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26 04:57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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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나타난 혜인이의 모습은, 검은색의 뭔가 옛날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레이스가 잔뜩 붙은.. 게다가 혜인이의 머리도 학교에서의 검은 머리가 아닌 원래의 은발이라서, 완전히 '무도회장' 분위기였다. 혜인이가 원래 예쁘긴 하지만, 이런 옷을 입으니까 정말 잘 어울린다. 옷이 날개라는 걸까.


"남자애랑 데이트라는 거.. 처음이니까. 좀 꾸며봤어."
"그 옷.. 뭐야?"
"엄마가.. 생전에 입었던 옷이야. 엄마 말로는.. 남자를 유혹할 때 입었다는데. 내가 입어본 건 처음이야. 나.. 어떤거 같아?"


역시 마녀의 옷이라는 건가. 이런 옷을 새로 사려면 장난 아니게 비쌀텐데.


"혜인이.. 원래 이쁜데, 지금은.. 뭐랄까, 공주님같아!"
"공주님.. 이라니. 나한테 그런건 안 어울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 지 몰라도, 나한테는 혜인이가 아름다운 공주님이니까."
"정말.. 이야? 거짓말하면.. 혼나, 윤민이."


내가 혜인이한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혜인이는 마녀라서인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혼난 적도 많으니까.


"나..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 윤민아."
"아냐. 내가 예쁘게 보는 게 아니라, 혜인이는 예쁘니까."
"나.. 그런 애 아니지만.. 어쨌든, 고마워."


혜인이도 그런 얘기를 들은게 기뻤던지 살짝 미소짓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혜인이는 착하고 예쁜 애가 맞으니까. 다른 애들이 혜인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만 바랄 뿐.


혜인이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이쪽을 쳐다보는 게 눈에 걸린다. 고등학생 여자애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보기는 쉽지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니까 많이 부담스러운데. 그리고 혹시라도 윤화라던가 서연이라던가한테 들키게 되면 곤란한데.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날도 좋은데다가 누가 놀토 아니랄까봐 사람들이 꽤 많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예상대로 버스에 올라타니까 앉을 자리가 없었다. 문제는 버스 안에도 시선이 이쪽으로 다들 쏠려있다는거. 드레스 입은 여자애 처음 본건가.


"소 곱하기 소는 소♬ 소곱하기 소곱하기 소는 소♬ 소곱하기 소곱하기 소곱하기 소는 소♬"


요새 라디오 광고들, 좋게 말하면 쉽게 꽂히고 나쁘게 말하면 유치하다. 저게 쇠고기 광고란다. 하긴 사람들이 저 중독성 있는 노래를 듣고 다들 '소' 하나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른바 '전파송'이라는 것들이 사람들 취향을 많이 가리긴 하지만 사람들한테 기억시키기에는 딱이니까.


내가 어렸을 때,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지금 어른이라는 건 아니지만. '뚫훍뚫훍뚫 따다다'라던가 '팥죽팥죽팥죽팥죽 머쉬룸 머쉬룸' 이런게 묘한 중독성을 줘서 인터넷에서 인기몰이를 했었단 말이지.


그런데..?


"..아아악! 이 여자가 사람잡네!"


갑자기 혜인이 옆으로 웬 아저씨 한 사람이 쓰러졌다. 도대체 이건 또 뭐야.


"혜인아, 왜?"
"이.. 사람이, 아까 내 몸을 막 만지고 그랬어."
"나쁜.."


지금도 버스에 저런 치한들이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유정이를 처음 만난 것도 그 때쯤이었지. 그런데 이 아저씨 낯설지 않은데.


"넌.. 그때 그.."


맞아. 유정이한테 몹쓸 짓을 한 바로 그 아저씨야. 그런데 똑같은 짓을 또 하다가 당하다니, 상습범이네.


"그렇지 않아도 잘 만났다, 네놈. 그 때 버스에서 뛰어내렸을 때 얼마나 아팠는데. 너같은 놈이 버스에 더 이상 타지 못하게.. 아아아악!"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인이를 건드린 댓가를 제대로 받는구나. 이번에도 또 버스 밖으로 튕겨나가버렸네. 인과응보며 자업자득이야.


"괜찮아.. 혜인아?"
"나.. 혼자 살다 보니까 이런거 많이 겪었어. 밤에 밖에 나갔을 때도 이상한 사람들 가끔 만나기도 했고. 당연히.. 다들 무사하진 못했지만."


