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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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 동안 메뉴에 오르지 않았던 닭고기 요리가 나와 순식간에 자신의 할당량을 비워버렸다. 근 1년만에 먹어보는 닭고기는 언제 먹든지 그 맛이 일품이었다. 모두들 교대를 번갈아 가며 한창 식사하기 바쁜 와중에 내가 먼저 일어섰다. 전술 지도를 받기까지 아직 어느정도의 여유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곧장 방으로 향했다. 거추장스런 평상복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수련용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침대 옆에 위태롭게 세워 놨던 바스타드소드의 칼집을 허리 춤의 벨트에 차매고 정문 앞의 정원으로 발을 옮겼다.


 


  “좀 처럼 시간에 맞춰 오시는 일이 없으시군요.”


 


  정문을 나서서 전략전술의 지도를 해주는 웰드와 마주쳤다. 긴 장발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계승전쟁때엔 아버님의 보좌에서 벗어나 수 많은 병사들을 괴멸시킨 영웅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속을 모를 남자였다. 그는 정문 앞의 3계층으로 된 계단에 눌러 앉아서는 '몸의 단련도 중요하니, 자신은 신경쓰지 말아달라' 고 말하며 수련을 시작하려는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소 이렇게 몇 시간이나 일찍 와서 내가 수련을 하는 동안 자신의 책에서 무언가를 써 옮겨나갔다. 그 날의 배울 내용이라던가 그런 것이겠지.


 


  “그럼, 사양 않고.”


 


  검을 뽑아 들기 전에 어깨에 걸친 수건을 돌돌 말아 입에 물었다. 후에 검을 뽑아 들어 양 손으로 잡고 양 다리를 어깨폭으로 넓힌다. 검의 끝을 쥐어잡은 손이 머리 위의 정중앙에 가게끔 들어 올려 천천히, 천천히 30분에 걸쳐서 단 한번 내려친다. 처음 이런 지도를 받았을 때엔 저런 것이 과연 소용이나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도했으나 5분만에 자세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천천히 30분 동안 단 일합을 내치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의 흐트러짐이나, 호흡의 엇박자 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수건을 입에 문 이유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근육에 주는 부담이 엄청나기 때문에 혹여나 이를 깨트릴 염려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이미 반 수 정도 내리치고 있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지 오래이고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은 가다듬기가 힘들어진다. 3kg의 검은 이미 그 중량이 몇배로 불어버린 마냥 그 자세를 유지하기가 버거웠다. 그러다 문득 웰드를 바라보았다. 책을 보며 자신의 공책에 적어 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관찰하며 어떤 것을 써나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여러번이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와서 내 수련을 지켜보는 것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가 지도 중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적의 병력과 대치 하게 된다면 지금의, 그리고 발생할 모든 의구심을 남기지 마라.’ 단순한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저 순수하게 그의 행동에 의문을 띈 것이고 그에 반응하여 알맞은 문장이 생각 났을 뿐 이었다. 수련 중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왜 단순히 수련에 집중 하고 주변에 시야를 두지 않았을까. 나는 극한의 무를 추구하는 투사가 아니었다. 언젠가 병사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일발의 집중력 기르는 것 보다 시야를 넓게 가질 수 있는 통찰력이 더욱 중요했다.


 


  “사실 뭔가 말하고 싶은게 아닙니까? 웰드.”


 


 입에 물고 있었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물론, 검은 예정 된 시각에 단 일합으로 내리쳐졌다. 이미 악력도 바닥이 나 버려 검은 그대로 바닥으로 내쳐졌다. 웰드는 공책에 무언가 쓰는 것을 멈추고 책을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서재로 올라가도록 하죠.”


 


  웰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련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간단히 몸을 푸는 것 치고는 상당히 무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에 집중하여 몰두하는 것과 의식이 분산되어 있을 때의 차이는 생각 보다 더욱 더 컸다. 검을 집어 간신히 칼집에 꽂아 넣었다.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이 덜렁거리는 팔이 거슬린다.


 


  서재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체스판을 요구했다. 그것을 꺼내들어 그의 앞에 펼쳐 놓자 그는 다시 미소를 짓는다.


 


  “단순한 체스라면 재미가 없겠죠. 룰을 바꿔봅시다.”


