청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육신 안에 영혼이 거하며 영혼이 그 육신을 다루어 의지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치열한 설전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점잖은 토론이 진행되어갔다. 뜻밖인 건 야나바의 태도였다. 티르빌이 내세우는 정교회 교리를 무작정 부정하고 나설 것이라 생각했지만, 야나바는 자기 민족 고유의 신앙에서 정교회 교리와 유사한 면을 먼저 끄집어냈다. 정교회와 유사하지만 그 표현만이 다를 뿐인 팜파냐의 신앙에 티르빌은 이미 반쯤 매혹되어 있었다. 야나바는 자신과 티르빌이 동의한 그 유사성을 기반에 놓고, 다만 팜파냐 신앙이 정교회와 견해를 달리하는 몇 가지 쟁점들을 비교하듯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티르빌은 야나바가 꺼내놓은 쟁점들을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반박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명백히 그녀의 의도대로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신기한 건,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티르빌과 마찬가지로 야나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단 것이다. 이상함을 깨달은 건 요한을 비롯해, 조금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한 사람들 몇몇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야나바는 마치 노래부르듯 제 교리를 암송했다.


 "신은 지상에 그 의사를 전하려 영혼을 창조했고, 영혼은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육체를 구했다. 또한 육체는 반려를 찾아 스스로 부족함을 채우며, 이들 한 쌍은 다시 필요를 위해 온갖 짐승을 길들여 벗으로 삼았다.

 이로써 지상에 온전히 창조가 이루어졌으니, 창조는 곧 신의 의사가 우리의 모자람에 의해 자연스레 사방 만물로 전달되어 실현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육신을 통해 질서가 이 땅 위에 섬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혼은 우리가 받은 것이요, 우리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지만, 육체 없이 우리는 지상에서 고귀한 신의 질서를 관철하진 못했으리라."

 "..."

 "어떠한가? 그렇지 않은가?"


 야나바의 질문에 티르빌은 침묵했다. 머리는 잠들었고 혀는 돌처럼 굳어 뻑뻑했다. 자신이 숱하게 외웠던 교리문답이 그 여자 앞에서는 한 줄도 생각나지 않았다. 티르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야나바가 믿고 경배하는 신은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티르빌이 침묵하자, 야나바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걸 보자 야나바는 꺄르르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 모두들 그렇게 얼빠진 표정들이지? 자,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된 거 같으니 피차간에 목이나 축여 보도록 할까? 이봐, 드웬!"


 주방에서 벙찐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드웬은, 야나바가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야나바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드웬은 화가 난다기보다 쑥쓰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기는 힘든 노릇이다.


 야나바는 선술집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드웬에게 물었다.


 "여기 모인 분들 전부에게 한 잔씩 대접하려면 얼마나 들지? 이거면 충분한가?"


 야나바가 내민 건 제국 금화 한 개였다. 드웬은 야나바 앞에서 눈에 띄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처음 야나바가 들어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은전 예닐곱 닢이면 족합니다."

 "좋아. 내가 전부 대접하지. 대신 좋은 술로 충분히 내올 것. 보답으로 값은 후하게 처주겠다."


 야나바가 내민 것을 드웬은 두 손으로 받았다. 야나바는 드웬이 내민 손 위에 은전 열 닢을 놓았다. 모두 값어치 있는 제국 은화였고, 그것도 가장 순도 높다는 입센 토르뵐 페르냐고프 1세 치하 인장이 박힌 것이었다. 드웬은 입이 쩍 벌어져서 다물지 못한 채 창고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순박한 그들을 향해 야나바가 외치는 소리가 선술집 안에서 울려 퍼졌다.


 "축제다! 준비가 미흡해 보잘것없지만, 모쪼록 다들 기꺼이 즐겨 주시길!"

 "축제다! 축제!"

 "뮬리나! 마을 사람들을 모두 데려와! 돼지를 잡아야겠어! 그리고 칠면조도!"