그런데 혜인이를 가만히 보니까, 혜인이 표정이 별로 안 좋다. 왜 그런거지.


"혜인아. 왜 그래? 어디 아파? 혹시 아까.."
"아냐. 그 때.. 마도서 찾느라 많이 무리했나봐."
"마도서 찾을 때 어떻게 했기에.."
"기억.. 안 나? 내가 그 때 수호천사..로 변했던거."
"아.."


맞아. 내가 그 때 힘이 쫙 빠졌던거. 난 설마 그 수호천사가 혜인이라는 생각은 정말 못 했었는데. 뭐 덕분에 혜인이랑 친해질 수 있긴 했지만.


"설마.. 그 모습으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닌거야?"
"그래도.. 사람 눈에 띄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으니까. 정 뭐하면 기억을 지우기도 했고."


하긴 그 수호천사 모습으로 있을 때도 '꿈'으로 위장하기도 했으니까. 사실 꿈이 하니라 정말로 했지만.


"그래서.. 그 때 마력을 많이 소비했나봐. 피곤해."
"혹시 어지러우면 나한테 기대도 되니까."
"고마워.. 그러고 싶었어, 윤민아."


혜인이가 그동안 많이 지쳐있을 테니까. 이렇게 나한테 기댄 혜인이도 귀엽다. 그러니까 다른 애들이 혜인이같은 애한테 가진 편견을 버려야 한다니까.


"Hello people! I'm a Space Dog♬ Not first one, but the only one♬"


이 노래가 Space Dog이었던가. 세계 최초로 우주로 간 생물인 강아지를 추모하는 노래. 가사가 왜 영어냐 하면 원래 원곡이 있는데 그걸 프레이아가 리메이크해서 불러서 그랬다고 한다. 얼마전에 한국에도 누가 우주로 갔다는데..


혜인이는 나한테 기댄 뒤에 잠이 들어있다. 혜인이도 그동안 많이 피곤했던 것일까.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라고 생각할때쯤, 안내방송이 들렸다.


"띵동. 이번 정류장은 어린이대공원입니다."


휴. 이제야 어린이대공원인가. 이제 혜인이 깨워야지.


"혜인아. 일어나. 대공원 다 왔어."


혜인이를 깨우고 나서 버스에서 같이 내렸다. 다행히도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는 표정이 괜찮아진 것 같다.


"괜찮아, 혜인아?"
"응.. 이제 괜찮아."


오늘이 놀토이기도 하고, 벚꽃이 피기도 해서 어린이대공원은 아직 아침인데도 사람이 장난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어린이대공원이라는 곳은 남녀노소 안 가리고 입장료가 무료니까.


이 어린이대공원이라는 곳은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정문에서 한참 걸어간 것 같은데 놀이공원이 아직 안 보인다. 안내지를 보니까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놀이공원까지는 아직 한참 가야 하니까, 어제 권밝힘 녀석이 여자 모습으로 나타난 얘기를 해볼까. 혜인이가 혹시 뭔가 알고 있을까.


"혜인아. 나.. 어제 이상한 거 봤어."
"이상한 거라니..?"
"내가 아는 애 중에서 권밝음이라는 애가 있는데, 남자애야. 내 동생 윤화의 친구인데, 걔가 여자를 많이 밝힌다고 해서 일명 '권밝힘'이라고 불리는 애야. 그런데.. 걔가 나한테 갑자기 솔로부대를 대표하면서 하렘메이커를 처단한답시고 칼 손잡이같은걸 꺼냈는데, 그게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처럼 손잡이에서 빛이 나는거야. 그걸 막 칼 휘두르듯이.. 휘둘렀어. 다행히도 한 대도 안 맞았는데."
"잠깐. 칼 손잡이에서 빛이 나는 걸 휘두른다면.. 설마..?"


혜인이가 혹시 뭔가 알고 있는걸까. 권밝음에 대해.


"혹시.. 뭔가 생각나는 거 있어?"
"아냐. 일단 하던 얘기 계속해 봐."
"그런데 문제는 어제.. 걔를 또 다시 만났는데, 걔가.. 자기 능력이 폭주했다면서, 여자애로 바뀐 채로 징징대고 있는거야. 여자애가 된 걸 숨기느라 진땀뺐다면서.."
"역시.. 그랬구나. 그 애.. 윤민이가 한 얘기가 맞다면, 능력이 폭주한 게 아니라.. 능력을 사용하면서 성별이 '여자'로 결정된 거야."