 


  그는 내게 터무니 없는 룰을 제시했다. 모든 말은 조건에 상관없이 전방 2마스의 범위로 움직일 수 있고 대각선으론 1마스 움직일 수 있다. 킹은 전방 3마스, 대각선 2마스의 이동이 가능했고 추가적으로 그 주변 6마스의 말들은 한칸을 추가적으로 운용 할 수 있다. 말의 배치는 자신의 임의대로. 승리의 조건은 킹을 제외한 말들이 전멸당하거나, 킹이 잡히는 경우.


 


  “체스… 입니까 이것이?”


 


  “단순한 놀이입니다.”


 


  변함 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개시 전의 배치는 서로가 한 말을 번갈아 놓는 것으로, 본래 체스의 룰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말도 안되는 게임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집어 들었다. 당당하게 킹을 자신의 진영 정 중앙에 배치 해 놓았다. 나는 우선 비숍을 들어 적당한 자리에 놓는다.


 


  “자, 즐겨봅시다.”


 


  그렇게 웃으며 차례차례 말들을 배치 해 놓는다. 나는 크게 킹을 제외한 15개의 말을 셋으로 나누어 킹의 전방과 좌 우에 배치 해 놓았다. 되도록 킹의 지휘 범휘 안에서 말들이 움직일 수 있게 끔 밀집 대형을 취했다. 그에 비해 웰드는 킹이 선두에 서 앞서 오는 말이 지휘범위에 들어오게끔 넓은 포진 진형을 취했다.


 


  “그럼 도큘님부터.”


 


  킹 이외엔 어떠한 이점도 없는 이러한 룰에 대해서 어떤 말을 움직일지 고심의 여지는 없었다. 진형 상 뒤쳐진 말을 하나 움직인다. 웰드도 그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움직인 말은 킹. 두칸 전진하여 두었다.


 


  “왕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병사들은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킹 바로 옆의 말을 전진시켰다. 진행 자체는 체스와 달리 스므스하게 흘러간다. 결코 적의 허용범위 안에 말을 놓지 않고 이외의 말들을 전진하는 것으로 처음 진형의 의미는 거의 없어졌다. 나는 킹을 부하말의 앞에 둠으로서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고 웰드는 킹을 선두에 둠으로서 나를 도발한다.


 


  결코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대치였다. 단 하나의 손실도 없이 그렇게 수십 수 이상을 대치에 활용한다.


 


  “병사는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웰드는 마치 수업을 진행 하듯 내가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자신의 말을 잇는다.


 


  “또한, 왕이 병사를 위해 존재하는 것 조차 아닙니다.”


  그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 만인을 위해 존재하는 왕도 아니고, 자신만을 위한 왕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전장에서 왕과 병사는 검을 든 한사람의 인간이나 다름 없습니다. 목표를 위해서 장애물을 배제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의의입니다.”


 


  모순된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이런 놀이를 준비 한 것이고 내가 어떤 것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리고 그가 지휘권 아래에 놓인 말을 움직여 내 말을 눕혔다. 언제든지 서로의 공격범위 안에 있었던 말들이 이제서야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 서로의 말들을 잃었다. 이것은 전술도, 전략도 아니다. 마치 소모전과 같은 의미 없는 놀이라는 것이 내 심정이었다. 이것은 더욱 확고해져 더 이상의 수를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어떠한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소모전의 양상이 점점 이상한 상황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서로의 말이 하나씩 없어지며 나는 되도록 왕을 보호하며 그 지휘권 아래에 말들을 놓았다. 그는 킹을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전진시키며 다른 말들을 하나씩, 하나씩 소모하며 압박했다. 그 결과, 그의 모든 말은 자신의 진영을 넘어있었다. 그리고 결국엔, 병사들이 전진해야 할 길을 막는다. 한수 한수 움직일 때 마다 나의 말 만이 하나씩 줄어드는 그러한 포진이 되어 버렸다.


 


  “그 안이한 생각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 그의 한마디가 이 놀이의 종지부를 찍었다. 킹이 졸병들의 사각, 가장자리로 파고 들어 그의 말 전체가 지휘범위에 들어왔다. 내가 말을 움직여 수를 넘긴다면 그때부턴 학살이나 다름 없었다.



  “허… 졌습니다.”


 


  패배를 선언 할 수 밖에 없었다. 웰드는 곧장 자신의 짐을 들고 일어나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한 뒤, 허탈한 마음 뿐인 나를 남겨두고 서재를 조용히 나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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