 야나바에게 호응하는 목소리가 군중 여기저기서 일제히 터져나왔다. 요한은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그의 시선이 야나바의 눈과 마주쳤다. 자신을 보고 있단 걸 깨닫자, 야나바는 요한을 향해 살짝 눈웃음지었다. 요한은 질겁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그런 그를 보고 야나바는 피식 웃었다. 요한은 더더욱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웅크렸다.


 분명 그 얼굴은 눈에 띄게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
  • profile
    yarsas 2012.12.20 23:22
    보통 또래의 남자보단 여자들이 더 일찍 철이 든다지만, 역시나 야나바가 압승이군요. 빨리 요한이 멋지게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12.21 00:13
    주인공에 대한 응원이 필요합니다. 이어질 화들을 보면 아시겠지만요;
  • profile
    Yes늙은조카Man 2012.12.21 01:59
    잘 읽었습니다... 진짜로 정독함..ㅋ 그냥 따로 잡념을 여기에 더하고 싶지가 않네여 1화도 그렇고...
  • profile
    윤주[尹主] 2012.12.21 06:31
    아마 아직까지 나온 내용이 너무 적기 때문은 아닌지...차후 귀한 의견 주셨으면 좋겠네요 ㅎ

  1. 『1999년 6월 20일』타임슬립 로맨스! 장기일【17화】

    Date2013.01.01 Category By♀미니♂ban Views417 Votes1
    Read More
  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기억해줄래 - 18. 밝혀지는 관계

    Date2013.01.01 Category By클레어^^ Views490 Votes1
    Read More
  3. [후일담] 어린왕자

    Date2012.12.30 Category By다시 Views428 Votes1
    Read More
  4.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Date2012.12.28 Category By시우처럼 Views571 Votes1
    Read More
  5. 사랑은 마약

    Date2012.12.28 Category By시우처럼 Views451 Votes1
    Read More
  6. 프리라이더 (3)

    Date2012.12.28 Category By윤주[尹主] Views493 Votes2
    Read More
  7. [진짜 오랜만이네요 ㅠㅠ]기억해줄래 - 17. 일훈의 고백

    Date2012.12.26 Category By클레어^^ Views342 Votes1
    Read More
  8. [밀린 숙제/가보지 않은 곳] 프로비던스, 스완 포인트 묘지, 흐림

    Date2012.12.24 Category By욀슨 Views376 Votes1
    Read More
  9. 현실과 꿈 아저씨편-19

    Date2012.12.24 Category By다시 Views661 Votes2
    Read More
  10. [일종의 독후감] 보지 않은 책에 대한 감상문 : 옥타비아 버틀러,<야생종>

    Date2012.12.23 Category By윤주[尹主] Views340 Votes1
    Read More
  11. 이데아 4화

    Date2012.12.23 Category By모에니즘 Views250 Votes1
    Read More
  12. 『1999년 6월 20일』타임슬립 로맨스! 장기일【16화】

    Date2012.12.22 Category By♀미니♂ban Views223 Votes1
    Read More
  13. [단편]패스트푸드

    Date2012.12.21 Category Byyarsas Views260 Votes1
    Read More
  14. 프리라이더 (2)

    Date2012.12.20 Category By윤주[尹主] Views246 Votes1
    Read More
  15. 현실과 꿈 아저씨편 - 18

    Date2012.12.19 Category By다시 Views310 Votes2
    Read More
  16. 거울 방

    Date2012.12.17 Category By비밀의수 Views353 Votes1
    Read More
  17. 반죽

    Date2012.12.17 Category By덧없는인생 Views353 Votes2
    Read More
  18. 이데아 3화

    Date2012.12.17 Category By모에니즘 Views254 Votes3
    Read More
  19. 방관자.0 (스토리)

    Date2012.12.17 Category By사설_ Views395 Votes3
    Read More
  20. [단편]머리카락

    Date2012.12.15 Category Byyarsas Views421 Votes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130 Next
/ 13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