잠깐.. 뭐라고? 능력을 사용하면서 성별이 '결정' 된 거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성별이.. 결정됐다니? 무슨 얘기야?"
"화이트 나이트.. 한 800년전 쯤엔가, 실수로 '화이트 엠프레스'라는 걸 만들었던 연금술사가, 영주한테 크게 데여서 그 영주의 친위대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일명 '화이트 나이트' 라고 불렸어. 형태는 다르긴 하지만 그 친위대의 일족이 대대로 '빛'을 특이하게 다루는 능력이 있어."
"그러면.. 그 밝음이가 그 화이트 나이트인가.. 그거야?"
"결정적으로, 화이트 나이트들은 태어나서 성별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양쪽 성별의 특성을 다 가지고 있어. 그리고 자기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사춘기 때에 자라난 환경에 따라서 성별이 결정이 되는데.. 문제는 능력을 사용했을 때에는.. 자기가 자라난 환경이 아니라, 빛을 다루는 형태로 능력이 결정되기 때문에 가끔 의도하지 않은 성별이 될 때가 있다고 들었어. 남자로 자라났는데 여자로 결정되었다거나, 그 반대가 되었다는 얘기를 가끔 들었어. 그래서 아예 화이트 나이트들은 이름을 지을 때 남자 이름으로도 여자 이름으로도 어색하지 않은 이름을 짓는다고 해."


이렇게 얘기를 듣고 보니, 권밝힘이 정말로 불쌍하다. 남자로 자라나긴 했는데 자기 성별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남자애로 자라다 보니 자기 이름답게 여자애들을 하도 밝혀서 이름인 권밝음이 아닌 별명인 권밝힘이라고 불릴 정도까지 되었는데 결국 자기 자신이 여자애가 되어버렸을 때의 기분..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까지 그렇게 되어버렸고.


가만. 어제 디씨인사이드 글 중에서 '화이트 엠프레스'라던가 '화이트 나이트' 같은 얘기를 하던 사람이 자기 반에 있다는 글이 있었지. 혜인이가 그걸 알고 있는 건가.


"화이트 엠프레스.. 라는건 뭐야?"
"나도.. 얘기만 들었는데.. 아까 말했던 화이트 나이트를 만들기 전에, 한 연금술사가 소녀한테 이 실험 저 실험을 다 했는데, 그 와중에서 얼떨결에 태어난 거래. 그 때 소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각성을 해서 '빛의 활'로 그 지역의 타락한 귀족들과 기사들을 눕혔다고 알려져 있어. 그리고 400년쯤 전에 모두 화이트 엠프레스를 잊어버렸을 때 쯤, 그 소녀의 후손이라던 어떤 여자가 화이트 엠프레스로 또 각성했고.. 역시 마찬가지로 지배층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고 해."


2번밖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만약 그 '화이트 엠프레스'가 또다시 나타나게 된다면, 지금쯤 누군가가 그 화이트 엠프레스가 될 시기라는 건가.


"문제는.. 각성하게 될 소녀는, 자기 자신이 전혀 '화이트 엠프레스'로서 각성하게 될 예정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구하게 되도 화이트 엠프레스 자기 자신은 두번 다 비극으로 끝났어. 우리가 직접 그 화이트 엠프레스를 만난 적은 없지만.. 혹시라도 지금 화이트 엠프레스가 나타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나도 모르겠어."


그 화이트 엠프레스가 만약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인 피해만 입히지 않는다면 내가 신경을 쓸 일은 없겠지. 연금술사는 자기의 잘못된 생각으로 모두를 망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막아야 하지만. 혹시라도 그 '화이트 엠프레스'가 나타나서 연금술사보다 더 심한 짓을 하면.. 어떻게든 막아야겠지.


하지만 어차피 지금 신경쓸 일은 아니니까. 이제 완전히 여자애가 되어 버린 권밝힘이 그저 불쌍할 뿐.


얼마나 걸었던가. 이제야 매표소에 도착했다. 일단 매표소에 가서 자유이용권을 사야지. 역시 자유이용권은 많이 비싸네. 그래도 여기가 xx월드나 xx랜드보다는 싸니까.


팔에 자유이용권을 감고 나서 놀이공원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뭘 먼저 탈까 고민이네.


"혜인아, 혹시 타고싶은 거 있어?"
"아니.. 그냥 윤민이 타고싶은 거 같이 탈거야."


