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동상

by 욀슨 posted Oct 1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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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은 허구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단체, 행위나 기타등등은 역시 모두 허구입니다. 




일어나자마자 나를 감싸는 건 지독한 한기였다. 사방에는 서리에 덮힌 고깃덩어리가 갈고리에 걸려서 주렁주렁 널려 있었다. 소나 돼지와는 다른 형태의 고깃덩어리들. 저 시체 같은 조명도 그렇고, 무슨 냉동 창고인 게 분명했다. 방금 전만 해도 나는 디저트 와인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래. 제정신도 아니고 평판도 바닥에 가깝지만 입맛 하나는 고급인 졸부한테 초대받아서.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것이 차라리 술통에 가까워 보이는 놈이었지. 요리는 훌륭했고, 술도 서빙도 모두 훌륭했다. 하지만 지금 입에 남은 건 지독한 갈증과 떫은 뒷맛뿐이었다. 추위에 덜덜 떨다가, 밑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옷은 왜 벗긴 거야?


“젠장......”

걸어가서 문을 살폈다. 밖에서 잠그는 구조로 되어 있었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잠겨 있었다. 그 동안에도 내 몸은 계속해서 차가워지고 있었다. 코끝도, 발가락이나 손가락 끝도 이미 남의 몸 같았다. 소리를 질러봤지만, 아무도 오는 것 같지 않았다. 뭔가 부수고 나갈 게 없다면 이대로 죽게 되겠지. 필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내 눈에, 고깃덩어리가 잡혔다. 이미 여러 부위 도려내서 썼는지, 통나무나 다름없는 상태의 것들도 많았다. 다행히 냉동창고의 문은 샌드위치 합판이었다. 이걸로 자물쇠 부분을 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 이딴 곳에서 얼어죽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를 갈고리에서 끌어내렸다. 너무 차가워, 손바닥 가죽이 통째로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깃덩이를 들고, 팔을 크게 젖히고, 있는 힘껏 자물쇠를 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한번. 두번. 세번. 시뻘건 얼음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자물쇠를 칠 때마다, 온갖 상스러운 말이 입에서 기어나왔다.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빌어먹을. 팔이 거의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아플 때가 되자, 갑자기 쩍 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그건 문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바닥에 둥근 것이 굴렀고, 나는 그것과 눈을 마주쳤다.

차고, 딱딱하고, 얼어죽은 눈이랑.

나는 비명을 질렀다. 철저하게 유린당해 있었고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쨌건 그건 사람이었다. 손에 힘이 풀렸고, 바닥에 나머지 부분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딱 한번 저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 누군가 문을 실수로 열어놔서 바닥에 떨어진 고양이나 낼 법한 소리. 조금만 더 소리가 둔탁했다면 비슷할지도 몰랐다. 바닥에 죽어가는 피부가 달라붙는 것도 모르고, 나는 주저앉아 뱃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그러다가 뒤에 있는 것들을 봤다.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돼지나 소랑은 좀 크기가 다르다고 생각했지. 기억이 무의식의 수면 위로 불쾌한 거품을 뿜어올렸다.

'이건 야생 버섯과 아티초크를 곁들인 갈비 요리죠.'

'무슨 고기인가요? 하하, 갈비 요리라고 하셨는데 어딘지 닭고기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식사 뒤의 즐거움이죠. 다음은-'

나는 남아있지도 않은 내용물을 게워냈다. 그리고 놈들이 어떤 식으로 재료를 취했을 지 생각하자, 또 다시 구역질이 치밀어 올렸다. 하지만 역겨움보다도, 공포보다도 추위가 더욱 강했다. 나는 다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단조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칠 때마다 시뻘건 얼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언제 흘렸는지도 모를 눈물은 빠르게 식어갔다. 이제는 욕도, 말조차도 나오질 않았다. 또 그렇게 자물쇠와 함께 절망적인 씨름을 한 뒤 부옇게 된 시계를 헤치자, 문은 살짝 우그러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나는 쥐고 있던 통나무를 봤다.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금이 간 것이, 한번 더 썼다간 절망적인 꼴을 보여줄 게 뻔했다. 입가의 지저분한 자국을 닦으며, 나는 바닥에 떨어진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통나무를 하나 더 집어왔다.

한참 뒤, 나는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은 지하실이었고, 아무도 없었다. 온 몸이 심각하게 가려웠다. 거울을 보면 온통 잿빛이 되어 있겠지. 앉아서 피가 날 때까지 몸을 긁다가, 나는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멍청한 놈들, 밥먹고 술 먹을 돈은 있어도 CCTV 설치할 돈은 없었던 모양이지. 나는 단단하게 굳어서 몽둥이나 다름 없는 고깃덩어리를 집어들었다. 몇 번의 총성과, 수 분의 난투극 끝에 나는 경호원의 머리채를 쥐고 있었다. 바닥에는 권총과 집기가 뒹굴었다. 그는 머리를 심하게 얻어 맞아서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후두부의 출혈로 보아 몇 분 살지도 못하거나, 살더라도 평생 침대에 누워 있어야겠지. 하지만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그의 목을 졸랐다. 목뼈가 부러지는 게 전해지고, 그의 몸에서 마지막 온기가 빠져나갈 때가 되어서야 손을 뗄 수 있었다. 나는 바닥에 있는 권총을 집어들고, 여전히 벌거벗은 채로 계단을 올랐다.

어차피 선은 넘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고, 동족까지 죽였다. 똑같이 갚아주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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