그런데 역시 누가 놀토 아니랄까봐 다들 줄이 길다. 줄이 가장 짧은 게 뭐가 있지. 자유이용권이 있으면 놀이기구를 많이 타는 것이 이익이니까. 다행히도 저쪽 바이킹이 줄이 짧네.


"혜인이는 놀이기구 많이 타 봤어?"
"아니.. 소풍 갔을 때 말고는 별로 타 본적이 없어."


바이킹에 오르긴 했지만, 오랜만에 타려니까 솔직히 조금 무섭다. 어렸을 때 어린이날에 놀이공원 놀러갔을 때도 많이 타보긴 했지만, 그땐 정말 어떻게 탔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때도 비명 질러가면서 탔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안전바가 내려오고, 드디어 바이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장난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렇다 쳐도, 점점 높이 올라가니까 무섭다. 옆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니까 더 무서워.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건..


내 옆에 있는 혜인이는 표정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이런 놀이기구가 전혀 안 무서운건가. 난 지금 바이킹보다 내 옆에 있는 혜인이가 더 무서워.


그리고 여기 탄 사람들 시선이 어째 다 혜인이한테 쏠려있어. 검은 드레스를 입은 것도 그렇지만,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은 것도 그래. 지금 바이킹이 움직이는 것보다 혜인이가 더 무서워.


도대체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바이킹은 이미 멈췄는데.


"혜인아.. 별로 재미 없었어?"
"나, 사람들이 왜 소리지르고 그러는 지 모르겠어. 난 별 느낌 없었는데. 그래도.. 윤민이랑 같이 있어서 그것만으로 좋아."
"고마워, 혜인아."


혜인이는 놀이기구가 재미가 없는걸까. 분위기를 좀 전환해봐야겠는데. 이번에는 88열차 쪽에다가 줄을 서야지. 이건 아까전 바이킹보다는 줄이 좀 기네.


줄을 서는 중에도 88열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솔직히 아까전 바이킹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떨려.


그리고 드디어 88열차에 올라탔는데..


...


장난없다. 역시 이런 놀이기구는 잘 타는 사람들은 잘 탄다고 쳐도, 이게 막 빠르게 내려가고 그러니까 겁난다. 다들 비명을 지르고 난리났네. 막 360도로 돌고 그러니까 더 무섭다.


옆을 슬쩍 보니까 여전히 혜인이는 아까 바이킹때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치마가 오르락내리락 한게 많이 불편했을텐데. 이번엔 뒤를 볼 수가 없어서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지도 알 수 없고.


이 88열차 자체가 무서워 죽겠는데 뒤를 볼 정신이 있을리가 없잖아.


이번에도 정신없이 끝나버렸다. 나.. 놀이공원에 정말 왜 온거지. 어지러워. 아무 생각도 안 나.


"윤민아.. 괜찮아?"


사실 전혀 괜찮지 않지만, 혜인이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응. 나.. 괜찮.."


아차. 생각해보니 혜인이가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 하도 정신없다보니 이런 것마저 잊어버리네.


"..은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
"윤민이.. 또 거짓말하려고 했지? 나.. 윤민이 다 좋은데, 거짓말하는 건 싫어."
"미안.. 혜인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 그런거에 실망 안하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 윤민이..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놀이기구 타는 건 멈추고 벤치에서 쉬어야지. 휴. 정말 지쳤어. 놀이기구를 너무 오랜만에 타서 그런가. 어렸을 때는 분명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윤민아. 나.. 윤민이랑 같이 있는 게 그냥 좋으니까, 그냥 윤민이 타고싶은 놀이기구 타. 윤민이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아냐, 혜인아. 원래 놀이기구는 그런 재미로 타는거야."
"그래도.. 내가 보기에 윤민이가 많이 힘들어보여서."


솔직히 놀이기구라는 것도 오랜만에 타니까 힘들긴 힘들다. 시계를 보니까 벌써 점심시간이네.


"그러고보니.. 뭔가 먹어야 할텐데.. 김밥같은거 싸왔어야 하는데."
"내가 가져온 거 있는데.. 이거라도 먹을래?"


혜인이가 주머니 속에서 꺼낸 것은, 빵이었다. 그런데 뭔가 색깔이 이상하네. 이런 빵을 팔고 있는 제과점이 우리동네에 있었던가.


"웬.. 빵이야?"
"내가.. 미숙하긴 하지만 직접 만들어본거야. 집에 레시피가 있어서."
"고마워.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잘 먹을께!"


혜인이가 미숙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난 음식이 웬만큼 맛없는 것에는 면역이 되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내 동생 윤화 때문에.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맛은 의외로 평범했다. 아니, 정말 윤화 때문에 뭘 먹어도 면역이 된건가.


"괜찮네.."
"고마워. 윤민이 생각해서 힘내서 만들어본건데.."


벤치에서 혜인이가 준 빵을 같이 먹고 있는데, 저쪽에서 낯익은 두 사람이 보인다.


"어, 윤민이네."
"안녕하세요, 선배."


호진선배랑 희연선배였다. 저 두분은 언제 봐도 잘 어울려. 저분들도 여기 데이트하러 오신건가.


"윤민이도 여자친구랑 데이트하는거야?"


설마 나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있을리가 없을테니까 여자친구라고 일단 말해도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 두분이 혜인이는 본 적이 없었던 것 같고.


"네. 아직.. 여자친구라고까지 말할 단계는 아닌데.. 제 친구 변혜인이예요."
"안녕하세요."
"혜인이라고 했지? 이쁘네. 호진아, 나도.. 드레스같은거 입으면 어울릴까?"
"희연이는 안 그래도 지금도 충분히 이쁜걸."
"아잉. 호진아. 몰라."


저 두분은 언제 봐도 사이가 좋다. 얼마 안 지나면 저 두분도 사귄지 1년이 되겠지. 나래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호진선배랑 희연선배가 떨어지게 되면 서로 많이 슬프겠지.


"호진이랑 같이 먹으려고 김밥 싸왔는데, 너희들도 먹을래?"


그래서 얼떨결에 호진선배&희연선배 커플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혜인이도 자기가 만든 빵을 두 분한테 드렸는데, 두분 다 특별히 맛있다거나 맛없다거나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오늘 날도 화창한데다 놀토라서 호진이랑 같이 데이트 나온건데, 윤민이도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네. 그것도 이쁜 여자친구랑 같이."
"저도 두분 뵙게 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어딘가에서 뭔가 불길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건 나만 그런건가.


'호진오빠.. 게다가 윤민이까지.. 나래.. 참아야 하는데, 못참겠어..'


아냐. 그냥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만약 정말로 나래가 호진선배랑 희연선배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면.. 두분이 위험해. 그냥.. 괜한 생각이겠지.


혜인이는 계속 말이 없었다. 역시 호진선배랑 희연선배 두분이 많이 낯설어서 그런걸까.


"윤민이 여자친구.. 이뻐. 나도 저렇게 이뻤으면 좋겠는데."
"희연이는 지금 이대로도 이뻐.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호진아, 고마워. 하지만.. 나도 좀 더 이뻐지고 싶어."


희연선배가 보기에도 혜인이가 드레스 입은 모습이 그렇게 예뻤던 것일까. 나도 처음 보고 나서 많이 놀랐지만.


두 선배하고 얘기를 한 뒤, 김밥과 빵도 다 떨어졌을 때 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선배. 덕분에 잘 먹었어요."
"응, 나중에 학교에서 봐, 윤민아. 여자친구랑 사이좋게 지내."
"걱정마세요."


희연선배 덕분에 김밥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러니까 윤화가 희연선배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런데.. 혜인아. 아까 왜 말이 없었던거야?"
"그냥.. 처음 보는 분들인데, 얘기하기가 좀 그래서.. 착한 분들 같긴 한데."


얘기를 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던걸까. 그나마 좀 덜 무서운거 타야지... 라고 생각해서 그 다음에는 회전목마를 탔는데, 역시 회전목마는 별로 재미가 없다.


도대체 뭘 해야하지... 라고 생각할 때 쯤, 딱 생각난게 있다. 대관람차. 놀이공원 하면 생각나는 것 중 하나지.


관람차에 타서 밖을 보니까, 정말 어린이대공원이 장난 아니게 큰 게 보인다. 동물원도 보이고.. 그런데 우리동네는 안 보이네.


"혜인아. 바깥 보니까.. 어때?"
"내가.. 변신한 상태에서 날아본 적이 있긴 하지만, 이런 데서 바깥을 보는것도.. 괜찮네. 그런데.. 윤민아."
"응?"
"여기 둘뿐이라.. 그동안 말 못했던 거 말하고 싶은게 있는데."
"말.. 못했던 거라니?"


혜인이가 말하는 거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전에 안새롬 건도 그렇고, 혜인이가 말한 것이 들어맞을때가 한두번이 아니니까.


"내가.. 마녀라고 말했잖아. 원래.. 마녀들은, 보통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된대."


뭐라구. 역시.. 나같은 것이랑 혜인이는 어울리는 사이가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있잖아. 난 윤민이한테.. 마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자애일 뿐인걸. 내가.. 괜히 윤민이를 살려준 게 아니니까. 윤민이가 나같은 애한테도 친절하니까.. 솔직히 나도 다른 여자애들이 윤민이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알고 있었어. 그 때마다.. 윤민이가 그 애들하고 그냥 잘 되게 할까도 생각했는데.. 역시.. 안되나봐. 나도.. 다른 게 아닌, '사랑'이라는 걸 느꼈으니까."
"..."


도대체 내 어떤 모습이 좋은걸까. 난 그냥 한명의 잘 생기지도 않았고, 공부도 잘 하는건 아니고, 사람들 마음도 잘 모르는 눈치없는 남자애일 뿐인데.


"내가 첫 경험을 한것도.. 윤민이였으니까. 그 때는.. 윤민이를 시험하려고 했는데, 윤민이는.. 그런 나한테도 잘해주니까. 그래서.. 일부러 내 마력으로 윤민이를 살린 것도.. 윤민이를 보통 남자가 아닌 특별한 애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애로.. 만들려고 한 거였어. 윤민아.. 미안해."
"아냐, 혜인아. 나도.. 혜인이가 좋으니까."
"이런 모습으로라도.. 키스인가? 해도.. 괜찮지?"
"뭐.. 못 할 건 없잖아."


그리고 혜인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난 혜인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살며시 갔다댔다.


"으으음.."


입술이 닿자마자, 내 입 안에 뭔가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혜인이가 혀를 집어넣은건가. 나도 안 넣을수가 없지.


"으으음.. 윤민이.. 따뜻해."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관람차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대관람차에서 내리고 나서 비극이 이어질 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대관람차에서 머나먼 바깥은 보였는데 바로 밑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민군. 도대체.. 뭐 한거야, 거기서?"
"윤민이. 이런 앤 줄 몰랐는데.."
"역시 윤민이도.. 호진오빠같이 여자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애야."
"오빠. 수행평가를 어린이대공원에서 하는 거였어?"


- 다음회에 계속 -


오랜만입니다. 드레스를 입은 모습의 혜인이랑 떠나는 어린이대공원 데이트. 이번 회에서 권밝음의 실체(?)를 드디어 밝혀버렸죠. 알고보니 여태 남자애가 아니라 성별 결정 전이었는데 결국 성별이 '여자'로 결정된 것. 그리고 놀이기구에 익숙하지 않은 윤민이랑 역시 '다른 의미로' 익숙하지 않은 혜인이. 하지만 윤민이랑 같이 있는게 좋다고 했고 결국 윤민이한테 고백까지 해버린 혜인. 하지만 문제는 대관람차에서 내리고 나서.. 또 다른 비극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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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0 비상 술라 2009.05.12 804 1
4239 여로[旅路] - 1. 퇴마사 바이레흐 2009.05.12 770 1
4238 연상기억은 이렇게 한다 6 . 연상달인 2009.05.12 683 1
4237 비상 술라 2009.05.12 770 1
4236 The Spiritual Entertainers 2.5(Another Ver.) 외전 클레어^^ 2009.05.12 741 1
4235 The Spiritual Entertainers 2.5(Another Ver.) 외전 클레어^^ 2009.05.12 800 1
4234 블러드 에볼루션 4 팹시사이다 2009.05.26 752 1
»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LiTaNia 2009.05.26 647 1
4232 Undertopia 1 Salvador 2009.05.26 765 2
4231 typing+잃어버린 느낌 4 idtptkd 2009.05.16 666 2
4230 고독은 언제나 곁에 1 다크조커 2009.05.27 632 1
4229 아크데빌 팹시사이다 2009.05.27 688 1
4228 어두운 달 4 팹시사이다 2009.06.01 730 0
4227 복수찬미가 #1. 2 허무공 2009.06.08 747 2
4226 복수찬미가 #2 1 허무공 2009.06.18 676 2
4225 색채연가 2 클레어^^ 2009.06.18 633 1
4224 복수찬미가 #3 1 허무공 2009.06.18 621 2
4223 [꿈꾸는 마녀]동백꽃 피는 집 misfect 2009.06.18 468 1
4222 피에로의 눈물 3 코키츠 2009.06.08 613 1
4221 [꿈꾸는 마녀]동백꽃 피는 집 misfect 2009.06.08 5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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